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뭐 들어요?"


씻고 나온 시원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지영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보통 시원을 기다리거나 혼자 있을 때는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지영이었고, 오늘 역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다만 책은 읽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시원이 옆자리에 앉자 지영은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다 씻었어?"

"응. 아 못 들었구나."

"응?"

"뭐 듣는지 궁금해서. 책도 안 읽고."

"아. 다정이가 추천해 준 노래."

"다정이가요?"


응. 대답하며 지영은 다정과의 카톡방을 보여 주었다. 단답형에 좋게 말해 자기 할 말이 뚜렷하고 나쁘게 말해 포장이 전혀 없는 다정의 카톡이 귀여워 시원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구장을 다녀온 뒤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정은 지영에게 곧잘 연락을 해오곤 했다. 

"친구가 없어서 그, 아악!"

그렇게 말하고 다정에게 쪼인트를 맞았지만 진은 나중에 찾아 와서 몰래 말해 주었다. 주위에 언니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강인아가 제대로 된 언니가 아닐 거란 것에는 시원 역시 적극 공감하며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리고 아마 지영 언니 키도 작고 (이 대목에서 진은 지영에게 꿀밤을 맞았다) 예뻐서 (진의 시선이 가슴께에 스쳤고 시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이 간 것 같다고. 괜찮으시면 가끔 놀아 주시면 엄청 좋아할 거라고. 지영을 보러 다정을 태우고 경기도까지 와서 쑥쓰러워하며 하는 말에 시원과 지영은 (끝에 가선)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이게 목록이야? 엄청 많네."

"요새 꽂혔다고. 수록곡까지 해서 앨범 전체를 zip파일로 보내 줬어."

"헤에. 아. BBD. 나도 꽤 들어."

"나도 TV에서 보긴 봤는데. 노래 들어보는 건 처음이라."


음악방송이나 예능프로를 즐겨보는 편이 아닌 건 지영이나 시원 모두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TV에서 잊을 만하면 CF 등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다만 듣던 노래만 주구장창 듣는 지영과 달리 워터멜론 탑 100을 듣는 시원은 이미 꽤 많은 곡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 그 뭐지? 그거. 작년에 엄청 히트한 거. 그거 좋던데요."

"<Blossom>?"

"아. 맞아요."

"응. 좋더라. 같은 앨범에 수록록인 <수련>도 좋아."

"그래요? 수록곡까진 안 들어 봤네."

"응. 같이 들을래?"

"응. 머리 말리고 올게요."


시원은 쪽 볼에 뽀뽀를 하고선 헤헤 웃고선 지영의 음악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드라이기를 가지고 방에 들어갔다. 

'그럴 필요 없는데. 차암.'

지영은 설핏 웃고선 강의하느라 목이 아플 시원을 위해 따끈한 유자차를 탔다. 귓가에선 잔잔한 발라드가 흐르고 있었다.




"노래 좋네."

"응. 되게 다양해서 신기해."

"그러게요. 장르가 다양하네. 아 얘네 무대도 되게 잘할걸요?"

"그래?"

"응. 후배들이 좋아해서. 아이돌은 무대죠!"

"그건 맞지. 아이돌은 무대지."

"왕년 빠순이다운 말씀이시네요. 이지영 선생님."


또 빠지면 안 된다며 장난스럽게 웃는 시원을 지영은 밉지 않게 째려보고선 덮치듯 안겼다. 


"너 하나 좋아하기에도 바빠."

"와 감동이네요."

"응. 그니까 이제 음악 그만 듣고 방에 들어가자. 내일 토요일이잖아."

"알아요. 그만 꼬셔요. 못 재울 것 같으니까."


시원은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2. 


[조민희: 졍졍! 오늘 점심 햄버거 콜?]

[이지영: 그래ㅋㅋㅋ 소라도 괜찮대?]

[조민희: ㅇㅇㅋㅋㅋㅋㅋㅋ 버거왕 ㄱㄱ]


답장을 보내고 고개를 살짝 들어 소라를 바라보니 손을 방방 흔들고 있었다. 귀여워. 포메라니안 같아. 지영은 피식 웃고선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와 집중했다. 

왕퍼, 불고기 왕퍼, 트리플 머쉬룸 왕퍼 세트를 시킨 세 사람은 오랜만의 패스트푸드에 꽤 들떠 있었다. 민희는 예전에는 로또리아밖에 없었는데 우리 학교도 많이 좋아졌다며 웃었고 지영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소라와 시훈의 시답잖은 싸움 얘기를 들어가며 햄버거를 먹던 지영은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에 살짝 눈이 커졌다.


