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암흑기사 잡퀘스트 스토리 일부가 간접적으로 노출됩니다. 잡퀘스트 중심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도 바라지 않으시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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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 으으.... "


 얇은 칸막이 너머로 들리는 앓는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일듯 노려보던 눈초리를 내리고 북받친 살기와 살의를 삼켰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한 스승의 밑에서 함께 배워온 선배, 시두르구다. 함께 지내게 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저 앓는 소리에 몇번이나 잠을 설쳤던가.


 한 번은 도저히 잠들수 없어 악몽에 몸부림치는 선배를 억지로 깨워본적이 있었다. 그러자 평소의 삐딱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흔들리는 초점으로 날 바라봤다. 깨우던 내 팔을 있는 힘껏 쥐어잡는 그 손과 거칠게 내몰던 숨은, 깨우던 사람을 확인하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바로 앞에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것이었다. 참 웃긴 사람이었다. 코앞의 사람이 살아있다 한들 이미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안심해 다시 잠들었다. 그날의 난 이렇게 애끓는 마음으로 칼을 갈았는데. 깨어난 정신에 죽일 이를 찾아 떠돌았는데.


 당신도 과거의 꿈을 꾸나보다. 오늘의 내가 그렇듯이 오롯이 나 혼자 살아남은 과거의 기억이자 악몽. 오랜 기간동안 구태여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지만 오늘만큼은 추억들이 참으로 생생했다. 어제는 또 다시 가족을 잃은 날이었으니까. 발걸음을 옮겨 방밖으로 빠져나왔다. 선배도 선배 나름의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른 새벽, 창 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



 이불 밖의 차가운 공기에 점차 익숙해져갈 무렵,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딱히 이른시간도 아니어서 느긋이 식사준비를 하였다. 잠자리에서 나오는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낡은 경첩이 끼익거리며 문이 열렸다. 잠들기 전과 다른 가벼운 차림을 못본체하고 평소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일어났습니까. "


" 그래, 방금 막 깼어. "



 그는 터덜터덜 걸어 식탁앞에 앉았다. 선배도 나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저 달각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 속에서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선배의 투덜거리는 소리나 그걸 다그치는 누군가의 소리나 그런것들이 오고갔으나 이날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관계도 사라질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런식으로 끝을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도 분명 그렇겠지?



" 끄으으윽... "


" ...그거 뜨거운 커피입니다. "


" 그걸 누가 모르냐?! "


" 방금전 까지는 모르는것 같았습니다만. "



 하여간 잠시 눈을 떼면 이렇게 된다. 뱉는 말투부터 행동 모두 삐딱하게 뻗쳤으면서 어딘가 맹한 틈이 있다. 나는 그것을 묘하게 바라보면서도 결국 당신의 그런 점을 챙기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스승을 모시게되고 함께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미성숙한 면을 보인다. 지킨다 말하며 정작 자신은 위태로워 보이는 당신. 죽이겠다 다짐하곤 주변을 살뜰히도 챙기고 있는 나. 굳이 지적해 고치고 싶진 않았다. 성격도 만남도 뭣도 맞지 않을 당신과 꽤나 기이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슬슬 이런 관계만으로는, 이런식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선배와 나의 중간을 확실히 묶어두던 끊이 풀어 헤졌으니까.


 인정하기도 싫게, 흉하게. 감히 상상조차하지 못하게 난잡하게 숨을 잃으셨으니까. 장갑 너머로 꺼끌한 탁자표면을 매만졌다. 억누르는 감정이 모나게 튀어나올것만 같다.



" 그럼 가자. "


"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


" 당연히 스승님쪽이지. 적어도 사체는 수습해야할거 아니야. "



 ...그렇지. 수긍하면서도 정신을 다 잡았다. 튀어나온 감정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안 된다. 수습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 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스승을 잃어 조급해하는 만큼 저쪽도 우리가 찾아갈 것을 예상하고 칼을 갈고 있을 텐데. 그대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그와 반대되는 선택을 바랐다. 순수한 감정 덩어리와 같은 녹색의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저 눈빛에 져서는 안 되는데. 일렁이는 감정에 잠길 것만 같다.



