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오물을 잘 몰라서 보편적으로 알고 계시는 설정들과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베타 테스트 : 특정 프로그램을 상용 발표하기 전에 앞서 실제 사용자에게 해당 프로그램을 배포해 시험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프로그램 테스트.

* 베타 테스터 : 컴퓨터 업체에서, 자사의 제품을 판매하기 전에 제품에 결함이 있는지를 검사하는 사람.

* β(베타) 테스터 : 알파, 오메가 형질을 가진 인종을 베타처럼 변화 혹은 전환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의·약사 혹은 제약사의 불법적인 인체실험을 받는 사람.




0.

좆같은 알파 새끼들.

역겹다,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온다. 알파 놈들의 페로몬은 왜 날이 갈 수록 정도가 심해지는지 알 수가 없다. 황급히 입과 코를 막아도 이미 강제로 맡아진 잔향이 그 징그럽고 끈적거리는 향들이 비강을 자극하고 비위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다. 나는 그 귀하고 희귀하다는 오메가니까.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꾹꾹 삼키며 표정을 갈무리한다. 더러운 알파 새끼들에게 걸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한낱의 노리개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심신의 안정을 위해 품 안에 깊숙이 숨겨두며 항상 지니고 있었던 종이 쪼가리의 존재를 황급하게 찾아본다. 바스락 거리는 그 작고 손바닥만 한 종이가 나를 조금 아주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게 해준다. 조만간이었다.

필요한 돈은 거의 다 모았다.


나는 베타가 되고 싶은 오메가이다.



1.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진화는 환경적인 이유와 생식의 선택에 의해서 바뀌고 변화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진리이자 불변의 법칙이었고,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렇게 진화를 해왔다.

현재 인종의 비율 즉 베타가 7이라면 알파는 2.5, 오메가는 0.5라는 극소수의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찍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한때 성욕에 사로잡혀 지나친 페로몬 사용의 성관계로 문란한 오메가의 몰락으로 유추하며 지금이라도 보호하고 멸종을 피하기 위해 정도가 지나치고 말도 안 되는 임신을 강요했다. 오메가가 생각을 바꿔야 멸망을 막을 수 있다는 병신같은 논리로 말이다. 오로지 오메가에게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오메가들을 비난했고, 임신을 거부하면 이기적이라며 손가락질 했다. 우리는 자손 번식을 위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궁이 아니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지성체였다. 이런 환경적인 것에 납득을 하는 극소수의 오메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오메가는 반감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코 임신은 누가 강요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이었고, 이 선택의 권한자는 당사자인 오메가들에게 있다는 것을 멍청한 알파이자 수컷들은 잊은 모양이었다.


생태계를 보아도 인종들이 짐승들이라고 치부하는 금수들의 생리를 보아도 항상 수컷의 비율과 암컷의 비율은 달랐다. 수컷의 비중이 암컷의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중 강하고 아름다우며 사냥 혹은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높은 수컷이 암컷에게 선택을 받아와 교미를 하고 임신을 하고 자손을 번식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멍청한 알파는 이것조차 잊은 모양이었다.


아주 지난 과거에 실존하던 사건이었다. 한 재판의 결과가 말도 안 되지만 그땐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진 시대가 있었다. 강간을 당한 오메가가 임신을 하자 가해자인 도태 알파와 결혼을 시킨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묶어버리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해결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미친 판결을 한 것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도태 알파에게도 무분별하게 자손 번식의 기회를 주는 족쇄를 오메가들에게 채워버렸고,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의 형질이 우수할 리가 없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알파, 혹은 오메가를 만들기 위해선 그 부모도 그리 되어야만 했다.

과학자들은 아니 알파들은 오메가의 소멸이유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였다. 과거가 역사가 계속 이야길 하고 있었다. 오메가의 현실을. 배울 만큼 배웠다고 하는 놈들이 오메가의 입장이 아닌 아니,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인 이상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암컷에겐 강하고 아름다운 수컷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문란하고 정숙하지 못한 암컷이라며 가스라이팅을 해왔다. 모든 미디어 매체, 인터넷, 그리고 부모에서 아이에게, 알파가 오메가들에게.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였다. 오메가들은 점점 자신의 페로몬을 숨기게 되었다. 갈무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알파를 자극하고 아찔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닌 미향으로, 미묘하게 짝이 없는 흔적으로. 극한의 예민함 혹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페로몬 판독기가 아니고선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바뀌게 되었다. 주변의 흔한 베타와 다름없이.

