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넌 어떻게 생각해?"

 벤치에 놓여있는 낡아빠진 인형에게 말을 걸어본다. 누군가 피난하면서 어떻게든 챙겼지만, 결국 이곳에 버려지고만 불쌍한 존재였다. 아마 그럴 거라고 영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인형에게 감정이입까지 하는 중이었다. 

 "너도 혼자 남겨지니까 서럽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10분 넘게 벤치에 앉아 인형에게 말을 걸고 있으니 숨통이 트이기는커녕 영의 기분은 완전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영은 턱을 괸 채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에 죽 늘어진 건물들을 향했다. 

 "재미없어. 대화 나눌 인간이 없으니까 지루해 죽겠어. 그렇다고 진짜 죽는 건 싫지만. 그나저나 이 구역은 너무 건물이 많다. 길은 좁아터질 거 같고. 네가 살던 곳이야? 그런 거라면 주거 환경 완전 최악이라고 해둘게. 내가 갇혀있었던 실험실도 이 길보다는 넓었다고."

 영의 손엔 스트라테이아 지도가 들려 있었다. 꽤 오랜만에 꺼내 보는 거지만, 이곳엔 옛날에 비후가 알려줬던 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두르 3구역. 이유는 몰라도 건물은 빽빽하게 많고 그 사이로 보이는 칙칙한 공사용 가림막이 기분마저 울적하게 만드는 곳.

 십자가가 떨어지던 와중에도 간신히 떠올린 기억으로 능력을 써서 복귀한 구역이었다. 솔직히 하연을 버려두고 온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기로 했다. 옛날 집에 가겠다는 하연의 목적은 어찌 됐든 이뤄놓고서 친구의 시작점 찾기는 아직 시도조차 못해본 게 사실이긴 하니까. 게다가 로제나에게 쫓기는 건 더 싫었다. 십자가가 떨어질 때마다 심장도 몇 계단씩 뚝뚝 떨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도착은 했어."

 좁은 길을 쭉 걸어가던 영이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등의 가방엔 아까부터 말을 걸었던 인형이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가방 주머니에 지도를 대충 쑤셔 넣으며 시선을 위로 향했다.

 "도서관..."

 팻말에 적힌 단어를 읊조리며 얼굴을 찡그린다. 이름만 봐도 들어가기 꺼려지는 장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KIPE의 정보력, 특히 비후가 처리한 일엔 단 한 번도 오류가 없었고, 그런 비후가 말하기를 여기에 필요한 정보가 있다는데.

 역사가 깊은지 꽤 낡아 보이는 나무문에 귀를 대고 조금 기다려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문을 조금 열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다. 일단 보이는 시야 내에 생명체는 없었다. 여차하면 능력으로 도망가도 되지만, 그런 번거로운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단 작았다. 수많은 책으로 채워진 책장이 한 10개쯤 있었고, 오른쪽에는 12명 정도는 앉을 수 있는 큰 책상과 1인용 작은 책상들도 있었다. 그 위에는 전쟁이 터졌던 날, 급하게 피하느라고 챙기지 못한 가방과 겉옷들이 먼지에 덮인 채 바래져 있었다.

 영은 그곳으로 다가가 버려진 가방을 살펴봤다. 대부분이 책과 노트, 필기도구들로 채워져 있었고, 에너지바 같은 것도 몇 개 있었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나있어서 먹는 건 불가했지만. 버려진 옷 주머니까지 뒤져봐도 딱히 도움 될 만한 건 없었다. 영은 할 수 없이 뒤지는 걸 포기하고 그나마 가장 덜 바란 겉옷을 골라 입었다. 이거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억울할 지경이었으니까.

 영은 큰 책장들을 스쳐 지나가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움직이는 건 없었다. 주변을 확인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 왼편이었다. 그곳의 몇몇 책장들이 부서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떨어진 책 중 일부는 완전히 찢겨서 제목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영은 얼른 책장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창가 쪽을 봤다. 창문 일부가 깨져있다. 괴물이 아예 안 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곳은 언제 와도 적응이 안 돼. 검색 시스템이 작동은 하려나."

 곳곳에 있는 컴퓨터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앞으로 다가가 키보드를 눌러본다. 검은 화면에는 아무 반응도 없다. 모니터의 전원을 눌러보고 이런저런 버튼을 만지작거리다 코드가 제대로 꽂혀있는지까지 확인해봐도 무용지물이었다. 혹시나싶어 다른 것들도 확인해본다. 부서진 것들을 제외하고 모든 전자기기를 건드려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마지막 컴퓨터에서도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자, 결국 영은 본체를 쾅 차버렸다.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제목이 뭐였지? 아테니케의 어쩌구였던 거 같은데... 뿔족이라는 단어도 있었고. USB를 잃어버려서 다시 확인할 수도 없다니, 진짜 열받네."

 영은 작게 욕을 읊조렸다. 꼭 필요할 땐 없다니까. 그래도 USB속 내용을 모두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다행히 4구역이었던 건 기억하고 있지."

 영은 천장에 붙어있는 팻말의 숫자가 4가 될 때까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4구역의 책장 앞에 멈춰서서 무작정 책들을 훑기 시작한다.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손으로 쓸어내면서 한참 동안 확인하다 보니 익숙한 제목이 보였다.

 <아테니케의 뿔족들은 어디로 가는가>

 분명히 이 제목이었다. 그런 확신이 들자, 영은 무슨 내용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곧장 책을 잡아 뺐다.

