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 쓰인 글입니다
  • 과장된 현상이 있다는 점 감안하여 주세요
  • 제출용으로 쓰인 글이라 분량 조절을 위해 중간에 끊어지는 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 1년간 열심히 가르쳐 주신 과학 선생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

태양은 불타는 별이다. 커다랗고 동그란 불구덩이 구체. 활활 타오르는 그 공격적인 불길이 그렇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은 태양이라는 항성을 공전한다. 그 커다란 화염에 파묻히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회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주의 신비. 난 지구 안에서 따라 움직이며 매일 태양 주변을 산책한다. 걸음걸음을 내딛으며 얇은 살결로 파고드는 자외선을 느낀다. 그 강렬한 뜨거움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진다면 내 산책은, 내가 늘 걷던 길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커다란 화염에 겁도 없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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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눈을 뜬다. 7시 30분에 맞춰놓았던 알람은 꺼지고도 한참이 흐른 후였다. 비몽사몽한 몸을 이끌고 세면대 앞에 섰다. 깨어난 날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구름이의 안내에 따라 화장실로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간다. 꾸벅꾸벅 졸며 세수를 하다 찬물로 촥 얼굴을 적시곤 볼을 두 번 때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도 늦게 나가면 희랑한테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다. 와이셔츠 단추를 대충 잠그고 바나나를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은 채로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미 문자에는 그의 욕설이 잔뜩 도배된 채이다. 한숨을 쉬곤 큰길로 걸음을 재촉하자 핸드폰을 껐다 켰다 하며 시간을 확인하는 희랑이 보였다.

 

“이강혁! 빨리 안 와?”

“이게 빠른 거야!”

“내가 진짜... 조금만 늦어도 지각이었어.”

“사람이 가끔씩 지각도 해줘야 인간미가 있지,”

“그런 의미에서 네 인간성은 조금 문제가 있다니까.”

“뚫린 입이라고 변명이 술술 나오지 아주, 다시 막아줘?”

 

지각을 겨우 면하고 학교에 도착하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3교시, 책상 한구석에 샤프를 사각대며 시간 보내기에 집중한다. 국어는 지루하다. 내가 관심 있는 과목이라곤 과학뿐이다. 그 중에서도 빛나는 천체, 우주, 미지의 세계만 취급하는 까다로운 성격. 한마디로 현생에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다. 고쳐야지 어떻게든...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니 희랑은 필기하는데 여념이 없다. 한숨을 뱉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낡은 교실 의자가 삐걱댄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오늘도 역시 다른 날들과 별반 없이 햇볕의 열기가 자욱했다. 아직 6월 초인데 벌써부터 날씨는 한여름이다. 뻣뻣한 감촉의 교복셔츠가 땀 때문에 몸에 끈적끈적 달라붙는다. 날이 더우면 시간이 녹아 천천히 흘러가는 듯하다. 그래서 여름의 학교는 최악이다. 다시 딴짓을 하다 희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모양으로 뭐해 라고 묻자 희랑이는 뻐끔대며 앞이나 보라고 눈치를 줬다. 어휴, 손부채나 마저 부치자.

최근 SNS에서는 길고 신비로운 오로라의 사진이 유행을 탄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의 오로라를 찍어 올리고, 좋아요를 독식한다. 오로라가 이렇게 넓고 화려하게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전무한 현상이라 더욱 인기를 얻는 것 같다. 오로라는 색이 다양하다. 푸른빛과 초록빛이 오묘하게 섞여 이상한 조화를 자아낸다. 전파 음이 지직대듯이 위아래로, 파도로 물결이 일듯이 양옆으로 자유로이 움직인다. 여신의 머리칼과 닮았다고 불릴 정도로 은은하게 밤하늘을 유영하는 예술적인 오로라는 태양과 지구의 자기장이 충돌하여 나타나는 모습. 사실 오로라는 태양폭풍이다. 그 커다란 충돌에 비해 오로라는 너무 아름다워서 유유히 흘러가는 여유로움에 우리는 폭풍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폭풍의 부산물을 멍하니 바라보다 카메라에 담는다. 화려한 빛의 흐름은 사진 안에 갇힌다. 사진은 고요하다. 나도 오로라 사진들에 좋아요를 눌렀다.

