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온통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빠져나가지 않는 열 탓에 몸이 자꾸만 뜨거워져서. 훅 훅 내뱉는 숨도 부글부글 끓는 수증기마냥 더웠다. 아래가 자꾸 축축하게 젖고, 몸 안이 가려웠다. 어떻게든 해 주었으면. 누군가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줬으면. 그런 음탕한 생각이 온 뇌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뚝, 뚝. 주사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겨우겨우 고통을 참았다.

-케이지.

이름을 부른다. 흐릿하게 눈을 떴다. 위도 아래도, 모두 하얗기만 한 공간에 그가 서있었다. 따뜻하고 황홀한 금색.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색. 안타까움으로 물든 금빛이 천천히 자기에게 다가왔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이젠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그래도 몸은 알고 있다. 코타로 씨는, 이것보다 손이 따뜻했는데. 이렇게 미지근하지 않았는데. 아, 그렇구나.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지금 꿈을 꾸는 거구나.

-그렇게, 내가 싫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사랑해요. 정말 좋아해요. 대답하고 싶은데. 꿈에서라도, 말 하고 싶은데. 입에선 앓는 소리만 나왔다. 꿈속의 그가 애틋하게 웃으며 손을 몇 번 쓰다듬었다. 그는 저지 차림이었고, 얼굴은 평소보다 하얬다. 안 그래도 하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질렸어요. 그가 성큼 다가왔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다 살그머니 아카아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있어, 케이지.

안 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코타로 씨. 꿈속에서만이라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요? 코타로 씨. 왜 몸이 움직이질 않는지, 왜 입술은 열리지 않는지. 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지.

“….”

끙끙 앓다 눈을 떴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하니 멀어졌다 다시 또렷하게 돌아왔다. 보쿠토의 모습은 없다. 역시 꿈이었나보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삑, 삑, 삑.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들렸다. 간이의자엔 어머니가 계셨다. 다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다급하게 아카아시의 손을 붙잡았다. 아가, 괜찮니? 대답 할 힘이 없어 머리를 주억거리자 차갑게 식은 손이 아카아시의 이마와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다행이야. 지나가던 사람이 네가 학교에서 쓰러진걸 보고 119에 신고를 해 주셨대.

“…그런가요.”

확인사살이다. 아카아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핏, 부실에서 보쿠토의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쓰러지기 전에 본 환상이었나. 처음 터진 히트 사이클은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해야지 라던가 저렇게 해야지 같이, 평소에 생각 하고 있던 것들이나 마음먹고 있던 것들을 전혀 하지 못했다. 히트가 시작되면 보쿠토 씨에게 가서 안아달라고 해야지. 각인을 해서 우리 사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야지. 절대로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우성 오메가에게 발현한 늦은 히트는 육체와 정신 양 쪽 모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몸이 좀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보쿠토를 만나겠다고 부실까지 몸을 끌고 간 것 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론 기억이 없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을 때가 되서야 실낱같은 이성이 멀리서 소리쳤다. 바보야. 보쿠토에게 연락도 없이 여기 오면 어떡해. 그리고 그걸 깨닫고 나서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운동부 특성상, 이곳은 알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온통 흐리고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았다. 누군가 부실 문을 열었다. 새카만 그림자다. 아카아시는 눈을 흐리게 뜨며 제대로 보려 애썼다. 보쿠토 씨였으면 좋겠다. 코타로 씨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뒤덮을 만큼 지금 이 순간이 두렵고 무서웠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기절한 뒤였다. 팔뚝이 따끔거렸고 온통 흔들리는 시계(視界) 너머에 보이는 것은 흰 옷과 주황색 구조 복을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을 부르고 싶을 정도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은 없다.

뒤늦은 발현은 독감이라는 병으로 교체되었고, 아카아시는 내리 4일을 앓았다. 열이 내렸다 다시 오르고, 헛것을 보기 일쑤였다. 보쿠토는 이상하게도 제가 자고 있을 때만 왔다 갔다고 했다. 냉장고엔 특정 브랜드 사과주스 병이 늘어났다. 참 신기했다.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유리컵에 차가운 사과주스를 홀짝이며 아카아시는 내내 보쿠토를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만날 방법을 몰랐다. 병문안은 제가 깨어났을 때 와주세요, 목구멍까지 말들이 다닥다닥 붙었는데도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퇴원하고 학교에 돌아가니 보쿠토가 있었다. 익숙하게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 그리 묻는 그의 얼굴엔 조금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대답대신 끄덕거림으로 대신하며 부실에 들어갔다.

