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버스 주요 용어>

에스퍼: 원소계, 육체계, 지능계 등등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다양하고 특이한 이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 이능력을 사용하면 작든 크든 반작용이 나타나기에 반드시 가이딩이 필요하다. 가이딩을 소홀히하면 이능력 제어에 실패하고 폭주하며 피아구분 없이 해를 입히며 자멸한다. 등급이 높을수록 폭주 시 피해 규모도 크다. 등급은 S~F급 순이며 등급이 높을수록 인원이 적다.

가이드: 에스퍼의 정신적인 지주로 에스퍼를 가이딩(이능력 사용으로 불안정해진 이능력 에너지 파동을 잠재우는 일) 하며, 스킨십 정도에 따라 진정되는 속도가 달라진다. 에스퍼와 동일하게 S~F급으로 등급이 나뉜다.  

힐러: 가이드가 에스퍼의 멘탈 에너지를 담당한다면 힐러는 에스퍼의 외상을 치유한다. 센터 소속으로 다친 이들도 치료한다.

각성: 에스퍼든 가이드든 주로 8살~14살 사이에 각성한다. 갑작스럽게 전신에 열이 나며 최소 1일~최대 10일을 앓는다. 앓는 기간이 길수록 강한 등급으로 각성한다.

센터: 에스퍼와 가이드가 소속되어 그들을 관리하는 회사. 대한민국은 현재 총 50개의 센터가 있다.

매칭: 에스퍼와 가이드의 가이딩에 필요한 매칭률은 둘의 파장의 퍼센트로 이뤄진다. 매칭 기준은 45%센트이기에 일반적으로 비슷하거나 같은 급끼리 매칭되며, 현재 최고의 매칭률은 77%이다.

각인: 각인한 상대에게서만 가이딩 받을 수 있고 줄 수 있다. 각인한 가이드가 사망 시 높은 확률로 에스퍼가 폭주한다.

※ "연속 재생"으로 배경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쌍둥이 동생은 한 손에 꼽히는 S급 에스퍼였다. 우리는 폭설이 쏟아지던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날한시에 태어나 보육원에 버려졌다. 똑같은 성별, 똑같은 외모,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취향. 그래서 생각했다. 언젠가 죽을 때에도 우리는 한날한시일 거라고.

열 살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화염계 이능력을 각성한 그 녀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국가공인센터 소속의 최연소 S급 에스퍼가 되었고, 짧은 훈련을 받은 후 곧장 던전에 뛰어들어 몬스터들을 퇴치하며 시민들을 지켰다.

언제부터 발생했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던전과 그 속에서 뛰쳐나와 사람들을 살육하고 건물을 부수는 사악한 몬스터, 그리고 그들을 퇴치하는 에스퍼.

동생과 달리 나는 각성하지 못한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생사를 넘나드는 동생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센터에서 거주하며 훈련을 받기에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짧은 만남 속에서 좋은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만 했다.

어렸던 난 알지 못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즐겁게 웃는 녀석이 어떤 고통을 참고 있었는지를.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률이 5%를 넘지 못하는 극악의 매칭률로 인해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기에, 수년 동안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이능력을 제어하던 게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말이다.

결국, 녀석은 폭주하고 말았다. S급 에스퍼의 폭주는 대한민국의 끔찍한 대재앙이었다. 행정구역 하나를 허허벌판으로 만들며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를 주고서야 폭주를 멈췄다. 아니, 소멸했다.

몬스터로부터 시민을 구하던 S급 어린 영웅은, 몬스터를 능가하는 최종 빌런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열네 번째 생일이었다.

아아…… 나는 왜 가이드가 아니었을까. 나는 왜 각성하지 못했을까. 

오직 후회와 죄책감뿐이었다. 

내가 가이드였다면 너를 가이딩해주었을 텐데. 어째서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너 혼자 이런 일을 겪게 했던 걸까. 왜 너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반쪽인데.

그 녀석이 남긴 잔인한 상흔과도 같은 폐허에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때 나도 너를 따라갈 것을…….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하나 남았던 가족을 모두 잃고 외톨이가 된 나를 불쌍히 여겼던 걸까? 녀석이 내 곁을 떠난 날, 나는 고열과 함께 각성하게 되었다. B급 가이드로.