"아."

"응? 지영 언니 왜?"

"아니. 노래. 요새 BBD 노래 좀 듣고 있어서."

"오! 언니도 좋아해?!"

"졍졍은 요즘 아이돌은 잘 모를걸?"

"노래 좋더라. 아직 노래만 들었어."

"우리 언니들 춤이랑 얼굴도 대박인데."

"에엥. 소라 너보다 다 애기들 아냐? 아하하."

"원래 잘생기면 오빠고 예쁘면 언니야."

"뭐야. 아하하. 근데 예쁘긴 해! 스완 요새 은하폰 광고에서 미쳤더라."

"너무 예쁘죠~~"

"아 나도 본 거 같아. 걔가 BBD구나. 맞아. 예쁘더라."


시원과 함께 보던 드라마의 중간 광고로 나오던 은하폰의 광고를 떠올렸다. 제 기억이 맞다면 세련된 느낌의 차도녀였었다. 


"맞아! 우리 수완이 우리 백조... 다 컸어. 은하폰 광고를 다하고...."

"다 컸지. 이십대 중반 아니야?"

"아잇! 아이돌 슴넷임 애기죠."

"하긴 우리 애들, 그 뭐야. 근장 미지도 스물네 살이잖아."

"아~! 언니들은 꿈이 없어어!"


두 사람은 소라의 핀잔에 소리내어 웃고선 식사를 계속했다. 콜라를 쭈욱 빨던 지영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아." 하며 소라의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그. 지금 이 파트 누구야?"

"아. ONE일걸요?"

"응. 노래 되게 잘하더라."

"아~ 얘 솔로 활동도 할걸?"

"우리 수완이도 노래 잘하는데.... 근데 ONE 음색 미친 건 인정이에요."

"솔로도 있다고? 들어봐야겠다."

"올~ 졍졍. 공원소년 이후로 식어버린 네 빠심에 불이 붙은 거야?"

"아니거든."


민희의 놀림을 일축한 지영이었지만 속으로는 집에 가면서 솔로곡을 찾아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자 방방 꼬리를 흔들고 있던 소라는 맞다 맞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며 폰을 꺼내 들었다.


"아!! 잠만 잠만 해보자. 나 트윗타에서 보고 한 번 해 보고 싶었어!"

"응? 뭘?"

"언니 BBD 애들 이름 잘 모르죠? 누가 누군지."

"아냐 대충 아는데. 다섯인가?"

"지금은 넷이에요. 쨘."

"허억. 뭐야 소라야."


갤러리 가득한 미남미녀의 사진 목록에 민희는 아연실색했다. 너 정말 예쁘고 잘생긴 거에 진심이구나. 몰랐어, 언니? 예쁘고 잘생긴 게 최고야! 실없는 대화를 주고 받고선 화려한 컨셉 사진을 지영에게 들이밀었다.


"쨘~ 내돌! BBD!"

"아, 은하폰 광고에 나오는 애가 얘지? 스완이라고?"

"응. 응. 내 최애! 우리 완이완이수완이!"

"어우. 마른 거 봐. 얘들은 진짜 저세상 몸매네."

"되게 예쁘다. 다들 개성 있게 예쁘네."

"이름 맞춰 봐요!"

"어, 이 사람 드라마에서 봤는데."

"응. 응!"

"이 사람이 ONE?"

"땡~!!! 우리 리다님. 주이."

"그럼 ½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지 지영은 나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름 아이돌 짬빠가 없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작고 예쁜 애는 아니겠지. 공원소년의 A 같은 비주얼 멤버인 것 같은데. 소거법으로 이 키 큰 멍멍이 같은 애인가...? 헷갈리는 와중에 민희가 옆에서 더 혼란을 주었다.


"ONE 작곡도 하지?"

"맞아요. 맞아. 수록곡 중 한두 개는 꼭 ONE이 작곡한 거고, 저번 앨범은 타이틀곡도 ONE이 작곡한 거였어요."

"정말? 뭐?"

"<Blossom>."

"헐. 돈 쓸어모았겠네. 대박."

"그럼 얘!"

"땡~!!"

"뭐? 정말? 그럼 이 조그마한 애가?"

"응. 그래도 오피셜론 161이라는데...."

"에이 말도 안 된다~"

"흑흑. 159 중에 제일 비율 좋은 159예요."


지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원의 사진을 확대해 보았고 소라는 포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폰을 가져 가더니 바로 스완과 다원의 투샷을 찾아 보여 줬다. 작은 얼굴 가득한 이목구비가 무척 화려했다. 눈이 얼마나 큰 거야. 


