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하하. 졸라 웃기네.”

 

자신의 집을 팔겠다는 태형의 말에 지민의 웃음이 터졌다. 그냥 웃은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포복절도. 지민이 허락만 하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집으로 가려던 태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지민이 웃은 것은 난데없이 집을 팔겠다고 나선 태형 때문이 아니라, 태형의 그 말에 윤기가 10년쯤 묵은 취두부를 씹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민윤기 표정 봐. 아이고 눈물까지 다 나네. 내가 형 알고 지낸지가 10년인데, 방금 그 표정은 조금 웃겼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눈물이라도 난 듯 지민이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눈물을 콕 찍어내는 시늉을 한다. 지민의 말에 태형이 자신을 돌아보자 윤기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지만 조금 늦었다. 환멸과 체념이 반쯤 섞인 표정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겨우 웃음을 진정한 지민이 말을 이어간다.

 

“하긴. 태형이 말이 뜬금없긴 했지.”

 

태형은 지민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민이 그 펜트하우스를 원하는 이유가 그곳이 단순히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고가의 맨션이기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그 집은 어린 지민이 나중에 무용가로 성공해서 아버지에게 사드리기로 한 약속의 집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태형 역시 그래서 그 집이 유난히 끌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형 자신은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탓에 지민과 지민 아버지 사이의 돈독한 유대감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민에게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율법과도 같은 것임은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살게.”

 

역시 태형이 기대했던 그대로 경쾌한 대답이 떨어졌다. 갑자기 생각해낸 임기응변이라기엔 성과가 너무 좋다.

 

“박지민아. 잘 생각해라.”

 

윤기가 어깃장만 놓지 않으면 말이다. 윤기가 얼마나 지민을 말리고 싶어 하는지가 목소리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생각할게 뭐 있어, 형. 형도 알잖아. 내가 그 집 사고 싶어서 안달 냈던 거. 집주인이 판다는데 생각 바뀌기 전에 얼른 잡아야지. 무슨 문제 있어?”

 

집을 사고파는 것 자체는 문제 될 일이 아무 것도 없지. 문제는 집을 팔겠다고 나선 집주인의 속내이다. 5분전까지만 해도 집을 매각할 의사가 1도 없던 김태형이 지민이 가장 혹할만한 미끼를 내던졌다. 마치 지민이 그 집을 얼마나 원했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지민은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윤기의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다.

 

‘이거 불길한데.’

 

지민이 이상하리만치 그 집에 욕심을 낸다고는 생각했다. 지민은 원체 물욕이 없는 아이였다. 몇 년 전 새 옷도 아니고 윤기가 입다가 준 가죽 라이더 재킷을 아직도 입고 다닌다. 그렇게 묵은 지 마냥 꺼내 입는 옷이 한두 벌이 아니다. 생긴 것은 백화점에서 산 명품 브랜드의 실크 잠옷을 입고 자게 생겨놓고서는, 인터넷에서 산 39800원짜리 잠옷을 헤질 때까지 입는 아이라는 말이다.

호사가들이야 지민의 사복이 얼마고 가방이 어쩌고 떠들지만, 지민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소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은 가격이었고, 새로 산 옷들도 그 옷들도 갖고 싶어서 산 것이라기보다는 오로지 팬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구매한 것들이었다. 예쁘기만 하다면 싸던 비싸던 신경 쓰지 않았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 지민이 유난히 집착하는 것이 그 집이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가격의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심지어 지민은 웃돈까지 얹어줄 생각도 했더란다. 그렇게 원하던 펜트하우스를 놓치고 지민이 얼마나 속상해 했는지 지민의 주변 사람들이라면 다 알았다. 속없고 낙천적인 신주호 마저 지민을 위로할 정도로. 그러다 문제의 집주인이 김태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기에 집 문제는 다 끝이 난 줄 알았는데....

 

“말 바꾸기 없기에요, 집주인님. 아시겠지만 제가 집주인이 말 바꾸는 거에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다소 장난스럽게 뱉어낸 지민의 말에서 지민이 지금 얼마나 기대감에 들떠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당장 계약할까?”