B급 가이드는 사랑을 한다 上

 written by 휴위





평화로웠던 일상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 모를 던전과 그곳에서 튀어나온 압도적인 힘을 지닌 기괴한 몬스터들로 인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인류가 멸망하는 건가 싶어 절망에 빠진 때에 이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인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이능력을 사용하여 몬스터들을 토벌하며 던전을 탐색하였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에스퍼’라 불렀다.

하지만 에스퍼의 이능력은 양날의 칼이었다. 이능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반작용으로 인해 폭주할 위험이 있었으며, 폭주한 에스퍼는 몬스터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는 두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하는데, 폭주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에스퍼의 체내에 있는 이능력 파동을 잠재우는 것이었으며, 다양한 신체접촉을 통해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사람들을 ‘가이드’라 불렀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전역에 총 50개의 센터를 세워 에스퍼와 가이드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던전이 자주 나타나고 몬스터도 B급 이상이 출현하여 ‘헬(Hell)급’이라 부르는 ‘제6센터’는 320명의 에스퍼와 55명의 가이드가 있지만, 각인된 인원을 제외하면 에스퍼는 300명, 가이드는 35명에 불과했다. 즉, 35명이 300명의 에스퍼를 가이딩해야 하는 매우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젠장.’

이제 곧 퇴직을 앞둔 방 팀장과 나란히 서서 가이드 부서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호석의 입안에선 이미 육두문자가 자동으로 나오고 있었다. 

까만 정장 바지와 까만 와이셔츠, 그와 대비되는 하얀 가운. 야리야리한 체격에 센터 유니폼이 금욕적인 매력을 풍기게 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같은 유니폼을 입어도 배가 불룩 튀어나온 방 팀장과는 천양지차였다.

올해 계란 한 판을 꽉 채운 서른 살이 된 호석은 센터 현황을 알려주는 방 팀장의 말에 ‘그렇군요~’라며 무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등 뒤로 가지런히 숨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센터에 비해 가이드 인원이 터무니없이 적기에, 평균의 배나 되는 8~9명의 에스퍼를 매일 가이딩해야 한다는 현실에 아찔해졌다. 에스퍼들은 예외가 없다 싶을 정도로 싸움닭 기질이 강했다. 호전적인 성격 탓에, 자신의 이능력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어하는 이상 성격으로 인해 한번 출동하면 풀파워를 사용하고 돌아와서 가이드들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높은 등급의 가이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나 B급 이하로는 에스퍼 한 명당 가이딩 시간이 최소 30분에서 최대 2시간 정도였다. 특히 제6센터는 던전과 몬스터 웨이브가 잦았기에 헬급이라 불렸으며, 그 악명에 맞게 에스퍼들도 제멋대로 미쳐 날뛰었다.

평균을 웃도는 힘든 가이딩으로 인해 퇴사하거나 휴직하는 가이드들이 타 센터보다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근무 중인 가이드들은 타 센터보다 2.5배 높은 연봉이라는 최대의 어드밴티지 때문에 버티고 있었다.

“우리 센터 악명은 익히 들어서 잘 알 거고……. 천국이라 일컫는 7센터에서 온 게 아니라 참 다행이야. 전에 뭣 모르고 호기롭게 지원한 7센터 출신 신입은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가더군, 허허허허. 요즘 젊은이들은 참 약해빠졌어. 근성도 없고, 조금만 힘들면 못 하겠다고 징징거리며 도망가버리니 말이야. 나 때는 말이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악착같이 버텼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그렇게 깨지고 구르면서 단단해지는데 그걸 몰라.”

호석은 헬급 바로 아래의 연옥급인 제4센터에서 근무하다가 상사와 트러블을 크게 겪었고, 이 때문에 이번 인사이동 시즌에 유일하게 제6센터로 좌천당한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평소라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웃어른을 존경하며 맞장구를 쳤겠으나, 좌천당하는 바람에 영 기분이 좋지 않은 호석에겐 그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닥쳐!’를 외치며 주먹을 날려 저 입을 틀어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 팀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참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정 대리는 4센터에서 7년이나 근무했다지? 이야~ 그 인내! 근성!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 그 정도면 우리 센터에서 살아남기 충분할 테지. 암, 암. 내가 퇴직하면 정 대리가 내 뒤를 이어 7팀 팀장이 될 수 있으니 힘내라고.”

팀장 맡는다고 보너스 주는 것도 아닌데 귀찮게 됐다며 속으로 혀를 차고는, 방 팀장 몰래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쓰는 호석이었다.

