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보았던 복잡한 도시에 지친 두 사람은, 오늘은 자연 풍경을 구경하기로 자연스럽게 마음이 맞았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인다는 유명한 공원을 찾아 큰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있는 숲길을 걸었다. 주위에 자란 나무들은 하나같이 엄청나게 키가 컸다. 아까보다 하늘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도, 나무 그늘 사이에 가려 해가 잘 들지 않아 음산하고 살벌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주위를 둘러보던 수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와, 이런 데 직접 와 보니까... 그런 소설들이 왜 나온 지 알겠어요. 폭풍의 언덕,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금지된 마법의 숲, 미친 개가 쫓아오는 늪지대... 살벌하네 분위기."

   "그러게. 한국은 좀 평화로운 분위기인데. 기껏해야 다람쥐나 고라니가 안녕? 하면서 튀어나올 것 같은. 우리 눈에 하도 익어서 안 무서워 보이는 건가? 우리도 구미호나 범 나오는 설화는 있잖아요."

   구미호? 와, 여긴 늑대인간이 나와도 하나도 안 이상할 것 같다. 수해는 숲의 분위기에 어지간히 압도되었는 지 혼자서 상상을 마구 키워갔다. 정운은 이상한 곳에서 현실적인 구석이 있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되면서 산이 너무 관리가 잘 되었다고, 공원 안내 표지판과 발을 닫기 너무나 편한 나무계단이 구석구석 꼼꼼히 박혀 있는 산에서 구미호나 도깨비가 나오면 그림이 이상하지 않겠냐며 중얼거렸다. 범이 멸종된 건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원체 동네 뒷산에 멧돼지 이상의 위협적인 동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무서운 것들을 상상하기 힘든 것 같다고 했다. 산에서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지. 뭘 먹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산에서만 몇십 년 동안 박혀서 살아온 것 같은 사람. 무섭지 않아요?

   조금 앞서 걷던 수해가 정운을 돌아보더니, 정운의 팔을 살짝 쳤다. 아오, 이정운 진짜...

   정운은 일부러 더 엄살을 부려 몸을 비틀고 아픈 척을 하며 킬킬 웃었다.

   수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한국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여긴 나약한 인간 따위 오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곳이다. 늑대인간이나 초월적인 악령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외국 공포 영화들 보면 산이나 숲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던데."

   "맞아요. 와보니까 정말 무섭긴 하네."

   수해가 길에서 특이하게 생긴 솔방울 하나를 주워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내 그것을 던져버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수용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모아 머릿속에 분류 중인 수해를 몇걸음 뒤에서 따라가며, 정운은 생각했다. 수해는 정말 호기심이 많네.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도 좋아하고, 모험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역시 한 군데 정착하며 매일 같은 것만 보고 사는 삶은 지겹겠지.

   자주 나올 걸 그랬나... 멍하니 수해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데, 갑자기 수해가 뒤돌아 정운에게 다가온다.

   "정운 씨, 우리 재미있는 거 할래요."

   "...? 숨바꼭질 이런 얘기 하기만 해. 나 기절하는 수가 있어."

   "아니. 그런 거 말고. 무서워 나도 그런 건. 우리 추리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해볼래요?"

   "오, 재밌겠다. 그럼 수해 씨부터."

   "그래. 지금부터 시이- 작!"

   수해가 슬레이트를 치는 것처럼 짝 하고 박수를 쳤다.

   흠흠. 잠시 분위기를 잡으며 몰입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 앞서 걷던 수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이봐, 왓슨 박사. 자넨 강령술이라던가, 악령의 존재를 믿나?"

   "악령이라. 글쎄, 나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신뢰하는 편이라서."

   "하긴, 자네는 의학 공부를 했으니. 아무리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보지 않는 이상 믿기는 어렵겠군.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어허, 악마의 입으로 신성한 구절을 읊지 말게. 하여간, 강령술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뭔가."

   "오늘의 의뢰인 말일세.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된 채 저택에서 발견되었어. 그런데. 그 막내딸이 살아있을 때 강령술에 엄청나게 집착을 했다더군."

