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시 30분. 창문으로 집 안에 있는 시계를 엿보았다. 평소 레너드가 등교하는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제자리에서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레너드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슬슬 다리가 뻐근했다. 일부러 레너드를 마주치기 위해서 일찍 집에서 나온 탓이었다. 아직 레너드의 얼굴을 보기 민망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꼭 물어볼 게 있어서였다. 누나는 어제 밤에 다시 약속이 잡혔다며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자정쯤에야 집에 들어온 외삼촌이 지나가는 말처럼 누나의 행방을 물었는데, 나는 모른다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번만큼은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누나가 어디 있는 줄 알았더라면 레너드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누나에게 확답을 받았을 테니까. 누나가 한 말이 전부 이해되는 건 아니었어도 어쩐지 상황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정말 레너드가 누나와 사귀는 게 아닌지, 딱 그 대답만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집 근처에 가볼까.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레너드는 항상 학교에 1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아직까지 그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거슬러 걸었다. 레너드의 집까지는 고작 몇 걸음도 되지 않았다. 길을 한 번 건너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곧 그가 사는 곳이 보였다. 좌우를 살피고 차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달음박질 쳐서 길을 건넜다. 레너드의 집은 고요했다. 길 건너에서도 아침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아이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그의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미안하다고는 해야겠지. 걔도 먼저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생각이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화해를 하는 게 먼저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비키라며 그를 쳐낸 게 나였던 것이다. 한숨을 쉬며 그의 집 계단 앞에 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그의 집 현관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레너드 기다리니?”

“네? 아, 아니에요...”

“일이 있다고 일찍 나갔는데. 어쩌지.”

“아, 네.”

“쿠키 먹을래? 잠시만.”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레너드 네 어머니였다. 따뜻한 시선이 피부를 따갑게 쑤셔대는 것 같았다. 얼른 손사래를 쳐서 거절하고 시선을 피했다. 레너드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가장 친절한 분들이었지만, 내겐 그들을 만나는 건 그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도 불편한 일이었다. 일찍 나갔다니. 그걸 미리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오늘 학교에서 일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처음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친구들이 제법 많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경을 긁어놓았다. 굳이 아침에 가야할 일이 뭐가 있다고. 오늘 쪽지 시험이라도 보나. 농구 연습을 하거나, 아니면 팀 과제라도 하는 걸까. 혼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게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말을 연습했었는데.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이 바쁜 척 몸을 돌렸다. 레너드가 없다면 이곳에서 더 서성이고 있을 이유는 없다.


“아, 마침 잘됐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네? 네.”

“아침에 급하게 가느라 그랬는지 점심 도시락을 잊어버리고 갔더라고. 좀 전해줄 수 있을까?”


대답을 뭐라고 했더라.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내 손에 어느새 그의 도시락 통이 들렸다.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 네 어머니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천천히 몸을 돌려서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와 같은 등굣길에, 손에는 짐이 하나 늘었다. 레너드가 먼저 학교에 갔다는 게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했는데, 갑자기 과제 하나가 어깨에 턱 얹어진 기분이었다. 애초에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그의 얼굴을 볼 일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언젠가 화해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누군가가 등을 떠밀자 오히려 더 발을 떼기가 두려워졌다. 머릿속에서는 냉랭하게 구는 레너드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뭐야, 이게? 알았어. 가봐.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꽉 쥔 손에서는 괜히 땀이 났다.


