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재재







"SUP 투자회사 전무 민윤기입니다."


"BV전자 상무 김태형입니다."





아버지의 부탁아닌 부탁 때문에 또 사람을 만나고 있는 태형이었음. 다른 점이 있다면 갑을 관계 정도? 평소에는 상대방이 철저한 을이어서 자신과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주었기에 나름 편했었지. 물론 나쁜 관계가 되면 서로에게 좋지 않기도 하고 아버지 눈치도 보여서 태형이 싫어도 좋은척 한 적이 상당히 많지만. 그런데 지금은 BV재단에서 회장인 태형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는 민회장의 아들이 태형의 맞은편에 앉아있었음. 그 말은 자신이 을도 아니지만 갑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었지. 하지만 저 민씨집안이 완전히 BV재단의 편이 된다면 태형의 아버지는 최고주주에 플러스로 다른 사람들의 주식을 합쳐도 넘볼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거였음. 태형은 여기서 불안했음. 태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형제들과 치열한 경쟁끝에 할아버지의 뒤를 물려받아 BV재단의 회장이 된거였으니까. 저 욕심에 민회장을 절대 적으로 둘리가 없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편으로 만들려고 용을 쓸게 분명했음.





"언제 이런 자리가 생기나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뵙네요." - 김회장


"우리 윤기는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오늘 만나는 자리의 의미를 알고 있더군요." - 민회장


"아버지께서 전화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 윤기


"놀라진 않았나?" - 김회장


"갑작스럽긴 했습니다만, 언젠가 할 거라 예상은 했던터라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 윤기


"몇 번 안봤지만, 볼 수록 마음에 드네 이친구! 하하!" - 김회장


"감사합니다." - 윤기


"김상무는 여기 왜 왔는지 아는가?" - 민회장


"친목을 위한 자리로 알고있습니다." - 태형


"하하, 친목이라 그것도 맞지." - 민회장





뭐지. 태형 자신만 이 상황을 모르는듯한 분위기에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음. 태형이 윤기를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는데 윤기는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조용히 음료를 마시고 있었음. 저 분도 아는데 왜 나만 모르냐고. 그냥 친하게 지내라고 부른거 아니야? 어제 정국이와의 사투 때문에 허리도 아프고, 허벅지에도 알이 베겨 온 몸이 아파 죽겠는데 왜 자꾸 질질 끄냔 말이야. 빨리 볼일 보고 끝내지.





잠시 후에 코스요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김회장과 민회장은 일과 관련된 이야기, 혹은 일상 이야기, 자식이야기 등을 하며 시간을 떼웠음. 그럴수록 태형이는 답답해 미치려 하지. 분명 저 민윤기라는 사람이랑 나랑 친하게 지내라고 부른거 같은데, 그럼 서로 인사하고 빨리 나가고 싶은데 왜 자꾸 회장 둘만 얘기 하는건지 모르겠음.





"근데 우리 김상무는 충분히 전무로 갈 수 있었을텐데 왜 아직도 상무를 하고 있나?"


"아직 BV재단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어 전자쪽부터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일을 굉장히 잘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허허, 겸손하기까지 하네."


"과찬이십니다."





거짓말에 능숙한 김태형..ㅎㅎ 전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안했지 배우긴 뭘 배워. 회장님이나 형들이 전무이사 하라고 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부담스럽고 싫다며 죽어도 안한다 난리쳤으면서 이렇게 점잖게 말하니 김회장은 어이가 없을지경이었음. 그러면서 집에서나 철없는 막내아들이구나 뿌듯하기도 하겠지. 아무튼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건 메인메뉴가 나오고 나서부터였음.





"그래, 우리 민전무는 애인은 없고?"


"네, 없습니다."


"허허, 이렇게 인물이 훤한 이가 애인이 없다니 참 이상하네. 주변에서 가만히 안뒀을텐데."


"우리 윤기가 워낙에 일밖에 몰라서. 그래, 우리 김상무도 애인 없다고 들었는데?"