   "그래서, 그 아이가 악마에게 혼을 빼앗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글쎄. 악마든 사람이든, 누군가가 그 불쌍한 아이의 혼을 빼앗아 간 건 사실이지. 아까 자네를 만나기 전에, 그 저택에 가서 현장을 보고 온 참이야. 내 생전 그렇게 기괴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시체는 처음 보네. 차라리 악마가 그 짓을 했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지. 사지가 거꾸로 향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목은 반쯤 잘려져 있었네. 잘린 경동맥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하지만 온 사방이 피 칠갑을 한 건 아니었어. 누군가 그 피를 받아뒀단 뜻이네."

   "사람을 무슨 소나 돼지를 잡듯 잡았단 말인가."

   "그보다는, 제사 때 잡는 양을 도살하는 방식이 더 어울리더군. 그리고 사방에 그녀의 피를 사용한 듯한 진법들과 생소한 문자들이 그려져 있었어. 그중 몇 개를 공책에 베껴왔지. 아마 무언가를 소환하거나, 무언가를 위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어."

   "끔찍한 일이군. 대체 자기가 살던 집에서 자신을 그렇게 끔찍하게 살해할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단 말인가?"

   "살해 방식도, 살해 동기도 석연치 않아. 다만 그 집의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네. 살해당한 막내딸이 평소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혼자 이 숲으로 어떤 의식을 하러 오곤 했었다고 말이야."

   "반쯤 정신이 나갔다라. 환각 물질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어. 방에서는 특별히 느껴지는 이상한 냄새나 가루 같은 것은 없었네."

   "아직 열 일고여덟의 소녀라 해도, 이미 성인 여성만큼의 체구는 되었을 터. 사람을 천장에 거꾸로 매달고 목을 자를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몇 없을 것이네. 별다른 저항 없이 살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그 집안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군."

   "하하. 자네, 내 조수 역할을 하면서 많이 배웠군. 탐정을 해도 되겠어."

   "다 자네의 흉내를 내는 것이네."

   작게 웃은 수해가 정운에게 돌아서며 품에서 책을 꺼내 펼치는 척을 했다.

   "소녀의 시체 곁에서 이 책을 발견했네. '강령술 - 파이몬 숭배' 라고 쓰여있지. 대충 감이 오지 않는가."

   쓸데없이 연기를 정말 잘하네... 진짜 책이라도 펼치는 것 같잖아. 보이지도 않는 투명 책의 제목을 읽으려고 애쓰며 정운이 생각했다.

   "잘 모르겠는걸."

   "여기 책에서 악마 파이몬을 부르는 진법 그림과 주문을 찾았네. 그녀는 혼자, 혹은 동행인과 이 숲으로 와서 자주 의식을 진행했던 모양이야."

   "동행인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이 책에 쓰여있기로는, 파이몬은 자신의 재림을 지켜보는 한명의 순수한 영혼을 필요로 한다... 고 되어 있네. 진짜 오컬트 마니아라면, 정말 사소한 하나의 규칙까지도 철저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

   관종 아닌가. 정운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때마침 눈앞에 적당한 공터가 나오자, 수해는 걸음을 멈추어 섰다.

   "바로 이 곳이 그녀가 의식을 진행하곤 했던 공터이네. 나는 두 가지 추측을 세우고 있어. 이 곳에서 의식을 치른 그녀가 파이몬을 소환하는 데 성공해, 자신의 육체를 기어이 봉헌했다. 혹은, 그녀의 동행인이 그녀를 속여 빙의 당했다고 믿게 만든 다음, 그녀를 살해했다."

   "첫 번째 가설은 좀 믿기 힘들군."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시체는 확실한 증거이네. 그 증거를 만든 인과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 그래서 난 여기, 자네를 앞에 두고 직접 강령술을 해보려 하네."

   "...뭐?"

   수해가 신고 있던 운동화를 땅에 죽 끌며 원을 그렸다. 이쪽저쪽으로 오가며 그럴듯한 별 모양을 만들더니, 어디서 긴 막대기까지 주워 와 이상한 문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저기... 수해야? 당황한 정운이 수해에게 뭔가 말을 걸려는데, 수해의 눈이 묘한 광기에 물들어있다. 완전 몰입했네, 몰입했어. 정운은 한숨을 쉬고 다시 놀이로 돌아갔다.

