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눈과 입꼬리는 서로에게 있어서 간절할만큼 절박했다.


버스 창 밖으로 하룻밤 사이 익숙해진 바다가 보였다. 코랄 빛 스케치북을 배경으로, 자신의 옆자리엔 다니엘이 있었다. 익숙할 듯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무거운 기분에 성우는 자신의 옆자리에서 잠들어있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배경 속 너와 올라가는 서툰 감정의 시간들이었다.

 

 

 

 

인간연고 04

냥연

 

 

 

 

어젯밤 머문 여관은 예상한 수준보다 깨끗했다. 다소 헤져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깔끔한 편이었다. 늦으면서도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에 여관엔 저와 다니엘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명백히 여관이라 하긴 뭐하지만 호텔이라 하긴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는 곳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바닥에 길게 뻗은 레드카펫이 멋있어 보이라 깔아놓은 듯 했지만 그 속의 촌스러운 티마저 감추진 못한 듯 싶었다.

성수기가 아닌지라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바다 코앞의 위치한 숙소인만큼 학생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비용이었다. 더군다나 성우와 다니엘에겐 예상치 못한 숙박이었기에 체감적으로 평소보다 더한 가격일수밖에 없었다. 카운터 여직원에게 가격을 들은 성우는 다니엘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다니엘 우리 역시 그냥 다른데 가는게 더 좋-”

“여 사장님 좀 불러주이소.”

 

다니엘은 걸쭉하게 여관 주인을 부르더니 이내 로비 뒤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처음부터 이 곳 말고 다른 숙박집으로 가자던 성우였지만 확신에 차있는 다니엘의 눈빛에 뭔가 확실한 구석이라도 있는 것 같아 결국 이곳으로 발을 들인 것이었다. 로비에 홀로 남겨진 성우가 양옆으로 전시된 아기자기한 장식구들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왔어요?”

“네?”

 

부산에 내려와 하루 동안 거의 듣지 못했던 서울말이었다. 데스크에서 컴퓨터를 보던 젊은 여직원이 성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편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덕분에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 성우에게까지 화학품 냄새가 풍겨오는 듯 했다.

 

“서울이요.”

“아-”

 

여직원은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자신의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성우도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눈앞에서 고양이로 된 유리인형이 영롱하게 빛났다.

 

“저 쪽은, 친구?”

“네?”

 

성우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여직원이 턱으로 다니엘이 들어간 방을 가리켰다. 두 번이나 이어지는 자신의 반문에 성우는 머쓱해져 목을 긁었다.

 

“..네 뭐.”

 

무슨 의도로 물은진 모르겠으나 여직원은 입술을 삐죽 내민채 고개를 다시금 끄덕여왔다. 턱을 괸 채 컴퓨터를 하는 모습이 노란 조명과 더불어 따분해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성우까지 졸음이 몰려오는 듯 했다.

친구? 성우는 여직원의 질문을 침묵과 함께 곱씹어보았다. 다니엘과 저의 사이는 무엇이라 정의하기 어려웠다. 폭풍같이 지나쳐온 며칠 동안 그런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있지 않았다. 단지 다니엘이 있는 순간들은 항시 성우의 마음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였다.

 성우가 천천히 몸을 돌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바다를 보았다. 흐릿하게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새카만 풍경과 함께 보이는 타지의 밤중 풍경이 이질적이다.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성우는 문득 건물 안에 있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정 속에서 규칙대로 돌아가던 삶에 들이닥친 다니엘이었다. 원체 자신의 틀이 깨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우였지만 다니엘은 달랐다.

 

“성우야.”

 

가령, 뒤에서 저 낮은 목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내려앉는 것이, 뭐라 형용하기 뭐했다. 글쎄 이게 뭔지 모르겠으면서도,

 

“사장님이, 울 이모랑 통화해가 기냥 자랜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사로운 것들을 해결하는 너를 보면 복잡해지던 마음마저도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런 점들이 첫 만남 때에 저의 속을 잔뜩 끓였으면서도, 그 점 하나가 성우가 다니엘을 바라봐올때 편안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받아들이면 이리 편해졌을 것을.

 

“가자.”

 

자신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아오는 다니엘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확실한건 다니엘은 저와 다르게 규칙 속의 유동성을 갖출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노란조명이 보였다. 눈이 시렵다.

