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처음 보는 나 - 이현경







키스 앤 라이드

Kiss and ride







새벽 여섯시부터 이모가 올라온 바람에 잠에서 깼다.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눈도 못 뜬 채 현관문을 열며 내가 물었다. 그도 그럴 게, 7년간 연재했던 아빠의 첫 장편 웹툰(이자 데뷔작, 국내 최대 플랫폼에서 7년 연속 수요일 1위를 놓치지 않은 어쩌구…) 가 어제 완결되며 아빠와 나, 이모와 재현이 넷이서 소소하게 시작한 축하 파티가 주종 섞어먹기 대회가 되면서 맥주에서 소주, 와인에서 막걸리까지 섭렵하며 웃고 떠들다가 이모의 집에서 아빠와 내가 올라온 게 새벽 두 시였기 때문이다. 만취 상태로 네 시간을 자다가 깼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순간 식도가 뒤집어질 것 같은 욕지기를 느끼다가, 이모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 몸집만 한 카트를 보고 놀라 술이 다 깼다.

 

“이모, 이거 이모 숍에 있는 거…”

“어. 우리 집에도 있잖아.”

“얠 엘리베이터 태워서 오셨어요?”

“못할 게 뭐야? 모래 네 말대로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

“아니, 근데 왜…”

“윤준식 아홉시에 인터뷰 있다며? 7년 만에 매체에 처음 얼굴 드러내는 건데 좀 찍어 바르고 머리도 해야지.”

 

너희 아빠 입을 옷도 몇 벌 챙겨 놨어. 조금 있다가 재현이가 갖고 올라오기로 했다며, 정작 아빠는 코 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울리게 자는데 이모 혼자 분주했다. 안 그래도 어제 아빠는 소파에 가진 옷 전부를 늘어놓곤 고민했다. 가진 옷 전부라봤자 몇 년 전에 마트에서 세일할 때 종류별로 산 마블 히어로 맨투맨 다섯 벌이었다. 작업실 출근할 때마다 요일별로 바꿔 입어 와 닳을 대로 닳은 것들.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 사이에서 고심하던 아빠를 보곤, 옷 사러 갈 시간에 원고해야 한다는 핑계 댈 것도 이제 없으니 새 옷 좀 사러 가자고 끌고 가려다 실패했는데. 아빠 사이즈도 뻔히 알면서 왜 내가 알아서 사 올 생각을 못 했을까. 역시 나보다 아빠를 잘 아는 건 이모였다.

 

“고마워요, 이모.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어디 네 탓이야? 더벅머리가 되도록 귀찮아서 컷트도 안하고 나이값 못하고 캐릭터 옷이나 입고 다니는 윤준식이 문제지. 참! 머리도 좀 잘라야겠다. 모래야, 바닥에 신문지 깔고 식탁 의자 좀 놔줘.”

“일단 아빠부터 깨울게요.”

“그래. 그게 좋겠어.”

 

C시의 뷰티업계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홍새벽 살롱을 운영하는 이모의 컷트와 시술을 예약 없이 언제나 받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재현이와 나, 그리고 아빠뿐이었다. 5년 전, 포화상태에 가까운 웹툰 시장을 그야말로 찢고 들어왔다고 평가 받으며 아빠는 데뷔 2년 만에 떼돈을 정산 받았다. 둘이서 평생을 살아 온 서울의 9평짜리 투룸 빌라에서 이사하며 근교의 신도시는 물론 서울 내의 아파트로도 갈 수 있었지만, 아빠가 고민 없이 C시로 온 건 여기에 이모가 있어서였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거의 평생을 알고 지냈고, 배우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이모와 아빠, 두 사람이 남매처럼 서로를 의지 하는 것처럼, 나와 재현이가 그런 관계로 자라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홍새벽이 날 답 없는 오타쿠 새끼라고 매일 구박했지. 애 병원비는커녕 당장 분유 값도 없어서 매일 돈 꿔달라고 전화하면서, 당장 나가서 돈 벌 생각은 않고 병원에 24시간 붙어서 간호하면서 그림만 그려댔으니까. 욕하고 구박하면서도 재현이 꺼 사면서 한 통 더 샀다고 매번 분유 보내주더니, 알고 보니 재현이가 돌 지나서 분유 끊은 뒤에도 계속 모래 네 개월 수 맞춰서 분유 보내 줬던 걸 나중에 알았어.”

