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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는 억울했다. 그는 휴게실에 종이컵이 자신이 사용한 것 외에 딱 한 개가 남은 걸 확인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작은 헌신을 보탤 계획을 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좁은 복도를 지나 탕비실로 가서 나무문을 열고 두 번째 캐비닛 옆에 있는 종이컵 박스를 꺼내 안에서 종이컵을 꺼낸 뒤 박스를 되돌리고 다시 휴게실로 돌아와 종이컵을 자리에 채워두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이유도 하나 없는 지극히 단순한 계획은, 탕비실 문을 여는 순간 어그러졌다. 

탕비실에는 여러 가지 사무용품과 잡다한 소비품들이 박스채 쌓여있으며 간단히 비용처리할 물품 외에도 스캔과 인쇄, 팩스 기능이 알차게 장착된 커다란 복사기도 있고 청소용품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비품이라는 게 그리 자주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 자기 자리에 개인 프린터가 있는 데다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있는 탕비실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복사기를 사용했다. 청소 도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내에서 망측한 짓을 저지르고자 하는 기력이 남아돌고 양심과 도덕이 현저히 부족한 사원이 있다면 탕비실은 제법 노려볼만한 장소라는 뜻이었다. 앞서 설명했듯 탕비실은 다른 공간과 좀 떨어져 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민지는 단연코 입사한 이래로 실제 탕비실에서 밀회를 저지르는 장면을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었다. 방금 탕비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는 정말로 그랬다.

"아, 이런."

천장에 매립한 쨍한 형광등 빛에 로맨틱한 분위기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어찌 불이 붙었는지 민지가 목격한 건 대낮에 보기엔 좀 민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물론 밤이라고 해도 단연코 싫었다. 

종종 이런 개념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도시 괴담은 들은 바 있으나, 직장인에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정통으로 딱 마주친 정신적 충격과 더불어 이 민망한 상황을 자아낸 사람이 익숙한 얼굴이니 더욱 당혹스러웠다. 순간의 충격이 가시면서 잔뜩 엉겨 붙어 혀를 섞어대던 사람들이 민지가 아는 얼굴들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했으나 하나 더 있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탕비실에 문이 열리면 바로 보이는 자리라는 건, 거기서도 문을 열고 들어온 민지가 정통으로 보인다는 의미였다. 같은 직장에 근무 중이니 다들 얼굴은 아는 사이들이 아닌가. 상대에게 완전히 들러붙듯이 하고 있던 입사 한지 얼마 안 된 신입과 민지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는 소리였다. 이쯤 되면 욕이 나올 기력도 없었다.

그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이 동그랗게 커지고 엉겨 붙어 있던 사람에게서 황급히 떨어져 나간 뒤 놀라고 당황하고 부끄러운 사람의 모든 반응을 일으키는 것까지 봤다. 파란 리넨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심이 솟아날 정도였다.

「오, 세상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래서 민지는 신입이 직장동료에게 이런 광경을 들키고 만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로 허둥대다 황급히 탕비실을 나가는 것을 도우려 문을 잡아주는 신세가 되었다. 앞으로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극한의 서먹함을 느끼게 될 암담한 미래에 민지는 벌써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다음이 더욱 기가 막힌 최종 보스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민지의 불행에는 끝도 없었다. 

제헌은 별일 없었단 것처럼 복사기에 반쯤 걸터앉아 기울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뒤쪽을 짚고 있던 손을 느긋하게 되돌려 셔츠를 매만지고 재킷을 여미는 것을 보며 민지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헌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하다 민지의 눈빛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키스밖에 안 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그냥…… 그냥 조용히 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민지는 가까스로 큰 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억눌렀다. 아무리 구석진 위치라지만 소리를 지른다면 누가 들어도 들을 게 분명했다. 일단 지금으로선 반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잘못한 거라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문을 열어버린 것밖에 없는 민지로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나 일단은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진정하는 시간이 흐른 뒤 민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회사 안에서…… 여긴 사람들 다 들락거리는 곳이잖아요. 문도 열려 있었는데 누가 들어올 줄 알고 그렇게 태연하게 있어요? 믿기지가 않네요. 그것도 이제 겨우 22살 된 애를 건드리다니요?"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히고 머리가 띵할 일이었다. 민지의 비난에 제헌도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진짜로 키스밖에 안 했는데……."

제헌의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좀 다른 의미가 담겼다. 심각해진 제헌의 목소리에 민지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더 할 말도 없었다. 정확히는 할 말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나 꼴을 봐야 속만 터질 게 분명했다. 더 말해 무엇하랴? 민지는 거친 손으로 쾅 쾅 캐비닛 문을 여닫으며 종이컵을 챙겼다. 물론 감정이 잔뜩 실린 행동 하나마다 꽉꽉 눌러 담은 문장 하나씩 뱉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회사 안에서 동양인의 이미지가 더 저렴해졌네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야 이 일만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저는 여기서 계속 저 사람들이랑 봐야 하는데 이렇게 분위기를 흐려놓으면 참 좋은 일이겠어요!" 

결국 민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머리를 짚었다. 방금 본 광경이 너무 적나라해서 어디 가서 최면술사라도 구해다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제헌은 민지가 테이블 위에 거의 던져버린 종이컵 한 줄을 집어 들었다. 그라고 그 타이밍에 민지가 들어올 줄 알았겠나. 조금 부주의했던 건 사실이지만. 

민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펍에 같이 갔던 이후로 제헌을 보고 한숨 쉬는 일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 버릇이 다시 돌아온 성 싶었다. 마치 상사에게 30분 넘게 닦이고 자리로 돌아와 쌓인 업무를 본 것 같은 민지의 모습에 제헌도 조금은 양심이란 것이 찔렸는지 목소리가 나붓해졌다.

"그런 것까진 생각 못 했어요. 아무튼 그런 꼴 보인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휴게실 비품 채우려는 거죠? 제가 할게요." 

제헌은 언제 뻔뻔한 태도였냐는 듯 양순한 얼굴을 하곤 종이 냅킨도 같이 챙기며 솔선수범을 보이려 감사원 앞에서 살랑대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제헌이 순순히 사과하고 눈치를 보며 알랑대는 모습에 민지도 좀 자신이 너무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10초 정도. 조금 덜 작위적이었다면 점수를 더 주었겠지만 제헌의 대놓고 비굴한 기색은 그리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민지는 그를 공통으로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얘기가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 편두통으로 머리를 짚었다. 비밀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안 드는데 얘기를 해봐야 손해 보는 사람은 있어도 이득 보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민지는 제헌에 비하자면 아주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평한 제헌의 태도가 괘씸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제헌에 비하자면, 지금 그와 비교해서 누가 안 그렇겠냐마는, 민지는 공사 구분도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제헌 씨는 어떤지 몰라도 그쪽이 장난으로 건드린 사람은 실직을 하면 자기 나라로 쫓겨나는 입장이라는 걸 기억하길 당부드릴게요."

제헌의 손이 조금 느려지다 다시 원래 속도를 찾았다.

"그건 몰랐네요."

제헌은 주섬주섬 챙긴 비품을 들고 탕비실을 나가려다가 무언가 막 생각난 것처럼 몸을 돌려 민지를 보았다. 민지가 고뇌하는 직장인의 피로감 가득한 모습으로 복사기에 기대려다 조금 전에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고 움찔 떨어져 섰다. 그러는 사이 좀 고민하는 기색이던 제헌이 말을 꺼냈다. 

"저… 민지 씨가 하나 알려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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