“우리 7팀은 정 대리까지 3명인데, 그중 정 대리가 연차가 제일 높아. 7팀은 전부 B급이고, 인턴 1명과 2년 차 주임 1명인데, 4센터의 7년 차 베테랑이 와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를 거야. 허허허허. 앞으로 잘 부탁하네! 차기 팀장!”

‘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유쾌한 방 팀장의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에 호응하는 호석의 눈동자에는 영혼이 1도 없었다.

“자, 도착. 여기가 정 대리가 근무할 공간. 가이드 부서일세.”

“!”

파티션으로 구역을 분리했으나 55명의 인원을 수용하느라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화 상태의 사무실 광경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서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겨우 붙잡은 호석이었다.

헬급이라는 명성이 초라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열악해 보였다. 모두 지친 표정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자리엔 하나같이 카페인 음료가 가득했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저 모습이 곧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의 제 모습이었다.

방 팀장은 호석을 데리고 다른 팀을 지나 창가 쪽 구석에 있는 7팀 자리로 갔다.

“7팀 주목~! 이번에 제4센터에서 온 차기 팀장 정호석 대리를 소개하지.”

가이딩을 끝낸 직후인지 하나같이 지친 모습으로 자리에 뻗어있던 두 팀원은, 방 팀장의 말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곤 눈을 반짝이며 입을 틀어막고 울먹거렸다.

“크흡! 드디어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대리님!”

“보고 싶었어요! 우리의 구세주!”

“아, 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환영하며 격렬하게 반겨주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부담을 느끼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으나, 이내 그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팀은 얼굴 보고 뽑았는가 싶은 정도로 하나같이 외모가 아이돌급으로 수려했기 때문이었다.

가운 가슴께에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달고 있었기에 그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하자 방 팀장이 나서서 차례차례 소개해주었다.

“여긴 우리 센터의 아이돌인 핸섬한 김석진 주임, 여기는 7팀의 마스코트인 귀요미 박지민 인턴일세.”

“반갑습니다. 정호석입니다.”

방 팀장은 팀원들에게 인사시켜주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 끝냈다며 조퇴했다. 곧 퇴직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근무 태도가 아주 그냥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늘 그랬듯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공기 같은 방 팀장이 사라지자, 세 사람은 친목 도모를 위해 가이딩 매칭 콜이 들어오기까지 짧게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저희가 진짜 얼마나 대리님을 기다렸는지 모르실 거예요.”

“맞아요! 그 악명높은 4센터에서 7년이나 근무하셨다면서요? 존경스러워요! 진짜 너무 의지 돼요!”

‘난 부담된다.’

이렇게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신을 의지하는 댕댕이들을 보니, 산전수전 다 겪어 속세에 찌든 제 모습에 급 피곤해지는 호석이었다.

지민은 이제 대학에 입학한 21살이었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휴학하고 인턴으로 근무 중이었다. 석진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하여 파릇파릇한 26살이었다.

“아니, 근데 어쩌다가 여기 오신 거예요? 저희는 오셔서 너무 좋은데, 대리님은 힘드시지 않으세요? 연차가 쌓이면 다들 편하고 쉬운 센터로 간다고 하던데. 수도권에선 주로 7센터나 3센터로 많이 가시잖아요. 4에서 6이라니. 이건 마치 미친 듯이 던전에서 경험치 쌓아서 최종 보스를 무찌르러 온 느낌이랄까요.”

석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순진한 어린양들은 아직 자신이 좌천되었다는 건 모르는 듯싶었다. 그러나 딱히 숨길 일도 아니고, 언젠가는 알려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호석은 쿨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손에 든 따뜻한 라벤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면서.

“에스퍼 부장님을 피떡이 되도록 줘패버리는 바람에 좌천돼서 왔어요.”

“네에에에!?”

여기 와서 처음으로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하는 호석의 말에 두 사람은 믿기지 않아 눈이 커지며 소리 질렀다.

“진짜예여?”

“정말로?”

모든 센터는 가이드들을 관리하는 가이드 부서의 가이드 부장과 에스퍼들을 관리하는 에스퍼 부서의 에스퍼 부장이 있다. 그들은 상호 불가침 영역이었기에, 가이딩하는 일 외에는 절대로 서로의 부서와 영역에 터치하지 않았다. 가끔 선을 넘는 미친놈들이 한두 명이 있었지만 그건 넘어가자.