“그래 이 오타쿠 새끼야. 하늘이 도와 잘 풀린 걸 천운으로 알고, 너 같은 아빠 밑에서 자기 혼자 열심히 큰 모래한테도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어. 알겠어?”

“혹시 그때 재현이 돌 반지를 내가 일시불로 못해줘서 5년 째 할부로 갚고 있는 건가?”

“재현아, 너 무슨 차 갖고 싶다고 했지?”

“엄마 나 CX90!”

“어. 아저씨가 18년 전에 약속했거든? 너 장가갈 때 차 사준다고. 못 받은 돌반지 눈덩이처럼 굴려서 그때 꼭 받아, 알겠지?”

“알겠슴다.”

 

정정해야겠다. 서로 의지… 가 아니라 아빠가 이모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한 관계였다는 걸로. 아빠가 데뷔하기 전까지 13년간 이모는 우리 부녀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으니, 아빠가 할부로 갚고 있다는 5년도 아직 한참 부족했다.

커트를 끝낸 이모가 아빠를 욕실로 집어넣었고, 나와 재현이가 일사분란하게 머리카락이 떨어진 신문지를 잘 접어 치우고 테이블 위에 이모가 가져온 화장품들을 셋팅했다. 엄마 근데 화장까지는 좀 오버 아니야? 재현이 말에 나 역시 무언으로 동의하는 바였으나, 이미 팔레트에 파운데이션과 비비를 짜서 섞고 있는 이모는 단호했다. 무슨 소리야? 윤준식이 누구 아빠라는 거, 적어도 이 동네에선 이제 다 알게 될 텐데. 안 그래도 홀애비가 꼬질꼬질한 모습까지 보이면 사람들이 모래를 불쌍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건 못 참지.

 

“이모. 감동이에요. 한 번만 더 말하면 백 번인 거 알지만 제 새엄마가 되어 주시면 안 돼요?”

“모래야… 나한테 윤준식이랑 같은 급으로 취급 받고 싶니?”

 

이모와 호적으로 얽히기… 오늘도 실패다.

 

 

 

 

 

 

 

 

 

“가끔 보면 너도 웃겨. 원장님이랑 호적으로 엮이면 재현이랑도 남매가 되는 거란 생각을 못 하는 거야?”

“지금이라고 되게 다른 관계는 아니잖아.”

“재현이 걔 성격에 반년 빨리 태어났다고 얼마나 오빠 유세를 떨겠어.”

“그런가…”

 

세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차피 재현이가 절대로 싫다고 했어.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재현이도 이왕 새아빠가 생긴다면 이모와 어울리는 근사한 아저씨인 게 좋겠지.

그나저나 한동영 얘는 좀 심각한 거 아냐? 지난주에 바로 이 다음 골목에서 밥 먹어놓고 여길 못 찾아서 재현이를 호출해? 기이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는 동영이의 길눈 감각을 세희가 심각하게 걱정했고, 나는 식당의 유리 창밖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미나를 내다봤다. 공준우네 그룹이 저번 주부터 아시아 투어를 갔댔나. 공연 준비 하는 잠깐 짬을 내 공준우가 전화 한 모양이었다. 같은 한국 하늘 아래에서도 롱디 같은 연애일 텐데, 준우가 아예 해외로 나가버리자 미나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말라갔다. 눈 아래까지 도톰하게 차오른 볼살까지 다 내려갔을 정도였다. 걱정이네…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내 처지라고 다르지 않기도 했고.

식당 문이 열리며 재현이가 동영이를 데리고 들어온 건 그 때였다. 버젓이 미나의 가방이 있는데도 동영이가 내 옆 자리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미나의 가방을 건네받은 내가 얼떨떨하게 그걸 반대편 옆 자리에 놓았다. 넌 걸을 때도 네이버 길찾기 켜고 다녀. 알겠어? 재현이가 한 소리 하든지 말든지 너른 어깨를 내게 딱 붙이곤 대뜸 귓속말을 했다. 무슨 일인데? 밥을 다 산다고 하고. 그러고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는데, 동영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얼레벌레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런 거 아냐!

