- 괜찮으세요?

뒤의 빛 때문에 손을 내민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숨에 열이 확 오르고 숨이 벅찼다. 지훈은 밭은 숨을 내쉬며 아래로 몰리는 열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참다못해 유일한 구원과도 같은 손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하고 언제나와 같이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느꼈던 열은 현실에서도 이어져 온몸이 땀으로 젖어 찝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사타구니 부근 바지에 눌려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지훈은 입을 꾹 다물고 짜증스럽게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일어나 속옷과 바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태어나길 남보다 체구가 작게 태어난 지훈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누군가를 앞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나 오메가라고 '오해'를 받았었다. 뭐, 이제는 오해가 아니게 되었지만 무튼. 그때는 오해를 받는 일에 기분이 나빴었는데 지금은 오해일 때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손 한 번 잡은 게 인생을 뒤바꿀 줄 알았으면 지훈은 절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자신의 하얀 손을 내려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 짜증스럽게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내었다. 지훈은 이제는 남아있을 리 없는 누군가의 페로몬을 여전히 지워내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면 다시 다 괜찮았던 이지훈의 인생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덜 마른 머리는 대충 손으로 털어내고는 곧장 주방으로 가 컵에 물을 따라 그 옆에 비치된 하얀 약통에서 알약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꿈 때문인지 오늘따라 더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아 줄곧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펴졌다.

지잉-

[회사로 오거라]

짧게 울린 진동만큼이나 짧은 명령을 본 지훈은 다시 지끈거리는 것 같은 머리를 손으로 짚고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딱딱한 환영인사에 지훈도 목례만 하고 회장실 문 앞에 섰다. 이 회장의 비서는 옷을 단정히 하는 지훈을 힐끔 보고 지훈이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지훈이 이때쯤 올 것이라 예상했는지 안에서는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들여보내."라는 짧은 명이 떨어졌다. 비서는 문을 열어주고 지훈에게 들어가라 안내했다. 지훈은 속으로 심호흡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상석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성을 마주했다. 곧장 인사로 이어져야 했으나 지훈은 그저 묵묵히 그의 앞의 자리에 가 앉았다. 이 회장은 무례한 지훈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리고 불편한 기색의 기침을 했으나 지훈은 그저 얼른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이 회장은 혀를 쯧 차고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파일을 들어 지훈의 앞으로 던졌다.

"우성 알파를 낳거라."

항상 이 회장의 앞에서 포커페이스만 유지하던 지훈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이 회장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다 자신의 앞에 던져진 파일을 바라봤다. 이 회장님께서 어디서 아랫도리만 놀려줄 우성 알파를 찾았나 보네. 역겹다. 지훈은 구역질 나오는 상황에도 별말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게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해봤자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을 낳아야 한다. 한 명은 우리 집안에, 한 명은 저쪽 집안을 물려받을 거니까."
"... 할 말 끝나셨으면 가보겠습니다."

지훈은 더 이상 이 고역의 시간을 참고 싶지 않아 파일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앞으로의 일정은 김 비서가 네 폰으로 안내할 거니, 확인하고 똑바로 행동해라."라고 말하는 이 회장의 말을 무시하고 회장실에서 나와 자신과 교대하듯 지훈에게 짧은 목례만 하고 회장실로 들어가는 김 비서의 등을 바라보다 빠르게 걸어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통을 잡고 헛구역질을 하다 괴로운 숨을 토해내는데, 속을 긁어내는 쓰라림보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이 주는 괴로움이 더 커서 지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 하...."

도망치고 싶다. 이 모든 상황들에서. 자신이 오메가라는 현실에서. 그냥. 이 삶에서. 지훈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팔로 눈을 꾹 누르며 생각했다. 최악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발현이 되었다 확진 받은 날이 가장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으나, 그때의 지훈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고작 오메가라고 확인 받은 사실은 그 오메가가 살아갈 사회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것이었다는 것을. 지훈은 회장의 비서에게서 넘어온 메시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안은 우리랑 조금은 다를까, 또 그런 헛된 기대를 하는 자신을 지훈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다독였다.

[내일 오후 4시까지 HS 회장실로 가세요. 그쪽 비서님께서 안내해 주실 겁니다.]


* * *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이어진 끝에 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 회장님도 참 힘드시겠네요."

웃으며 말하지만 그 뜻이 누가 들어도 오메가인 손자가 있는 이 회장을 안타까워하는 거라 지훈은 뾰족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참았다. 이 집안이고, 저 집안이고 참 답도 없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그냥 웃어 넘겼다. 지금은 이런 모욕보다 그녀의 눈에 들어 순영의 옆에 서게 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회장님 손자라고 하니까, 신원은 확실하네요. 일을 물려받지 않을 거라 앞에 나서지도 않는다고 했죠?"