삶이 규칙적이고 틀에 박혀있다 한들, 마음마저 늘 한결같을 법은 없다. 일탈의 욕구가 없을지라도, 무엇인가를 지켜야한다는 강박감. 성우는 그 틀이 지켜지길 바래왔다. 마법같이 등장한 다니엘이 있기 전까진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의 틀을 조금씩 바꾸어주는 법을 알았다. 산산히 부셔버리는 법만을 알던 성우에게 다니엘은 손잡고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줄줄 알았다. 성우는 그래서 괜찮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다니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니엘이 옆에 있으면 그깟 고정된 일상 따위 조금 바뀌어도 괜찮았다. 다니엘이 옆에 있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꽤나 오래 묵혀진 듯 보이는 먼지가 날렸다. 호텔과 같은 쾌적한 향은 나지 않았지만 오래된 침대의 포근한 향이 느껴졌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성우는 눈앞으로 보이는 침대와 부엌을 눈으로 훑었다. 


"..."

"..."


다니엘과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니 먼저 씻을래?”

“아니, 너 먼저 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다니엘이었다. 성우의 대답에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곤 화장실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아 화장실 너머로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귓가로는 다니엘이 샤워하는 소리가 어렴풋 들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 몇 점만이 살색 모래사장을 비추었다. 분명 몇 분전까지만 해도 저곳에 걸터앉아있던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다.

성우가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사진이 잘나오는 각도도, 끝내주는 조명이 있는 풍경도 아니었지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3초 채 되지 않았다. 창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사진에 담겼다.

 

살면서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가 있다. 목표한 점수를 받았을 때 뇌 끝까지 찌릿해져오는 짜릿함, 난처해진 상황 속 진퇴양난의 순간들. 또는 화려한 목련꽃 사이로 보이는 풍경, 그리고 그 속의 저를 내려다보는 다니엘도..

 

“성우야 내 샤워가운 좀 갖다도.”

 

성우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가운을 찾았다. 문 사이로 팔과 얼굴만 내민 다니엘에게 샤워가운을 들고 허둥지둥 다가간다. 슬핏 보이는 다니엘의 맨살과 함께 화장실에서 풍겨 나오는 열기가 성우의 얼굴을 갑작스레 덮쳤다.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다니엘에게 가운을 건내는 성우의 얼굴이 무겁게 화끈거렸다. 

달칵. 다니엘이 고맙다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성우가 그제서야 볼에 손을 올려본다. 불에 데인 듯이 뜨겁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낯선 감정들. 지금의 지나가는 순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닷가에서 손을 잡을 때와는 또 다른, 저를 뒤흔드는 이 감정에 성우는 화장실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 이 객실로 들어서고 나서, 둘을 뒤로 문이 닫히고 생긴 잠깐의 정적에도 성우는 생소한 감정에 휘청거려야했다.

침대, 외박. 손잡는 것보다, 뭔가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도무지 뭐라해야할지.

 

“니 해라.”

 

머리를 털며 나오는 다니엘로부터 풍기는 향이 붉었다. 성우는 재빠르게 자신의 짐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섰다. 다니엘이 남겨놓은 온기가 온 몸을 덮쳤다. 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회오리였다.

다니엘은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는 성우를 눈에 담는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성우는 또다시 개운치 못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가운을 입고자 하니, 갑작스레 결정된 타지에서의 하룻밤인 만큼 옷가지들을 챙겨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갈 때야 어쩔 수 없이 오늘 입었던 옷들을 전부 입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속옷이었다. 내일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오늘밤마저 이미 벗었던 속옷의 찝찝함을 애써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음...”

 

성우는 한손에 들려있는 속옷과 한손에 들려있는 샤워가운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다니엘한테 물어봐야하나 성우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찰박, 찰박. 성우가 발을 작게 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옷을 굳이 오늘 다시 입고 싶진 않았다. 문제는,

 

“성우야.”

“어어!”

 

화장실 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저 인간때문이었다. 아니 뭐, 다니엘이랑 같은 남자인데 가운만 입어도 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불려진 저의 이름 때문에 성우는 오른 손에서 속옷을 놓치고 말았다. 샤워가운마저 놓칠뻔한 것을 간신히 잡고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괜히 찔리는 기분에 성우는 주저앉아 두 손을 들고 소리 없는 좌절을 해야했다.