그에 반해 알파들은 더욱더 자극적이게 더 강렬하게 더 매혹적이게 바뀐다면 오메가의 마음을 받거나 혹은 속된 말로 꾀어낼 수 있다고 판단을 했는지 그들의 페로몬은 과거에 비해 농축돼있으며 지독하다 못해 역겨울 정도로 진하게 진화를 해왔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그럴수록 더 혐오스럽다는 것을 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쉽게 생각해서 그냥 어느 집에나 있는 평범한 비누향과 떡칠된 지독한 향수향. 어느 것이 더 향기롭다고 느낄까? 일단 나는 전자가 더 취향이었다. 아니지. 대부분의 오메가들의 생각은 그랬을지도?


숨어버린 오메가. 그 덕에 흉흉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부풀려졌다.

속칭 오메가 사냥.


오메가인 것을 들키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고 임신을 시키는 그야말로 사육장에 갇혀 평생을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기괴하고, 잔혹하며, 끔찍하게 몸집을 키워왔다.

저 소문의 사실 여부는 확인 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오메가들이 공포에 떨기엔 충분했으며 자신을 더더욱 숨기는 이유가 되었다. 더 베타처럼, 평범하게, 아니 그냥 내 페로몬이 사라졌으면...!

이런 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알파들은 무지하게 열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회는 오메가의 편이 아녔다.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파였고, 알파들의 입맛대로 주물러지고 있는 세상이었기에.

이제는 베타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오메가들을 솎아내기 위해 오메가를 위한 기초 생필품 혹은 의약품 조차 알파들이 상주하며 판매하는 곳이 아니면 살 수 없었다. 그 외의 곳에서 구입, 판매를 하다 걸리면 바로 감옥행이었다. 말이 감옥이지 아닐 확률이 가장 높았다. 사육장으로 끌려갈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정말 치졸하고 치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좆같은지 모르겠다.


알파들이 빛이 있는 세상에서 지랄을 하는 동안 오메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어둠이 있는 곳에서 베타로 형질을 변환 할 수 있는 약, 혹은 시술이 생겼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뭐든 좋았다. 내 코안으로 무자비하게 침입하며 비위를 상하게 하는 페로몬을 맡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불법이든 후유증이 남든, 그런 것들은 내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에겐 한 가닥의 거미줄이라도 그것이 동아줄로 보일 테니.


베타(β) 테스터 모집합니다.

이 작은 종이 쪼가리가 나에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구명줄이었다.




2.


화려하고 빼곡한 빌딩 숲에 있으면 영원히 어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나를 판별하기 위해 눈을 번뜩이며 훑어내리는 시선들이 따갑다 못해 소름 끼쳤다. 나는 그 속 사회구성원으로 존재를 해야 했으나 항상 도망치고 싶었다. 매분 매초 들켰나 마음 졸이며 불구덩이 지옥이 환하다고 해서 지옥이 아닐 수 없게 되는 것 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 그냥 외롭다 미쳐버린대도 혼자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빛 한점 드리워지지 않는 곳이라도 천국이지 않을까?

낯선 곳이었다. 한 번도 이런 곳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그런 곳.

빌딩숲에서 조금만 더 벗어났을 뿐인데 반대편과 대비되도록 어둡고 스산했다. 요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파인 콘크리트길 아래로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건조한 날씨에 비해 달라붙는 공기가 축축하고 눅눅하게 느껴졌다. 괜히 나도 모르게 점퍼의 앞섬을 꼭 쥐게 되었다. 저 새카만 골목 사이에서 나의 존재를 알아챈 짐승 같은 새끼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마른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왔나? 사기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지면서도 시야는 빠르게 돌아가며 이 무채색 컴컴한 공간에서 이질적일 빨간색 문을 찾고 있었다. 검은색 철문, 회색빛 반쯤 열린 셔터, 부서진 나무 문. 하. 도대체 어디...!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 안쪽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는 곳에 시선이 확 꽂혔다. 이젠 거의 사라져 잘 보이지도 않는 필라멘트 전등. 수명이 거의 다 되었는지 치칙 거리는 불안한 소리를 내며 곧 사라질 듯 가늘어진 불빛을 힘겹게 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무채색인 이 뒷골목에서 페인트가 거의 벗겨졌지만 이질적인 유일한 빨간 문. 막상 문 앞에 다가서니 긴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차가운 문고리를 돌리자 생각보다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나마 희미한 불빛이 있던 바깥과 다르게 아무 조명이 없는 이 어두운 복도를 보니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야, 오늘 나랑."