따로 연락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아도, 전화나 문자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누나에게 전해줬던 핸드폰이 떠올랐다. 정확히 얼마를 내야 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누나가 구했다면 나도 구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따로 돈을 버는 것 같긴 했지만, 누나는 다른 데 쓰는 돈도 많았기 때문에 아마 여윳돈은 나와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었다. 마침 오늘 아침에 누나에게 받았던 식권과 내 몫의 식권을 다 챙겨왔다. 되는 데까지 팔았다가, 주말에 시내에 나가볼 생각이었다. 누나는 내 나이보다도 한 살 어렸을 때부터 외삼촌이 가져다주는 옷을 입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선 옷을 입고는 친구에게서 빌린 거라며 둘러대더니 나중에는 그 얄팍한 변명도 그만두었다. 그 나이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면 나라고 못할 건 없었다. 셔츠 팔을 걷어붙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누나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안 입는 옷을 받아온 거라는데, 그래서인지 오른쪽 팔의 단추 하나가 빠져 있었다. 아무리 맞는 옷이 없다고 해도 남의 옷을 받아 입고 싶진 않았는데, 누나가 내일 입을 것까지 골라뒀다며 성화를 하는 바람에 결국 그대로 입고 나왔다. 이상한 데 또 맛이 들린 모양이었다. 나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렇게 의존하진 않아도 되겠지.


영어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교실을 찾았다.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간이 늦어서 다른 데 한눈 팔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 시간을 핑계 삼아 손에 들린 도시락 통은 그대로 교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또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매일 보면서 뭐가 그렇게 신기할까.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내가 없는 사람인 양 서둘러 눈을 피해대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반응은 그래도 아직까진 신선했다. 여전히 식당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이 잦아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로 방과 후 보충 수업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애들은 계속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아댔던 것이다. 맞은 것도 내가 더 많이 맞았지 지가 몇 대나 맞았다고. 차라리 또 시비를 걸어오면 시원하게 사고를 쳐버리면 될 텐데, 딱 거슬릴 정도로만 눈치를 주니 나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교실 문 앞에 섰다가, 막 문을 열고 나오는 애와 어깨가 부딪혔다. “어, 미안.” 그는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더니, 내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당장 주먹이라도 날릴까봐서. 일부러 먼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자르니 확연히 가벼운 느낌이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훤히 드러난 얼굴이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하다가,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저저번 주에 제출했던 작문 과제에 대한 이야기로 입을 뗐다. 아직 점수를 다 매기지는 않았지만 독창적인 글이 많아서 소개해주고 싶다는 거였다. 또, 뻔한 발표 시간이었다. 금방 심드렁해졌다. 여름에 대한 글이 주제였던가. 이런 시간에 발표를 하는 애들은 보통 정해져 있고, 내용도 주제와 관계없이 다 비슷비슷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들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공책을 쥐어주었다. “발표해볼래?” 그 아이는 쑥스럽다는 듯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뭇거리던 태도와 달리 발표를 하는 목소리에는 떨림 하나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아이들은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그 박수 소리와 함께 발표를 하던 아이가 자리에 앉고, 선생님은 다음 공책을 손에 들었다.


“제임스 커크.”


화들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았다. 나?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 않겠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선생님이 내게 전달해주라며 우리 줄 가장 앞자리에 있는 아이에게 공책을 내밀었다. 공책은 내 앞에 앉은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씩 거쳐서 내 앞에 툭 던져졌다. 내가 공책을 받아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공책을 내 쪽으로 더 내밀었다. 결국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책에는 내가 적은 게 분명한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떠듬떠듬 글을 읽어 내려갔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지자 목덜미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짧은 글을 읽는 시간이 한나절처럼 느껴졌다. 겨우 마지막 문장을 끝내자 박수가 쏟아졌다. 뻣뻣해진 다리를 끌어 얼른 자리에 앉았다. 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게. 그 말 한 마디를 못해서 괜한 일에 휘말렸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학생의 이름을 불렀고, 아이들은 금방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목덜미에서 시작된 열은 어느새 귀 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

“커크?”

“...왜?”

“너 오늘 뭔가...”

“....”

“아니야. 그냥. 좀 달라보여서.”


