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철야라는 개념은 없어져 마땅했다. 회사에서 철야하고 빌딩 사이에 끼어있는 비좁은 틈새 같은 비상계단에 나와서 담배 피우며 제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제헌이 불을 붙일 때쯤 바로 뒤이어 문이 열리더니 회사 후임이 나왔다. 단둘이 사적으로 뭔가 같이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어서 마주치자 서로가 잠시 당황해 멈춰 섰다. 

"문 닫아요."

제헌은 마주 보는 것보단 덜 뻘쭘할 것 같아서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서며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들어 보였다. 후임이 문을 닫았다. 손엔 종이컵 하나와 타바코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언뜻 금속제 같았다. 흡연자들의 동지애라는 것도 있는지 어쨌든 침묵 속에 그냥 각자 자기 담배 피우기만 했다. 점심시간이었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이 선 곳은 에어컨 실외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친하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있기엔 조금 좁았다. 실내는 에어컨을 돌려야 했지만 바깥은 제법 괜찮은 날씨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제헌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후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서 피우고 있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인지 각각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자리를 택했으나 그래도 워낙에 공간이 협소해 별로 멀리 떨어지지도 못했다. 더 멀어지려면 1층으로 좀 빨리 내려가는 방법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방법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지나쳤으니까. 제헌은 제 직속으로 들어온 이가 피우는 담배 필터 위가 붉게 지저분해지는 걸 보며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당연하게도 제헌이 쳐다보는 걸 알아차렸다. 사실 특별히 바라본 것은 아니고 그냥 시선을 둔 게 그쪽일 뿐이었지만 상황이 영 머쓱해졌다. 철야에 뇌가 둔해져서 자기가 그러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던 탓이다. 제헌이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 그냥…… 왜 그렇게 불쌍하게 숨어서 피우는가 싶어서요."

"숨어서 피우는 게 습관이 돼서요."

"학생 때 피웠어요?"

"대학생도 학생이죠."

"대학생이면 학주한테 걸려서 처맞을 일도 없는데 뭐하러 숨어요?"

"대리님이야 모르시겠죠." 

후임은 약간 인상 쓰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이쪽을 보더니 제헌을 훑어보았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스윽 스윽 스캔 당한 제헌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건 친밀함의 문제를 떠난 종류의 시선이었다. 

"근데 회사는 왜 다녀요?"

"……그거 모르면 회사 다니면 안 되나?" 

잠시 무슨 소리냐는 듯 멍한 얼굴이던 후임이 웃음을 빵 터트렸다. 

"아니 그거 말고요. 복권이라도 당첨된 거 아니었어요? 사람 때깔이 달라졌는데." 

제헌은 후임의 말에 자신의 때깔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일단 지금 입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맞춤 정장이었다. 제헌의 생각이 조금 더 뻗어 나갔다. 최근 들어 자연스럽게 명품을 사용하는 빈도가 늘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필요해서 맞춘…… 아니, 사실은 약간 허세가 들어가서 스노우가 주는 대로 받아먹은 제헌은 한국에 와서도 이 때깔 좋은 것들을 몸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제헌은 자신의 속물성에 잠시 슬픔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물건에는 죄가 없으니 일부러 안 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선물 받아서." 

"재벌 2세라도 만나요? 그 댁 부모님이 물 끼얹으면서 봉투 내밀고?"

"그럴 리가 있냐."

"뭐 하긴."

너무 쉽게 수긍해버리는 거 아닌가? 스노우는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글로벌 기업의 이사진 중 하나이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선 대충 재벌이라고 해도 되는 인물이었다. 상세한 디테일이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스노우는 친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양부모님들만 조심하면 돈 봉투와 물싸대기는 피할 수 있을 터였다. 대부인지 후견인인지도 있다고 했지만 웬만하면 마주할 일 없을 것 같으니 그쪽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싸대기라면 몰라도 돈 봉투는 좀 괜찮지 않나? 물론 제헌 쪽에서 봉투를 드리며 스노우 좀 떼 달라고 해야 할 형편이긴 했지만. 

제헌의 정신을 아침 드라마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은 맛나게 담배를 빨고는 난간 너머로 후우우 길게 연기를 뿜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다 제가 대리님이랑 같은 회사라는 얘기가 나오니까 동문이랑 선배들이 다들 입을 모아서 대리님 조심하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학교에 다닐 때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후임도 제헌과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 어떤 얘기일지는 따로 묻지 않아도 쉽게 짐작이 갔다. 

"그런데 지금 모습 보니 안심이 되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대리님이 그 사람 놓칠 일은 안 하실 것 같아서요." 

"그게 왜 그렇게 돼요?" 