희랑은 지금 병원에 계신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 그리고 오늘은 병문안을 가지 않아도 되는 날, 즉 희랑의 집에 놀러갈 수 있다는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익숙하게 라면 봉지 두 개를 뜯었고, 그는 게임패드 두 개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저번에 깨다 만 게임에 접속해서 라면이 다 끓을 때까지 누가 더 빠르게 깨는지 치열하게 대결하다 결국엔 불은 라면을 나눠먹는다. 혹시 접속이 끊어질까봐 입천장이 데는 것도 마다않고 급하게 면을 삼켰다.

 

“젓가락 안 내려놔? 내가 너보단 적게 먹었어.”

“넌 진짜 피곤하게 산다.”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결국엔 다 비운 라면 냄비를 싱크대에 넣어놓고 후식으로 먹기 위해 꺼내놓은 노란 사과가 식욕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변해갈 때까지 게임패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늘따라 게임이 술술 풀린다. 물론, 여전히 숙제는 뒷전이다. 어차피 여기서 자고 갈 건데 밤새서 천천히 하면 될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넘겨버린다. 이번 판에서 희랑이 지면 모레에 있을 일식을 관측하러 동네 뒷동산에 같이 따라가 주기로 했기에 최선을 다했다. 온 신경을 집중하니 마지막 클릭과 함께 일식 관측용 노예를 얻었다. 승리의 웃음을 지으니 게임패드가 날아왔다. 아야.


개기일식은 특정한 장소를 기준으로는 370년에 한 번 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선명한 개기일식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신이 날 보살펴주시고 있다는 증거다. 이 지루한 삶에 이렇게 큰 행운을 선사해주시다니! 하지만 그에 반해 자기가 얼마나 큰 행운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희랑은 조금 걸었다고 벌써 지쳐서 숨을 헐떡인다. 아까부터 이 날씨에 등산이 말이 되냐고 별 핑계를 다 대더니 이럴 줄 알았다. 난 그를 어르고 달래어 겨우 동산을 올랐다. 뚱해서 삐져나온 입에 초코바를 친히 물려주면서. 그는 평지에 도착하자마자 잔디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졌고 난 그가 매고 온 천체망원경을 꺼내서 설치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좀비처럼 끅끅대는 불평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무시한 채로 사그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저 광명이 검게 가려지는 순간을 담기 위해 카메라 또한 꺼내들었다. 그리곤 땀으로 젖어 지쳐 널브러진 희랑의 목에 걸었다. 잘 부탁한다며 뻔뻔하게 미소를 짓자 이번에는 가운뎃손가락이 돌아왔다. 그래도 그는 사진부라고 능숙하게 카메라를 든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니 이제 5분 정도만 기다리면 저 환상적인 순간을 내 두 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흥분되어서 또 난리를 피우려는 것을 희랑이 겨우 제지했다. 설렘에 부풀어 오른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간은 흐른다. 태양의 오른쪽부터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선명한 검은 구의 형태가 새하얀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고요히 제 빛의 어머니를 가려온다. 달의 본 그림자가 제 모습을 서서히 넓히며 빛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늘 깜깜한 어둠 속에서 외로이 빛을 내던 달은, 빛으로 가득 찬 대낮 하늘 안에서 스스로 유일한 어둠이 되어 커다란 태양을 단번에 삼켜버린다. 자신보다 몇 배는 거대한, 불타는 공의 앞에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인다. 아, 어둠이 내려앉는다. 깜박, 검은 달 주변을 왕관처럼 날카로운 빛이 감싸며 순간 온 세상이 정전된다. 트루먼쇼의 감독이 영화 세트장의 조명을 온통 꺼버린 것처럼 평생 어둡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의 하늘이 빛을 빼앗긴다. 비록 잠깐 이였지만 깜깜한 낮에 내 눈만이 별이 되어 반짝였다. 아주 잠시 우리는 저 드넓은 우주와 그 속의 자그마한 우리가 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다시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 빛을 응시하던 눈이 따갑게도 부셔 관측용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몇 번 더 깜박인다. 간지러운 여름 바람이 하얀 티셔츠 안을 파고들어 훅 올라온다. 뜨거운 태양이 날씨를 적셔 차가운 바람이 미지근하다. 바람을 타고 잔디 내음이 차근차근히 밀려와 초록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옆을 보니 뿌듯한 표정으로 희랑이 카메라를 들어보였다. 카메라 렌즈가 다시 드러난 햇빛에 비쳐 반짝거린다. 370년 동안 바삐 회전하던 두 행성과 항성 하나가 일직선상에 올라와 서로를 마주했다. 천체의 만남을 드디어 눈에 담았다. 쿵쿵 뛰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야, 인생샷 나왔다... 나한테도 보내줘.”