성우는 바닥에 적셔진 속옷을 들어 수건걸이에 잘 걸쳐두었다. 그냥 나가려다 성우는 이내 속옷 위에 수건을 덧올리고선 화장실을 나왔다. 괜히 알지 못할 부끄러움, 그런게 있었다. 다니엘에겐.

 

“와 그리 놀라노.”


성우가 나오길 기다렸는지 화장실 문을 열자 벽에 기댄 채 휴대폰을 하는 다니엘이 있었다. 성우는 모든게 다 들킨 기분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괜시리 가운 사이로 입지 않은 속옷이 보일까, 성우는 샤워 가운을 더욱 동여맸다.


“..아니.. 아니야. 왜 불렀어?”

“내 라면 끼리는데. 니도 하나 묵을래?”

“응”

 

횟집에서의 식사가 소화되고 나서 출출한 참이었다. 다니엘은 원체가 식성이 좋아 돌아다니면서도 이것저것 항상 군것질을 하는 편이었고, 성우는 조금씩 자주 밥을 먹는 편이었다. 그러니 둘은 의도치 않게 지금처럼 동시에 배고플 때가 자주 있었다.

라면을 끓이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흘긋 보곤 성우가 침대에 던져져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터리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아 배터리가 얼마 없었다. 

보글보글, 성우를 뒤로 라면스프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덜 익은 라면이 탁상 위로 올라왔다. 빨간 국물이 군침이 돌아 성우가 재빨리 수저를 들자, 앞 접시를 가져온 다니엘도 뒤따라 수저를 들었다.

그러고 나선 먹는 동안 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샤워를 끝낸 지 얼마 안 된 성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물조물 앞에서 햄스터마냥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하나 더 끓였어야 했나 싶었다. 하얀 수건 가운을 걸친 채 볼을 잔뜩 불려오는 성우를 보자니 다니엘의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다행스럽게도 성우의 배는 빨리 차는 편이었다.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하던 성우는 물을 한잔 거하게 마시고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으어- 정체모를 신음이 성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 배부르다. 다니엘 너 진짜 라면 잘 끓인다.”

“맛있었음 다행이고.”

 

성우는 자신이 앉은 의자위로 두 다리를 쭈그려 올렸다. 의자 등받이가 밀리면서 나무판자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벌게진 성우가 마지막 한 젓갈을 가져가는 다니엘을 바라본다. 허둥지둥 배 채우기에 급급했던 저와 다르게 다니엘은 차분하고 꾸준히 먹고 있었다.

 

문득, 다니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우에게 이런 마음이 들었더랬다.

 

“오늘은,”

“...”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충동성,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진심이 스며든.

성우의 말에 다니엘이 먹던 면발을 입에 문채로 성우를 올려다 보았다. 성우가 피식 웃었다. 가벼운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다니엘에게 전해주고픈 수많은 감정속에서 오늘의 핵심은 저 한마디로 충분했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했다. 성우는 다부지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다니엘이 먼저 몸소 보여준 덕분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있지, 다니엘.”

 

이제 단지 한마디일 뿐인데, 성우의 마음속에서 송골송골 물기어린 마음이 맺히기 시작한다. 다니엘이 성우의 내리깐 두 눈을 응시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속눈썹이 깜빡깜빡 움직인다. 뒤로 보이는 새카만 하늘 앞에, 새카만 우주 같은 눈동자가 국물밖에 남지 않은 냄비를 내려다본다. 

성우의 조곤조곤한 말이 주변 공기를 감싸 안았다. 다니엘은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 성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엄마가 16살 때 돌아가셨어.”

 

성우가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횟집에서와 같은 풍경이 빈 냄비를 사이에 두고 되감아진다. 이제는 한결 편안한 듯 성우는 의자 등받이에 팔로 턱을 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다니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 편안한 다니엘의 표정에 성우는 다시금 스며들어갔다. 배가 부르니 몸이 노곤노곤거리며 졸리기 시작했다. 

성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이었다.

 

“아빠도, 외국에서 일하셔서, 집에는 가끔 들어오셔. 우리 엄마도 다니엘 아버님 같아서, 음, 아빠를 정말 많이 챙기셨어.

