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축 받는 척 재빨리 숲 쪽을 흘끔거려 별장지기라는 남자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베르타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릴리에게 배우의 자질이 있을 줄 알았어. 배우 겸 각본가인 거지. 오, 내 안목은 정확하다니까. 끌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면 극장주를 협박해서 너도 조연으로 끼워줄 수 있을지 물어는 봐줄게. 무대 경험은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그대가 나온다면 구경 정도는 가주지. 아니면 후원금 정도는 보내줄 수도 있고. 그렇지만 같은 무대에 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재밌을 거라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언제나 어리고 풋풋한데 에너지 넘치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오만하면 더욱 열광하고 무엇보다 어릴 수록 좋아한다니까. 릴리, 자기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지."

바닷물에 젖어 축축한 꼴로도 베르타는 당당했다. 꽃잎처럼 살랑이던 드레스는 물에 젖어 아래로 무겁게 몸을 끌어당기고 발바닥엔 모래가 묻어 불편할 텐데도 헤죽거리며 웃는 게 오히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릴리도 어느새 그 장단에 맞추어 좀 우쭐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나도 이제 곧 제국 기준으로도 완전히 성인이야."

"어머! 생일이야? 그러면 또 이 베르타 그로홀름이 아주 성대하게 축하를 해줘야겠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얘기하지. 아까 그 남자가 아직 근처에서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실크 스타킹이 물에 흠뻑 젖고 모래투성이가 된 데다 얇은 원단을 수십 수백 겹쳐놓은 풍성한 치맛자락은 물에 풍덩 빠졌던지라 무겁기도 무겁고 형태도 다 망가진 데다 불편하게 몸에 들러붙고 있었다. 물은 어떻게 말리더라도 분명 원단도 다 상하고 형태도 다 뒤틀렸을 테니 원래의 모습을 찾을 가망은 일찌감치 잊는 것이 나을 터였다.

베르타는 치맛자락을 붙잡았고 릴리는 그런 베르타를 데리고 별장 건물로 향했다. 베르타가 빨리 걸을 수가 없어서 나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은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로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 뒤를 천천히 따라 걷다가 뒤늦게 바다에서 나온 딜란을 돌아보았다. 창백할 정도로 밝게 물이 빠진 것 같은 곱슬기 거의 없는 금발을 뒤로 단정히 묶은 남자는 조촐한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아담하고 선이 부드러운 베르타만큼은 아니어도 그의 제종제 또한 어딘가 유약한 인상을 품고 있었다. 유난히 색이 옅은 머리카락 때문일 수도 있었고 되바라진 소리를 할 때조차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공손히 시선을 내리는 습관이나 어떤 사람들처럼 불필요한 순간에도 자신을 드러내며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언제나 담백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딜란은 신발을 벗어 거기 고여있던 물을 빼느라 몸을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로라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약간 늦게 알아차렸다.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본인이 먼저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로라는 버릇처럼 흠칫 놀랐다. 소동물 같은 반응에 딜란이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로라가 황급히 말을 늘어놓았다.

"아 그게, 좀 전에는 죄송해요. 저는 정말로 딜란 님도 세련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제 말씀은…… 아까 그 얘긴 잊어주세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아… 그거라면 전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타격을 받기엔 누님을 따라다니며 너무 많은 걸 겪었거든요."

"으음. 아무튼 죄송했어요."

딜란은 새치름한 기색으로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아도 그걸로 됐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로라도 더 말하지 않고 제 옷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썩 들어가지는 않고 좀 머뭇거리는 게 어쩐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딜란은 일단 멈춰 서서 기다렸다.

발아래 깔린 아주 작은 모래톱을 내려다 보던 로라가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부산한 뒷모습을 일별한 뒤 조용히 말을 꺼냈다.

"두 분도 다투거나 하는 일이 있나요?"