"예쁘죠? 예쁘죠? 우리 한백 커플~"

"사귀는 사이야?"

"말이 그렇단 거죠. 근데 둘이 진짜 수상해요. 맨날 붙어 있고."

"뭐 비지니스 아니겠어? 아무튼 얘 사기캐야."

"직캠 볼래요? 직캠? 복근이랑 기립근이랑 오져요."

"기립? 뭐?"

"에이 일단 함 속는 셈 치고 봐 봐요~!!"


소라가 틀어주는 영상을 민희와 지영은 영문도 모른 채로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3. 


"다녀왔어요~"


시원은 문을 닫고 인사를 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지영이 수고했다며 다가왔다. 시원은 쪽쪽 뽀뽀를 하고선 뭐 하고 있었냐며 물었다.


"아, 그냥."

"으응? 책 읽고 있었어?"

"응. 응. 맞아."


요새 들어 수상쩍어 보이는 지영이었지만 시원은 별 의심하지 않고 꼬옥 끌어안았다. 지영은 간지럽다며 웃고선 고개를 빼꼼 꺼내어 들고선 물었다.


"자기 피곤한데 오늘 나가서 먹을래?"

"그럴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음. 그, 거기 뭐였지?"

"응? 어디?"

"W대 앞 사거리에 새로 생겨서 우리 가보자 한 데."

"아 마라탕 집? 거기 가볼까? 너무 맵게는 말구."

"응 우리 맵찔이. 아 그리고."

"응?"

"코인 노래방 안 갈래...?"

"노래방?"


먼저 노래방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드물었기에 시원은 뜻밖이다 싶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지영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시원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대?"

"그냥, 오랜만에 가고 싶어서."

"나야 좋죠. 신청곡도 받아요?"

"내가 신청할 거야."

"으응?"




"랩? 나 랩 잘 못해...?!"

"그래도 나보단 낫잖아."

"끙. 그래. 해 볼게."


첫키스 때 생각하면서 뽀뽀나 몇 번 하고 느긋하게 노래를 불러야지 했던 시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래를 열심히 검색하는 지영에 눈이 땡그래졌다. 그리고 평소에 주로 부르던 노래도 한두 곡 있었지만 확 바뀐 레퍼토리에 또 한 번 놀랐다. 요새 열심히 듣는다 싶더니 BBD의 히트곡 몇 개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어, 예. 어허."


아이돌 노래를 많이 듣고 부르기도 많이 부르는 연구실 막내 재롱둥이 정시원은 시키는 대로 랩이고 코러스고 열심히 불러 젖혔다. 원체 노래를 잘 부르는 지영이었기에 발라드가 아니었어도 찰떡같이 잘 소화했다. 


"오~! 우유빛깔. 이지영. 사랑해요. 이지영."

"뭐야아. 쑥스럽게."

"자기 아이돌 노래도 진짜 잘한다."

"그래? 고마워."

"고마우면 키스나 한 번 할까요~?"


일부러 느끼하게 웃는 시원에 지영은 질색하면서도 뺨을 쓰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목을 그러안고 한참을 입술을 비비고 있으니 다음 노래의 간주가 시작되었다. 저번처럼 자연히 넘어가겠거니 했던 시원이었지만, 지영의 반응은 달랐다. 


"아, 안 돼...!"

"어?"



"아직 삐졌어?"

"사람을 그렇게 밀다니. 나 완전 바닥 구를 뻔했잖아요."

"아니이. 그래도 노래부르러 간 거니까."

"그렇게 말꼬리 늘이면서 귀여운 표정 지으면 풀릴 줄 알죠."

"내가 언제 귀여운 표정 지었다고 그래."

"아아. 안 되겠네. 이 사람. 어? 어디 가서. 어? 그렇게 예쁘게 웃고 그러지 마요."


진짜 아무 것도 안 한 지영은 절로 화가 풀려서 주접을 떠는 시원이 귀엽다는 듯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시원은 하지 말라며 짜증 아닌 짜증을 냈지만 이미 입꼬리를 헤실헤실 풀어진 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레퍼토리가 많이 바뀌었네요. 뭐 유명한 노래들이긴 하지만."

"그런가? 요새 듣는 노래들이야."

"나 앨리샤 키스 그 노래 되게 좋아하는데, 자기가 불러 주니까 더 좋더라."

"그랬어?"

"응. <예뻤어>도 좋고. 그 노래 가사가 넘 찡해."

"그치. 뭔가 그 노래 네 생각 나."