무슨 소리야, 그게. 수업이 끝나고 교실 뒤편의 휴지통에 종이를 버리러 갔다가 어떤 아이와 부딪혔다. 평소라면 이대로 조용히 각자 쓰레기나 버리고 지나쳐가면 될 텐데, 그 애는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러다 금방 휙 가버리는 바람에 길게 말을 섞진 못했지만, 1교시 만에 내가 평소에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하던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발표한 것 때문인가. 괜히 짧아진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내가 앉았던 책상으로 돌아와 교과서와 공책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물론 도시락 통도 잊지는 않았다. 언제 전해주지. 마침 이 다음 시간에 레너드가 무슨 수업을 듣는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체육이었던가. 그렇다면 어차피 체육관까지 오고갈 시간은 없었다. 도시락을 락커 안에 넣어두었다. 점심시간 전에만 주면 되겠지. 최대한 시간을 미루려는 생각이었다. 이미 한 시간 만에 체력이 다 동난 기분이었다. 지금 레너드까지 마주쳤다가는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슬슬 더워지고 있던 참이라 그 냉기가 반가웠다. 허리를 숙여 손을 씻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잠그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확 달려드는 것이었다. “매튜!” 반갑다는 듯이 부르는 낯선 이름도 함께였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털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엉뚱한 얼굴이 보였다. 매튜라니. 내가 아는 그 애? 그 애는 우리 학년에서도 인기가 꽤 많은 애였다. 초등학교 때는 항상 비실비실했던 것 같은데, 재작년부터 갑자기 키가 훌쩍 커 와서는 이목을 끌기 시작한 애였다. 게다가 올해에는 럭비부까지 들어가면서 한창 아이들의 입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걔도 금발이었던가. 괜히 착각당한 내가 민망해져서 다시 수도꼭지를 틀었다. 저 애들이 나간 후에 화장실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어? 어... 미안. 잘못 봤네.”


슬쩍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어색했다.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진 건가. 하기야 애들이 하고 다니는 게 달라야 얼마나 다르다고. 평소 입던 옷과 다르게 입고 오기까지 했으니 그 정도 착각을 하는 건 예삿일이라고 할만도 했다. 두 번씩이나 씻은 손을 털고 화장실을 나왔다. 식권을 팔려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서둘러야 했다. 아침에는 내내 그 도시락 통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한 장도 팔질 못했다. 가방에서 식권을 몇 장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늘은 한 다섯 장만 팔아도 좋을 텐데. 최소한 일주일은 꼬박 팔아야 목표했던 돈이 떨어질 것 같았다. 가방을 닫다 보니 또 레너드에게 전해줘야 할 도시락이 생각이 났다. 이제 정말 점심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레너드는 주로 따로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기 때문에 식권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 얼른 줘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여전히 발걸음은 쉬는 시간 내내 락커 주위만을 맴돌았다. 모르겠다. 필요하면 먼저 찾으러 오겠지. 어머니한테 연락도 받았을 거 아니야. 나한테 맡겼다고.


“하나?”

“쟤 거까지 두 장 살게.”


오늘은 운이 좋았다. 초콜릿 푸딩에 치즈 소스를 부은 나초가 나오는 날이었다. 인기가 많은 메뉴가 나오자 아이들은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는 식권을 약간 싸게 팔아넘겼던 것이다. 물론 대놓고 판매하는 건 금지 당했지만, 때로는 말이 발보다 빠르다는 게 편리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벌써 목표치였던 다섯 장은 팔아치웠다. 그리고도 여전히 줄을 서 있는 애들이 몇 명 있었다. 식권을 넘기면서 속으로는 셈을 했다. 이 속도대로라면 넉넉히 이번 주 안에는 돈을 꽤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모자란다면 식권이 새로 나오는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겠지만. 이게 모자라다면 차라리 이 돈으로 자전거라도 살 생각이었다. 학교까지 매일 걸어 다니는 건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서, 손에 들린 지폐를 정리하며 하나씩 천천히 세어보았다. 나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굴리느라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레너드다. 그의 발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손을 멈추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지만 모른 척 시선을 고집스럽게 유지했다.