저 편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무섭다고 생각한 그 복도로 빠르게 몸을 욱여넣었다. 문이 철컥이며 닫히는 소리,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자 방망이치던 심장이 점점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빛보단 어둠이 나에겐 낙원인 모양이었다. 크게 숨을 내뱉으며 조금 더 진정이 되길 기다렸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앞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일단 문안으로 들어왔으니 가긴 가야겠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앞을 비추었다. 제법 길이가 있는 복도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숨기고 숨기는 것을 보니 확실히 불법적인 무엇인가를 하는 건물은 맞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드는 와중에도 왜 이렇게 기대하게 되는 마음이 커지는지 모르겠다. 간절한 욕망은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용기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베타가 되고 싶었다.


더듬더듬 거리며 걸어 나가자 복도 끝이라고 인지되는 곳 까지 다다랐지만 전혀 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일단 문이라면 문고리가 있어야 되는데 없었다. 혹시 복도에서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었나 다시 비춰보았지만 아녔다. 그냥 일자로 쭉 이어진 복도였다.

그럴리가 없다. 이럴 순 없었다. 내가 이날을 위해 힘들고 지쳐도 아끼고 아껴온 연차들을 몰아서 사용했다. 그게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 짓인데 절대로 이래선 안되었다. 더듬더듬 거리며 벽을 살펴보는데 뭔가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홈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반달 모양의 고리가 있었다.

고리를 당겨보니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 이게 문고리였나? 당겨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음이 너무나도 초조해졌다. 제발. 제발!

이리저리 방향을 달리 잡아서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벽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여는 건데! 혹시 돌리는 건가? 싶어 고리를 우측으로 돌리자 부드럽게 돌아가며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당기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가볍게 열렸다. 황당할 정도 였다.

그리고 열린 틈 사이로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 흘러 들어왔다.

정답인 모양이었다.


바깥의 풍경과 다르게 내부는 정갈한 사무실 혹은 서재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실망스러웠다.

음습하고 어두운 뒷골목에 자리 잡은 곳이라 영화처럼 흔들리는 전구 아래에 지저분하게 흩어진 의료기구들과 주사기들, 곧 부서질 것 같은 수술대 같은 걸 상상하긴 했지만 꼭 그렇게 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불법적인 시술에 관련 된 곳이니 뭔가 급박하게 차려진 시술소 느낌을 기대했는데 너무나도 깔끔한 인테리어에 약간 더 경계심이 치솟았다.

정답인 줄 알았는데 꽝이면 나는 지금 큰일 난 거니까.


"계세요...?"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살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더 안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안계시나요오...?"


뭔가 염소 같은 목소리가 나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경고 사이렌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삐용거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뒤돌아서 도망갈... 뭐야. 문 어디 갔어?

내가 들어온 입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바깥에서 열 때 있던 반달 모양 고리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벽...? 아, 잠시만 나 그럼 어떻게 도망가지. 뭐 버튼 같은 게 있나? 싶어 벽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뭐야. 너 누구야."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만 아녔다면 계속 출구를 찾았을 것이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칼각으로 잘린 웃긴 앞머리에 비해 선이 고운 미형의 남자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했던 사이 잠시 정지했던 사이렌은 이제 불빛을 발광하며 머리에서 위험신호를 울리고 있었다. 도망, 도망가야 해!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 불법적인 일을 할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지랄 할 것 같은 상이었다.

물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편견이지만 그래도 관상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제발! 열려라. 제발!


"너 누구냐니까?"


턱 하고 얼굴 옆으로 그 남자의 손이 벽을 짚었다. 어떡하지. 진짜 이제 어떡하지. 괜히 왔나 봐. 손바닥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쪽 문으로 들어온 모양이지? 너 오메가냐?"


시발.

칠까? 그냥 한 대 칠까? 아니지. 그것보단 낭심을 차면 더 위력적인 타격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오래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땀이 찬 손을 꽉 말아 주먹을 쥐었다. 한 번의 발차기 뿐이었다. 실패하면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이다.


"입에 본드 발랐나. 무슨 대답이 없어. 야. 너 베타 테스터냐고."


으응? 너무나도 내가 원하는 단어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 그 남자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정말 당신이 그 의사였던 거야? 근데 듣다 보니 어이없네. 저 따위 응대니 내가 전문성을 의심하고 쓸데없이 긴장했잖아.