 

“고연대 아직 연락 없나보네.”

“이미 문 닫았나봐.”

“아쉽네. 아침마다 너 태우고 등교 같이 하려고 했는데.”

“뭐? 서울에?”

“뭐야. 그 눈빛 뭔데, 윤모래.”

“너 대학 어디 가는데?”

“어디 가냐고 물으면서 얼굴은 네가 대학을 어떻게 가냐는 얼굴인데.”

“그런 거 아니야.”

“너 나한테 진짜 한 톨의 관심도 없구나, 윤모래.”

 

뭔 소리래… 중얼대는 사이에 미나가 돌아왔다. 한동영. 여기 내 자리거든? 동영이를 건너편 자리로 밀어 보내고 제 자리에 앉은 미나는 언뜻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묘하게 울고 난 얼굴처럼 보였는데, 그걸 눈치 챈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동영이가 길을 헤매는 사이 시켜 놨던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다들 서둘러 젓가락을 드는데 재현이가 마치 중대발표가 있는 사람이 자기인 양 켐켐,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일순 시선이 집중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애들아. 윤모래가 할 말 있대.

드디어 때가 왔다. 아빠의 인터뷰는 저녁이면 온갖 매체에 퍼다 날라질 거고, 애들이 언제 알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말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신비주의를 표방한 건 아니었지만 연재하던 칠년 간 아빠가 단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명 ‘윤작가’의 사생활은 그동안 알려진 바 없었고, 착한 세희와 미나는 우리 아빠를 처음 만나곤 동네 백수에 다름없는 행색에 뭐 하시는 분인지를 묻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한 번도 우리 집에 대해 물어보지 않아서, 이런 사정을 유일하게 재현이만 아는 채로 고등학교 3년이 흘러버렸다.

그런데 어떤 말로 서두를 시작해야 하지. 재현이에게서 내게로 옮겨온 여섯 개의 눈동자를 피해 허공을 응시하다가, 그래 무슨 말이든 시작해보자! 하고 숨을 크게 들이 쉴 때였다. 테이블에 올려둔 내 핸드폰이 맹렬한 벨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제가 윤모래 학생인데요. 네. 네. …네? 어디요?”

 

 

 

 

 

 

 

 

 

이겸이는 메시지보단 전화를 해 달라고 당부했다. 워낙에 핸드폰을 잘 안 봐서, 전화 벨소리면 몰라도 카톡은 무음이라 못 들을 거라고. 대신 벨소리를 늘 최대로 키워 놓고 있겠다고 했다. 몽골과의 시차 역시 겨우 한 시간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내가 이겸이와 통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열 시 무렵. 이겸이가 아카데미에 가 있을 시간에 카톡을 해 두면 저녁 안으로는 답장이 왔고, 하루 간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고 난 뒤에 이겸이는 내일 또 아침부터 공부를 하기 위해 자야 했다. 또 통화를 한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리가 친한 건 아니었다. 우리의 대화는 특별할 것 전혀 없이 지극히 일상적이었고, 또 묘하게 겉돌기만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좀, 고민을 하긴 했다. 이 정도의 용건이면 메시지보단 아무래도 전화를 하는 게 맞나 싶어서.

 

[나 붙었어.]

[고연대 문창과. 오늘 추합 마지막 날이었거든.]

 

완전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아까 애들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갔다가… 로 이어지는 사족은 후략한 메시지를 아까 보내두었지만 아직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피곤해서 일찍 자는 건가. 몽골은 밤 아홉시 남짓 될 시각이긴 했다.

내일이면 답장 오겠지? 기뻐해 주겠지? 생각하며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서울에 인터뷰를 하러 간 아빠는 플랫폼 사람들과 회식 한다며 아직 귀가 전이었고, 내 합격 소식을 들으면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달려 올까봐 재현이와 이모에게 함구령을 내리고는 예치금마저 내 통장에서 빼 스스로 냈다.

 

“기분… 너무 좋다.”