 "와씨, 너무 두꺼워."

 책을 펼치기도 전에 한 말이었다. 질색한 얼굴로 목차를 보고 앞부분을 조금 읽어보다가 바로 책장을 파라락 넘기기 시작했다.

 "사진... 사진만 찾자."

 책을 뒤적거리다가 중간 즈음에서 사진을 하나 찾고는 활짝 웃었다. 녹색 통 안에 들어있는 그것과 정말 똑같이 생긴 것이 찍혀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게 좀 더 크고, 짙은 녹색이라는 차이점은 좀 있었지만. 

 하지만 사진 밑의 적힌 설명을 읽던 영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유해니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다른 페이지로 넘겨본다. 하지만 이게 찍혀있는 사진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말은 구구절절 어려운 표현까지 써가며 책을 빼곡히 채우고 있으면서 정작 보여주는 건 아주 조그맣게 그림으로만 존재했다.

 물론 사진이든 그림이든 유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계속 책장을 넘기다가 유달리 오래되고 바랜 종이가 찍힌 사진을 발견한다.



 모든 뿔족들은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아테니케의 가호이자 뿔족에 대한 구원이다. 만약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알 수 없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 한 구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기록 외에는 발견된 적 없는 내용이기에,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정할 수 없다.


 최초의 뿔족들이 나이를 먹고 수명이 다해가 처음으로 원정을 떠나게 된 뿔족이 나타났을 때, 죽음에 대해 깨달은 우리는 겁에 질려 외쳤다.

 우리가 길을 잃고 돌아갈 곳조차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당신께도 가지 못한 채, 무력하고 영원하게 떠돌아다니는 건가요.

 점점 불안해하는 뿔족들이 늘어만가자, 어느 날 아테니케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나니.


 영원한 건 없단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다가온다면 신이 내려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 너희들에게로 가겠다. 너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아주 작게 유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린 많은 고통을 겪고, 수많은 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국엔 다시 만날 수 있을거다. 언제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하는 너희과 똑같이.

 뿔족의 시작점에서.



 영은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씁쓸하게 책을 덮고 지금껏 소중하게 들고 다녔던 녹색 통을 꺼내 가만히 응시했다. 그걸 열어보려다가 그만두고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과 로제나의 대화로 눈치를 아주 못 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 통에 담긴 게 뭔지 확신까지 하게 된 이상 내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이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게 둔 것부터 이미 죄책감이 잔뜩 들고도 남았다.

 "난 이런 결론 진짜 싫은데."

 책을 책장에 돌려놓다보니, 이 구역에는 죽음에 관한 책이 참 많다는 것도 깨닫는다.

 스트라테이아의 뿔족들은 정해진 수명까지 절대 죽지 않기에 죽음과는 항시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정해진 끝이 있지만, 그 사이에 무작위로 급습해오는 불행은 없을 테니까. 죽음을 인지한 순간부터는 누구나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뿔족들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결국에는 죽는다고 해도 느끼는 방식이 전혀 다를 터였다.

 영은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부럽다고도 느꼈다.

 그런데도 이곳은 죽음으로 차 있다. 정작 죽고 나서 남게 되는 자신들의 흔적은 이렇게 사진이나 그림 몇 장으로만 기록해놓고서, 죽음에 대한 고찰만 잔뜩 해놓았다. 정해진 수명이 있다는 것이, 그들을 얼마나 공허하게 만들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던 영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책상 건너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순간 몸이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이럴 땐 그냥 도망가야 상책인 것을. 그게 뭔지 확인해보겠다고 고개를 들어버렸다.

 괴물, 창문으로 들어왔을 법한 크기의 작은 존재가 그곳에 있다. 그것도 손에 뭔가를 들고 다녀야 안심되는지 어느새 영이 갖고 왔었던 인형을 들고 있다. 그리고도 만족하지 못해 녹색 통까지 흘끔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냉큼 손을 뻗어봤지만, 아깝게 스쳐 지나가며 녹색 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필 원통 모양이라 데굴데굴 잘도 굴러버린다. 괴물이 있는 곳보다 더 멀리. 괴물에게 가로막혀 가지도 못할 곳으로.

 "이런 전개는 더 싫어하고!!"

 책상 아래에 엎드린 채 허겁지겁 가방을 끌어안으며 소리를 빽 질렀다. 가방을 뒤져 가진 것 중에 가장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총을 들어 올렸다.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온다. 하필 손가락도 없어서 명중률도 별로인데 이렇게 떨다간 단 한발도 맞추지 못하겠지.

 괴물을 죽이는 건,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특히 몸집이 작은 것들은 더. 그래서 인간을 쫓는 일만 맡았었는데. 혹시라도 괴물과 맞닥뜨리게 되면 뒤로 숨기에 바빴고.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죽이고, 죽어가고, 죽게 되고, 죽는다는 건 이렇게나 갑자기 다가올 만큼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을.

 그러니 착잡한 마음에도 영은 방아쇠를 당길 거고, 반쯤 울먹이면서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올 거다. 쓰러진 괴물의 품에 인형을 안겨주고는 약속과 책임, 즐거움과 회피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녹색 통을 들고 도서관을 떠나게 될 거다. 가야 할 곳.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서.

 친구의 시작점으로.


 영을 부르기라도 하는 듯, 저 멀리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행상 영의 외전이 먼저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 본편과 순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엔 18화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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