애인? 갑자기 왜 애인의 유무를 묻는거지? 태형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윤기와 딱 눈이 마주쳤음. 윤기는 태형의 표정을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였음. 뭐, 뭐지.. 애인 있는걸 눈치 챘나. 아니 뭐 눈치 채면 어쩔건데, 우리 아버지한테 이르기라도 할거야?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면서 두 회장의 대화에 집중을 하는데 이게 들으면 들을 수록 이상한거지. 아무리봐도 태형이랑 윤기를 친구사이로 엮을거 처럼 보이지는 않았음. 태형이는 속으로 애써 부정하겠지. 에이, 아닐거야. 형누나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약혼했다가 결혼했는데 난 아니었잖아. 난.. 아닐거야... 아니겠지..? 이렇게 갑자기 약혼을 할리가 없어. 아무리 욕심많은 아버지라지만 언질도 없이 약혼을 시킬리는 없잖아..? 막내 아들인데 그럼.





"반지는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윤기의 안목도 들어갔어요."


"어디 봅시다. 허허, 다이아가 크고 반짝이는게 태형이도 좋아하겠는데?"


"반, 반지..요..?


"아이고, 참, 우리 김상무는 아직 모르지."


"둘이 약혼식을 올릴거다. 날짜나 장소는 추후에 정해질거고."


"네?? 약혼식이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


"태형이 너와 민전무가 갑작스럽다고 느낄거 같아서 약혼식은 조금 뒤로 미루려 한다."


"그 전까지 둘이 만나서 친해지고, 사랑도 나누고 해 봐. 허허."


"기사는 언제 낼지 변호사를 통해서 얘기 합시다."





태형이는 굳어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음. 애써 부정해 왔는데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만거지. 여기서 저 애인 있어요!!! 소리치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버지한테 무슨 불호령을 받을지도 모르고, 정국이한테도 얼마나 어떤 피해가 갈지 몰라서 일단 입 닥치고 있었음. 내가 평범한 애인이 있음이 밝혀지면 그건 곧 BV재단의 약점이 되고, 아버지는 그 약점을 없애려 하시겠지. 자그마한 약점 하나라도 있으면 아버지의 형제들이나 그 주변에서 물어 뜯으려 했고, 그렇기에 아버지는 그 약점이 싫어서 어떻게든 없애려는 분이셨으니까. 무슨 일을 저질러서라도. 진짜 까딱 잘못했다간 정국이가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음. 태형은 예쁨 받고, 귀히 여겨지며 자란 막내 아들이기에 더욱 잘 알고 있던거지. 자신의 주변이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고, 아름답고, 부유하게만 있는지 커서야 알게 됐으니까.





"둘이 아직 얘기 못해봤지?"


"그래그래, 너무 우리만 얘기 했나보구나."


"식사 마치면 둘이서 드라이브라도 하고 들어오거라."


"밤새 안들어와도 뭐라 안하마 태형아."


"아, 아버지이!"


"허허, 그녀석 참, 부끄러워하기는."





태형이는 답답해 미칠지경이었음. 난 저사람이랑 약혼하기 싫다고 발악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디저트로 나온 아포가토를 푹푹 떠먹었음. 저 민윤기라는 분한테 뭐라고 말하지, 우리 아버지한테는? 그보다 정국이한테는? 나랑 정국이랑은 어떻게 되는거지? 당황했던 마음에서 불안으로 옮겨가면서 태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음.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두 회장님은 서둘러 자리를 뜨셨음. 윤기와 단 둘이 남은 태형이는 어색한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 그냥 서있기만 했음. 처음보는 곧 약혼자가 될 사람이랑 서서 무얼 해야하나? 심지어 태형이는 죽어도 하기 싫은 약혼인데.





"그 때 이후로 처음이네."


"네?"


"20년 전, 연회장에서."


"...?"


"일단 타지."