딜란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로라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아들었다.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지만 멀리는 친척 간이기도 하고 어쨌든 상하가 있는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조언이든 공감이든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딜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초여름의 햇빛 아래에서 녹색 타일로 덮은 기둥 사이로 베르타와 릴리가 떠들며 자리에 앉는 것을 보았다. 이 어린 아가씨가 질문을 통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별거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언제나 하나도 빠짐 없는 차림새에 차분한 말씨를 쓰고 늘 우울하게 보일법한 무표정인 딜란이었지만 여름 해변에서 겉옷을 벗어든 채 모래사장을 맨발로 서 있으니 평소의 창백한 느낌이 걷어져 인상이 퍽 달라 보였다. 딜란은 베르타가 벗어버린 뒤 그냥 방치한 구두를 주워 손에 든 채 서서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고개를 숙여 다시 로라를 보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아무래도 우리 관계가 두 분에게 참고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본인의 구두 뒤축에 손가락을 걸고 반대 손으론 베르타의 구두를 든 채 딜란이 천천히 걸어갔다. 로라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가 포치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도달했을 때쯤에야 발길을 옮겼다.

안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타의 목소리였다.

"뭐야~ 둘이서 뭐 했어? 내 욕한 거 아니지?"

"걱정이 되시면 그럴만한 일을 만들지 마세요, 누님."

베르타는 그저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웃음으로 무마했다. 베르타가 좀 전에는 본인도 놀랐노라 떠들어대는 사이에 딜란은 모래를 털어낸 구두를 베르타의 발치에 놓아두고 안에서 담요를 가져와 베르타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베르타는 '동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맞장구치는 릴리의 호응에 힘입어 치사한 시댁 욕을 하느라 딜란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로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걸어가 릴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몇 년 전에 있었던 괘씸한 일에 대해 떠들다가 기억 대조를 위해 베르타가 딜란에게 본인 기억이 맞는지 물어보는 사이에 아직 시원한 음료를 호록 호록 마시던 릴리는 드디어 로라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걸 알아차렸다. 릴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봐?"

로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눈치 있는 사람과 눈치 없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눈치가 있는 쪽에서 더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기운 바닥에서 물이 한 쪽으로 흐르듯이 이해도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만큼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

로라는 일부러 새촘하게 말하곤 아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릴리는 이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릴리가 떨어진 세상은 레이스로 벽을 짓고 리본으로 바닥을 덮고 촘촘하게 짠 흰 면사의 바다와 매끈거리는 견사로 지은 대륙에 꽃처럼 부풀린 러플과 서부에서 들여온 방식의 자수 문양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였다. 릴리는 여기 들어온 뒤 대략 오십 번 째 재채기를 하려 고개를 뒤로 젖히다 그만 재채기가 안 나와서 눈물만 글썽이고 말았다.

"로라, 아직 멀었어?"

하품을 한 직후라 릴리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하지만 게으를 정도로 지루함이 가득한 질문에 돌아온 건 평소보다 톤이 높아진 목소리였다.

"세상에나! 아가씨도 이거 보셨어요?"

좀 전에 씩씩대며 싸워댄 일이 지난 생애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로라는 들떠있었다. 그것 자체는 릴리에게도 좋은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릴리가 느릿하게 말했다.

"이거랑 똑같은 거 아까도 다섯 개 정도 본 것 같은데."

"아휴, 아가씨도 참. 아까 봤던 건 나염이었고 이건 선염이잖아요. 색상에도 차이가 있고 완전히 다르다고요."

"그, 그래."

이방인이 되어 멀뚱거리는 릴리와 달리 로라는 완전히 이 세상의 원주민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한 사람은 행복하니 다행이겠지? 릴리는 흥분한 로라가 주인장과 떠들어대며 또 다른 직물을 살피는 동안 하릴 없이 옆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는 일종의 중간도매상이었는데, 취급품은 옷이나 장신구를 만드는 재료 품목이었다. 부자재는 아니고 직물 종류만 다룬다고 하지만 릴리는 그게 무슨 차이인지 썩 관심 갖지 않았다. 처음에야 온갖 직물들이 쌓여있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릴리에겐 딱 거기까지였다. 

동부에서는 이런 장소에 와본 일이 없었다. 직접 만들거나, 솜씨 있는 이에게 따로 주문을 하곤 했으니까. 손님이 직접 찾아오는 게 아니라 연통을 넣어 저택으로 부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중서부에서도 직접 찾아오는 것보단 사람을 불러서 일을 처리하는 쪽이 훨씬 보편적인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외에도 몇 차례나 손님들이 오가는 걸 보면 적어도 이상한 일까지는 아닌 듯했다. 