“보쿠토 씨.”
“응?”
“…저, 히트 사이클이었대요.”

단순한 독감이 아니었다는데. 알고, 계셨어요? 넥타이를 풀어 옷걸이에 걸고, 재킷도 단정하게 걸었다.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알고 싶다.

“그래? 그랬구나.”

그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놀라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았다. 이젠 괜찮아? 그가 다시 웃는다. 이상했다. 꼭, 감정 없는 인형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파츠를 끼운 것 처럼 묘한 얼굴이다. 아카아시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놀라길 바랐다. 왜 말 하지 않았냐거나 부르지 않았어? 같은 반응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몸을 하고 보쿠토네 반에 갈걸. 안아달라고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기라도 해 볼걸. 각인해달라고 엉엉 울기라도 볼걸. 왜 부실에 갔지. 왜 거기서 기다리면 보쿠토가 와서 안아줄 거라고 믿은 거지. 실수는 쓰고 실패는 참담했다. 연습하러 가자 아카아시! 방긋 웃으며 밖으로 나가려는 보쿠토의 손목을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왜 그래? 반질반질한 금색 눈이 의아함을 가득 담고 쳐다본다. 그 눈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저와 자신이 적어도 과거엔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마저, 모조리 표백된 것 처럼. 아무것도 없다.

“아무, 아무렇지도…않으세요?”

말이 나가버렸다. 아차. 아카아시가 놀라 황급히 손을 놓았다. 보쿠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얼음장 같았다. 저런 얼굴을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 했는데. 또, 마음을 다쳤다.

“뭐가?”
“…아닙니다.”

연습 하러 가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보쿠토가 아까처럼 방긋 웃었다. 그래! 연습해야지 연습!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따라 나갔다.

그 날 이후, 꼬박, 아카아시는 페로몬 억제제를 챙겨먹기 시작했다.




* * *




아카아시 케이지의 인생은 보쿠토 코타로를 만나기 전과 만나고 난 후로 나뉜다. 처음 어린 그와 손을 마주 잡았던 날 느꼈던 꽃과 풀내음. 어디선가 느껴지던 청량하고 싸한 향기. 지금은 이렇게 뒤틀렸지만 결혼을 하면 달라 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주장을 달고, 자신이 부주장을 달고 나간 전국 대회에서 후쿠로다니는 준우승을 했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그는 은퇴를 코앞에 두었다. 차기 주장은 누구로 할까? 하는 3학년들의 말에 모두들 아카아시 케이지를 추천했지만, 보쿠토 만큼은 아카아시를 추천하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춘고 돌아오기 전에 은퇴 할 거야. 그런 녀석에게 부를 맡길 수는 없지.