“망할 에스퍼 부장 쉑, 아니 부장님이 어린 에스퍼들에게 던전 토벌을 명령했어요. 베테랑은 차치하고 어른 에스퍼 한 명 없이. 그것 때문에 에스퍼들이 폭주할 뻔하고, 가이드들도 개고생하고 빡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7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이 많이 든 아이들이었거든요. 뭔 토벌을 이딴 식으로 하느냐며 빡쳐서 부장실로 찾아가서 적절하게 욕도 섞어가며 실컷 패버렸더니 이곳으로 보내더라고요.(웃음)”

“아아, 그, 그랬군요…….”

“아, 하하, 우리 정 대리님 의외로 성격이 화끈하시네요…….”

석진과 지민은 땀을 삐질 흘리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여기까지가 직장 동료에게 밝힐 수 있는 표면적인 이유. 그리고 밝힐 수 없는 속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비밀 연애 중이던 망할 놈의 구남친 부장 새ㄲ가 권력가 집안의 귀한 따님과 결혼한다며 호석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거로도 모자라 호석을 눈앞에서 치워버릴 명분을 만들기 위해 그가 아끼는 어린 에스퍼들을 이용해 그 사달을 낸 것이었다.

겉은 까칠하나 사실 속은 누구보다 따뜻해서 정이 많은 츤데레 호석이 분노하며 찾아와 행패 부릴 것을 예상하고서. 보기 좋게 그의 계략에 휘말려 피떡을 만든 후 좌천 통보를 받고서야 깨닫고 말았다.

‘망할 개자식.’

찻잔을 든 호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센터는 한 곳에서 4년을 채우면 어디로든 당연 이동이었지만, 헬급과 연옥급인 제6센터와 제4센터의 가이드들은 높은 강도의 노동으로 인해 1년을 채우면 타 센터로 이동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조건 희망 센터에 발령되었다.

호석은 첫 직장이 제4센터였고, 입사한 후 단 한 번도 이동하지 않았다. 7년 동안 붙박이인 가이드는 호석이 유일했으며, 전설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A급 부럽지 않은 제4센터의 베테랑 B급 가이드. 그게 바로 정호석이었다.

A급은 아니지만, A급에 준하는 실력과 모든 에스퍼와 평균치의 매칭률을 자랑하는 특이점 성향의 호석을 향해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담아 물었다. 대체 7년 동안 어떻게 버텼느냐고. 그럴 때마다 호석은 웃음으로 넘겼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하나의 대답뿐이었다. 나를 버티게 한 것은 모두 ‘사랑의 힘’이었다고.

정말로 사랑의 힘은 위대했고, 호석을 전설로 만들었다. 그만큼 빌어먹을 똥차를 사랑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함께 있고 싶었기에 무려 7년을 버텼다. 그런데 그는 제게 역대급 빅 엿을 날리고 그거로도 모자라 헬급이라 불리는 이 지옥에 처박았다.

그렇기에 현재 호석은 소진 상태였다. 전문 용어로는 번 아웃. 조만간 휴직을 신청할 예정이었다. 복수는 꿈도 꾸지 않는다. 가이딩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에 복수에 쏟을 시덥잖은 에너지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휴직계를 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일이 너무 바쁘고 실연의 아픔으로 술에 찌들어 사느라 휴직 신청 기간을 놓치고 말았으니 누구를 탓하랴.

퇴사할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하여 일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걱정할 건 없었다. 하반기에 또 휴직 신청 기간이 있기에 그때 놓치지 않고 휴직 신청하면 되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자 싶었다.

삐릭!

“어! 대리님, 매칭 떴네요!”

때맞춰 손목에 찬 워치에 가이딩 매칭 콜이 울리자 지민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제6센터에서의 첫 임무였다.

호석은 워치와 연동된 태블릿 PC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매칭된 에스퍼의 이름과 증명사진, 이능력 종류, 등급, 가이딩실 호수가 떴다.

“누구예요?”

“A급 김남준이요.”

“후우, 다행이다.”

“?”

김남준이라는 이름 석 자에 두 사람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호석이었다.

“대리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왜 에스퍼들이 좀 싸가지 없는 경향이 있잖아요. 자기 능력 믿고 지 잘난 맛에 가이드를 좀 함부로 보고 대하는 면도 있고.”

석진의 말에 호석은 저도 잘 안다며, 그 발언에 매우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에스퍼들은 좀 그런 경향이 심했다. 그러나 호석에게 걸리면 다들 순한 양이 되었다.