“에? 김태형. 사업 하루 이틀 해? 중개사도 없이 무슨 계약이야. 그러다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대표님. 법무 팀 윤변호사님이 중개사 자격증도 있다고 했지? 내 대리로 일처리 부탁해도 될까?”

“어. 윤변에게 말해 놓을게.”

“들었지? 윤기 형에게 네 대리인 번호 남겨놓고 가. 자세한 건 변호사님 통해서 연락할게.”

“너, 너, 너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나가려는 지민을 다급히 붙잡느라 태형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나? 나는 연습하러 가야지. 휴식시간이 다 끝나가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계약 조건에 대해 나하고 의논도 하고.”

“변호사님이랑 의논하라니까. 어차피 그 집 시세 뻔하고. 니가 얼마에 샀는지 다 아는데, 너무 무리한 액수만 부르지 마라. 어지간하면 맞춰줄게. 가능하면 빨리 끝내자.”

“어...어....”

 

집을 빌미로 지민과 따로 만나려고 했던 계획이 어그러지니 태형이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누가 봐도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태형의 모습에 윤기는 피식 웃음이 난다. 오늘 참 김태형의 낯선 모습을 참 많이도 보네.

 

“그리고 형. 내가 내 생일에는 스케줄 잡지 말라고 했지?”

“그런 용건은 나 말고 정 실장이랑 해결해라, 지민아.”

“정 실장은 형이랑 해결 보라던데?”

“............. 난 모르는 일이다.”

“미카가 14일에 귀국한단 말이야. 그래서 13일에 같이 파티 하기로 했어. 내 생일 축하해준다고 러시아에서 온 애를 푸대접 할 수는 없잖아.”

“.............”

“시간 비워주는 걸로 알고 있을게.”

 

태형은 며칠 전 우연히 호텔에서 미카와 마주쳤던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미카는 통화중이던 아마 매니저일 것이 분명한 상대방에게 누군가의 생일선물이라며 팔찌와 맥캘란을 준비하라고 했었지. 그 선물이 누구에게 갈 것인지는 굳이 확인이 필요치 않았다.

나도 지민이 주려고 팔찌를 샀었는데. 19번째 상자와 함께 샀던 얇은 뱅글 팔찌가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팔찌를 어디다 두었더라.

 

“할 말 더 없으면 난 간다.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

“집은? 그래도 계약하기 전에 집은 한 번 봐야하지 않을까.”

“전에 여러 번 봤는데 또 볼 필요 있을까.”

“아니...인테리어도 보고.”

“어차피 이사하기 전에 새로 인테리어 공사 할 건데 봐서 뭐하게.”

 

우리 집 인테리어가 분명히 네 마음에 들 거야라는 태형의 말은 지민이 미련 없이 돌아서서 나가는 통에 지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원하던 것을 얻어서인지 지민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지민이가 많이 바빠. 콘서트가 얼마 남지 않아서. 지민이 예정에 없는 일정 빼려면 전담팀 100명의 일정을 모두 다시 조율해야 해.”

 

윤기가 하는 말의 뜻은 명확하다. 집을 빌미로 지민이를 따로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넌 그냥 적당한 액수를 받고 지민이에게 집만 넘겨주면 된다.

빌어먹을. 태형은 집을 팔겠다고 했던 말을 취소하고 싶다. 집주인이 말 바꾸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지민의 말만 아니었어도 안 판다고 소리치고 나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신의 한 수라 여겨졌던 제 생각이 비루하기 짝이 없는 꼼수로 전락해버렸다.

 

“김태형.”

“네.”

“지금 나 엄청 진지한 거니까 잘 들어. 너랑 지민이가 집을 사고파는 건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니까 뭐라고 못하겠는데. 아까 말했던 거. 생일선물로 위스키 사주기로 한 거. 제발 부탁인데 그것만은 없었던 걸로 해라. 지민이 살리고 싶으면.”

“..........지민이를 살리고.... 싶으면?”

 

매년 생일이 다가오면 지민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자신의 생일날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 중 한 명의 부재만 느껴도 기분이 가라앉기 마련인데, 지민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민이 유치원 다닐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사랑을 쏟아주던 아버지도 지민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가셨다. 매년 지민의 성공이 규모를 달리해갈수록 지민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지민이가 제 생일을 꿋꿋이 버틴 건 딱 두 해였어.”

