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택한 선잠이었다.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던 이랑은 얼마 가지 않아 물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잠의 수마는 비단장막과 같이 보드라웠지만, 천리마처럼 빨라서 긴장 없이 잠든 붉은 털의 짐승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낼름 삼켰다. 고급 호텔 침구류는 별안간 올가미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겨우 비집고 나온 말은 이연이었는지 형이었는지 뭉개져서 온전히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작은 음운에 불과했다. 잠결에 내뱉은 말들은 평소라면 쉬이 내뱉지 못할 이랑의 마음이었고, 또 그만큼 부질없는 기억의 파편이기도 했다. 


"…으, ㄴ…."


 무의미한 몸부림 끝에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이랑은 잠에서 깨어났다. 거의 꿈 밖으로 던져졌다는 말이 옳을 정도로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천천히 제 주위를 살피던 랑은 제 호텔방임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하지만 이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제 배를 감싸 안았다. 거칠게 맞물린 살점이 또다시 벌어질 일도 없었지만 두 팔로 동여메듯 몸을 옹송그린 채로 이랑은 온몸을 떨었다. 꿈의 여운이 갈고리를 들고 날뛰는 탓에 얄팍한 뱃가죽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던 불씨가 따라오기라도 했는지 살갗이 지져지기라도 한 듯 몹시 아렸다. 이랑은 덜덜 떨리는 턱을 악물었다. 잇사이로 낮고 긴 울부짖음이 새어나왔다. 포효라기엔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버림받은 애처럼 굴지마. 너 이제 어린애 아니야.'


 등 돌리지마. 니까짓 게 나한테서 먼저 등 돌리지 말라고. 미처 받아치지 못하고 삼켜버린 목소리가 미련스럽게 굴러다녔다. 고작 그 손으로 제 목숨을 거둬 들이지 않는 이유를 들으려 간 게 아니었다. 제 목숨줄을 온전히 넘겨주곤 버릴지 말지 선택하라 종용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랑은 이연에게서 답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원치 않았다. 그는 제가 원하는 답을 돌려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다.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도 순순히 말해주지 않았다. 이연은 더이상 산신의 지위에 있는 자가 아니었지만 이타심이라고는 여전히 찾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오만한 절망감과 오기로 점착된 감정이 잠식되는 순간 고리타분한 잿더미 냄새가 꾸역꾸역 밀려 올라왔다. 그 때 삼킨 그을음이 폐부에 그리고 이 뇌리 속 깊숙히 파고든 탓인지도 몰랐다. 매캐하고 탁하기만한 냄새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콧속에서 입안에서 그리고 이 작고 동그란 머리통에서도 케케묵은 숯 검댕이 나올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힌 이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밤바람을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이 망할 놈의 호텔 창문을 왜 다 열리지 않는거야. 안전상의 문제라기엔 이러다 불이라도 나면 오도가도 못하고 방 안에서 타죽기도 전에 질식사하기 딱 좋을 성 싶었다. 기어코 억지로 힘으로 밀어부쳐 창의 걸음쇠를 망가트린 이랑은 마른 가슴팍을 헐떡이며 창틀에 몸을 쭉 뺀 채로 늘어졌다. 


"나가라. 제발 빨리…."


 고작 사나운 꿈자리 하나에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혀 있었다. 겁을 먹었다. 자존심 따위 운운할 여유조차 없었다. 인간과 비교한다면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다지만 꿈속에서는 그저 도망가기 급급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새 공기가 필요했다. 숨을 쉬고 싶었다. 시뻘건 기세로 저를 삼키려 들었던 화마와 발을 내딛는 곳곳마다 숨이 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공포감은 온몸을 저릿하게 했다. 한낱 먼지가 되어버린 잿더미 속은 늪 같아서 자꾸만 뛰어 도망치려는 이랑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도망치려 한 것인지 누군가를 애타게 찾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 언제나 그럴 듯한 끝맺음 없이 지레 놀라고, 힘들어 견딜 수 없어 깨어버리는 꿈은 명치께의 통증을 동반했다.

 

 생리적인 눈물인지 눈앞이 뿌옇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눈 깜빡임 한 번에 고층빌딩의 수놓은 조명들이 빛알갱이가 되어 부셔져내렸다. 자동차의 클랙션 소리, 부지런히 어딘가로 향하는 구둣발 소리, 어느 좁은 골목에서 텃세를 부리는 길고양이들의 앙칼진 소리와 영원히 잠들 것 같지 않은 도심의 소리들이 폭포수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여름의 풋내가 섞인 바람이 이마에 가닥가닥 붙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고층 빌딩 사이를 오가는 바람 속에서 이랑은 비냄새를 맡았다. 