“나한테도 하나 팔래?”

“왜. 넌 따로 싸오잖아.”

“오늘은 까먹었어. 얼마주면 돼?”


그제야 도시락을 아직 주지 못했다는 게 생각이 났다. 굳이 식권을 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락커에서 그것만 가져가면 되는데. 고개를 들자, 레너드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평소라면 도시락을 잊고 왔다고 해도 정직하게 식권 판매기 앞에서 서 있을 사람이, 어쩐 일로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한 푼, 두 푼을 아껴야 할 정도로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그는 그런 사소한 규칙을 지키는 걸 좋아했던 것이다. 도시락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레너드는 갑자기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되는 건가. 그를 이렇게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도 오랜만이란 게 생각났다. 지금껏 퉁명스레 굴었던 걸 떠올려보면 나도 할 말이 없는 셈이었다. 머뭇거리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먼저 입을 떼었다.


“머리, 달라졌네.”

“아... 샘이ㅡ”

“어? 레너드. 거기서 뭐해?”


고개를 돌려보니 계단 위에서 우르르 내려오는 레너드의 친구들이 보였다. 얼른 옆으로 물러섰다. 레너드와 말다툼을 한 것 때문인지, 나를 보는 시선이 평소보다 배로 따가웠다. 레너드는 내 손에서 식권을 한 장 가져가더니 지폐를 한 장 쥐어주었다. 5달러짜리였다. 너무 많은데. 돈을 거슬러주려고 얼른 1달러짜리를 몇 장 꺼냈지만, 레너드는 어느새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식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는 할 틈도 없었다. 그를 돌려세우기 위해 계단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니 발걸음은 거기서 저절로 멈추어버렸다. 그냥 나중에 5달러는 그대로 돌려주자. 돈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의 친구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학교에 있는 모든 애들이 나를 싫어할 때는, 나도 굳이 나서서 더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도시락 통을 가지고 본즈의 락커 쪽으로 올라왔다. 아이들은 대부분 점심 식사를 하러 갔기 때문에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락커 앞으로 다가갔다. 평소에 비해 따가운 눈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상급생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그리 잘 알지는 못했지만, 나를 달가워하지 않기는 늘 마찬가지였다. 원래 다른 학년 아이들이 자기 층에 올라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더러 나는 그 예외에 속하는 아이들 중 하나도 아니었던 것이다. 상급생들처럼 차려입고, 언제든지 파티며 운동 경기에 따라다니는 아이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사람들이 금방 나를 못 본 것처럼 지나쳐가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에 온 게 다행인 모양이었다. 얼른 그의 락커를 찾아 이름표를 읽었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을 때 빨리 도시락 통만 넣어놓고 갈 생각이었다.


“어? 지미?”


조용히 심부름만 하려던 계획은 또 무너져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누나의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얼굴을 본 사이라 유난히 낯이 익기도 했다. 한동안은 치어리더 여자애와 연애를 한다고 얼굴도 잘 비추지 않더니, 하필 오늘 이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별로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땐 그가 나를 두고 장난을 쳐댄 적도 많았고, 크고 나서도 가끔 볼 때마다 친한 척 엉뚱한 소리를 해대곤 했던 것이다. 정말 친하기라도 하면 몰라. 그는 누나가 아니고서는 얼굴 볼 일도 없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정도 사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이 편했다.


“왜 그래. 반가워서 그러는데.”

“...응, 안녕.”

“너 키 컸어? 멋있어진 거 같은데.”


키? 무슨 키.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서 옷이 많이 짧아지기는 했다. 긴 바지는 죄다 7부 바지처럼 위로 딸려 올라갔고, 그만큼 티가 나진 않아도 상의도 꽉 끼는 편이었다. 가끔 체육복 반바지가 민망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는데 옷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키가 컸던 모양이었다. 레너드를 바라볼 때 고개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그래서였나. 락커를 곁눈질 하다가 위 칸에 적혀 있는 레너드의 이름을 찾았다. 이젠 이름표를 보려고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락커 문을 열고 아직도 내 옆에 서 있는 누나 친구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도 키가 꽤 큰 편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예전 같은 위압감은 느껴지질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샘 보면 내 라디오 좀 돌려 달라고 해줘.”