"왜요? 내가 부를 것 같아서?"

"응. 넌 헤어져도 그렇게 예쁜 말 좋은 말만 할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없잖아. 바짓가랑이 붙잡고 추한 꼴로 늘어질 거야."


정색하고 눈썹을 모으는 시원에 지영은 나도 놔 줄 생각 없다며 웃었다. 



4.


"지영이가 이상해."


케이크를 와구와구 퍼 먹고선 커피를 쪼로록 빨던 수아는 뜬금없는 시원의 말에 고개를 빼꼼 들어서 바라보았다. 무슨 또 흰소리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이게 다 뇌물이었구만. 이수아 속아도 또 속았네. 이제 시원이 강남 왔다고 밥 사주겠다고 해도 다시는 따라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또 뭔데?"

"요새 계속 뭔가...."

"계속?"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 밑밥 좀 그만 깔고 빨리 말해 봐!"

"...지영이가 나한테 뭘 숨기는 것 같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말하는 시원에 수아는 "으엥?" 하며 괴성으로 되물었다. 


"아니, 요새 혼자 있을 때 핸드폰을 엄청 하는데... 뭐 하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래."

"그래?"

"어. 인기척만 느껴져도 바로 후다닥. 그리고 요샌 책도 훨씬 덜 읽어."

"우리 언니 얼마나 책 읽는지도 체크해? 언니 좀 소름끼친다!"

"뭐, 뭐래. 같이 책 빌리러 가니까. 우리 학교로."

"데이트 TMI네. 여하간 뭐 요새 책 읽기 좀 싫나 보지."

"...내가 싫어진 건 아니겠지? 누구 다른 사람이랑 연락하는 거면 어떡하지."

"에이. 아닐걸. 계속 얘기해 봐. 또 뭐가 수상해?"

"다다음주 주말에 혼자 어디를 간대."

"엥? 혼자?"

"응. 소라랑 서울에 놀러 간다길래 그러라고 했는데.... 오늘 소라 만나서 물어 보니까."

"보니까?"

"눈동자가 엄청 흔들리면서 제대로 답을 못하는 거야."

"허어엉?"


이쯤되는 수아도 의아해하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사실 바람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왜냐면 얼마 전에 통화했을 때도 시원 언니 얘기가 7할이었으니까. 아. 


"잠만. 잠만."

"그리고 노래 취향도 엄청 바뀌고...."

"다다음주 주말?"

"응. 토요일."

"잠시만... 아!!"

"응?"

"후후후. 알았다!"

"뭐야. 뭐야?"


수아는 장난기가 드글드글한 표정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낄낄낄낄 웃었다. 괜히 애타는 시원만 전전긍긍하며 아랫입술을 물고 뭐냐며 걱정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 생긴 거 맞아!"

"...뭐?"

"워억. 언니 눈으로 사람 죽이겠어."

"다른 사람? 무슨 소리야. 진짜야? 수아야."

"아이~! 농담도 못하겠네. 테이블 뿌셔져요!!"

"빨리. 무슨 소리야."

"진짜 장난 아니네. 크흠흠. 아~ 이거 울 언니 프라이버신데."


그러나 아까 꺼낸 말 때문에 눈이 돈 시원은 봐 줄 생각이 없는지 표정을 조금도 풀어 주지 않았다. 수아는 '이크. 이거 나중에 언니한테 뒤지게 혼나겠는데....' 조금 후회했다. 그러나 당장 말을 안 했다간 시원에게 죽게 생겨서 도리가 없었다.


"아이돌이요. 아이돌!"

"...느어?"

"얼빠진 소리도 내는구나. 언니도."

"아이돌? 공원소년...?"

"아뇨. 아 물론 언니의 영원한 오빠들이긴 하지만."

"오빠들은 무슨, 죄다 아저씨들인데...."

"언니 민경언니랑 우리 언니 앞에선 싱글싱글 웃으면서 잘 맞춰 주더니."

"크흠. 그래서 무슨 얘기야? 아이돌이라니?"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 사실...."




"허 참."


시원은 운전을 하면서도 수아의 말을 떠올리며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귀엽다고 해야 할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가수 좋아하는 게 뭐 그리 감출 일이라고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남자 아이돌도 아니고, 여자, 그것도 열 살도 어린 아가들인데 내가 신경쓸 것 같았나. 내가 너무 쫌생이같이 굴었나. 별 일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야.


"허어."


그러면서도 시원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BBD의 신곡에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렸다. 집에 가는 내내 "허어. 허참. 하하." 혼잣말만 중얼거렸다.