“.................”

 

그때가 언제인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윤기가 17번째 상자를 선물한 해, 그리고 태형이 18번째 상자를 선물한 그 다음 해.

 

“너도 알겠지. 맥캘란이 지민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건 그냥 술이 아니야. 아버지와 같은 의미라고. 그 아버지도 보통 아버지였냐. 지민이에게 아버지는 너나 내 아버지와는 다르지.”

“...............”

“그런데 니 같잖은 선심 덕에 지민이는 8년째 아버지의 축하를 받지 못하는 생일을 보냈다.”

“................하아....”

 

큰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는 것 말고 태형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두 눈을 감으니 검은 상자를 안고 해맑게 웃던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윤기가 준 17번째 상자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17살의 지민이. 제가 건네준 상자를 보며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지게 웃던 18살의 지민이.

위스키는 제가 사줄 테니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받지 말라고 했던 건 순전히 질투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은 지민이 그 사람에게 저런 웃음을 지어줄 거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지민에게 위스키를 선물하는 중요한 역할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맥캘란이 지민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 다음 문제였던 것이다.

인정하기 두렵지만, 이제야 지민에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왜 자꾸만 지민을 만나려 드냐고 추궁하던 윤기와, 연우. 자신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던 미카와 윤기. 사과는 할 거냐고, 사과를 할 거면 뭐라고 할 거냐고 끈질기게 물어오던 연우. 지민이 자신을 만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안다고 말하자 비웃던 연우.

태형의 잘못은 단순히 지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잠수를 탄 것이 아니었다. 태형은 지민에게서 그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을 빼앗았다. 제 어린 날의 철없음이 뼈저린 후회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아니 감히 후회라는 말을 쓸 수조차 없다. 그러니까 태형의 후회는 깊은 심연의 색이다.

 

“아버지도 없고, 너도 없고. 지민이가 그동안 10월을 어떻게 버텼을 것 같아?”

 

지민이 버텨낼 수 있도록 윤기가 들인 노력은 가히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지민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지민의 옆에 붙였다. 새로 사람 사귀는 것을 힘들어하는 지민이라 일부로 신주호 같은 사람들을 골랐다. 석유장사 아저씨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미카를 서울로 부르거나 지민을 유럽으로 보내기도 했고. 그때가 되면 바빠 얼굴보기도 힘든 서연우조차 기꺼이 지민을 위해 시간을 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 연우가 지민의 집을 찾아와서 술을 퍼마시고 간 것은 이미 다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윤기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팬들에게 생일날까지 부려먹는 비인간적인 소속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생일날 스케줄을 빡세게 잡았다. 일이 많으면 시간이 빨리 가고 몸이 피곤하면 잡생각이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올해 생일은 제발 아버지 축하 좀 받게 해주라.”

“................”

 

태형의 침묵을 윤기는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너희 변호사 번호 놓고 갈래, 아님 우리 윤 변 번호 줄까?”

“..........내일 제 비서에게 형네 법무 팀으로 연락하라고 할게요. 변호사님 이름이나 알려줘요.”

“윤 변 찾으라 그래. 우리 법무 팀에 윤씨가 한 명 밖에 없어.”

“네.”

 

이제는 태형도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본사에서 마라톤 회의가 태형을 기다리고 있다. 잠시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타이도 다시 조이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비록 여기서는 윤기에게 당황스런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무표정의 카리스마로 불리는 김 본부장이니까.

그런데 연습해야 한다며 한참 전에 나갔던 지민이 다시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마치 무언가를 잊은 것처럼.

 

“아까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냥 나갔는데, 연습실에 도착해서 보니까 깜박하고 김태형에게 안 한 말이 있더라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왔는지 앞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있다. 숨이 찬 듯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헉헉거리던 지민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태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야, 김태형.”

“.....어.”

 

차마 지민의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겨우 대답을 할 뿐이다.

 

“얼굴 좀 들지.”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 할 말이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 지민의 상체가 옆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퍽 하는 타격 음과 함께 태형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비릿한 피 비린내가 입 안에 감돈다.

 

“니 잘난 집이고 나발이고. 먼저 나한테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양심 없는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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