“직접 말하지, 왜.”

“내 여자 친구가 그런 거 싫어해서.”

“뭘 싫어하는데?”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전해줘.”


그는 언제나처럼 멋대로 할 말을 하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나를 더 귀찮게 굴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다행이었지만, 누나 친구들은 나를 누나의 메신저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핸드폰이라도 있는 사람이 누군데. 전화 한 통이면 될 걸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전해달란 소리를 하는 게 영 고까웠다. 나야말로 누나가 사라지면 연락할 방법 하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서 누나와 엮이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원래 누나와 나는 서로에게 그리 참견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가끔 학교 애들 중에는 우리가 남매 사이인 줄 잘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학년도, 노는 무리도 달랐고, 누나는 나보다는 친구들과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불만이 없었다. 왜 평소 같지 않은 짓을 해서. 이게 다 누나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다음부터였다. 레너드를 좋아한다는 그 말 때문에. 누나의 도움이 없이도 잘 생활해온 게 몇 년인데, 사람들은 죄다 내가 누나가 업어 키우기라도 하는 애인 줄 아는 게 짜증났다. 게다가 레너드마저도 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상관 없다고 쳐도 그까지 나를 어린애 취급 하는 건 싫었다.


레너드 맥코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락커를 열었다. 락커에 아무런 스티커나 포스터도 붙어 있지 않아서 찾기가 까다로웠다. 락커 안은 예상했던 대로 깔끔했다. 옷걸이에 체육복이 반듯하게 걸려 있었고, 책은 가지런히 일렬로 꽂혀 있었다. 책에 색색이 꽂혀 있는 포스트잇도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하는구나. 하기야 곧 시험이니까 바쁘겠지. 도시락 통을 조심스레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통이 꽂혀 있던 책을 건드리면서 구겨진 포스트잇 하나가 떨어졌다. 일부러 구겨놓은 게 명백한 모양이었다. 책을 살짝 옆으로 치워내자 그 뒤에 감추어져 있던 포스트잇이 여럿 보였다. 다들 제멋대로 구겨진 채였다. 쓰레기를 버릴 시간이 없었다. 이걸 왜 여기다 두지. 책을 그대로 다시 돌려놓으려는데, 그 중 몇몇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먹어.’

‘맛있게 먹어.’

‘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


뭐야, 이게. 고백이라도 해? 구겨져 있던 포스트잇 중 하나를 펼쳐 보았다. ‘너 주려고 샀어.’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레너드의 글씨체는 분명했다. 썩 내키지도 않는 공부를 한다고 그의 책을 몇 번이나 뒤적거렸는데, 이런 걸 헷갈릴 리가 없었다. 남의 락커를 엿보고 있다는 불안감도 잊고 포스트잇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초콜릿이야. 이건 먹어도 괜찮을 거야’ 이번 건 글씨를 죽죽 그어 지운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 스스로가 쓴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래, 바쁘게 살았네, 레너드 맥코이. 네가 이런 걸 다하고. 그의 마음이 누나를 향해 있다는 건 헛짚은 모양이었지만, 그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큼은 내 촉이 맞았던 셈이었다. 아무리 친구에게 쓰는 쪽지일 거라고 자기 위안을 해봐도 마음은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가 이렇게 공들여서 쪽지를 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너드가 이런 걸 할 줄이야. 상냥하고, 또 조금은 사려 깊기까지 해 보이는 문구에 점점 기가 찼다. 그래, 누군 줄이나 알자. 누군데 그래. 나는 가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포스트잇을 꺼내 펼쳐 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손에서 종이가 툭 아래로 추락했다.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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