 

지금 이 순간, 아쉬운 게 딱 하나 있다면 방에 불을 꺼 줄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 형광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린 눈을 깜빡였다. 네 시간 밖에 못 자고 새벽같이 일어난데다가 도랑만큼 좁은 내 인맥 전부에게 대국민발표를 앞두고 오전 내내 긴장했고, 기대도 없었던 추가 합격 소식으로 오후 내내 또 진을 썼으니 말 그대로 기진맥진했다. 과한 감정들이 온종일 밀려와 피곤했지만 잠들기가 힘들었다. 뒤척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고, 예치금 넣어야 한다며 밥만 먹고 돌아온 나를 제외하고 자기들끼리 술 마시러 간 애들이 나오라고 한 전화인 줄 알고 심드렁하게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이겸이었다.

 

“미쳤나봐!”

 

침대에서 그대로 튀어 올랐다. 사람 목소리 같지 않았던 내 외침을 이겸이가 듣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고민 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고 선택지는 더더욱 적었다. 이겸이가 전화를 끊어 버릴까봐 조급해 나는 일단 통화 버튼을 밀고 봤다. 전화벨이 끊겼고 대신 수화기 너머에서 미세하게 지직이는 소리가 났지만 이겸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물리적 거리만큼의 착신 시간이 필요한 걸까. 내가 여보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에 이겸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모래야.

 

정말로 이겸이의 목소리였다. 전화 하는 건 처음이라,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음성이 묘하게 낯설다는 생각. 내 말문이 턱하니 막혀버린 건 이겸이와 통화하는 게 어색해서라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신이 나빠서 안 들리나보다.

“…….”

―끊어야 되나.

 

결국 이겸이가 혼자 결론 내릴 때까지 멍하게 있던 내가, 끊어야겠다는 말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들려!”

―모래야.

“나 들려! 들려, 강이겸!”

 

하하하하. 이겸이가 길고 낮게 웃었다. 나는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걸 느꼈는데, 입은 영문 모르게 이겸이를 따라 웃으면서도 눈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강이겸 아니라 이겸이라니까.

“아. 미안.”

―메시지 봤어. 이런 축하는 전화로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구나. 답장 없어서 자는 줄 알았어.”

―고민 좀 했어. 혹시 통화 불편한가 해서.

“아니야.”

―전화 달라고 해도 한 번을 안 걸길래.

 

그럼 자기가 하면 되지.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옮기진 않았다. 꼬깃꼬깃 접어 뒤끝 리스트에 조용히 밀어 넣어 두었다.

 

―축하해. 진심으로.

“고마워.”

―자세히 얘기 좀 해 줘. 전화를 받은 거야? 뭐 하고 있다가?

 

이겸이가 말꼬 트기가 무섭게, 문자로 적을 땐 후략한 뒷이야기들을 내가 풀어놓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았을 때 아이들이 다 같이 있었다는 거, 어차피 내가 사려고 했던 밥이긴 한데 그게 합격 축하 턱이 되었다는 거. 그러다보니 아빠 얘기도 하게 되었고(이 대목에서 이겸이는 전화 한 용건을 잊고 잔잔한 충격에 빠졌고, 아빠의 단행본을 모두 초판본으로 갖고 있다며 귀국하면 꼭 사인을 부탁드릴 거라고 했다.) 이야기 하다 보니 나도 합격한 기쁨에 이절 삼절 하며 세희나 미나에게 얘기하듯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친하지 않은 사이라 통화가 어색할거라고 걱정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하려다가도 잊는 말들이 전화로는 술술 나오는 게 신기했다. 어제 먹은 술이 아직 안 깬 걸지도 몰랐다. 할 말 들을,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쏟아내고 나니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왔고 그제야 몰려오는 어색함으로 발가락이 다 구부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잘 됐다. 나 사실, 미안해서 계속 신경 쓰였거든.

 

졸업식 날의 이야기였다. 너 때문에 대학 떨어졌다고, 그러니까 책임지라고 화를 냈었지. 내가. 그걸 여태 마음 안좋아 하고 있었다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다.

 

―공항에 나오란 얘길 괜히 했나 싶었어.

“내가 말도 안되는 화 낸 거야. 내가 미안해. 여태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어.”

―화를 내서가 아니라, 네가 울어서.

“…….”

―너 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모래야.