아빠가 국제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고 전화하지 말라해도, 한결같이 매일 밤 하시고, 아빠가 가끔 집이라도 들어오는 날은, 조금 서럽지만 내 생일상보다 더 크게 상을 차리시곤 하셨어.”

 

무엇인가 요점은 있지 않았다. 횟집에서 다니엘이 성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때부터 그랬다. 지금의 다니엘과 성우에게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있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는 서로에게 진심으로서 서툴렀고, 줏대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마저 소중한 순간들일 뿐이었다.

눈을뜨자 다니엘의 입꼬리가 다시금 살며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다니엘이 공감을 해줄 때 나오는 일종의 신호였다. 성우는 다니엘의 그 슬픈 입꼬리가 좋았다. 복잡했던 마음마저 그 입꼬리를 보고 있자면 다시금 정상궤도를 찾는다.

 

“그런 엄마는, 하늘을 좋아하셨어.”

 

그리고 성우의 목소리를 듣던 다니엘이 젖어오는 목소리에 성우의 눈을 찾는다. 저의 앞에서 심하게 요동치는 검은 눈동자에 다니엘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우의 입꼬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방심한 사이 찾아온 갑작스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목련 꽃도 참 좋아하셨어.”

 

말을 마친 성우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다니엘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다니엘의 큼직한 손이 가녀린 성우의 어깨에 얹혔다. 침묵이 가라앉는 밤, 성우의 크지 않은 흐느낌이 커다란 손으로 곧이 곧대로 전달된다. 다니엘은 차분히 성우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내 안다.”


토닥, 토닥.


“...뭘.”

“성우 니가, 창 밖을 자주 보는 이유,”

“...”

“하늘 때문인거, 목련 때문인거, 내 안다.”

 

그니까, 말 안해도 된다 성우야. 다니엘의 낮은 목소리가 성우의 귓가를 가득 채워온다. 

눈 앞이 아득하고, 정신이 까마득해진다. 다니엘의 품으로 가득 찬 시야가 어두워 그대로 잠들고 싶은 충동이 잔뜩이었다. 이 품이 없기 전 울다가 지쳐서, 아니 울음을 참다가 지쳐서 그냥 잠들었을 때 다시 깨어있던 순간들의 외로움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창밖을 보는 순간에도, 엄마의 기억이 떠올라 애써 무시했던 목련꽃 주변에도 다니엘은 항상 있었다. 축구를 하면서, 또는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다니엘이 알지 모르겠다. 아프기만 한 추억의 매개체들을 누군가가 상충되는 감정으로 만들어줄 때, 그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거 같은 것. 가슴이 아프기만 하던 모든 것들이,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워지게 바꿔주는 사람. 너가 그렇다는 것을.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할 수도 있는 이 분위기 속에 한줄기의 위로만으로도, 많은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성우는 다니엘이 알기 바랬다.


성우의 눈이 까무룩 감겼다. 바디워시와 섞인 다니엘의 체향이 샤워가운 너머로부터 숨길 수 없이 흘러나온다. 그 향에 마음이 가라앉듯, 성우의 눈이 감겼다 뜨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등을 쓰다듬는 다니엘의 손길이 부드러워서 본능적으로 성우가 머리를 비벼왔다. 다니엘의 가슴 언저리에 성우의 까슬까슬한 머리칼이 닿았다.

그러니 그때는, 다니엘의 손길에 심장이 떨릴 순간조차 여유치 않았다. 여린 손길이 여린 마음을 토닥일 때의 전달되는 위로만으로 마음이 가득차기엔 충분했다.

 

다니엘이 저를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등뒤로 푹신한 것이 닿는다. 눈이 껌뻑 껌뻑거리며 흐릿하게 보이는 다니엘의 얼굴을 찾는다. 성우는 그제서야 자신이 침대에 누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 위로 올라오는 이불이 기분 좋게 저를 안았다. 

성우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정말로..”

“..자라 성우야.”

“..오늘은 니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정말로.. 정말로..

 

성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쳤다. 다니엘은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자는 성우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져 그림자진 성우의 얼굴이 고왔다. 지나치게 긴 하루다.