“여기 에스퍼들도 그런데, 유일하게 예외로 젠틀한 에스퍼가 김남준이에요.”

그 말을 듣고 다시 사진을 보니 인상이 참 선해 보였다. 살짝 미소 짓느라 보조개가 팬 호감형 얼굴이었다.

“잘생겼네요.”

내 타입은 아니지만. 첫 감상이 무심결에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쵸!? 진짜 잘생겼죠!?”

호석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고 석진이 흥분하며 외쳤다. 그 반응에 호석이 움찔했고, 석진은 아차 싶어 헛기침을 큼큼, 하며 얌전해졌다.

“일단 가보겠습니다. 갔다 와서 또 얘기 나눠요.”

“네~ 다녀오세요~ 대리님~”

손까지 흔들어주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일하러 가는 엄마를 배웅하는 귀여운 댕댕이들 같다고 생각한 호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이드 부서를 벗어난 호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석진은 급하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맞다. 대리님께 제일 중요한 거 말씀 안 드렸네.”

“……6센터 공식 ‘광견’ 말이죠?”

지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음…… 근데 만날 일 없지 않을까요? 유일한 S급이라 가이딩도 A급으로 이뤄진 1~6팀에서 돌아가면서 하니까. B급인 우리랑 어지간해선 마주칠 일 없죠.”

“그렇죠? 맞아요, 천만다행이네. 우리 귀한 정 대리님 모쪼록 S급 피해서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여기네.’

가이딩실은 가이드 부서 아래층에 있었다. 호석은 309호실 앞에 섰다. 실에는 아무도 없는지 재실 알림 램프가 꺼져 있었다. 노크 없이 들어가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비어 있었다.

2평 정도의 가이딩실은 밝은 분위기였다. 인테리어는 낮은 탁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보는 2인용 카우치 소파 두 개와 뒤편에 놓인 싱글 사이즈 침대뿐이었다. 가이딩은 보통 소파에서 손을 잡고 이뤄지지만, 상황이 심각하거나 상호 동의 시에는 침대에서 격한 스킨십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호석은 생각할 것 없이 소파에 앉아 에스퍼를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고 에스퍼가 들어왔다. 정장 형태인 가이드 유니폼과 달리 에스퍼들의 유니폼은 활동성을 위해 군복에 가까운 검은색 복장이었다. 특히 항공 점퍼에는 센터 로고가 수 놓여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모델 뺨칠 정도로 키가 크고 역삼각형 체형에 건실한 체격이었다.

“어? 처음 보는 가이드님이네요? 안녕하세요.”

남준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검은 군홧발로 뚜벅뚜벅 소파를 향해 걸어오며 낯선 얼굴의 호석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번에 발령받은 정호석입니다.”

호석도 덩달아 일어나서 인사했다.

“와, 발령이라니. 자원하신 거예요, 아님 좌천되신 거예요?”

“…….”

예의 바르다며. 첫 만남에 이런 식의 질문을 한다고? 호석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이래서 에스퍼들이 싸가지란 소리 듣지. 호석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손 내미세요.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네.”

남준은 악의 없다는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호석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아도 남준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가이딩을 위해 손을 요청하자 남준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고, 호석은 눈을 감고 남준의 에너지 파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이능력은 정신계라고 했다.

‘많이도 사용했네.’

눈을 감으니 그의 현재 에너지 상태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신계는 뇌와 관련 있기에 뇌 쪽에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에너지를 세심하게 손수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가이딩이 시작되자 맞닿은 손에서 호석의 내면에 깃든 초록빛의 에너지가 남준의 손을 거쳐 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뇌를 향해 나아갔다.

“오…….”

호석의 에너지가 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남준은 의외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지며 감탄했다. 무척이나 청량한 녹음의 숲에서 피톤치드 샤워를 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와. 가이드님, S급이에요?”

“집중해야 하니 조용히 하세요.”

“넵.”

호석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남준은 그런 호석을 보며 씩 웃고는 자신도 눈을 감았다. 온전히 저만을 위한 이 상큼한 포레스트 가이딩에 취하며.

눈을 감고 가이딩을 받던 남준이 기우뚱하더니 소파에 풀썩 쓰러졌고, 호석은 그 상태로 손을 맞닿은 채 가이딩을 마쳤다.

“김남준 에스퍼님, 끝났습니다. 일어나세요.”