“나보다 빠르게 내려가면 보내줌.”

“넌 그게 네 친구한테 할 소리냐?”

 

다행히 아까보다는 걸음이 가볍다. 내리막길,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로부터 겨우 3일 후였다. 여기저기서 별 이상한 일이 발생하던 때가. 수업 도중 온 동네 전기가 전부 나가버려 정전이 된 것이 시작이었다. 갑자기 멈춘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히고, 반에서 영상을 보며 수업하던 애들도 진도를 멈췄다. 병원도, 상가도 모두 비상이 걸려서 동네가 한 동안 소란스러웠다. 희랑이네 할머니께서도 정전 때문에 호흡기가 멈추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되셔서 더 이상 희랑과 같이 하교하고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할머니를 간병하느라 학교에 오는 것도 뜸해졌다. SNS에서도 이와 비슷한 피해사례가 몇 차례 더 보였다. 점점 지구 종말에 관한 소문들이 알게 모르게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적으로 무슨 일을 계획하다가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고 결국 SNS를 삭제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개기 일식이, 에이 설마.

그렇게 여느 때의 유행들처럼 흐름을 따라 잊혀 갈 줄 알았던 사건은 점점 더 심각해지기만 했다. 정전 문제가 해결되고 TV가 켜지자마자 비상뉴스가 온 채널에서 흘러나왔고 핸드폰에도 긴급재난알림문자가 쏟아졌다. 집집마다 TV에서의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와 온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결국 마주한 사실은, 이번 일식과 함께 발생한 태양 활동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기록적인 세기의 자기 폭풍으로 지구 자기장이 불규칙적이게 변화하고 있다는 소식. 한 마디로 이 문제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다는 것. 영화에서 그렇게 자주 보던 지구 멸망 소재가 현실로 찾아온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님에도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잦아들 새가 없었다. 학교는 급히 휴교했고,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안전한 곳으로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의 무리들 위로는 검은 새떼가 푸드덕거리며 휘청휘청 날아와 아파트 창문에 연이어 부딪쳤다. 새들의 핏자국이 유리창에 선명하게 남았다. 곧이어 그 새들은 바닥으로 추락해 차들 사이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차들 위로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며 마구 짖어대는 구름이의 소리까지 모두 귀를 아프게 했고, 불안했다. 귓가의 울림이 아팠다.

우리 가족 또한 차에 시동을 걸어 안전한 곳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귓가에선 아직도 여러 소음들이 웅웅대었다. 길은 더럽게도 막혀 앞 차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고 얼마 가지도 않아서 델린저 현상 때문인지 내비게이션 화면이 깜박이다가 꺼져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 핸드폰 전파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앞 차의 흐름에 의존해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창문을 열자 비명소리, 울음소리의 희미한 흔적과 함께 텁텁한 매연이 타고 들어왔다. 기침을 콜록이며 창문을 다시 올렸다.