" 뭐야, 불만이 있으면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말을 하던가. 애초에 이 일이 그렇게 못마땅할 일이야? 정  그렇게 싫다면 혼자서라도 간다. "


" 위험할겁니다 선배. 그들이 스승님의 유해를 가만 둘것 같습니까?  이곳에 암흑기사가 혼자가 아니란 것즘은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


" 그 놈들 머리가 장식이 아닌 이상은 그렇겠지. 그런데 이대로 두고 보자고? 그 사람의 주검이 이 거리의 어딘가, 혹은 저 허허벌판 어딘가에 버려지는 꼴을? 그러고 두팔 두발 뻗은채 참 잘도 자겠다. "


" ...흐음. "



 아마 선배는 이 뒤로 며칠간 악몽에 시달리겠지. 그러면 얇은 칸막이 사이로 또 앓는 소리가 들려올테고. 이번 만큼은 나도 여유가 그리 넉넉치 않았다. 어렸을 적과 같은 알량한 관심과 동정심만으로 다가가기에는 다른 감정에 앞서 다가설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고 마냥 흘려들을 수도 없다.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선배는 늘 누군가를 잃어 힘이 없다는 사실에 후회하였고 나는 누군가를 잃어 깊은 분노에 쌓여 살의를 품었으니까. 그런 꿈에서 깨면, 울화 어린 감정이 꽉 들어 맞아 오히려 정신이 멀끔해졌다. 그렇게 깊은 감정속으로 나를 가라앉히면 서서히 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조용한 사방에서 선배의 앓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렇게 잠들수 없는 밤이 새벽이 되고, 동이 튼다. 그치지 않는 눈 때문에 해가 뜨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누군가 깨어나기까지의 긴긴 시간을 지새웠다.

 ...아, 그래. 그렇게 맞이했던 이른 아침에는 늘 스승님과 먼저 마주했지. 그렇게 선배가 깨어나기 전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에 대한 것, 당신에 대한 것, 암흑기사에 대한  것. 그냥 시시콜콜하고 차분한 일상의 이야기들.



" 그럼 함께하도록 하죠. "



 대검과 환술봉을 들고 익숙하게 로브를 푹 눌러썼다. 오늘도 당신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 하려 할테지. 눈에 그리듯 훤했다. 오늘 가지 않더라도 괜찮을 일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행동은 독일지 모를 일이지만... 아니지, 분명 우리에게는 득이 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다 일을 그릇치게 된다면 나는 과연 다시 들끓는 분노에 휩쌓이지 않을 수 있을까.

 보내버릴 그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대한 분노에, 감정에 삼켜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나를 끌어내줄 사람에게 너무 늦었노라 비난의, 책임의 화살을 돌리지는 않을까.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불만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겠지.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박도 변명도 하지 않아, 솔직하지 못한 관계가 또 어지럽게 섞인다. 어디까지가 서로를 위한 거리일까.


 ...선배 당신은 저에 대해 어디까지 정의내렸습니까. 눈발 속에 내뱉은 새하얀 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나서면 바로 들키겠어. "


" 알고서 오자고 한거 아니었습니까 선배. "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저렇게까지 진을 치고 있을 줄은 몰랐지. 적어도 셋인가... "



 그보다 더 많다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다. 몇명 더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선배의 생각과 행동을 회유할 수 있을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애초에 이미 따라왔을 때부터 말려든 것과 같다. 그래도 무언가 계획이 있겠지. 그렇게 스승님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선배를 바라보았을때, 그의 손은 검을 향하고 있었다.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의 감정에 동한다는 것이지 당신의 무모함을 두고 본다는 뜻이 아니다.



" 진정하세요. 지금 나가면 무모하게 몸만 버릴 뿐입니다. 이래서 며칠은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었는데... 설마 계획도 없이 그냥 덜컥 가자고 말한건 줄은 몰랐습니다. "


" 그러는 너는, 따로 세워둔 계획이라도 있나? 그냥 두고 보고 싶지는 않아서 따라온거 일거 아니야. 설마 그렇게 말해놓고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고 말하진 마라. "



 ...설마 정말로 아무 계획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어째서인지 골치가 아파온다. 물론 평소에도 조금 무대포식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녔는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으려 했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것마저 모두 선배의 감정속에서 드문드문 떠오른 것들이었던 걸까.