하긴 사람과 건물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는 도시인 이안드에서는 손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것도 그리 번거롭지 않긴 할 테니까. 동부라면 번화가에 있다고 해도 마차라도 타지 않으면 오가기 곤란한 경우도 많기도 했고 길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다만 로라처럼 오래 머무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이미 주문했던 걸 받아 가거나 급하게 필요한 재료를 사러 잠깐 들르는 정도에서 그쳤기 때문이었다. 로라도 본래는 그런 볼일 때문에 들른 손님이기는 했다. 

분명 올 때는 그런 마음으로 왔던 것 같았는데. 

릴리가 힐끗 로라를 보았다. 로라는 릴리가 보는 것도 모르고 상점 주인장과 떠드느라 바빴다. 급하게 필요한 게 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게 되었으니 잠시 들러 사소한 물건 하나를 구하러 가고 싶다는 로라에게 그럼 자신도 가겠노라 동행을 제안한 것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로라가 서로 다툰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좀 전에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놓고 바로 붙어 다니는 게 어색한 일이어야 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것보다 함께하는 쪽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고작해야 한 번 다투는 걸로 기분이 상했다고 해서 서로를 타인으로 만들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지금 릴리는 반쯤 만들어져 마감이 되지 않은 천 조각을 걸쳐놓은 사람 인형 비슷한 것 옆에 놓인 의자에 앉혀진 채 절대로 남이 될 수 없는 상대에게 반쯤 잊혀 있었다. 중간에는 로라가 혹시 마음에 앙금이 남아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까지 들었으나 다행히 그걸 사실로 믿을 정도로 릴리의 이성이 날아가 버리지는 않았다. 

로라는 동부에서 유행하는 것과 로렌의 전통에 따른 색이나 원단, 그리고 옷을 만드는 방식의 차이점에 관해서 열성적으로 떠들고 있었다. 저렇게 할 말이 많은데 릴리 앞에서는 어떻게 참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로라의 대화 상대인 이 상점의 주인장은 실패와 가위 그림을 걸어둔 문을 지나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이안드 내에선 바느질에 관해서라면 어디에도 안 진다고 자부하더니만 로라와 점점 죽이 맞아 이야기를 한참이나 나누었다. 그는 로라의 얘기를 무척 흥미 깊게 듣더니 보통 흥미를 넘어선 열정으로 불타올라 갑자기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흥분한 두 사람이 실이 얽히고설키는 얘기를 신나게 떠드는 사이에 어째서인지 원래 구하려던 것을 제외한 온갖 물건들이 이카트 저택으로 보내지기로 되었다. 릴리가 기꺼이 지갑을 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로라의 과소비를 이끌어내는 주인장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릴리는 마침내 섬유로 이루어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바깥 공기가 이렇게 맑은 거였구나.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어."

"안에 먼지가 좀 많긴 했죠?"

릴리가 지루해했다는 걸 아는 로라가 눈치를 살짝 살폈다.

"햇빛도 뜨거운데 빨리 가요."

아예 한 번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 버리고 나니 오히려 풀려버린 걸까? 하지만 릴리가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평소대로 돌아온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혹시나 안 좋아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다툼을 하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뭐가 정확히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릴리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애초에 그게 로라와 관련된 것인지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필리엔은 무사히 돌아왔고 릴리도 로라도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왜 기분이 자꾸 이상할까? 이대로 무엇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면야 차라리 좋을 텐데.

릴리는 마음속이 복잡하기도 하고 기력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발길을 옮겼다. 로라가 일이 있다고 해서 따라온 것이기도 했지만 릴리도 볼일이 생각나 도중에 길을 튼 것이기도 했다. 급한 건 아니었지만 장소가 마침 이 근방이었다. 그래서 릴리는 로라와 함께 필리엔에게 추천받은 서점으로 향했다.

책을 구매할 방법을 묻는 릴리의 질문에 필리엔이 상당히 자신감 없게 답하기도 했거니와 이안드라는 도시에는 대현자의 엄청난 도서관이 있으니 서점의 필요가 크지 않을 것 같아서 찾아오면서도 내심 불안한 기분은 있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의외로 멀끔하니 괜찮은 곳이었다. 

필요가 적다 생각하면서도 릴리가 굳이 서점까지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대현자의 도서관은 없는 지식이 없는 보물창고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인물은 소수에 속했으며 무엇보다 정확한 제목을 알아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평범한 경우에는 대현자의 도서관이 아니라 이렇게 마법적이지 않은 서점이 유용했다. 릴리가 오늘 서점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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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의 시선이 나오면 묘사가 많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냥 즐기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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