 

이겸이의 울적한,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음 어딘가를 긁고 지나갔다. 졸업식 날, 사실 그 사건만 있지는 않았다. 그 날, 나는 집에 와서도 밤새 울면서 하루를 보냈고 심장이 물에 젖어 축 가라 앉은 것 같은 기분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몽골에 돌아간 이겸이와 계속 연락 하긴 했지만 둘 중 누구도 그 때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나로선 최선의 방법으로 마음을 전달한 거라, 이제 대답을 기다리는 쪽은 나였는데 이겸이는 무슨 생각인지 이 관계를 선뜻 정의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정한 친구 사이로 남기엔… 친구끼리 뽀뽀하지는 않잖아.

 

“난 괜찮아. 이겸아.”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 다 말해 주겠다고, 이겸이가 그렇게 얘기 했으니까. 기다릴지 말지 온전히 내 선택에 맡기겠단 말이었고, 나는 그런 이겸이를 기다리고 싶었으니까.

 

“너는 잘 있어?”

―나?

“몽골은 2월에도 영하 20도라고 하더라. 추운데 잘 있나 싶어서.”

―응, 뭐.

 

망설임 없이 대답부터 해놓고 이겸이가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그리고 돌아온 말은 완전히 내 예상 밖이었다.

 

―아니, 잘 못 지내는 것 같아.

“정말? 무슨 일 있어?”

―그냥. 모래 네 말대로 여긴 무지 춥기도 하고, 한인들이 모인 마을에서 사는데 아카데미 학생들은 거의 몽골 말 배우러 온 영어권이야. 뚜렷한 목표 없이 지내는 시간이 처음이거든.

 

이겸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겸이를 잘 모르는 나지만 이 순간의 그 말 만큼은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카데미 과정이 끝나면 오프로드 투어를 갈 거야.

“헉. 초원에서 말 타고 게르에서 자는 거?”

―말을 이동수단으로 타진 않겠지만. 하하.

 

[여기 공항 이름이 칭기즈칸 공항이야.] 울란바토르에 도착해 이겸이는 제일 처음 그런 문자를 보냈었다. 혼자서도 한국에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굳이 부모님을 따라 나선 건, 그 나라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문화적 호기심이 있어서였던가 보다.

 

―원래는 연말까지 있다가 아버지랑 같이 귀국해서 삼수생 같은 초수생이 되려고 했는데, 10월 말쯤에 귀국해서 올해 수능을 볼까해.

“왜 계획을 바꿨어? 이왕 간 거 하고 싶은 거, 충분히 경험하고 오면 좋잖아. 나중에 아쉽지 않겠어?”

 

 

초원에서 말 타다 떨어지고 게르에서 자다가 입 돌아가라는 지난 날 저주를 속으로 마구마구 취소하며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수능 한 달도 안 남기고 들어와서 공부는 언제 해?”

―글쎄. 시험지 보고 아는 것만 풀지 뭐.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정말 대책 없다.”

―날 엄청 잘 봐줬나보네.

“어떤 전공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돼?”

―부모님께선 의예과 가기를 원하셨어. 근데 난 잘 모르겠어. 사실 그냥 적당히 남들 기대 맞춰서 공부하고 지냈으니까.

“적당히라니, 전교 일 등이 할 말은 아니다. 혹시 그래서 작년에 수능 안 보고 몽골 간 거야?”

―80%는 그런 이유였어. 유예하면서 뭘 하고 싶은지,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려고 했거든.

 

세희야 진작에 항공학과를 준비해 이미 수시를 붙어뒀고, 신발 끈 리본 묶는 모양까지 부모님이 결정해주시는 미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부모님의 바람대로만 수능을 준비해 사대의 수학교육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재현이는 실기 100%으로 일찌감치 실음과에 합격해 놓고도 혹시 모르니 인문계열도 하나 준비 해둬야 한다는 이모의 극성에 한 학기 내내 울며겨자먹기로 나와 함께 논술학원을 다녔어야했다.

일단은 전공만 선택해 놓고, 학교는 점수 나오는 대로 가려고. 이겸이의 대답은 산뜻했으나, 삼 년 내내 거의 전교 일 등만 했다는 내신도 버려두고 몽골로 갔다는 건 확실히 포기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흐름을 거스르고 스스로를 결정하기 위해 탈주한다는 건, 이겸이가 겉으로는 그저 순응적이고 또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는 것관 다르게 오히려 자신의 진로에 대해 무수한 고민이 있는 걸로 보였다.