5.


원인을 알고 나니 지영의 수상쩍은 행동이 빤히 보였다. 원래 보던 낫플렉스 외에 OTT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니만, ONE이 메인 호스트로 나오는 캠핑예능 때문이었고. 알고 보니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도 다 BBD, 주로 ONE이 커버한 노래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BBD랑 ONE 노래만 부르고 싶었겠지만 들킬 거라고 생각한 건가. 시원은 잘 숨기지도 못하면서 덕질을 숨기고 있는 지영이 조금 안쓰러우면서도 잘 이해가 안 갔다.

'공원소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 놓고 왜?'

이제 와 새삼 부끄러워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이에 동거 중이고, 출근 시간 외에 종일 붙어 있는 편인데 들키지 않기가 더 어려울 텐데.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지영의 행복과 편안이 제일 중요한 정시원이었기에 시원은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어 있다가 넌지시 지영을 불렀다.


"지영아. 자기야."

"으응?"

"오늘 후배 만났는데."

"응. 잘 만나고 왔어?"

"<Away>인가? 그게 되게 재밌다고 그러더라."

"...아!"

"그거 우리 새로 가입한 OTT에 있는 거지? 시즌2 곧 시작한다던데 같이 볼까 싶어서."

"정말?"

"응?"

"아냐. 소라도 그거 되게 재밌다고 그랬어. 같이 보자."


화색이 피어난 지영의 표정에 시원은 마주 웃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언가 마음 한 구석에 석연치 않았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스스로를 달랬다.




"노래 잘한다."

"응. 잘하지."

"자기가 좋아하는 목소리지."

"...응."

"지영아."

"이수아야?"

"푸핫. 맞구나."

"아. 이 망할 기집애...."

"동생한테 말이 너무 심하다."

"미안. 아... 진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민망함에 지영은 시원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원은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면서 웃었다.


"화 내려고 얘기한 거 아니야. 자기가 나 눈치 보느라 힘들 것 같아서."

"아니 막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래서 막 몰래 영상 보고 그랬어? 이것도 다 본 거지?"

"아이. 진짜."

"괜찮아. 팬으로서 그러는 건데. 신경쓰지 마. 내가 오히려 미안해. 자기 좋아하는 거 감추게 해서."

"시원아...."


그제야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지영에게 시원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맞추었다. 물론 미소의 1푼 정도는 거짓이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다른 가수 안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오빠들은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거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시원의 팔을 베고선 마치 대학 입시 문제를 풀이해 주듯 하나하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영상의 입덕 포인트를 짚어 주던 지영은 뜻밖의 질문에 볼을 붉혔다. 그리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대답했다.


"다 커서 이러는 거 좀 부끄럽잖아. 게다가 10살이나 어린데."

"에이.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늘 말하잖아. 20대 중반인 줄 알았다고."

"콩깍지야, 콩깍지."

"그래도 좋아하는 거에 나이가 어디 있어. 거짓말 하지 마요. 앞으론."

"응. 진짜 고마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무슨,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 연예인을 좋아하냐며 이해를 못 하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시원 역시 지영이 알기론 누군가의 열렬한 팬인 적은 없었으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자신의 벤츠는 벤츠라고 지영은 다시금 확인했다. 



6.


하지만 그 벤츠는 그뒤로 심란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히익. 차가! 왜애?"

"아냐. 그냥. 복근 이제 다 없어졌네...."

"응. 아무래도 요새 운동 안 해서...."

"그렇구나."


별 의미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었는데. 기껏해야 약간의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원은 미간을 좁힌 채 크롭티를 입어서 일자로 가지런한 복근이 그대로 드러나는 썸네일의 다원을 노려보았다. 시원의 에이패드로 영상을 몇 개 같이 봐서 그런지, 종종 너튜브 알고리즘에 뜨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영상 댓글에 온갖 주접들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복근...."


시원은 티셔츠를 슬쩍 들춰 보았다. 군살이 늘어질 정도로 붙진 않았지만 복근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기립근은 또 어디야?"


척추를 더듬어 봤지만 평범한 대학원생에게 기립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원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신경쓰지 말자. 신경쓰지 말자며 고개를 저었다.




"뭐 해?"

"하나, 둘, 으어어으어."

"내 요가매트까지 꺼내놓고...."

"운동. 그냥. 심심해서. 아하하."


심심하다고 할 운동 같아 보이지 않는데. 지영은 브이업(몸을 브이자로 접는 복근운동)을 하고서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대 자로 뻗어 있는 시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홀짝였다. 시원은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몰래 빼꼼 티셔츠를 들어올려 확인했다.