터널을 한 번 지날 때마다 뒤에서 급정거하는 차들의 충돌 소리가 들려왔고, 앞 도로도 사고로 전복된 차들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으스러진 번호판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모든 GPS와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 꼬여 버린 동선 때문에 사고가 계속 일어났다. 도로 구석,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가족은 애써 무시하며 액셀을 밟았다. 저기에 우리까지 휘말리면 안 되니까. 나는 구름이를 안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구름이도 혀로 날 핥으며 낑낑거렸다.

다리를 건너면 가까운 피난소가 있다. 하지만 다리 위에서 발생한 연이은 접촉사고 때문에 더 이상 차를 타고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 둘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인파의 사람들 사이, 난 간절하게 구름이의 목줄과 엄마의 손을 잡고 인파를 헤쳐 나갈 뿐이었다. 조용히 인파 속을 헤치던 구름이가 갑자기 사납게 짖어대던 때,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커다란 진동에 난 부모님의 손을 놓치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구름이의 목줄도 놓쳐버려서 급하게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할 때 사람들 사이로 금이 가는 건물이 동공에 스쳐갔다. 바닥은 계속해서 진동하고, 귀에는 소음이 웅웅댄다. 순간 불길함과 공포심이 온몸을 타고 올라 소름이 돋았다. 굉음과 함께, 건물이 쏟아진다. 그 뒤로는 기억이 띄엄띄엄하다. 내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중 갈색 구두가 내 얼굴을 그대로 걷어찼다. 훅 밀려오는 콘크리트 먼지구덩이 속에 난 그대로 파묻혔다.


볼에서 느껴지는 따갑고 부드러운 감촉. 유난히 고요한 주변. 한층 차가워진 바람. 폐에 부스러기가 들어찬 듯 답답한 느낌에 가래 기침을 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눈앞이 뿌예서 어질어질했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부들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꼬리를 살랑이며 앉아있는 구름이가 보였다. 뽀얀 털에 먼지가 소복히 붙어서 먼지댕이 진돗개가 되어있었다. 아까 걷어차인 곳을 만져보니 이미 피멍이 들어 부어올라 있었고 코에는 피딱지가 얹어져 있어 쌍코피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혀도 씹었는지 입안에 비릿한 향이 역하게 풍겼다. 소매에 닦아낸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남은 차들 말고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아 고요했다. 구름이의 목줄을 쥐고 일어나 아픈 얼굴을 꾹꾹 누르며 반대편으로 건너가 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아는 유일한 목적지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피난처뿐이기에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 희랑이네 할머니가 계신 병원이 있는, 가끔 둘이 버스를 타고 놀러왔던 곳이다. 익숙한 모습과 완전히 붕괴되어 알아볼 수 없는 잔해들이 뒤엉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먼지로 하늘이 뒤덮여 날이 추웠고 땅에서부터 조금씩 느껴지는 지진의 여파가 날 놀래곤 했다. 나는 메마른 목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혹시나 남은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작은 신음소리가 퀘퀘한 먼지 안개 사이로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그쪽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겨보니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기절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리 주변으로 온 바닥에 피가 흐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엎어져 쓰러진 사람의 몸을 뒤집었다. 엉망이 되어 있는 낯선 얼굴이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어? 야! 희랑아 정신 차려!”

“강...혁이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무슨 기구한 팔자를 타고나서 죽어서도 널 봐야 하냐......”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눈 좀 떠봐, 괜찮아?”

“살려줘.......”

 

난 쓰러진 희랑이의 몸을 일으키곤 내 겉옷을 벗어서 희랑이의 온몸에 뭍은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말하길, 뉴스를 보고 할머니를 챙겨드리려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급하게 뛰어오다 붕괴에 휩쓸렸다고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는 두 다리에 급한 대로 다리에 옷자락을 꽉 감아두고 피가 안 통한다며 아프다는 희랑이의 말을 무시한 채 혹시 휠체어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게 있나 둘러봤지만... 당연히 이 재난상황 한복판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그에게 내 등짝을 내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그리 무거운 편은 아니라는 것. 꼬리를 살랑이며 앞서가는 구름이를 따라 한 층 더 무거워진 걸음을 내딛었다.