듣는 모두가 놀랄 만큼 냉정한 말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보쿠토가 없는 배구부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차기 주장은 오나가가 맡게 되었고 아카아시는 조금 더 일찍 부활동을 은퇴하기로 하였다.
둘의 사이가 삐걱대던 말든 진행되고 있는 정기 가족 모임에서, 보쿠토가 배구로 가장 유명한 K대학교 추천입학에 합격했고, 현재 대학 리그 선발전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T대 경제학부를 지원중이며 입학을 하고 나면 공부에 매진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들의 이야기인데 서로의 입이 아닌 부모님을 통해 듣는다. 아이러니했다. 보쿠토는 내내 아무런 표정이 없이 아카아시를 보았다. 그 눈을 보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추억도 많이 만들고 그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하는 결혼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 무수히도 애를 썼었다.
질투도 해 보고, 연락도 해 보고. 히트가 터지면 매달릴 준비도 하고.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소용없었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아카아시 케이지는 작아졌다. 사랑을 감싸 안고 쪼그라들었다. 버려진 백색왜성처럼 혼자 앓았다. 보쿠토에게 알아 달라 외쳤으나 너무 작았고 너무 멀었다. 첫 히트가 터지고 난 이후 보쿠토는 조금 더 매정해졌다. 늘 함께 했던 유일한 자유시간인 점심시간도 따로 갖기 시작했고 하교도 종종 따로 했다. 자율 연습 때 그에게 토스를 올려주는 것 빼곤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다. 정말, 그것 말곤 저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혼자 이불을 쓰고 울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매달 달력에 표시된 히트 기간이 돌아오면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 약을 버릴까. 약을 버리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 그의 방 침대에 누워 안아달라고 조를까. 그래볼까. 그러면 이 답답한 관계에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일까.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꽃다발을 건네러 갔다. 아카아시가 졸업할 때, 내가 도쿄에 없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고마워. 이렇게 꽃 주러 와줘서. 그는 여전히 덤덤했다. 표정관리 하나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중학생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숨기는데 도가 튼 고등학생이 되었다. 축하, 드려요.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꾸역꾸역 감정이 덕지덕지 붙은 채였다. 보쿠토의 표정에 잠시 안개가 낀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번만, 안아 봐도 돼?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만 다가와 조심스레 어깨와 등을 감싸 안았다. 어렴풋이 기억하던 보쿠토의 몸은 어린 아이였는데. 이렇게 탄탄하고 단단해져있다니. 감탄이 나올 것 같았다. 열심히 트레이닝 한 보람 있으시겠어요. 그리 농담이라도 건넬 생각이었는데. 늘 그랬듯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아니에요. 고생이라뇨. 제가 뭘 했다고요. 조용히 그의 등 뒤에 팔을 두르며 대답하자, 한숨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맞아.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안 했어. 잘못은 다 내가 했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 하자, 끌어안은 팔에 그가 조금 힘을 주며 말했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잠시면 되니까. 아주 잠깐만 이러고 있자 아카아시.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인지. 어째서 이리도 아프게 말 하는지. 물어 봤다면 사이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는 보쿠토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가 없는 1년은 한 톨도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빛이 없는데 주변 사물을 기억하라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다. 아카아시는 내내 공부를 했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방 안에서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공부만 했다. K대 캠퍼스 바로 옆이 T대 캠퍼스다. 그렇기 때문에 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대학마저 같은 곳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보쿠토가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탓이었다. 그러니 바로 옆 캠퍼스라도. 아무 의미 없는 위안이었지만 아카아시는 절박했다. 입학하자마자 팀 레귤러가 되었단 보쿠토는, 가족 정기모임 때가 아니면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 보다 훨씬 가중된 훈련 때문에 그러겠거니 싶었지만 머리가 알고 있는 걸 늘 마음은 알아주지 않는다. 머쓱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는 그는, 좀 더 키가 컸고, 더 늠름해졌고, 더 멋있어졌다.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어색해 코를 박고 밥만 먹었다.

아카아시는 잘 지내?

요즘 바빠서 연락도 잘 못 해서 미안해. 가족들이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너희 연락도 잘 안하고 지냈니? 아카아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보쿠토가 먼저 와하하 쾌활하게 웃었다. 대학 리그가 생각보다 바쁘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하지만 내내 공부중이잖아요. 건들이기 좀 그래서…. 대학생만 되면 둘이서 손잡고 놀러 다닐 겁니다. 아카아시는 어떤 대답도 없이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이다. 저건.
지옥 같던 1년이 지나고 당당히 T대학 수석입학을 했다. 내심 보쿠토가 전처럼 꽃을 들고 졸업식에 찾아와주길 바랐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중요한 경기와 날짜가 겹쳤다나. 대신 보쿠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신 축하를 전했다. 케이지, 축하한다. 이제 성인이구나. 보이지도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인사를 대신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축하를 건넸지만, 아카아시의 마음엔 겨울 북풍이 몰아쳤다. 지금은 분명 4월인데 말이다. 우울한 얼굴로 저녁식사도 마다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연락을 기다렸지만 보쿠토는 전화 한 통, 하다못해 메시지 하나 넣어주지 않았다. 우울함에 짓눌린다는 건 이런 감각일까. 무어라 말하기 힘든 탈력과 무기력함에 누워 있었는데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보쿠토 도련님이 왔다 가셨는데요.”
“…네?”

왔다 갔다니? 내 얼굴도 안 보고?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열자 도우미가 품 안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졸업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지방에서 부랴부랴 올라왔는데, 결국 졸업식은 놓쳐버렸대요. 이 꽃만이라도 부탁한다 하셨는데…. 어머, 도련님?

“….”
“도련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시오리 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는 품 안에 꽃을 끌어안고 조용히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오늘 제가 운거, 아버지 어머니에겐 비밀로 해 주세요. 알겠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쉬시란 말을 덧붙이곤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갔다.

“…바보.”