" 선배의 계획을 듣고 B안으로 염두해두자고 한건 있습니다만... 우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지금 당장 스승님의 유해는 포기해야 할겁니다. 적어도 사나흘은 지나야 이 감시가 소홀해지겠죠. 그럼 새벽에 나와... "


" 사흘 뒤에 놈들이 없을거란 보장은 없지 않나. "



 사흘 뒤에 그들이 남아 있을거란 보장 또한 없지 않나. 하지만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당신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조차 않았으니까. 내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겠지.



" ...그렇죠. 하지만 지금보다는 나을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도 감시에 소홀해 질 것이니까요. 굳이 지금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단걸 선배도 잘 알지 않습니까. " 



 ...봐라. 결국 당신은 내 말에 귀기울이지조차 않고 내날 뿌리친채 저 앞으로 향한다. 스승님의 주검과 희번뜩 거리는 살기속으로, 저 새하얀 눈발 속으로,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말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스승님을 잃어서 느끼는 감정이 오롯이 당신만의 것인 줄 압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인 것을.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말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 하하하! 역시 나타날 줄 알았어,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 "


" 감히 귀족분들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계속 그 숨을 붙여놓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더냐! 오늘이야말로 그 명맥을 끊어주마! "



 커다랗게 울리는 금속의 소리. 그는 붙잡을 수 조차 없게 빠르게 나섰다. 그 뒤를 따르는 나는 대검과 환술봉중 어느것을 들지 고민도 하지않고 하나를 골라내었다. 저 세치의 혀를 다 뽑아버렸어야 했는데. 저 길가에 나뒹굴 주검은 나의 것이 아닌 저들의 것이어야 했는데. 감히 누가, 누구를 비하하는가. 서로의 살을 물어뜯는 줄도 모르고 눈밖에 나는 자를 찢어발긴다. 결백을 말미암아 죽음의 사지에 몰아 넣고 승리했다 일컫는다. 자잘함을 꼬투리 삼아 건실한 인간을 너절한 쓰레기로 만든다. 그들의 입속에서 놀아나도 괜찮을 무고한 이는 없다. 그래. 결국엔 검을 들었다. 사라져가는 이의 명예를 위해. 남겨진 이와 함께하기 위해. 내 안에서 울리는 잔음을 없애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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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더럽게 무거운거 알고 있습니까 선배. "



 엉망진창이다.

그런 스승님과 선배이기 때문에 내가 환술을 배우기 시작했던거 같은데, 오늘은 나도 못지 않게 엉망진창이었다. 반듯하게 빚어둔 호수가 일렁인 탓이다. 그 호수에 파문을 만든 건 내가 아니지만... 그 물결을 무시하기에는 깊은 곳에 묻어둔 감정이 꿈틀거렸다. 삼키고 삼키기만 했던 꺼내지 못한 감정들까지 줄줄이 늘어질것 같았지만 오늘 같은 날이 아니라면, 이런 일들속에서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감정이라면, 이것의 존재하는 의미가 있던가. 다른 감정들은 당신에게도 있겠지만, 이 깊은 곳에 가라앉은 것도 똑같이 존재 하고 있을까.



" 평소에는 더 무거운것도 잘도 들고다니면서 엄살을, 윽?! 정신머리 나갔냐?! 어딜치는거야?! "


"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선배가 아직 정신을 못차린거 같아 한번 확인해 봤을 뿐입니다. 어차피 치료는 제가 할테고... 소리지를 기력이 있는거 보니 더 이상 안 챙겨드려도 되겠군요. "



 그럴리가.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며 슬 몸을 뺐다. 어쩐지 당신이 괘씸하게도 느껴졌다. 분명 평소와 같은데도 그런 느낌이었다. 앞으로 단 둘이기 때문에 그런걸까. 잔물결이 바람에 실려 파도마냥 출렁이며 새로운 감정을 떠밀었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쌀쌀한 기운, 깊은 상실감과 옅은 후회. 덩그러니 남아버린 두 개의 대검을 가지런히 두었다. 비어버린 자리는 결국 어떻게든 티가 났다. 