 

―아무튼 축하해. 이 말 하려고 전화한 건데 별 얘길 다 했다.

“응. 정말 고마워.”

―종종 전화할게. 너한텐 하라고 해도 안 할 것 같으니까.

“어, 응. 그래.”

 

이제 전화를 끊어야 할 때였다. 이겸이에게 전화 걸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관문이 이제야 생각났다. 전화를 끊는 것. 어떤 말로 통화를 마무리 해야 하지… 이겸이가 아쉬워 보이지도 않으니 간단명료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모래야.

 

조금 잠긴 목소리. 이겸이가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그 사이가 간질거리면서도 복잡했다. 말 못할 기분들 사이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으면서 나는 이겸이의 말을 기다렸다.

 

―잘 지내.

“…….”

―잘 지내, 모래야.

 

맥이 풀렸다. 잘 지내라고, 그 말 하려고 부른 거구나. 멍하게 있다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응. 너도, 이겸아.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눕기 전에 불 끈다는 걸 또 잊었네.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려 팔로 눈을 가렸다.

이겸이는,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멀리 떠나있고. 아마 이겸이에겐 정말로 중요한 시간이겠지 지금이. 그렇다면 지금의 이겸이에게 나는 뭘까. 돌아온 뒤에 모든 걸 말해 주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겸이의 성격을 알지만, 이런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이겸아 나는, 자꾸 뭔갈 기대하게 돼.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네게 그렇게 묻고 싶어지고 말아.

 

 

 

 

 

 

 

 

 

입학식 전 새터가 있었다. 2박 3일이었고, 대절 버스가 집합지인 고연대 앞에 내려주면 각자 알아서 귀가하는 시스템이었다. 살면서 내가 사귄 친구들이라고 해 봐야 윤일고 애들 뿐이고, 그 좁은 인맥 마저도 재현이가 다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는 아빤 내가 가서 사흘 내내 혼자 벽만 보고 앉아 있다가 올까봐 온갖 걱정을 했지만, 적당히 사회적 가면을 쓰고 모두에게 적당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은 차라리 내겐 쉬웠다. 같은 방이 아니어서 새터 내내 얼굴한 번 보지 못했던 유진이라는 애와 돌아오는 버스에 함께 탔는데, 신경숙과 기형도, 오르한 파묵과 이강백 이야기를 하느라 버스 안 세 시간이 삼분 같았고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집이 서울, 그것도 학교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이라는 유진이를 먼저 보내고, 나 역시 C시로 돌아가기 위해 핸드폰으로 급행 시간을 알아보며 걷던 중이었다.

윤모래. 이름이 불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뒤로 넘어질 만큼 놀라고 말았는데, 내 눈 앞에 한동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 내가 대뜸 물었고, 동영인 내 가방을 자기 차 뒷좌석에 싣고 나서야 황당해하는 날 마주보고 대답했다. 데려다줄게. 나 차 가지고 왔거든. 차를 가지고 오든 말든 고연대에 네가 왜…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동영이에게 등 떠밀려 조수석에 태워졌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상황 파악 못 하고 멍해 있다가, 동영이가 탄 고속도로가 C시로 향하는 하행이 아닌 상행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놀라 외쳤다. 야, 여기 우리 집 가는 방향 아니잖아! 그래서, 너 고연대 다닌다고? 한동영이 KOYEON UNIVERSITY 라고 적힌 검은색 과 후드티를 입고 있는 걸 이제야 봤다.

 

“난 모래 네가 진짜 날 대학 갈 생각도 없는 애로 생각하는 줄 몰랐다.”

“너 하루 이틀만 더 결석했어도 출석일수 모자라서 졸업도 못 할 뻔했다며.”

“누가 그래? 고세희야 강미나야?”

“둘 다.”

“내가 뭐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면서 애들을 괴롭히길 했냐, 아님 선생님들한테 반항을 하길 했냐? 이거 봐. 선생‘님’들이라고 하잖아.”

“그건 그런데, 나는 네가 학교를 안 나오니까 당연히,”

“공부도 못하는 줄 알았다?”

