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국의 순주라는 지방에는 기 씨 성에 희언이란 이름자를 가진 젊은 사내가 살았다. 그 사내에게는 꼭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운국에서 제일 어여쁜 미인과 혼인하여 백년가약 맺는 것이었다. 허나 기희언은 혼담 한 번 논해보지 못하였는데, 그가 순주에서 손에 꼽히는 부유한 유지임을 따져보자면 실로 기이한 것이었다. 기희언은 일찍이 관례 올려 긴 머리를 천으로 감싸 틀어 올렸건만 혼담을 논하지 못하여 늘 초조해하며 매파가 대문을 두드리길 바랐다. 참다못한 기희언은 매파를 불러내어 상당한 은자와 보석을 내주며 청을 해보았으나 운국에서 제일 어여쁜 여인이어야 한단 조건을 듣자마자 매파들이 도망치기 일쑤였다. 기희언은 그러면 침울해하며 밤마다 경전을 필사하며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이러다가는 신부의 지참금으로 마련해 둔 은자로 땅이나 사서 무덤 자리를 미리 파놔야 할 참이었다. 기희언이 소득 없이 시름시름 지쳐가던 어느 날, 쥐구멍에도 볕이 든다더니 기희언에게도 혼담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기희언은 운국에서 제일 어여쁜 미인과 혼인하여 백년가약을 맺었더란다. 


순주는 실로 평안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순주는 여태껏 큰 가뭄이나 폭우로 흉년이 든 적이 전무하고, 늘 풍년이었다. 백성들은 해마다 곡물상에 팔고도 먹고 살 만큼 넉넉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고, 곡물상들은 도읍이나 곡식을 심기 어려운 지방으로 열심히 쌀과 밀과 보리를 수레에 실어 날랐다. 그러한 곳이니 사람을 해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목숨까지 빼앗으려 드는 흉악한 이들도 없었고, 순주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순주는 살기 평안한 곳이나 곧 너무 따분한 곳이라며 혀를 쯧쯧 차면서 중앙으로 돌아갔다. 

그런 관리들이 여러 차례 왔다가 되돌아가자 중앙에선 순주 출신의 사람이라면 고리타분한 옛사람이라 치부해버렸다. 그리하여 순주는 딱히 특산물도, 특색도 없고 즐길만한 유흥거리도 전무하여 무료한 지방이나 서생이나 농부가 살기엔 딱 맞아 한 번 정착한 이들이 쉬이 떠나지 못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 순주에선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유지가 존재하였는데, 물론 유지라고는 하나 딱히 관리들과 뇌물을 주고받거나 소작농의 고혈을 쥐어짜는 자들은 아니었다. 순주의 사람들은 온화한 기후 때문인지, 혹은 평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하나같이 느긋하고 여유로웠기에 은자나 곡식을 빌리고 부러 갚지 아니하는 자가 있어도 재촉할 법을 몰랐다. 

중앙의 관료들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도통 화를 낼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기희언은 그런 유지 중 하나이며, 비교적 연배가 젊은 편에 속하였다. 기희언의 부친이라 알려진 기 씨는 본래 순주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말하자면, 기 씨는 갑자기 순주에 나타나 장신구와 비단을 팔아 재산을 축적하더니 그 길로 척박한 북부에 곡식을 팔아 큰돈을 만진 사람이었다. 

기 씨는 그 길로 순주의 땅을 사서 소작농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기 씨는 갑자기 죽었고, 그 아들인 기희언이 모습을 드러내어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곡물상과 비단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희언은 주로 수수한 무명옷을 입고 다니는 순주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다니는 사내였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를 가진 기희언은 매번 그 눈을 휘며 공작 깃털이 달린 접선을 펼쳤다. 순주 사람들은 그런 기희언을 기묘하다 여기며 피했다. 

또한 기희언은 부친인 기 씨와 달리 늘 집에 틀어박혀 경전이나 베껴쓰는 한량이었다. 실상 곡물상이며 비단 장사는 아랫사람에게 맡겨두고 명맥만 간신히 이어나갈 뿐이었다. 도읍에서 들여오는 비단은 기희언의 새 의복을 짓거나, 기희언이 제 부인이 될 여인을 위하여 함에 보관해두었다. 순주 사람들은 어느새 기희언을 입에 거론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기 씨는 본래 순주에서 홀로 살던 자였다. 기 씨가 죽자 갑작스레 그 아들이라 자칭하며 나타난 기희언은 참으로 이상한 자였다. 그 집안의 사용인들마저 제 주인이 순주 사람이라고는 애매하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희언은 열심히 경전을 베껴 쓰며, 매파를 직접 찾아가 혼담을 청했다. 

허나 매파의 주머니만 불려줄 따름이었다. 기희언은 끈질기게 매파를 찾아갔다. 매파의 집 문지방이 닳도록 말이다. 하필 기희언이 운국에서 제일 어여쁜 이를 내자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니 매파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돌려주기도 난처한 은자가 쌓이자 매파는 길길이 화를 내며 기희언을 쫓아냈다. 허나 기희언은 계속 매파를 찾아갔다. 순주의 매파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기에 이르렀다. 기희언은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었다. 재산도 넉넉하고, 술과 노름도 삼가며, 기껏 해봐야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첩실을 여럿 들여 부인의 심경을 괴롭힐 생각도 없었다. 바라는 것이라면 운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일 뿐인데, 어찌하여 혼담이 전무한 것인가? 사람들은 그런 기희언을 보면서 혀를 쯧쯧 찼다. 따져보자면 아름다운 미인은 운국의 황궁 담벼락 안에 있으면 있지, 이런 순주에 있을 리 만무했다. 차라리 기희언은 학식이 높거나, 함께 경전을 베껴 쓸 여인을 찾았어야 했다. 