아카아시는 벽에 꽃다발을 하나 더 걸었다. 결국 이 아름다움도 언젠간 바라고, 벽에 붙은 오래된 것들처럼 바스스 말라비틀어지겠지만 그래도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정기 모임이 돌아왔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아카아시가 먹고 싶은 걸 먹자는 부모님의 말씀에, 스시가 먹고 싶다 말씀 드렸더니 모임장소를 긴자의 어느 고급 스시 집으로 잡아오셨다. 보쿠토네 아버지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이라고 했던가. 조용히 앉아 젓가락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장지문 옆이 트여있어 넓게 펼쳐진 정원이 보였다. 인공연못엔 시시오도시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보쿠토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전보다 조금 탄 것 같다. 피부가 하얀 편이었는데 약간 가무잡잡하다.

“케이지, T대 수석 입학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직 술은 못 마시지? 아카아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안타깝게 됐다며 껄껄 웃었다. 의회탓에 조금 늦게 오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모두 모였다. 올해는 광어가 좋다는 구나. 보쿠토네 어머니가 소담히 웃으셨다.

“얘들아.”

보쿠토 아버지의 목소리에 아카아시와 보쿠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케이지도 이제 곧 성년이니까, 슬슬 너희 날을 잡는 게 좋지 않겠니? 마침 코타로 이 녀석 대학 리그도 9월에나 시즌이 다시 시작한다니까. 내 생각엔 케이지만 좋다면 5월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구나. 어르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

드디어 때가 온 건가. 아카아시는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부모님과도 얘기가 끝난 다음이었다. 신혼여행 같은 거 짧아도 좋다. 아니, 그가 싫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 몸 눕힐 만한 적당한 집만 있으면 된다. 어서 그와 함께 살고 싶다. 그리고 제대로 각인을 받고 아이를 만들고 싶었다. 1년 내내 수험과 씨름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빨리 가정을 만들어, 아이를 만들자. 아이가 있으면 그도 자신을 쉽게 벗어나지 못 할 테니까.

“저….”
“어른들 다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래도 결혼은 저희 둘의 일이니까, 저희가 날짜를 좀 상의해 봐도 될까요?”

너무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둘이 따로 차라도 마시면서 얘길 하겠습니다. 빨리 결론 지어 올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그 후에 씨익 웃는 얼굴은 평소 같았다. 너른 상 위에 접시가 하나 둘 올라왔다. 분명 아까까지 배가 고팠던 것 같은데 식욕이 완전히 사라졌다. 버릇이 되어 버렸다. 기분이 나쁘거나 신경 쓰이면 식사를 넘기지 못하는 거. 먹으면 체하거나 바로 토할지도 몰라 젓가락으로 초생강만 집어먹고 있었더니, 접시 위에 스시 하나가 올라온다.

“안 먹어?”
“…속이, 조금 안 좋아서요….”
“…먹고 싶다고 했다며.”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게요. 목소리는 평온을 가장했으면서 손을 떨었다.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정말로, 날짜를 맞춰 보려고 그러는 거겠지. 눈앞이 노랗게 흐려졌다. 먹을 수 없다. 안되겠어.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자 어머니가 걱정이 된 듯, 케이지? 작게 제 이름을 불렀다. 너 얼굴이 하얗다. 아가, 왜 그러니? 아까 전체로 먹은 두부가 체했나봐요. 대충 둘러댔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보쿠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 앞에 약국 있는 거 봤어요. 약 사오겠습니다.”

넘치는 다정함이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등을 보았다. 따뜻한 사람. 다정한 사람. 언제나 자기 멋대로 하는 것 같으면서, 사람을 상처 입히진 않는 신기한 사람. 그 탓에 조금은 자기를 억누를 줄도 아는 사람. 보쿠토는 그런 사람이다. 오랫동안 봐 와서 알고 있다. 그는 약하고 아픈 사람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정의감? 아니, 그런 종류는 아냐. 그렇다면? 동정. 그래, 동정에 더 가깝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헐레벌떡 방으로 돌아왔다. 약국 이름이 새겨진 희고 작은 봉투 안엔 다양한 약이 종류별로 들어 있다.

“체한데 먹는 약 다 달라고 했어.”

따줄까? 아카아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차피 심리적인 문제라서요. 먹든 안 먹든 여전할 텐데요. 하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사다주었단 사실 그 하나가, 너무 좋아서. 아카아시는 내내 약 봉투를 뒤적거렸다.

“그럼 둘이서 얘기 하다 돌아오렴.”