   "이봐 홈즈, 만약 진짜 빙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림을 다 그린 수해가 원 한 가운데에 섰다. 정운을 등지고 선 수해가 고개를 돌려 정운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 의식을 지켜보는 순수한 영혼이 되어주게, 왓슨 박사. 그리고 진짜 파이몬이 내 몸에 들어오거든, 그레이스를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보게. 이 악마는 자신을 과시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것 같으니,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걸세. 자백을 받아내고 나면 그 단단한 지팡이로 나를 후드려 패던가 하게. 아파서 못 견디면 알아서 나가겠지."

   말도 안되는 소리... 정운은 수해가 그림을 그리고 집어던진 막대기를 다시 주워 왔다. 곧 수해가 투명 책을 펼쳐 드는 척 하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에 대충 라틴어 접미사와 접두사를 붙이니 진짜 그럴싸한 라틴어처럼 들린다. 조금 웃겨서 수해 몰래 킥킥 웃고 있는데, 갑자기 수해가 고개를 푹 떨궜다. 응? 뭐야? 아주 기가 막히게도, 때마침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는지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수해가 두 팔을 기괴한 각도로 번쩍 쳐들었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처럼 양쪽 손 끝이 허공에 고정되더니, 수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온 몸을 비틀었다.

   "수해 씨...?"

   조금 당황한 정운이 수해에게 몇 발자국 다가가자, 수해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로 음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히,히,히... 히.. 히,히...."

   "수해 씨... 왜 그래요..."

   수해의 웃음소리는 이제 소녀가 노래 부르는 것 같은 음산한 노랫소리로 바뀌었다. 랄라라... 라...

   순간, 수해가 정운을 향해 휙 몸을 돌렸다. 수해의 입꼬리가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크게 찢어져 웃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이제 진짜로 무서운데.

   "수해 씨?"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수해의 눈동자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수해에게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하하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와악 소리를 지르며 정운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악!!"

   너무 놀란 정운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넘어졌다. 수해의 양손이 정운의 어깨를 붙잡는가 싶더니, 자신을 내리 누르며 덩달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수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떠는 것이 보였다.

   "수해 씨, 수해 씨!"

   겁먹은 정운이 수해의 어깨를 다급하게 흔들었다. 곧이어 수해에게서 피식하고 겨우 웃음을 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풉... 크흑.... 큭큭..."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정운이 수해의 어깨를 팍 밀어냈다.

   "아, 권수해 진짜 미쳤냐고!"

   "으학, 으하하하하하하!"

   수해는 이제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거의 구르다시피 하며 웃고 있었다.

   "아, 너무 웃겨 진짜. 나 눈물 난 거 봐."

   "아, 쫌..."

   정말 얄밉게도, 수해의 눈가에 너무 웃어서 찔끔 눈물이 나와 있었다. 정운은 투덜대며 손으로 수해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 인나봐 쫌... 그만 웃고. 아직도 웃느라 몸을 못 가누는 수해를 겨우 일으켜 흙이 묻은 바지를 털어주었다.

   "나, 나. 진짜 빙의된 줄 알았어? 크하학."

   "그래, 씨발 눈 까뒤집고 지랄을 하는데 진짜 미친 건 줄 알았다."

   "으.. 으아아아! 하하하하."

   수해가 정운의 등짝을 마구 때리며 웃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쓸데없이 연기를 잘 해가지고.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웃느라 몸에 힘이 다 빠진 수해를 잡아끌며 겨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수해야, 너는 대체 왜 배우를 안 해? 데뷔를 해, 데뷔를. 얼굴 되지, 키도 크지, 연기 되지. 네가 배우를 안 하면 이건 국가적 손실이야.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십년은 퇴보하는 거라고."

   "아... 진짜. 배우 될 걸 그랬어, 그치..."

   힘없이 정운에게 질질 끌려가며 수해가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대꾸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정말 해가 질 것 같아, 정운이 수해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가자, 어두워졌다 벌써. 찜찜한 기분에 정운은 아까 수해가 진법을 그려놓은 공터를 자꾸만 흘긋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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