자신도 모르게 숙면한 남준이 호석이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고, 그 순간, 감탄에 찬 얼굴로 호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가이드님 뭐예요? 너무 좋은데? 우리 센터는 S급 없는데, 혹시 S급이에요? 이제까지 받은 가이딩 중에 제일 좋았어요. A급보다 좋다니 이런 경우가 있나? 진짜 상쾌하네요. 와…….”

남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제 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호석은 칼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앗! 가이드님 잠시만요!”

호석은 남준의 외침을 외면하며 재빨리 가이딩실을 떠났다. 그날을 기점으로 제4센터를 평정했던 B급 가이드 호석의 역사가 제6센터에서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망할. 과연 헬급 센터.’

시도 때도 없이 매칭을 요청하는 지명 콜이 호석의 태블릿 PC에 가득 찼다. 알림 소리가 거슬려서 워치를 끄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는 호석이었다.

김남준뿐이 아니었다. 호석의 가이딩을 맛본 에스퍼들은 어느새 호석의 단골이 되었고, 그들이 내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긴 에스퍼들도 호석에게 지명 콜을 넣기 시작했다.

원래 가이딩 매칭은 매칭률을 토대로 시스템이 랜덤으로 해주었지만, 에스퍼들의 요청에 의한 매칭도 가능했다. 즉, 미각인 299명의 에스퍼들이 일제히 호석을 지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덕분에 호석의 태블릿 PC는 후끈하게 달아올랐고, 지명 콜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호석은 매일 최대치인 9명의 인원을 받으며 콜이 온 순서대로 대기를 타게 되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299명의 에스퍼에게 지명받는 유일한 B급 가이드. 제4센터뿐 아니라 제6센터에서도 전설을 하나씩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되자 호석은 유일하게 모든 에스퍼를 가이딩한 전설을 또 하나 쓰게 되었다.

‘아직도 4개월이나 남았잖아…… 빨리 와라, 휴직 신청 기간.’

정말 간절하게 원했다. 그동안 모아둔 적금으로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다 올 거라며 굳게 다짐하는 호석이었다. 딱히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었으나 그의 탁월한 능력은 그를 조용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역시 우리 대리님 멋져.”

“최고예요, 대리님. 너무 존경스러워요.”

오늘도 눈을 반짝이는 석진과 지민 댕댕이였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조용히 밥을 먹는 호석은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댕댕이들의 시선에 체할 것 같았다.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 대리님, 진짜 너무 대단하세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가이딩을 잘하세요?”

그냥 하면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간 극혐하는 눈빛으로 바뀌겠지?

“에스퍼들의 에너지를 느끼고 하나하나 잘 풀어나가면 됩니다.”

“…….”

“…….”

물론 정석으로 대답해도 그들의 눈빛은 극혐하는 눈빛이었다. 호석은 이 이상 더 할 말이 없었다. 호석에게는 이 말 그대로 하면 되는 거였지만, 아직 2년 차밖에 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말과 실전은 다르기에.

“역시 천재는 다른가 봐여…….”

“범재인 우리완 다르네…….”

“그래도 7팀에 계셔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대리님. 덕분에 저희 7팀 위상도 좀 올라가는 거 같아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요~! 게다가 두 달 만에 모든 에스퍼를 가이딩한 가이드는 대리님이 처음이에요.”

“……모두는 아니에요.”

“네?”

“수를 세봤는데 딱 한 명만 제게 신청하지 않더라고요.”

호석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으며 무심하게 말했고, 그 순간, 그 유일한 한 명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은 석진과 지민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고, 다행이라며 두 사람은 안도했다.

“S급.”

“!?”

뒤이어 나온 S급이라는 말에 밥을 먹던 두 사람은 흠칫하며 행동이 굳었다. 정말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존재가 호석의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국에 딱 세 명뿐이라는 S급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요. S급이라 그런가, 매칭률 높은 전담팀이 있나 보죠?”

“어, 음…….”

석진과 지민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눈치를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광ㄱㅕ, 아니 그는 주로 1~6팀에서 돌아가면서 가이딩해요.”

“흠. 하긴, 비슷한 등급이면 매칭률도 높다고 하니까. 여기 S급은 가이딩이 잘 되는 거 같아 다행이네요.”