 

 


따사롭다 못해 뜨거운 햇빛이 창문을 가득 채워온다. 익숙치 않은 배게 냄새와, 익숙치 않은 천장에 성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 앞에 보이는 객실 티비에 성우는 그제서야 자신이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했다. 고개를 돌리자 다니엘이 작은 쇼파에 몸을 구겨 자고 있었다.

가격을 지불하지 않아서 남는 방으로 받았기에 침대가 하나있는 방이었지만 둘이서 자기에도 좁지 않은 침대였다. 성우는 다니엘이 왜 굳이 쇼파에서 잠이 들었는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 다니엘의 위로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뒤척이는 다니엘에 성우는 혹여나 다니엘이 깰까 조심스럽게 덮인 이불을 정리해주었다. 이마 위로 차분히 내려앉은 다니엘의 머리카락이 내려앉는 이불로 인해 휘날린다.

 

“아..!”

 

성우가 불현 듯 조용한 감탄사와 함께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수건대에 얹혀진 수건을 걷어내자 어제 자신이 걸어놓았던 속옷이 보였다. 성우는 화장실 문을 소리나지 않게 닫은 후 재빨리 속옷을 입었다. 보송보송까진 아니어도 어제 바닥에 떨어뜨리고 난 후 물로 한번 씻고 말려진 상태여서 그런지 제법 입을만했다.

거울을 본 성우가 자신의 부어진 두 눈을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야식으로 라면은 다 좋은데 이렇게 눈이 붓는다. 찬물로 세수를 해보지만 별 차이점은 없었다. 익숙치 않은 모양의 거울 속 성우가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씨ㅂ, 깜짝이야.”

“니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성우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선 자신의 앞에서 컵 두잔을 들고 서있는 다니엘을 보고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기척도 없었는데. 성우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선 다니엘을 쏘아보았다. 성우의 반응이 재밌는지 다니엘은 큭큭 웃었다.

 

“나는 뭐 사람 아니냐. 그건 뭔데.”

“커피. 이건 니꺼.”


다니엘이 왼손에 든 컵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성우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다니엘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하늘 위를 걷는 듯 개운하고 좋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온도였다. 일 년에 한차례 있는 태풍이 지나간 뒤, 하늘은 가장 맑은 법이었다. 성우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맑은 기분에 약한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이렇게 괜찮아도 되는걸까. 그래도 굳이 맑은 기분에 먹칠을 하는 생각을 하고싶진 않았다. 다니엘과 함께 있으면 모든게 그런 법이었다.

성우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의 햇살을 만끽한다. 하늘이 탁할 정도로 파랗다. 성우가 입에 컵을 가져다댔다.

 

“아씨.. 달아.”

“뭐라고? 뭐씨?”


성우는 애써 다니엘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며 뻔뻔하게 물었다.


“이거 믹스커피야?”

 

혼자 속삭이는걸 또 어떻게 들었는지. 성우가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몸을 돌리자 다니엘은 벽에 기댄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 믹스커핀데. 다니엘의 무덤덤하면서도 퉁명스런 대답에 성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다니엘, 몸뚱아리만 건장하고 이거 순전,

 

“존나 애 입맛.”

“...옹성우 주디 관리 안하제?”


에베베, 내 맘이다.


“이거 먹고 잠은 깨냐?”

“안깨가 내는 껌 한사발 먹는댔잖아.”

 

성우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텐션이 잔뜩 높아보이는 성우의 모습은 또다른 의미로 새롭다.

성우는 자신의 손에 든 미지근해진 커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걸 안먹을수도 없고, 다니엘이 타준건데. 그리 고민하다 이내 한입에 다 털어넣는다. 라떼 조차도 잘 먹지 않는 성우였지만, 다니엘이 준거니까, 달면 좀 어떤가 싶었다.


다니엘은 분위기를 조절할 줄 알았다. 우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법을, 어수선한 상황에서 진지해지는 법을 알았다. 단연, 다니엘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다니엘이 의도한 분위기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게 다니엘이 주변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유가 아닐까 성우는 생각했다.

성우는 그런 다니엘에게 고개조차 들기 힘든 감사함을 느껴야 했다. 엄마의 기일이 있기 전이나 후나 언제나 우울함 속에서 허우적댔던 성우에게는 이런 시원한 마음이 익숙치 않았고 바래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쉬운거였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니엘의 옆에 있으면 성우는 줄곧 자신이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커보이던 다니엘도 지금처럼 젤리를 씹는다던가, 믹스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보다보면 잊고 있던 사실이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아, 다니엘도 결국은 19살이구나- 하고 말이다.