초면에 왜 반말하고 지랄이세요?




3.


"어떻게 왔어?"

"이거 보고."


눈눈이이는 내 모토였다. 네가 반말을 하면 나도 반말을 한다. 수년간 서비스직에 몸담았는데 나를 존중하지 않는 놈한텐 나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며 도달한 철칙이었다.

싸가지가 없는 이 자식에게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꿈꿔온 당첨 복권 같은 종이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음. 오래된 티켓이네. 얼마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거야. 꼬질꼬질해진 것 좀 봐라."

"그냥... 몇 년..."


당연히 오래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구한다고 해도 이미 해질 대로 해진 상태였고 시술을 받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선 당연히 오랫동안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몇십만 원 했다면 바로 가능했고, 백단위도 뭐 그렇게 힘들진 않지. 천단위? 무리한다면 불가능한 금액도 아녔다.

근데 이새끼야. 네가 3억이라고 찍어놨잖아.

평범한 직장인이 1억을 벌기 위해 평균 10년은 걸린다고. 진짜 미친놈 아냐? 싶어졌다. 하긴 의사는 푼돈일 수도. 근데 나한텐 아니라고 이새끼야. 저 미묘하게 비꼬는듯한 말투에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지 거칠어 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뱉진 못하지만. 일단 나는 간절한 을이었고 나에게 은혜를 부여할 저 자식은 갑이니까.


"일단 여기 앉아봐. 간단한 검사 좀 하게."


여전히 미심쩍어 하며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저 멘트로 그 응어리가 사르르 녹았다. 좀 전문직 같은 멘트였다. 가리킨 의자 위에 뻣뻣하게 앉아 의사 놈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달그락 거리며 스테인리스 의료기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게 의사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근데 너 히트 사이클 주기 맞춰서 온 거야? 거의 안 느껴지는데?"

"뭐?"


그딴 소린 처음 들었다. 주기를 맞춰서 와야 된다니 그런... 난 그런 거 못 들었다고. 난감해하는 표정을 확인한 의사는 부드럽게 내 귀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여기 귀밑 부터 겨드랑이, 아랫배, 허벅지 사이 그러니까 사타구니에 향낭이 있는 건 알지?"

"으응..."

"이게 가득 차야지 약물을 투여했을 때 녹일 수 있거든?"

"어...?! 어어... 그렇구나."

"근데 텅텅 비어있잖아?"

"그럼... 안돼?"

"당연히 안되지. 너 알약이 물 없이 녹겠어? 그냥 계속 있다가 서서히 체온에 녹아서 몸에 흡수 될 뿐이야."


...? 그럼 몸에 흡수되니까 되는 거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 올려보자 의사 놈은 답답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자연히 흡수되었을 땐 아무런 효과가 없어. 오히려 체액 그러니까 땀이나 소변으로 배출되어버리거든. 페로몬이랑 섞여서 흡수되어야 효과가 있는 거니까."


지금 느끼는 심정은 말 그대로 절망이었다. 평소 생리휴가를 아껴가며 연차도 아껴가며 어렵사리 구한 억제제를 아껴먹어 가며 이날을 기다렸다. 혹시나 히트가 터지면 안되니까 대비하고 대비해서 아예 텅텅 비우고 왔는데 이러면 안되었다. 그래선 안되었다. 내 노력과 시간을 이렇게 쓰레기통에 처박을 순 없었다.


"어떻게 안될까?! 나 진짜 시간 겨우 내서 온 건데..."

"하... 시술 방식은 왜 안 알아보고 온 거야. 심지어 기본이잖아."


너한테나 기본이겠지. 이 새끼야. 지금 실망한 사람한테 그 딴식으로 밖에 말을 못하냐고! 험악한 내 내면과 다르게 신체 반응은 억울하다 못해 우울할 지경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손이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내 시선은 의사 놈의 예쁜 앞머리를 노려보다 천천히 땅으로 떨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현실은 시궁창인데 이곳 바닥은 그 비싼 대리석인 것도 나를 울리게 하는 추가적인 요소였다.


"일단 적합 검사는 해보자. 좀 차가울 거야."


귀뒤로 뭔가 축축한 것을 붙이더니 곧장 떼어내었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거즈 같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거즈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연한 분홍색이었다.


"희귀 향이네. 플로럴 계열이구나. 거의 안 느껴지긴 하는데... 백합인가?"

"어. 나 백합..."