'젠장.'

이거만 하면 바로 생긴다더니. 복근은커녕 그늘도 보이지 않는 평평한 허연 배에 시원은 다시 누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위아래로 팔다리를 길게 뻗은 시원의 기름한 몸매가 보기 좋아서 지영은 아예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응? 뭐 해."

"구경하려고. 길어서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길지?"

"하하. 그래요?"

"응. 진짜 하얗고 길어. 새삼 이렇게 팔까지 쭉 뻗고 있으니까 더."

"그래도 키는 작은 것보단 큰 게 낫지?"

"...? 응. 뭐."


너무나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한 지영이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하자 시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본 지영은 답변이 좀 부족한 건가 싶어서 컵을 내려놓고 드러누운 시원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며 흐트러지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볼에 쪽 뽀뽀를 해 주고 이어 말했다.


"...네가 키 작았어도 좋아했을 거야."

"쯧!"

"응?"

"아냐. 고맙다고. 사랑해. 나도."

"응, 으응."




"내가 데려다줄까? 아니다. 나랑 같이 갈까? 나 그 앞에서 기다릴까?"

"됐어. 팬미팅 2시간 가까이 되는데. 다녀올게."

"그래도...."

"왜 이래. 두고 가는 사람 발걸음 무거워지게 귀엽게 굴어. 나 가지 말까?"

"아냐.... 잘 다녀 와."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 좀만 기다려."

"아냐. 나 다이어트 하려고."

"뺄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으응. 조심해서만 다녀와. 빨리 오고."

"응. 사랑해."


뽀뽀를 하고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뭔가 주인이 나가는 걸 전송하는 멍멍이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 수상쩍었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이 약속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는 일은 많지 않았기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요새 술도 안 마시던데. 뭐 줄이면 좋지. 나이도 있는데.'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하며 지영은 신나게 발걸음을 옮겼다. 



7. 


- 야.

"뭐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걸고? 뭐 또 예약해 줘?"

- 아니. 그건 아니고. 너 복근있어?

"무슨 생뚱맞는.... 끊을게."


세연과의 이브닝 타임을 방해하는 오랜 친구의 엉뚱한 질문에 인아는 표정을 구기며 바로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세연이 오히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모양으로 '제발 시원 언니한테 잘 좀 하세요'라고 했기에 끊지 못했다. 


- 복근이 안 생겨.

"그니까 웬 복근 타령이냐고."

- 내 주위에 개인 트레이너 끼고 운동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그건 맞지. 코어 엉망이면 나중에 곱게 못 죽으니까 열심히 키워 놔."

- ...그나마 복근도 있을 만하고.

"정확히는 복직근이야. 그것도...."


인아는 슬쩍 파자마 윗도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세연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길래 저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건가 싶어 미간을 좁혔다. "하여간 또라이셔...."라고 중얼거리다가 인아에게 배를 만짐당하자 소리없는 아우성을 쳤다. 인아는 세연을 만지작거리면서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맞는 말이네. 있네. 나."

- 기립근도?

"척추기립근? 글로벌코어니까 뭐. 데드리프트도 하긴 하니까. 근데 그게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갈라져서 척추가 움푹 들어갔냐는 소리 아니에요?"

"왜 그렇게 잘 아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 있어요?"

- 세연이도 같이 있어?

"네. 안녕하세요!"

- 아하하. 안녕.

"나 기립근 있어요? 없어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세연 씨가 내 알몸 제일 자주 보니까?"

"언니이?!"

- ...끊을게. 미안했다. 미안. 세연아.

"실없네. 뭐 프로틴이라도 보내 줘?"

- 단백질?

"응. 난 운동하면 마시거든."


최대한 체력을 끌어쓰면서 일을 하면서도, 죽지 않기 위해 개인 트레이너를 끼고 여유가 날 때마다(주로 저녁식사 시간을 쪼개서) 운동을 해 온 인아였다. 어찌 보면 전문가에 가까웠지만 어디까지나 미용 근육을 키우는 목적의 운동이라기보단 생존형 운동에 가까웠다. 복근 역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않아 드러난 것에 가까웠기에 인아는 지금 시원의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허리라도 다친 거야? 왜 갑자기?"

"아마 미용... 때문 아닐까요?"

- 윽.

"뭐야. 이지영 씨 취향이 빨래판 같은 배래?"

- 아니거든. 

"복근 있으면 예쁘니까요. 저도 윗몸일으키기라도 해야 하나...."