조금 다른 사실이었지만, 그게 그녀에게는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테니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 회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훈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계산하듯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WZ면 알파 골라잡기 곤란하지 않을 텐데 왜 굳이 이런 계약에 끼어든 거죠?"

순영이 닮은 날카롭게 벼려진 눈이 지훈에게 답을 종용했다. 지훈은 미소를 짓고 느긋하게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중에 우성 알파는 없잖아요?"

지훈은 그녀의 머릿속의 오메가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내며 웃었다. 여 회장은 지훈의 답에 약간의 경멸을 표정 위로 드러냈으나 금방 표정을 바꾸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우성 알파의 아이를 원해요."
"저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원해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당신의 아들을 오직 페로몬만 이용해 먹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여 회장은 우성 알파의 아이만 낳아준다면 자신의 아들이 어떤 취급을 받든 상관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국에 있는 지인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거예요. 이름은 뭐, 흔한 이름이니 굳이 바꾸지 않고 그대로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조만간 비서를 통해 장소를 알려드리죠. 다른 정보 역시 비서를 통해 알릴 테니 이만 나가보라는 축객령이 떨어졌다. 지훈도 딱히 이 자리에 더 앉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지훈의 발목을 잡는 말이 들려왔다.

"그 이상은 안 돼요."
"..."

지훈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나도 바라지 않아요, 그 이상은. 역겨운 당신네 가족이 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지훈은 그냥 말 없이 회장실을 나왔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지훈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훈이 나온 문으로 들어갔고, 지훈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굳건히 닫힌 회장실의 문을 바라봤다.

"역겨운 알파 새끼들."

결혼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둘은 만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지훈은 감금당하다시피 집 안에만 머물며, 시답잖은 신부 교육이나, 결혼식 관련 결정만 하고 있었다. 지훈은 지루한 얼굴로, 신혼집에 들여놓을 가구를 고르고 있었다.

지잉- 지잉-

최근 모든 연락은 회장이 붙여준 비서에게로 갔기에 거진 시계 용도로만 쓰였던 지훈의 핸드폰이 오랜만에 진동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모르는 번호 11개가 찍혀있는 화면을 보다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이지훈 씨, 맞으신가요?]

지훈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는 화면을 바라봤다. 어떻게 들어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지훈은 다시 귀에다 대고 "누구시죠?"라고 물었다.

[우리, 봐야하지 않나요?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인데.]

누구냐는 질문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돌려 말했지만, 지훈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권순영. 이름만 전해 들었던 몇 년 짜리 남편이 될 사람. 여 회장의 태도로 봤을 땐, 훈의 집안이랑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예의는 차려서 말하는 그에게 지훈은 조금은 안심하며 그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순영을 만나기로 했다는 보고에 이 회장은 못마땅한 듯했으나 상대측에서 부부가 될 사이인데 보자고 먼저 연락을 취했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어, 지훈에게 결혼 전까지 몸 간수 잘하란 말만 남겼다. 몸 간수. 지훈은 쓴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엿이라도 먹어봐라 하곤 당장 이 망할 몸뚱아리를 어디든 내던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이 지옥에서 내쳐질 수 있었을 텐데. 지훈은 답답한 숨을 삼키며 비서가 골라준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일이 있다는 순영에게 지훈이 맞춰주어 제법 늦은 시간에 잡힌 약속이었는데, 그 마저도 36분이 지나가는데도 순영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의 있는 척 다 하더니 이렇게 사람 물 먹이려고 그랬던 건가? 고상하네, 이 집안은. 지훈은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토해내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가게 로비로 급하게 뛰어 들어오곤 점원에게 무어라 말했다. 점원은 곧장 지훈이 있는 쪽으로 안내하는 몸짓을 했고, 그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린 남자와 지훈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점원에게 목례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와 지훈의 앞에 서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변명할 여지 없이 제 잘못입니다. 기분 상하셨겠지만,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기회? 지훈이 순영에게 줄 수 있는 기회란 게 있을까? 따지자면 그가 갑이고, 지훈은 을로 그가 원하는 대로 휘둘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지훈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얼굴과 제 손목을 잡은 손목.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페로몬의 향이었다.

- 괜찮으세요?

그였다. 지훈을 이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다정한 악마.





맛있게 호우합니다. @non_amee0 (포타 업로드 전 초안 작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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