호석은 극악의 매칭률로 인해 제대로 된 가이딩을 못 받고 폭주해버린 동생을 떠올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허무하게 잃어버린 동생 때문에, 호석은 늘 가이딩에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싸가지 없고 미쳐 날뛰는 망둥어들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생긴 그들이 폭주해서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진심으로,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나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며 그들의 파동을 안정시켜주었다. 정성을 가득 담았기 때문일까, 에스퍼들은 호석의 가이딩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7년 동안 수도 없이 폭주를 막았다.

모든 에스퍼와 그럭저럭 매칭률이 좋고, 가이딩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지만, 그렇기에 호석은 침울해지곤 했다. 진즉에 각성했다면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녀석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삐릭! 삐릭! 삐릭!

상념에 빠져있던 호석은 주변에서 식사 중이던 모든 가이드의 워치에서 일제히 울리는 매칭 알람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뭐, 뭐예요? 갑자기?”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지라 어리둥절한 석진과 지민이었다. 호석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모든 가이드의 워치가 울리는 ‘올 콜(all call)’ 현상. 이러한 상황은 제4센터에서도 딱 한 번 겪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최악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몬스터 웨이브예요!”

최소한 A급 이상의 던전이 나타나고, 그 던전 속에서 A급 이상의 몬스터가 물밀듯이 세상으로 튀어나오는 급박한 위험 현상. 그로 인해 에스퍼들이 이능력을 과하게 사용하여 폭주 직전이라는 것.

“다들 가이딩실로 가세요!”

어림잡아 200명은 넘어 보였다.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호출하다니.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대규모의 인원을 동시 수용하기엔 가이딩실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때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나왔다.

“현재 중심지에 S급 던전이 발생했습니다. 가이딩실이 배정된 가이드들은 신속히 해당 가이딩실로 이동해주시고, 그 외 가이드들은 지금 즉시 현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금? 현장이라고!?”

“S급이라니!”

밥 맛있게 먹다가 이게 웬 날벼락이야? 믿기지 않는 안내에 당황하는 석진이었다.

사람들은 신속하게 안내 방송에 따랐다. 재빠르게 가이딩실로 이동하는 가이드를 제외하고 가이딩실을 배정받지 못한 가이드들의 워치에 좌표가 나타나더니 개인마다 머리 위로 빛기둥이 나타났고, 찬란한 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맙소사…….’

던전이 나타난 현장으로 전송된 가이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벌벌 떨다가 구토하기 일쑤였다.

평지였을 법한 번화가가, 망가져 폐허가 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기괴한 모습을 한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들로 쌓인 산으로 변했다. 몬스터들은 에스퍼들에 의해 조각나거나 터져 죽었으며, 그로 인해 피비린내와 살점, 내장이 흘렀고, 화염계 능력에 죽은 몬스터들은 불타며 다양한 냄새가 섞여 후각을 역하게 자극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광경에 석진과 지민은 속이 울렁거렸다. 곧장 고개를 돌려 조금 전에 먹은 점심을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얼마나 험하고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쌓이고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에스퍼들이 이능력을 영혼까지 끌어올려 갈아 넣었다는 것도. 다들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검은 눈동자들은 하나같이 금색으로 변하여 지금 당장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가이드들은 상황의 심각함을 모르고 이 끔찍한 주변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이러한 몬스터 웨이브는 수도권 센터 중에선 유일하게 제4센터에서만 일어났으니까. 폭주라고 해도 현장에서 폭주를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제4센터가 연옥급이 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할지라도 A급 몬스터 웨이브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다들 정신 차려! 죽고 싶어!? 이 많은 에스퍼들 폭주하면 전부 죽는다고! 빨리 매칭된 에스퍼들을 찾아가!”

호석은 뱃속에서 모든 힘을 끌어모아 우렁차게 외치며 석진과 지민을 비롯해 여타 가이드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가이드들은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려 했다.

하나둘씩 각인한 자신의 에스퍼들을 찾아, 매칭된 에스퍼들을 찾아 그들을 가이딩하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매칭된 에스퍼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워치가 매칭된 에스퍼들의 위치를 알려주었으니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손잡기로도 충분했던 가이딩이 키스를 통한 점막 접촉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각인 상대와는 더욱 격한 스킨십이 이어졌다.

호석도 제게 매칭된 에스퍼를 가이딩하며 그의 정신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한 마리의 짐승이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절규처럼 들리기도 했다.

‘뭐야? 가이딩 못 받고 있는 거야? 담당 가이드 어디 갔어?’