"세연 씨는 지금이 딱 좋아요. 말랑하고 기분 좋고."

"제발 그런 얘기는 둘만 있을 때 하시면 안 돼요?"

- 고생이 많아. 세연아.

"네가 미용에 신경쓸 이유가 이지영 씨 외에 또 있어? 또 있으면 바람이지."

- 맞는데. 취향이 그런 건 아니고. 그게....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지영 씨한테 네가 외간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복근 단련 중이라고 얘기할 거야."

- 너는 진짜 인간이 왜 그러냐?!

"빨리. 궁금한 건 딱 질색이야."


세연은 이런 관계가 15년 유지되었단 점에서 시원이 정말 보살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홀쭉한 배를 만지고 있는 인아의 손을 탁 때리며 쳐냈다. 


- 지영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는데....

"응. 뭐 사인받아다 줘?"

- 뭐래. 절대 안 돼.

"질투하네. 귀엽긴."

- 끊는다.

"말해 봐. 빨리."

- ...걔가 배랑 등이 되게 예쁘더라고. 지영이가 요 며칠 전에 복근 없어졌다고 했거든.

"요 며칠 전에 섹스했구나. 평일인데 대단한걸?"

- 극혐이다. 끊을게.


낄낄 웃다가 세연에게 옆구리를 쥐어뜯긴 인아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세연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전했다.


"미안해요. 얘기에 공감이 안 가서 그만."

"공감가게 해 드려요?"

- 응?

"저도 관심있는 연예인 정돈 있어요."

"...세연 씨. 그 얘기 더 하면 내가 CF 끊어버린댔지. 걔 밥줄 끊기는 거 보고 싶어요?"

- 뭔, 누군데?

"있어. 키 작고 어리고 맹랑한 꼬마."

"꼬마 아니에요. 저랑 동갑인데."

"스물두 살이 꼬마죠."

- ...설마 ONE이야?

"네, 실물로 뵐 일이 있었는데 멋지시더라구요."

- 강인아.

"왜."

- ...진짜 CF 자를 수 있어?

"연예계에 발도 못 붙이게는 어려워도, CF는 얼마든, 아야!"

"진짜 유치하게 뭐 하시는 거예요. 저번부터."


두 사람에게로 번진 불에 시원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인아에게 진짜 끊을 수 있냐고 물어 보려다가 애먼 사람을 탓하면 강인아랑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라고 자신을 다스리고선 프로틴을 찾으러 정보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8.


"늦네...."


요새 들어 술을 거의 마시지 않던 시원이 진영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겸 재민, 예원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간 게 오늘 5시였는데, 거실의 벽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12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10시쯤 진영 씨가 가서 한 차만 더 하고 온댔는데....'

또 얼마나 술값을 내고 올지 심란했지만 지영은 이내 걱정을 그만 두었다. 자신이 덕질하는 것만큼이나 음주는 시원의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잔소리만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밤늦게 취한 상태로 쏘다니는 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서 지영은 조금 전전긍긍해졌다. 스마트TV로 보던 직캠을 잠시 일시정지해 두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삑삑삑삑삑삑 띠로리리


"양반은 못 되네. 정시워언~"

"으흐흐. 지영아~ 자기야~ 우리 예쁜아아."

"어머. 왜 이렇게 취했어. 괜찮아?"

"우응. 엄청 취했죠. 안아 줘요."

"뭐야. 아하하."


기분 좋게 알딸딸하게 만취한 시원은 지영을 꼭 끌어안고 둥가둥가하다가 번쩍 안아올렸다. 코어 운동을 미친 듯이 한 보람이 있긴 한지 지영은 대롱대롱 메달렸다.


"꺅! 뭐해?"

"가벼워...."

"요새 운동하더니 이래?"

"아아아!"

"응?"


거실 TV 화면 가득한, 일시정지되었음에도 굴욕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에 시원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잔뜩 구겨진 목소리로 꼬깃꼬깃 중얼거렸다.


"나 쟤 싫어요."

"어?"

"뭘 먹고 다녔길래 저렇게 내장지방 하나 없이... 사람도 아니야."

"왜 이래. 정시원? 괜찮아?"

"싫어요. 쟤."

"으응? 화났어?"

"으으응.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오늘 엄청 취했네. 빨리 재워야겠다.'

지영은 대화의 핑퐁이 좀처럼 되질 않는 시원에 자게 빨리 씻으라며 겉옷을 벗기고 욕실로 들여보냈다. 그때 음악소리가 시원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응?'