 

믹스커피가 와 아 입맛인데, 참나- 다니엘의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믹스커피였다. 다니엘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빈 컵을 싱크대에 올려두었다.

그래도 성우에게 무언갈 말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의 옆에서 가벼운 미소로 하늘을 보는 성우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성우가 창밖을 가벼운 표정으로 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란걸 다니엘은 잘 알고 있었다.

햇빛에 비춰지는 성우의 머리칼에 먼지가 가라앉는다. 문득 성우의 올라간 입꼬리가 저를 닮았다고 다니엘은 생각해본다.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성우는 불과 몇 시간전이 아득했다. 당장 오늘 아침에 마셨던 커피가 일주일은 된 듯 이질적이었다. 반나절을 주기로 다니엘은 성우의 감정의 방향을 자주 바꾸어댔다. 성우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믹스커피가 효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부모님들의 기일이 같았고, 둘은 우연히 만났다.'

그 간단히 정리되는 문장 속에 수백개의 감정이 오고갔다. 성우에겐 온통 생소하고 낯선 감정들이었다.


성우의 어깨에 다니엘의 머리가 닿았다. 갑작스런 충돌에 성우가 몸을 움츠렸다. 덜컹거리는 버스 탓에 자꾸만 코끝으로 다니엘의 샴푸향이 닿는다. 

성우가 조용히 손을 들어 다니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성우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갑작스런 운동을 시작한다. 가볍게 떨려오는 손에 성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당장 성우의 엄마 기일이 1년째 되던 순간만 되새겨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니엘은 슬픔의 늪에서 빠져 지내고 있어야 할 시기였다.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다니엘을 바라볼때면, 다니엘은 입꼬리를 올려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다니엘이 자신의 감정에 대처하는 방법이자, 성우를 바라보는 방법이었다.

 

“아..”

 

다른건 몰라도 이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성우는 감이 오지 않았다. 손을 잡자고 먼저 말했던 어젯밤에도,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다니엘에게도, 도무지 이 감정을 손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많은 생소하고 낯선 감정들을 느끼며 거쳐지나가는 감정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감정은 자기 자리를 떡하니 지키고 성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불가항력적이다.

 

“미쳤네...”

 

다니엘, 네 말이 맞는거 같아.

물러서기엔 너무 늦은 감정인거, 맞네.

 

성우의 고개가 떨궈졌다. 자신을 두드린 다니엘에게 문을 열은 순간부터, 이미 두 톱니바퀴의 회전은 시작된 샘이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기엔, 무언가의 ‘선 ’을 지나친지 오래였다. 그 '선' 에 대해 성우가 생각해본다.

 두 눈을 꼭 감은 성우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스쳤다.

 

-저쪽은 친구?

-네? ...네 뭐.

 

자신의 멍청함에 성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성우의 허벅지 위로 다니엘의 손이 얹혀왔다. 잡아달라는 소리다. 성우가 심호흡을 하고선 손을 마주잡았다. 마음이 더 크게 진동한다. 매 순간 순간들이, 스쳐가는 잠깐의 시간들조차 새로운 단계였다.

 

왜 몰랐을까. 네가 손을 내밀고 내가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그런 ‘선’ 은 존재할리 없다는걸.  

어젯밤의 모습들이 마음을 스쳐지나간다. 바닷가에서 마주잡은 두손같이 직접적인 순간들부터, 화장실 문 너머로 보이던 너의 어깨와 문이 닫히고 나서의 가슴떨리는 침묵, 속옷을 들고 고군분투하던 자신의 작은 순간들까지. 

고작 너와 내가 부산에서 느꼈던 감정만으로도, 친구를 설명하기엔 너무 벅찼다.

마주잡은 두손을 쳐다본다. 성우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성우의 손가락이 다니엘의 투박한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장애물이 앞에 있더라도,

다니엘이 저의 손을 잡고 자신이 다니엘이 손을 잡는 시간동안, 속도를 늦추고 싶지 않았다.

 

 


너의 손은 늦춰진 세상 속 가장 빠른 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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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행  18.04.15 / 01:15 Am

재발행 18.07.04 / 10: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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