식사 자리가 끝나자 부모님들께선 따로 할 말이 있다며 자리를 옮겼다. 덩그러니 대문 앞에 서있던 아카아시의 어깨를 보쿠토가 톡톡 두드렸다. 커피나 뭐…그런 거 마실 수 있겠어? 아까도 하나도 안 먹었잖아. 빈속에 커피 먹으면 위 아파. 너 수험생활 하다가 속 다 버렸다며. 어머님이 아까 그러시더라. 괜찮아요. 애써 덤덤히 대답했지만 속이 다 썩어서 이젠 아프기까지 했다. 지나친 다정함은 독약보다 해롭다. 저 사람은, 그걸 알까. 모르니까 이러겠지.

“같이 걷는 거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예전엔 늘 이렇게 같이 걸었었는데. 아, 미안. 예전 얘기해서. 별로 안 좋아했었나. 조금 뒤에 떨어져서 걷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웃었다. 같이 걸었던 건 아주 옛날이었어요. 아마 다 잊어버리셨겠지만. 마음을 또, 한 움큼 삼킨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걸었었다. 그의 등을 보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얼굴 표정을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 옆에 있으면 손을 잡고 싶었고, 그의 눈을 보고 싶었고, 전처럼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할 것 같았다. 뭘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건 마음을 자꾸 삼킨 탓이다.

“…사과 주스, 마실래?”
“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가 건넨 말은 의외의 말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그걸. 아카아시의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그가 자리서 일어나 주문을 하러 갔다. 아메리카노 아이스 한잔이랑, 아 저 사과주스 병으로 주세요. 네, 얼음 컵 따로 주시고요. 낭랑한 그의 목소리가 음악보다 기분 좋다.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데. 울 수도 있는데. 보쿠토가 하면 뭐든 좋다. 중증이다. 사랑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아카아시, 사과주스 이것만 먹잖아.”
“….”
“…체하기도 했으니까…. 아플 땐 항상… 먹었고…. 아…, 체했을 땐 좀 그런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짧은 적막. 아카아시는 그가 내민 주스를 받아들었다. 주스 자체도 오랜만이었다. 그는 목이 탔는지 빨대도 없이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모르는 게 점점 늘어난다. 보쿠토가 이렇게 커피를 잘 마셨던가. 카페인이 잘 받는 사람이었던가.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낯선 모습이 생긴다. 한숨을 연달아 쉬던 보쿠토가, 굳은 얼굴로 아카아시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얼굴을 굳어 계실까. 달콤한 사과주스인데 쓸개즙처럼 쓰기만 했다.

“아카아시.”
“…네.”
“정말, 나랑 결혼 할 거야?”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처럼 어지럽고 혼미했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파혼 할 기회는 지금 뿐이야. 너도 알고 있지?

“아카아시는 똑똑하니까…. 잘, 결정 할 거라 믿어.”

무엇을? 도대체 무엇을? 대체 뭘 알고 있단 말인가. 도망가고 싶었다. 손이 떨렸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보쿠토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돌다 폭죽처럼 펑, 펑 터졌다. 주스 잔을 잡은 손이 하얗게 될 때 까지 아무 말도 못 했다. 고장 난 레코드처럼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저… 일어나도 될까요….”
“…응. 괜찮아.”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자신조차 없으신 거구나.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갈 기력조차 없는 거구나. 현기증이 느껴졌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연극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전부 꿈이었다면. 눈을 뜨면 중학생 때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고등학생 때라도 좋아. 처음 히트가 터졌던 그날로 돌아가서…. 그에게 각인을…. 아카아시가 비틀거리며 골목길로 들어가 벽을 짚고 서서 한참 숨을 토해냈다. 어지러워. 숨 막혀. 토할 거 같아.
보쿠토가 알고 있는 대로 ‘착하고 똑똑한’ 아카아시 케이지라면 보쿠토를 놓아주어야 함이 맞다. 알아. 원하는 것이 그거라는 건. 아카아시는 휴대폰을 들었다. 미안합니다. 저, 엄청 이기적이에요 보쿠토 씨. 모르고 계셨겠죠. 저 지금, 보쿠토 씨의 ‘다정한 마음’을 이용하려고 하거든요. 알아요. 이러면 안 되는 거. 하지만요. 머리가 안다고 해서 마음이 따라가진 않더라고요. 제가 싫을 거예요. 어쩌면 증오하게 될 지도 모르죠. 그래도 저는요. 저는.

“…쿠로오 씨, 저 좀…, 도와주세요….”

당신을 놓을 수가 없어요. 놓을 수 있었다면, 이 사랑도. 당신에 대한 마음도. 미래도. 전부 놓아 버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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