여기저기 무너진 건물들의 파편을 피해가며 걸음을 내딛었다. 엉망이 된 도로변을 지나쳐 무작정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피난처 표시판을 찾아가며 무너져 가는 일상 사이를 지나쳐 갔다. 경쾌한 걸음의 구름이 뒤를 군말 없이 따랐다. 다른 길로 향하기에는 내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의 책임감을 뒤집어쓰는 것이 두려웠다. 그저 뒤에 업혀 있는 희랑을 위해 무서운 것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이 더 흐를수록 한 층 더 뜨거워진 햇빛 아래서 한참을 걷다보니 태양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운 날씨에 갈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지금 이 순간 다시금 달이 태양을 가려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차라리 어둠 속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 몽글몽글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바라다보며 혼미해져 가는 정신 사이에서 간간히 희랑이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우리 이러다 죽는 건가?”

“아니, 네 등에 업혀서 죽기는 싫은데.”

“그럼 조금 더 가보자.”

 

괜찮은 척을 하며 무너진 지구의 한복판을 산책해 나간다. 아직까진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용기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대책이 없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둘 다 지쳐 말이 없다. 공상을 해본다.

태양은 검은 우주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빛을 내며 제 존재감을 맹렬히 드러낸다. 지구는 적당한 거리에서 태양의 뜨거운 열정을 온화하게 받아낸다. 지구라는 그 온실 속에서 햇빛을 받으며 여러 생명체들은 서서히 자라난다. 그저 파랗기만 했던 행성에 태양은 색을 불어넣었다. 인간이 죽어서 별이 되어 우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평생 태양에게 의지해 살아간다. 그 빛나는 항성을 동경하면서 우리는 그 태양을 따라 일상에 빛이라는 것을 품고 산다. 그 빛은 우리가 앞을 보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고, 때론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사실, 태양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태양계의 중심이 되어 행성들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안정적이게 순환하도록 하는 주인과 같은 별이라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매우 소중하거나 희망을 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뜻이 붙었을 정도로 인간에게 태양은 필수적인 존재이며 오늘이 힘들었어도 내일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우리는 삶이 순환하는 것을 알기에 희망을 건다. 태양이 다시 떠올라 내 창문 안으로 따스한 빛을 전해줄 것을 알 수 있어서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새로운 해가 밝으면, 바다 안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 앞에 둘러앉아 다 같이 소원을 빈다. 그 소망이 태양을 따라 저 높은 우주까지 뻗어나가길 바라면서. 그리고 난 그 빛 아래서 걸음을 재촉한다.

두 번째 피난처 안내지를 찾았다. 숫자가 써져 있음에도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가쁜 숨을 멈추고 잠시 희랑을 내려 앉혔다. 몸이 아프다. 지금 상황은 절망적이다. 내 두 다리가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희랑은 괜히 눈치를 보더니 내 다리를 주무른다. 지친 다리에서 덜림이 전해진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어본 적은 처음이다. 꽤 오래 걷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무 그늘 아래에 겨우 몸을 숨겨도 보도블럭이 달궈져 뜨겁다. 차마 편히 기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다. 날씨가 나아지도록 빌어본다. 평범한 날의 산책로처럼.

난 산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음걸음 나아가다 보면 점점 바뀌는 주변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좋다. 햇빛이 날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인 것처럼 당당하게 산책로를 활보하며 즐거운 상상을 즐긴다. 오늘은 저번과 달라진 모습이 있으려나 하고 가볍게 걸어 나간다. 작은 변화를 마주하는 것은 늘 새롭다. 지구는 둥그니까 이렇게 걷다보면 언젠가 내가 바라는 것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른다. 우연하게도, 세상의 모든 것은 사실 그렇게 시작한다. 그런 점마저 매력적이어서 산책을 해왔다.