 차라리 지금 쏟아지면 좋으련만. 검이라기엔 단순하기 그지없고,  우산이라기엔 가볍고 눈에 띄는 붉은 우산을 본 기억이 있엇다. 왜 지금 그 우산의 주인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매사에 시큰둥하고 도통 정이라고는 없으면서도 저를 여전히 곁에 멤돌게 하는 이상한 이복 형제말이다. 젠장. 아직 잠이 덜 깬 탓이라 치부하며 이랑은 푹 젖어버린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도르륵 이른 빗물이 흘렀다. 





"이랑님."

 여분의 카드키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인지라 쫄래쫄래 고운 하얀 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방방 뛰어 올 방문자 또한 한 명뿐이었다. 이랑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벽에 기대려 앉으려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타고 볼품없이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꼴사납게 뭐하는 짓인지. 

"뭐하세요?"

 대답대신 이랑은 훤히 젖혀진 창문을 고개짓으로 가르켰다. 걸음쇠 끝에 간신히 걸린 나사가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삐걱거렸다. 꽤나 버거운 몸짓으로 이랑은 무너진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반듯하게 등을 벽에 기댄 채 앉을 수 있었다. 


“탄 냄새가 나서.”

"탄 냄새요? 하나도 안 나는데요." 


 순수하게 의문을 갖는 목소리는 크지않음에도 잘게 골이 울려 랑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려 덮었다. 제 살갗이 내어주는 온기에 서서히 안정을 되찾으며 이랑은 얕게 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불에 탄 들판도 아니었고, 그저 콘크리트 빌딩으로 우뚝 솟은 도심 한복판일 뿐이었다. 손을 내리자 궁금한 것 투성이인 유리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은하수를 빼어닮은 예쁜 눈동자 안에 수심이 가득했다. 물음표가 걸린 말간 턱끝을 건드리자 그제야 베시시 웃고만다.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다. 아는 것이 적고, 고작 철창 안 세상과 제가 귀띔 해 준 것만 아는 아이였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나 이런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뭔지 알겠다.”

유리의 눈매가 얄쌍하게 접히며 화사하게 웃었다. 니가? 뾰족한 말은 굳이 내뱉지 않으며 이랑은 물끄러미 고개를 올려 유리를 쳐다봤다. 정답을 알아챈 아이 같은 해사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나도 그런 거 있어요. 시멘트나 녹슨 쇠 냄새요.”

동물원 생각나서 기분 더러워요. 이랑 님이 구해주셔서 나 이제 거기 없는데 말이죠. 싫은 거죠? 이랑님도 탄 냄새가. 왜인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반쯤 맞춘 건 알아챈 해맑은 얼굴이 호텔방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청소부 불러서 방 좀 청소하라고 할까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바꾸라고 할게요. 이 방 좀 오래 썼죠. 다른 방 써보실래요? 여기서 탄 냄새가 나요?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코를 갖다대지만 여기도, 저기도 새 가구의 냄새뿐이었다. 흐음. 궁금증이 해소되지 못한 유리는 고민 끝에 손바닥만한,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숄더백에서 향수를 꺼내 이리저리 뿌렸다.

"아직도 나요, 탄 냄새?"

 허공을 휘젓는 유리의 손길을 따라 달디단 복사꽃 향이 퐁퐁 피어올랐다. 몇 시간만에 처음으로 편하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제 하나도 안 나."

이랑님 그럼, 우리 나가서 놀아요. 유리가 앞으로 내민 손을 쭉 펼쳤다. 부드럽고 유연한 버드나무 같은 손가락에 걸린 자동차 키가 보였다. 새 장난감 타 봐요. 그래, 시승식라고 하지 그런 거. 내려가 있어. 준비하고 내려 갈게. 이랑의 말에 유리는 어린아이처럼 팔짝 뛰며 방을 나섰다.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앉아있었던 탓에 등허리가 뻐근하고 아팠다. 옷장 안쪽에 달린 거울에 비친 얼굴도 꽤나 피곤해보였다. 괜찮아. 어디든 불길 속만 아니면 되겠지. 이랑은 새 셔츠를 꺼내 입는 내내 떨리는 손 끝을 애써 무시하며 단추를 꼼꼼하게 잠궜다. 거울 속 제 모습이 낯설다가도 자꾸만 누군가와 겹쳐보여서 보기가 싫다가도 또 눈길이 갔다. 그래도 꼴에 형제라고 닮은 구석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지독하리만큼 아팠던 불길을 빼닮은 눈동자가 거울 속에서 보인 것도 같았다. 그 눈. 항상 그 눈이 문제였다. 차라리 꿈 속의 불길이 나았다.  들불이 담긴 눈동자를 가진 자의 무관심은 꿈 속의 화마보다 곱절은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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