지금쯤이면 다들 제 에스퍼를 찾아갔을 거고, 가이딩을 받고 있다면 절대로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이 비명은 뭐야? 호석은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집중해서 가이딩하다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서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호석은 제 시야를 가득 채우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무려 여섯 명의 가이드가 빙 에워싸고 있는 남자 에스퍼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섯 명의 가이딩이 필요한 저 에스퍼가 바로 S급이라는 것을.

은발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S급 에스퍼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미 눈동자는 금빛이었고, 폭주의 전조 증상처럼 전신에 검은 불꽃이 화륵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염계 에스퍼였다. 지금 당장 가이딩하지 않으면 정말 폭주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정작 가이드들은 에스퍼에게 손도 못 대고 멍청하게 벌벌 떨고 있었다.

“씨발! 지금 뭐 하는 거야!”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A급이라는 것들이 폭주 전조 증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에스퍼에게 가이딩은커녕 손도 대지 못하는 꼴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장할 것처럼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인상이 험악하리만치 구겨진 호석은 어느 정도 파동을 진정시킨 매칭 에스퍼의 손을 놓고는, 곧장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향해 미친 듯이 전력 질주했다.

―형!

고통스러워서 절규하며 불에 타오르는 그 모습이, 어쩜 그렇게도 그를 닮았는지 알 수 없었다. 똑같은 화염계 이능력이라서 그런 걸까?

‘괜찮아, 울지 마. 지금 갈 테니까. 조금만 견뎌줘.’

어느새 저 이름 모를 S급 에스퍼와 동생의 모습이 겹쳤다.

‘안 돼. 폭주하지 마. 제발…… 제발!’

“으아아아아악!”

마지막 절규를 끝으로 검은 불꽃이 S급 에스퍼의 전신을 휘감아 하늘 높이 치솟을 때였다. 겨우 그에게 도착한 호석이 싱그러운 초록빛의 에너지를 담은 다정한 양손을 뻗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두 손이 뜨거운 불꽃을 통과하며 윤기의 볼을 감쌌다.

“크악!”

불에 닿은 순간 손끝부터 화상을 입고 옷이 타들어 갔다. 통각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당장 놓고 이 자리를 떠나라고 명령했지만, 호석은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사람이 느끼는 아픔 중 가장 아픈 게 불에 타는 아픔이었지만, 호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집중해서 가이딩했다.

‘착하지…… 돌아와…….’

호석은 눈을 감고 윤기의 에너지를 읽었다. 전신에 꽈리를 틀고 윤기의 정신과 몸을 좀 먹고 있는 거대하고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 뱀의 금빛 세로 눈과 마주친 순간, 날카로운 독니에 공격당해 전신이 마비되는 것처럼 아릿해졌다.

S급의 가이딩은 처음이었고, 에스퍼의 내면의 파장에 역으로 공격당하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과연 가이딩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가 손을 놓는 순간, 그는 진짜로 폭주하며 이 땅의 재앙이 될 테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제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자던 하얀 고양이 같은 어린 에스퍼가.

기억이란 참 신기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뜬금없이 떠오르곤 하니 말이다. 

‘그래, 그 애도 막았어. 그러니까…… 당신도 막을 수 있어. 포기 안 해.’

호석은 자신의 에너지를 한계치까지 끄집어내어 상대의 몸에 집어넣었다. 손에 잡힌 에스퍼의 얼굴을 불꽃 바깥으로 끌어당기더니 품에 와락 안았다. 좀 더 넓은 면적으로 가이딩하기 위해서였다. 에스퍼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불꽃이라 그런지 화상을 입지 않았다.

‘다행이다…….’

호석은 전신에 느껴지는 뜨거운 불꽃을 끝까지 참으며 전심으로 에스퍼를 가이딩했다. 이제까지 했던 그 어떤 가이딩보다 더 정성을 다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그러자 절대로 밀리지 않을 것처럼 기를 쓰고 공격하던 검은 뱀이 어느 순간 초록빛 에너지에 집어삼켜지더니 단번에 소멸해버렸다. 동시에 검은 불꽃도 초록빛 에너지로 변하며 사그라들더니 마지막엔 초록빛 반딧불이 반짝이는 효과가 두 사람을 맴돌며 완전히 사라졌다.

‘아…… 해냈다…….’

폭주를 막았다. 안도감에 호석은 에스퍼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스르륵 지면으로 무너져내렸다.

“정 대리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으나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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