지금 나도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연하게 피난처에 도착할 것이다. 내가 먼저 확신을 내리면 길이 날 이끌어 줄 것이다. 길이 먼저 나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위를 걸어가야지 ‘내가 걷는 길’이 되는 거니까. 끈질기게, 지친 내 몸이 멈추는 일이 없도록 더 빠르게 가자. 나 혼자 걸어가는 게 아니니 더 멀리 갈 수 있어. 산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야 멀리 갈 수 있으니까. 그래야 덩달아 걸음도 가벼워질 테니까. 무너진 지구 위 풍경도 아름답다. 먼지가 사그라지어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파랗다. 다시 몸을 일으켜 희랑을 업었다. 자, 산책가자.


태양에서는 폭발이 인다. 흑점 부근에서 폭발이 일어나 채층의 일부가 순간 반짝하고 밝아지는 현상은 플레어, 태양의 표면에서 온도가 높은 물질이 대기로 솟아오르는 현상은 홍염이라고 부른다. 그 뜨거운 불의 구체는 시도 때도 없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대기로 불길을 흩뿌린다. 그 불길이 지금 나까지 태워버리려는 듯하다. 이미 말라 건조해진 목과 전부 타버려 따가운 살결이 아프다.

한계라 느끼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하이얀 빛이 스쳐가며 태양이 보였다. 한 걸음만 더 내딛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그 커다란 화염이 날 잡아먹을 듯이 타오르며 몸을 뜨겁게 달궈왔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쌀알 무늬들 사이 군데군데 보이는 흑점들은 전부 태양의 눈동자인 마냥 날 응시했고 난 그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얼굴 앞에서 플레어가 솟아오른다. 나의 시선을 새하얀 빛이 가려버리자 그 안에 새빨간 홍염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내 동공이 태양에 녹아버린 양 눈앞이 일렁인다. 화염에 잡아먹히기 직전임에도 그 빛의 흐름이 너무 아름다워 불길을 제자리에서 눈으로 쫓았다.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불길에 파묻혀 타오르고 싶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쿵쿵거리는 박동이 귀까지 울려 희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이 막히고 손이 떨려왔다. 홀린 듯 빛에 취해 떨리는 걸음을 내딛어 태양 속으로 파묻혔다.

태양 속은 뜨겁다는 자각도 못할 정도로, 붉은 빛이 아니라 너무 밝아 하얀 빛 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불타는 새하얀 방 안에 갇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곳이 빛이었다. 눈이 시려워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어 그 안을 터덜터덜 헤맸다. 진짜 같은 환상에 겁이 났고 천천히 타는 듯한 피부에 다급해졌다. 그때 커다란 흑점이 새하얀 빛 중앙에 보였다. 코로나에 둘러싸인 달처럼, 내가 보았던 일식과 닮은 흑점이 보였다. 그곳으로 녹아 흘러내려 바닥에 쩍쩍 눌어붙는 걸음을 디뎌본다. 어둠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시선은 서서히 선명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감은 눈을 떠본다.

 

“멍!”

 

구름이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 다시 눈앞이 선명해졌다. 저 멀리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에게 의지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까워졌다. 그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섞여있다. 반 죽어가다 앞을 보곤 희망에 차 신나하는 희랑을 업고 달린다. 이미 한참을 걸어온 신발이 아주 닳아버리도록 뛰어가 본다. 태양이 떠있는 한 희망이 있고, 우연하게도 피난처가 길 잃은 우리를 찾아냈다. 산책은 이렇게 언제나 돌아올 곳이 있기 마련이니까 쉬이 떠날 수 있는 거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결국 돌아왔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울컥이며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다행이야, 도착했어.

 

“야 도착했어, 피곤해 돌아가시겠다.”

“드디어 왔네, 넌 가서 좀 자라.”

“근데 너 그 전에 치료부터 받아야지.”

“아, 다친 거 까먹었다.”

“........어휴 더위 제대로 먹었네.”

 

산책이 끝났다. 아직 걸어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이제 쉴 시간이야. 

태양이 저물며 폭풍이 고요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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