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온화한 분위기와 달리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제 귀비를 사랑스레 바라보던 예가 주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 상황을 가장 먼저 정리할 이가 누구일까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

황태자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 없군.



“ 초칙은 경들의 의견과 무관하나 귀비의 대모代母인 중서령이 하는 말이니 들어는 두지.”



대단치 않은 것처럼 말하는 예의 태도와 달리 놀랄만한 사실이었다. 주영이 귀비, 송 청의 대모(*후견인)라니? 공신 가문 출신인 주영이 같은 공신 가문 출신이었던 청의 모친과 교분을 나누던 사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황제가 윤허할 경우, 대자녀는 대부모의 가문을 이어받는 것이 가능하다.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귀비에게 민씨 성을 잇게 함으로써 역모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다가도, 지금의 황제를 보면 능히 그럴 것도 같았다.



“ 초칙에 가부可否를 논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셨으니 미진하나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폐하의 말씀대로 신臣 민주영 사사로이 귀비 마마의 대모 되는지라 그를 귀애하심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 한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서두가 이리도 길까.

옥좌의 팔걸이에 성의 없이 기대어 턱을 괸 예가 사르르 웃으며 되물었다. 느리게 끌리는 어조였다. 그를 오래 본 이라면 이 순간 누구나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 귀비마마는 내명부의 일원이십니다. 그분의 성별이나 가문과 상관없이, 폐하께서 그분을 후궁으로 삼으셨고 태후께서 이를 윤허하셨으니 신을 포함한 누구도 감히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 하오나 오화는 이와 다른 문제입니다. 천라는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내명부의 정치적 개입을 허용한 바 없사옵니다. 정치적 직분을 하사한 일 역시 그러합니다. 이는 경계해야 할 문제입니다.”



당연히 대자녀인 귀비의 편을 들 것으로 생각했던 이들은 예상치 못한 반대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예는 그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태연한 낯이었다. 오히려 긴장은 청이 하고 있었다.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와 젖은 손바닥을 긴 소매 안으로 숨겨야 했다.

한편, 말을 꺼낸 당사자인 주영은 착잡하기만 했다. 청을 다시 만나 기쁘기도 했지만 황제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니 심란한 마음이 더 컸다. 사슴 같던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청은 오랜만에 보아도 친자식처럼 어여뻤다. 그러나 사사로이 정에 휩쓸려 국정을 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청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가 권력과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황제의 손가락이 어좌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문 채였다. 주영은 그를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 천라의 관직은 본래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지. 개국 이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던 것을 조부께서 타파하여 여성 역시 국시를 치를 수 있도록 했어. 하여 지금은 어떤가.”



당상관의 절반가량이 여인이고, 삼재(*천라의 현직 관리 중 가장 높은 위치. 상서령, 중서령, 문하시중의 총칭)중 둘이 여인이다.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 중서령. 만약 짐이 하고자 하는 일이 상식선의 일이었다면 초칙으로 삼을 이유도 없었겠지. 이부에 교지를 내리라 명하면 그만인 일을.”

“ ... ... ”

“ 그대가 천라의 안녕을 위하는 관리임을 잘 알아. 다만 선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걱정부터 할 필욘 없지. 경험도 부족하고 연치도 어린 짐을 보아서라도 너그럽게 생각해봐.”



보통의 황족들과 달리 훌륭한 외양을 타고난 죄로, 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황의 정치에 이용되었다. 노출이 잦았던 만큼, 당시의 사랑스럽던 모습이 모두의 기억에 선명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고압적인 태도를 조금만 누그러뜨려도 그때의 예를 겹쳐보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마음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그리 연약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대답은 정 반대쪽에서 들려왔다.



“ 초칙에 신들의 동의를 구하시니 송구스럽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주목받는 법을 아는 자였다. 단번에 흐름이 바뀌었다.



“ 중서령께서는 내명부의 일원이 정치적 발언권을 갖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귀비마마께서, 물론 그러지도 않으실 테지만, 황심을 어지럽히고자 한다면 후궁의 신분만으로도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영과 달리 냉정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래서일까. 내용과 상관없이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 오화라는 제도는 새로운 황제의 반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나, 역으로 그들이 폐하의 곁을 지킬만한 인재인지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무능하여 폐하께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 폐하의 눈을 가리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자. 있다면 그때 간언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 귀비마마께선 귀족 자제 출신이며 언관이기도 하셨으니 폐하의 바른 뜻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혜안慧眼 역시 저희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이지요.”



아아. 자신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는 이야기군.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한 령 역시도 오화 중 귀비, 청만을 언급함으로써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나머지 네 명을 안고 갈 심산인 듯 보였다. 하긴. 사이좋은 모자母子는 아니더라도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가 오화로 임명되었는데 나쁠 것이 무엇이겠는가.



“ 초칙이 괜히 초칙이겠습니까. 시행하시되 일정 기간 후에 다시 한 번 신료들의 의견을 구하소서.”

“ 역시 상서령이십니다.”



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맞장구치는 이 자는 황제의 외숙이자 선황 연제의 또 다른 오화였던 추밀원장, 수 총강이다. 외척의 신분인지라 실무를 담당하지 않는 명예직에 머물러 있지만, 처세도 좋고 언변도 좋은지라 모두와 두루 지내는 자다. 지금 이곳에서 교분만으로 그 영향력이 가장 큰 자를 뽑자면 두말할 것 없이 그였다.



“ 다른 것도 아니고 초칙입니다. 특별한 경우이니 일단 지켜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총강의 발언에 관리들 몇몇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넘어가는 것이 확연히 보이니 주영조차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 하면 폐하. 이후의 간언에 귀 기울여 주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 약조하지.”

“ 신, 민주영. 황명을 받드옵나이다.”



주영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모두가 그녀를 뒤이어 외쳤다.


황명을 받드옵나이다!


이로써 새로운 황제의 초칙이 공포되었다.


[ 한 설, 가 율, 가 윤, 주 요련, 송 청. 오화로 임명한다.]


이제 막 초칙 하나를 끝냈을 뿐 논의해야 할 현안이 잔뜩 쌓여있었다. 귀비, 청에게 허락된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오화로 임명되었다고는 하나,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회는 원칙적으로 다음번부터였다.

예가 제 환관을 지척으로 불러 명했다.



“ 귀비의 지밀상궁을 들게 하라. 귀한 몸이니 홀로 걷게 할 순 없지.”

“ 너는 가서 귀비가 처소에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귀한 총첩으로 다룰 생각인지. 예가 목적을 이루기 전에 제 정신력이 먼저 동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청은 습관처럼 입을 열었다.



“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소첩,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물러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청은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갔다. 살면서 이만큼 주목받은 적이 없을 테니 심신이 피로한 모양이었다.

휘청거리지 않는 것만도 칭찬해주어야 하나.

청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예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여상한 어조로 운을 뗐다.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 한데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던 것이 있어.”



옥좌에 반쯤 기대어 앉은 황제는 나른한 듯도, 권태로운 듯도 보였다. 마치 긴 사냥을 마치고 마침내 배를 두둑이 채운 맹수와 같은 분위기다. 황태자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눈에 익은 태도였다.

이는 분명,



“ 귀비의 가문이 역모를 꾀하여 멸문당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 증좌가 있나?”



선전포고할 때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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