"당연하잖아요. 호구 잡은 거 아니에요? 그런 걸 놓치면 바보죠." 

제헌은 순간 대답을 못 했다. 과연 만으로 3년 꽉 채워서 호구 잡히다가 처절한 과정 끝에 마음도 돈도 멘탈도 매몰해 버린 짬밥이 있는 사람이라 말의 깊이가 달랐다. 만취 상태에서 친구들 사이에 신촌질주녀라는 별명까지 훈장처럼 얻었으니 분명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발언일 게 분명했다. 

제헌은 그날 같이 있었던 후배들을 수소문한 끝에 15초짜리 흔들린 영상을 신촌질주녀라는 수상한 이름으로 하드의 흑역사 폴더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고, 알 거 다 아는 이들과의 술자리에서 종종 하던 대로 그걸 꺼냈다가 당사자에게 반죽음을 당할뻔했던 기억이 있었다. 비록 같은 학교 후배라고는 해도 제헌이 생각하기에도 좀 너무 나간 짓이긴 했기에 서로 없던 일로 묻어두기로 했었다. 비록 그 뒤로 제헌이 다니는 회사에 제헌이 하던 일을 담당하는 후임으로 들어와 지금껏 쭉 서먹하긴 했지만.

그 사이에 후임은 담배를 다 태우고 꽁초를 가지고 나온 종이컵 안에 넣어 불을 껐다. 제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5분 사이에 후임은 몇 마디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 제헌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 제헌이 나중에 자서전을 낸다면 이 후임에게 몇 %는 떼어주는 걸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제헌은 생각했다. 자신은 그 호구를 잃을 법한 짓을 무지하게 저지르고 다녔다. 아니 그보다 제헌은 애초에 스노우를 떼어놓고 싶어 했던 거 아닌가. 이상한 건 아니잖아?

후임의 손에 든 종이컵에는 바닥에 깔릴 정도로 남은 믹스 커피와 꽁초가 담겨 있었다. 색을 보니 사무실의 친구 맥모골이었다. 후임은 쪼그려 앉아 제헌이 피우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뜨려 비벼 끈 꽁초도 주워 담았다. 제헌은 조금 당황했다. 후임은 언제나처럼 평이한 어조로 음울하게 말했다.

"여기서 꽁초 버리지 마세요. 얼마 전에 항의 들어와서 난리 났었는데-"

아마 그때는 제헌이 해외에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떠올렸는지 후임도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무튼 대리님 때문에 저까지 쫓겨나지 않게 해주세요. 마음대로 담배 피울 수 있는 곳 찾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원래는 건물 바깥에 흡연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빌딩에 있는 사람들이 공용으로 쓰는 흡연 장소라 다른 회사 사람들과 섞여서 써야 했다. 물론 1층까지 내려가는 게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제헌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번잡하게 끼어있고 싶지 않아서 여기서 종종 담배를 태우곤 했다. 당연하지만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고 초년생인 후임보다 나이도 많았다. 그 사이에 젊은 여자 사원이 혼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한 제헌은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를 했다. 그의 등짝을 무수히 패 가며 가르침을 하사한 누나 선배 동기 동료들이 기뻐할 괄목한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예."

흐리멍덩한 대답이었다. 후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종이컵을 구기며 비상계단에 연결된 철문을 열고 총총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동그란 안경을 쓴 조그만 사람이 제헌의 후임에게 쪼르르 다가가는 게 보였다. 표정과 몸짓을 보아하니 심심하던 차에 뭐라고 쓸데없는 농담을 붙이려고 다가가는 게 틀림없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다져진 제헌의 감이 경고했다.

"우리 쓸이 없으니 내가 쓸쓸했잖아~ 어? 둘이서 거기서 뭐 했어? 세상에, 드디어 사내 커플의 핑크색 기류가 황량한 우리 사무실에도 불어오는 것이로구나!"

어디에 내놓아도 인정받을 헛소리였다. 헛소리를 늘어놓은 대가로 후임의 가차 없는 커담 입 냄새 공격에 회사 대표가 자지러지며 쓰러지는 꼴을 보며 제헌은 침착하게 안으로 들어가 철문을 닫았다. 제헌과 제헌의 후임은 사이가 별로였지만 본인이 연결해서 데려온 사람들이라 대표랑은 둘 다 꽤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이건 친밀로 인한 비극이라 하겠다.

이래서 학연·지연으로 만들어진 회사 같은 데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물론 제헌도 그렇게 들어온 거긴 했지만 원래 모든 악행에서 본인은 면죄하기 마련이었다. 매번 제헌에게 유난히 짓궂은 소리를 하는 대표 때문에 퇴사 욕구가 치솟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정 인맥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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