" 그러게 제가 모험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어선... 제가 없었으면 어떡할뻔 했습니까? "


" 어차피 갈거였으니까 딱히 상관없는 일이지 않았나, 왜 자꾸 투덜거리는건데? 전부 다 해결됐으니 괜찮은거 아닌가? "



 그 말에 고갤돌려 그를 바라봤다. 어파기 갈 것이기는 했지만, 당신만큼 나도 분하고 화가 나기는 했었지만, 지금 이 결과가 다 해결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괜찮다 이야기하기에는 당신도 나도 엉망이었다. 멍과 상처투성이라, 환술조차 없었다면 나도 당신도 제대로 돌아오기는 힘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저렇게 넘어가도 되는 일인가.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절걱거리며 단단한 갑주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녹음의 눈동자는 언제나 단 한가지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 계속 그렇게 살아갈 생각인겁니까. "



 이 상처가 아물면 또 당신은 날붙이들이 날뛰는 결투속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검을 들겠지. 자신의 길에 단 한치의 망설임과 주저함도 없이.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어느쪽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로. 어제까지만 하여도 그 선에서 삶의 쪽으로 당기던 사람이 이제는 곁에 없었다. 나는 당신의 곁에 서서 제 곁으로 당겨오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발짝 떨어진 발치에서 오는 걸 기다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언제나.



" 그렇게가 어떻게인데? 나는 언제나와 똑같았다. "



 당신도 똑같다. 언제나, 언제나와 같지.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쭉 계속 되는 것일까. 그러지 않길 바란단 말이 발치에서 어른거린다. 제자리 걸음을 이어가는 듯한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도 결국엔 크게 변하지 않는다.



"  ...다음에 또 이런일이 생긴다면, 그땐 그냥 두세요. "



 그 말에 다친곳을 향하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가늘게 좁혀진 눈은 가당치도 않는 소리하지 말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래에 생길 이 일의 끝은 맺어두어야 한다. 당신이 바라지 않는 쪽으로. 내가 바라는 쪽으로.



" 제가 죽으면, 그때도 이렇게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생각입니까? 이번에도 이 전에도, 제가 선배와 스승님의 상처를 치료했죠. 제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다 그냥 옮다고 생각하지? 네 말은 정론이지만 예외조차 두지 않으면 강압과 똑같아. 오늘 있었던 일은 그 예외에 해당되는 일이란걸 너도 알고 있을텐데. "



 알고 있다. 그 예외에 포함되는 것은 필히 나와 스승님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죽어 사라진 곳에서 당신이, 또 오늘과 같은 결과를 맞지 않길 바란다. 나도 당신과 스승님을 예외로 두었다. 지켜야할 사람으로, 또 다른 형태의 존재로 정의했다. 그저 단순히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것도 아니니까. 무수히 많은 이 감정들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사람이니까. 그리고 또 거기에서는...



" 그 예외에서 제 사체를 찾기 위해 그런 꼴이 되지 말란 뜻입니다. "



 당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지.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정확히 가늠조차 못하는 걸까,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하는 걸까. 나는 부러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 감정을 나 홀로 먼저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뒤에 이어질 당신의 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먼저 서두를 떼었다.



" 힘을 더 쌓으면, 다치지 않는다면, 무리하지 않는다면. 그 변명과도 같은 말로 도망치려하지 마시고 똑바로 보세요. 과거의 선배는 그 말들을 담지 않았다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제가 없는 마당에 선배마저 사라지면 그들이 바라는대로 암흑기사라는 존재부터가 사라질겁니다. "


" 마치 네가 먼저 죽을 것이란걸 확신하듯이 말하네, 그렇게 따지자면 너도 그렇게 두고 떠날거란 뜻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말이 머릿속에 참 잘도 박히겠다. "



 그렇겠죠. 란말을 겨우 삼켰다. 나는 당신보다 먼저 죽으리라. 선배가 나보다 앞서 검을 들었지만 그 검을 놓는 것은 분명 내가 먼저일터다.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을 사람들을 위해 검을 들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복수를 위해, 내 원수의 숨통을 끊고 죽이기 위해 날붙이를 들었다. 대검을 붙잡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작의 흔적은 서로에게 얼룩져 있었다. 악몽과 같이, 때로는 현실로, 또 오늘의 일로, 홀로 다잡은 각오에, 그렇게 싸움의 흔적으로 남았다.