갑자기 반말..? 날 봤었나?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닌데. 윤기가 열어주는 포르쉐 보조석에 조용히 올라탄 태형은 약혼을 파기하자고 어떻게 말해야하나 고민에 빠짐. 갑작스러운 약혼에 놀라셨죠, 저도 놀랐는데.. 서로 잘 모르고 원하지도 않으실텐데.. 그래서 말인데 회장님들께 잘 말하면 취소해주시지 않을까요? 좋아 이렇게 말해보자.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 돌리고 있던 중 윤기가 꺼내는 말에 태형이는 벙쪘음.





"반지는 마음에 들어? 화려한걸 좋아할 것 같아서."


"네? 아..."


"약혼식은 최대한 빨리 하고 싶은데."


"...진짜 하시게요?"


"그럼 가짜로 해?"


"....."





큰일났다. 이 사람 약혼 할 마음 있구나. SUP에서는 우리랑 맺어져서 좋은게 뭐지? 아니, 애초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면 나같은 권력욕 없는 상무랑 맺어져서 좋을게 뭐냐고.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분위기 좋은 카페에 도착을 해버리고.. 차 안에서 멍때리다가 윤기가 문도 열어주고 에스코트도 다 해줌. 결국 가만히 윤기한테 이끌려서 자리에 앉은 태형이었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친데."


"그게..."


"뭔데, 말해봐."


"...아, 아닙니다.."


"뭐, 애인 있다고?"


"네.. 네?! 아니, 네?"


"아까 표정보니까 있을 것 같아서. 나랑 약혼하기 싫은 눈치기도 하고."


"그... 아버지한테 말 하실 건가요..?"


"안할거야. 일단은."


"...일단은..."


"정리는 해. 아무리 갑작스러운 약혼이라지만 애인있는 상대는 좀 껄끄러워서."


"....."


"싫어?"





.....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태형은 아랫입술을 꾹 내리 누르면서 고개를 숙임. 윤기는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더니 탁, 소리나게 내려놓음. 태형이는 그 소리에 움찔 떨겠지. 얼마나 됐어 만난지. ...좀 됐어요. 많이 늦었네 내가.



그 다음부터였지, 윤기가 매일 꽃을 보내기 시작한게.





"김상무님, SUP 민전무님께서..."


"버려."





아직 정국이한테 말하지도 못했는데 매일 꽃을 보내오는 윤기때문에 태형이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음. 혹시라도 정국이가 볼까봐 조마조마 했지. 김회장이 태형이한테 딱히 아무말이 없는걸 보면 다행히 김회장한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음. 그래도 이렇게 꽃을 보내오면 어떡해! 회사에 소문 다 나게! 아니, 그걸 노린건가? 문자로 따져볼까 했는데 문자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냅두는 중이었음. 나중에 아버지 보여주는 식으로 만나게 됐을 때 보내지 말라고 꼭 말하리라 다짐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태형이었음. 차라리 협박을 하면 정국이한테 말하기도 쉬워서 악으로 깡으로 사랑의 도피를 하든 뭐라도 할텐데 이렇게 꽃만 보내오니 더 머리가 아파왔음.





"정국아."


[업무중에 왜 폰을 하고 그래요, 김상무님.]


"보고싶다."


[사무실이야?]


"응."


[지금 갈게.]


"응. 기다릴게."





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헥헥거리고 달려온 정국이를 보고 태형이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았음. 난 사랑하는 사람이랑 제대로 사랑조차 못할 운명이구나. 돈같은거 권력같은거 필요없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랑 사랑을 나누고 싶고, 자유롭게 살고싶은게 전부인데 이 간단한 것 조차 못하는구나. 울먹이는 태형이 앞으로 달려온 정국이는 태형이 얼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살펴보기 시작함.





"무슨 일이야. 응?"


"정국아.. 보고싶었어."


"연락도 잘 안되더니 무슨 일 있었구나."


"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인데."


"....."


"말해줘, 응? 괜찮아."


"사랑해 정국아. 난 너 밖에 없어."


"나도 사랑해 김태형."








-








아직 누구랑 이을지 안정했는데.. 뭐, 쓰다보면 결정 되겠죠..?


그나저나 윤기랑 정국이랑 언젠가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만나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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