자신이 설정해 놓지도 않았는데, 똑같은 벨소리(ONE의 솔로앨범)에 지영은 조금 놀랐지만 별 생각 없이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최재민'이 가득 차 있었다.


"여보세요. 대신 받았습니다."

- 아! 누님. 안녕하세요.

"재민 씨. 안녕하세요."

- 시원 누나 잘 들어가셨죠? 오늘 엄청 취해서 좀 걱정돼서요.

"네. 잘 들어 왔어요. 많이 취했네요."

- 이구. 죄송해요. 누나 주량 생각하면 엄청 많이 마신 건 아닌데. 처음에 빼길래.

"시원이가 술을 빼요?"

- 네. 근손실 온다고...?

- 최재미이! 지여이 언니가!?

- 어, 억. 어. 예원마.

- 언니!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빼액 소리를 지르는 예원에 지영은 고개를 파르르 떨며 전화를 조금 귀에서 뗐다. 시원만큼이나 취한 건지 예원은 방방 뜬 목소리였다.


- 언니. 애인 배 좀 봐 주요~!

"배? 배?"

- 마 억수로 운동해 가 쪼매 생기따 아임니까

"뭐가...?"

- 보끈요! 보끄은!

"복근? 그걸 왜요?"

- 마. 이 언니 또 모른다카노.

- 니 취했다. 내가 받을게. 누님. 전데요.

"네. 재민 씨. 예원 씨가 무슨 소리 한 거예요?"

- 크크. 시원 누나한테 말하심 안 돼요?




씻고서 조금 술기운이 가신 시원은 개운해진 상태로 화장대 앞에 섰다가 취기를 빌려 애교 좀 부려보겠다는 마음에 스킨을 들고 쫄래쫄래 지영에게로 다가왔다. 


"히히. 발라 주.... 으억?"

"흐응."


졸지에 티셔츠 배를 뒤집어 까인 시원은 동그란 눈을 꿈벅거리고 있었고 지영은 그런 시원의 배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술과 안주를 먹는 바람에 볼록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눌러보니 예전과 달리 좀 탄탄한 감이 있었다. 


"으아악! 차가워요."

"여기도 좀 생겼네."

"으후."

"그렇게 질투 났어?"


지영의 웃음기어린 그 말에 시원은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아이씨 재민이야 예원이야 하면서 꿍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밉다면서도 티 하나 안 내고, 자신이 더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복근운동을 하고, 후배들이랑 노래방 가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연습하는 등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시원이 사랑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 진짜 내가 널 두고 누구를 좋아해...."

"진짜? 내가 제일 좋아요?"

"응. 왜 이렇게 귀여워. 진짜...."

"나 안 귀여워.... 귀여운 건 윤다원이 귀엽죠.... 쪼그만 애가 뭐 으쌰으쌰 만드는 거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면서요...."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사랑하는 사람 말인데 어떻게 안 기억해~!"

"삐졌어? 질투났어?"

"네. 근데 왜 이렇게 신났어?"

"좋아서."


물론 전남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 새끼 저 새끼 쌍시옷 섞인 소리를 내가 분개하며 질투하는 것도 귀여웠지만, 이렇게 소심하게, 질투의 상대도 아닌 연예인에게 이러는 게 지영은 정말 연하랑 사귀는 게 실감이 났다. 


"그렇구나. 서운했구나."

"네. 완전. 내 배 만지면서 걔 생각했죠."

"아니야. 걔 보면서 옛날 정시원 생각한 거야."

"말은 잘해. 뻥."

"조금?"

"와이씨. 진짜 너무해요."

"농담이야. 너랑 이러고 있는데 누굴 생각해."

"저번에 노래방에서 키스하다가 걔네 노래 부르겠다고 나 밀쳤잖아요."

"...그거는."

"그리고 예전에 열 번 내 생각 했는데, 요샌 한 일곱 번 내 생각 하고 세 번은 걔 생각 하죠?"

"아, 아니야아. 무슨."

"한 번은 하잖아."

"...아니야."

"자기 거짓말 할 때면 내 눈 못 보는 거 알죠. 나 봐요."

"아이 아니라니까."

"흐응."


'귀엽다는 말 취소.'

훌러덩 티셔츠를 벗어던진 시원의, 복근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탄탄한 배와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한 지영은 온몸으로 거대한 질투의 감정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종일 내 생각만 나게 해 줄 테니까. 각오해."


아랫배를 묵직하게 만드는 허스키하게 쫙 깔리는 저음이 자신의 최애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키스를 퍼붓으며 잠옷 안으로 긴 손가락을 집어넣는 시원의 목을 지영은 두 팔로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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