" 살리는 재주도 없이 지키는 것만 가능한 선배가 언제까지 홀로 버틸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까. 죽어버린 제 몸뚱아리를 위해서 선배의 신체를 해치치 마세요. 처절하게 살아남으라 그겁니다. 살아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벼려둔 칼을 그 목에 들이밀 수 있습니다. 물론 저라면. 선배가 먼저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찾아갈겁니다. 저는 제 스스로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



 선배는 살것이다. 내가 살릴테니까. 혹은 이전에 지켜온 자들이 앞과 뒤로 끌어줄테니까. 새카만 비늘에 시리도록 하얀 피부와 머리칼. 옅은 무채색들 속에서 유일한 색인 초록빛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내가 왜 이런말을 했는지 어느정도 정의내리고 있겠지. 나름대로 정답을 찾기는 했어도 완전히 맞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테니까. 결국 꺼내진 감정은 다시 저 깊은 안쪽에, 소리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스스로 눈치채는 날이 올까? 단 둘이 남게된 이 이후의 날들에도 선배와 나는 여전히 이런 관계로 굳어버리는 걸까. 당신도 아주... 없지는 않은거 같은데. 단순한 나의 착각일까.



" ...그 말을 꼭 오늘 했어야 했나? "


" 오늘이 아니라면 선배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겠죠. "



 걸음을 옮겨 선배의 바로 앞에 섰다. 벌어진 상처는 아직 완전히 지혈되지 않아 조금씩 피가 베어나왔다. 붉게 물들어가는 붕대위로 손을 뻗었다. 서늘한 피부의 감촉 사이에서 흘러나온 온기와 습한 기운. 여태까지의 다쳐온 일에 비교하자면 그리 큰 상처도 아닌데 가만 두고볼 수가 없었다. 스치듯 닿는 감촉 넘어로 잘게 떨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것봐라. 결국 선배, 당신도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게 아니야. 당신의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 중에서, 나에 대한 것들만 꺼내고 끌어내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감정들에 집중할 나날이 당신에게는 있을까. 방을 채우던 정적 속에서 생각에 잠겨있다가 밀어내는 선배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의식하다가도 일부러 밀어낸 느낌은 착각일까.



" ...지금이라고 굳이 들을 생각은 없어. "



 가까워질듯한 거리는 또 그렇게 벌어졌다. 그런 태도에 나는 또 뒤로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듯 하면서도 넘어갈 수 없는 듯한 이 간극은 언제즈음 좁혀질까. 작게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하곤 돌아섰다. 이미 흘려보낸 십수년의 시간 속에서 더 줄어들지 않는 거리감에 결국 최소한의... 마지막과 같은 최후의 선만을 지켜달라 말했다. 내 앞에서 당신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살릴 테니까. 이 깊숙한 곳에 쳐박힌 감정이 잠겨 사라지지 않는한은 당신을 놓지 않을테니까. 분명 위험한 상황에 다다랐을때 나는 내가 아니라 당신을 챙길 것이다.



 그래, 그 각오와 마음이 오늘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무딘 칼은 이제 짐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커다란 홀의 구경꾼들이 나의 비척거리는 모습에 웅성거린다. 환호인지 비난인지 모를 그 목소리들 속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당신이 보인다. 곁에 있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선배의 모습. 그늘진 얼굴에 녹색의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보인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빛나던 황금 빛은 결국 감정의 녹음에 서서히 감화됐다. 잠겨 사라질 것만 같은 감정들은 그렇게 몸집을 불려 오늘의 형태를 빚어냈다. 상대의 검을 막아내면서도 나의 시선은 이따금씩 그에게로 향했다. 선배, 당신도 이성과도 같은 그 색에 점차 스며들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감정속에, 당신의 울타리 안에, 그 녹음 속에 제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있기는 했습니까.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대검이 저 멀리 날아갔다. 마지막에 마주한 것은 내 앞의 상대가 아니라, 칙칙한 로브 속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한쌍의 눈동자였다.



 아, 과연.


...됐습니다, 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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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로 하나 더 있습니다 ㅇ)-( =3

이어지는 건 아마 이 뒤까지 셋으로 끝날거 같네요

잡덕 그냥 ㅁ뭐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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