향수에서 플로럴계의 향기는 액체의 보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받고 아름다운 향이다. 하지만 오메가인 나에겐 굉장히 치명적인 단점으로 될 수 있는 향이기도 했다. 생화가 없는 곳에서 자연스러운 꽃향기가 날 리가 없으며 다른 계열의 향기에 비해 지나치게 진한 향을 뿜기도 하는 계열이었다. 심지어 백합이었다. 꽃향기 중 가장 진하고 풍성한 향. 그 화려함 덕에 병문안용으론 어울리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꽃이었다. 그게 나한테서 나오는 페로몬의 향기였다.


"고생했겠네. 귀찮았겠어."

"좀... 그런 편이긴 해."


꼴에 의사라고 아는 것은 많은 모양이었다.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가 재수 없으면서도 좀 고맙긴 했다. 하지만 재수 없음이 더 컸다.

의사놈은 거즈를 어떤 플라스크에 넣더니 뭔지 모를 용액을 들이붓고 마개를 덮고 흔들었다. 곧장 작은 냉장고 같은 기계를 열더니 뱅글뱅글 돌아가는 벨트 위로 플라스크를 올렸다.


"근데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나. 이거 검사해보고 부적합 판정 뜨면 히트 사이클 맞춰서 와도 시술 못하는 경우도 있어. 무조건 돈만 주면 다 해준다고 생각하지 마."

"뭐야. 부적합? 그런 게 왜 있어?"

"잘못하면 죽거든. 그래도 상관없다면 각서를 받고 해주는 편이긴 하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게 맞을까 저 새끼? 생명의 존엄에 대해서 제일 먼저 배우지 않나? 저런 부작용이 있다면 그래도 일단 뜯어 말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간절하니까 해주는 거야.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간절하니까."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답변해주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납득이 되었다. 맞아. 그 죽어도 상관없다는 간절함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나... 이제... 집에 가?"


나의 애절한 시선과 무미건조한 의사 놈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아무래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가야지."


그리고 다시 시야는 망할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좆같은건 어쩔 수 없었다.

의사놈이 다시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실망감에 잠겨버린 나는 확인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거 줄 테니까 조금 더 버텨봐. 내가 보니까 넌 부적격은 안 뜨겠다."


내밀어진 상자를 보니 억제제 몇 박스와 페로몬 탈취제로 추정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구하기도 힘든 귀한 것을... 저 입이 삐뚤어진 놈이...


"그리고 다음부턴 위험하게 그 뒷문으로 들어오지 말고 정문으로 들어와. 여기 건물은 진짜 병원이니까 의심 아무도 안 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의사 놈이 가리킨 문을 열고 나가자 너무나도 병원이에요 하는 복도가 나왔고, 조금 더 걸어가니 너무나도 병원 카운터에요 라는 접수대가 보였다. 뒤를 돌아 나온 문 옆에 명패를 확인하자 병원장실 그리고 시라부 켄지로.

허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으로 나와 바깥 풍경을 살펴보니 아는 거리였다. 내가 빛 속에 갇혀 숨 막힌다고 생각한 그 빌딩 숲 어딘가였다. 병원 간판을 확인해보니 가끔 감기나 위장약을 받기 위해 몇번인가 들렀던 5층짜리 큰 개인 병원이었다.

이거 사기 아니야...?

근데 내가 알기로 여기 의사... 알파인 걸로 알고 있는데? 페로몬은 안 느껴지던데... 


역시 잘못된 소문이었나?




여자가 나간 뒤 문이 닫힌 것과 동시에 시라부는 몸을 휘청거리며 겨우 책상을 붙들어 몸을 지탱했다. 억눌러 온 욕망이 터져 나온 듯 보랏빛을 담은 남색 페로몬이 순식간에 사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스파이시계의 시나몬 향이 진동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본 오메가의 미세한 페로몬만으로 억지로 욱여둔 알파를 자극하기엔 치명적일 정도로 충분했다. 급박하게 주사기안을 채운 뒤 지체 없이 허벅지 안쪽으로 찔러넣었다. 그는 진정해야만 했다. 다시 벽지며 가구 시트고 갈아 낼 순 없었다.

겁먹은 오메가가 역하게 느낄 알파의 페로몬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무척 곤란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너의 그 향을 복기 하는 것은 괜찮잖아. 너는 내 향기를 역겨워 하겠지만.


꼭 다시 보자.

릴리.






먹고싶은 맛이 있는데 아직 메뉴에 없다면 직접 조리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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