기희언이 원하는 미인은 색을 밝히는 황제로 인하여 각 지방 곳곳에 파견된 관리들의 눈에 들어 후궁이나 궁인으로 입궁하였으니 기희언의 소망은 참으로 헛된 꿈이었다. 기희언도 지치기는 지쳤는지, 어느 날부턴가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그런 기희언에게 갑작스레 처음 보는 매파가 찾아왔다. 기희언은 처음엔 매파에게 이제 혼담 같은 것은 생각이 없다며 나가라 손짓하였으나 그 매파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순주의 고지식한 매파와는 다릅니다."

기희언은 귀가 솔깃했다.

"순주의 매파들은 말재간이 없어 은자만 받아먹었으니 같은 매파로서 참으로 보기가 안타깝고 자존심이 상하니 먼 곳에서 공자의 소문을 듣고 발품 팔아 이리 찾아왔습니다."

매파는 귀가 솔깃해진 기희언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운국에서 제일가는 미인과 혼담을 주선해드리겠습니다. 허니 이 사람의 재주를 믿어 보시지요."

기희언은 그 길로 매파에게 은자와 보석을 내주었다. 여러 달이 지나, 기희언이 이번에도 속았구나 싶어 경전을 베껴 쓸 때쯤 그때의 매파가 찾아와선 운을 띄웠다.

"이곳, 순주에서 먼 북방의 취성이란 곳에 공자께서 찾는 미인이 있습니다. 공자와 여섯 살 차이니 딱 알맞지요."

그러자 기희언이 들뜬 기색을 숨기면서 매파를 넌지시 떠보았다.

"그이는 어떤 미인인가?"

매파가 화답하길.

"이 운국에서 북방의 미인은 촌스럽단 편견이 있으나 이 미인은 다릅니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보드라우며, 눈썹은 먹처럼 짙고 수려하니 고고한 자태가 흐르지요. 두 뺨은 봄에 핀 복사꽃처럼 발그레 물들었는데 입술은 꼭 앵두처럼 새초롬하니 무릇 사내라면 이 미인이 무리한 청을 하여도 차마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벌써 이 미인에게 빠져 상사병을 앓는 이가 여럿이라지요. 목소리 또한 귀를 울릴 정도로 매혹적이고 듣기에 매끄러우니 실로 모든 것이 완벽한 미인입니다. 언행에는 천박한 기색이 없이 우아하니 타고난 미모가 몸에도 절로 배인 것이지요. 또한 공자께서는 늘 시구를 외고, 경전을 베껴 쓰신다는데 이 미인의 학식이 높다고 하니 틀림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입니다. 이리도 잘 맞는 미인과 혼인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간 공자께서도 겪어보아 잘 알고 계실 터."

과연 매파의 언급대로 마음고생 해온 기희언이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점점 얼굴에 화색이 도는 기희언에게 매파가 중얼거렸다.

"헌데 이 완벽한 조건을 가진 미인에게 흠이 좀-."

"흠이라니?"

매파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린 것도 모르고 기희언이 대답을 독촉했다. 

"어떤 흠이 있더라도 미인이라면 다 용납할 수 있으니 당장 말해보시게."

그러자 매파가 은근히 에둘러 말하기를.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니 솔직히 고해 올리겠습니다. 이 미인의 부모가 일찍이 자식을 두고 떠나며 상당한 빚을 남기고 갔는데, 빚을 갚지 못한다면 숙부가 혼인을 허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기희언은 픽 웃으며 화답했다.

"그까짓 빚이야 내가 갚아주면 되는 것일세."

"허나 공자, 그 빚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이 사람도 어렵게 말을 꺼낸 바이지요."

"대체 얼마나 되기에?"

매파는 곧 기희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빚의 액수를 듣고 기희언도 매우 놀랐으나 호흡을 가다듬고서 의연하게 말하였다.

"미인과 혼인하려면 그만한 대가는 필요한 법이지. 그 숙부라는 이에게 내가 빚을 청산하겠다고 전하고 혼담을 청해주게나."

이내 아랫사람을 시켜 은자가 가득 든 함을 가져온 기희언의 언행에 매파가 감탄했다.

"공자께서는 이 미인을 얻을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그리하여 기희언은 은자가 든 함을 옮길 장정들을 매파에게 딸려 보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미인을 멀리서 보고 온 이들은 그 자태만으로도 미인이라고 하며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그 미인 또한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매파가 기희언이 어찌나 그이를 아껴줄지 말해주자 당장 그 훌륭하신 공자와 혼인하겠노라 말하였다고 전해주었다. 또 두 사람이 일찍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된 신세이니 처지가 비슷하여 서로 의지하면 되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기희언은 그 숙부라는 자에게 후한 지참금까지 더 보낸 후, 초조하게 북방의 취성에서 신부가 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백년가약을 맺는 것만 남은 기희언이었으나, 앞으로 어떤 일이 제게 벌어질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것만이 기희언의 실책이었다. 

1차 BL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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