“어.”

 

다행히 다음 TG에서 바로 빠져나와 하행선으로 막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C시 까진 77km나 남아 있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한동영이 운전하는 차라서 한참 먼 여정 동안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몰라 마음을 놓을 새가 없었다.

 

“이런 저런 취미가 많았던 거지, 학교 꼬박꼬박 다니면서 하기엔 워라밸이 무너지니까.”

“학교 안 나온 이유 치곤 거창하네. 무슨 과인데?”

“기계공학.”

“아, 기계공학… 이 아니라, 기… 기계공학?”

 

고연대. 인서울이긴 하지만 입결 자체는 전국 10위권 대학에 겨우 발만 붙이는 수준으로 최상위권은 아니었다. 다만 유일한 의외가 있다면 공대, 그 중에서도 기계공학인데 입결도 월등히 높고 고연대 기계공학 출신의 공학자들이 전국의 유명 연구기관과 기업에서 위상을 내보이고 있어 차수석 졸업을 하면 여러 기업에서 모셔가는 수준이라고 들었다.

 

“와. 너 머리 되게 좋구나.”

“학교만 안 나간 거지 공부도 열심히 했거든.”

“그래. 그랬겠지. 그러니까 기계공학을…”

“너 지금 표정이 그 날 고세희 강미나 같네.”

“그 정도야?”

“어.”

 

우리 아빠가 사실은 백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애들에게 고백했던 날. 세희는 놀란 걸 넘어서서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는데(나와 재현이 둘 다에게), 의도치 않은 비밀을 오래 유지하게 되면서 내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해서 세희와의 사이에 잠시 금이 갈 뻔도 했다.

 

“건 그렇고 강이겸은.”

“응?”

“잘 지낸대?”

 

언제부턴가 애들은 이겸이의 안부를 내게 묻는다. 직접 연락하기 귀찮아서 나를 볼 때마다 그 김에 손쉽게 묻는 건지, 아니면 재현이처럼 간혹 보내는 메시지마저 읽씹 당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동영이는 전자 같았다.

 

“응. 잘 지낸대.”

“싱거운 대답이네.”

“몽골에 가 있는 애 안부를 나도 자세하겐 모르지.”

“둘이 매일 연락하는 거 아니었어?”

“가끔.”

“가끔?”

“매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별 진전 없나보다, 강이겸이랑?”

“뭐?”

“너희 둘 사이 애들 다 알아.”

“…….”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서운한 마음을 내뱉고 말 것 같아서, 투정부리고 틱틱댈 것만 같아서 요즘 일부러 이겸이와의 연락에 사이를 두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마음인지조차 이겸인 모르겠지만. 잠시 잊고 있던 이겸이 생각에 다시 마음이 복잡해져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동영이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전화 와.

무음으로 해 놓은 전화의 화면이 내 무릎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고, 발신자가 세희인 걸 확인한 내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세희야.”

―공준우 죽이러 갈 때가 된 것 같다.

“무슨 일 있어?”

―나 여기 병원 응급실이야.

“뭐?”

 

타이밍도 좋게 차가 급정거했다. 브레이크를 너무 갑자기 밟으시네. 동영이가 앞 차를 향해 작은 불만을 내뱉고는 날 보고 무음으로 물었다. 왜? 일단 가만 있어보라는 뜻으로 내가 막 손사레 치며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너 어디 아파?”

―미나가. 걔 식음 전폐해서 쓰러졌어.

“공준우 때문에?”

―어.

“자세히 얘기해 봐. 미나가 밥을 안 먹는게 말이 돼?”

―그러니까. 그걸 해 낸다. 공준우가. 너 지금 어디야?

“새터 끝나고 내려가고 있어. 동영이랑 같이.”

―그럼 빨리 병원으로 와. 아줌마도 안 계셔서 지금 나 혼자야.

 

 

 

 

 

 

 

 

 

사건의 발단은 미나가 말도 없이 공준우네 그룹 팬 행사에 불쑥 나타난 것부터라고 했다. 한시간 반짜리 사은 행사. 저 멀리서 면봉만 한 제 남자친구를 보기 위해 미나는 행사에 응모하는 데에만 공준우가 모델인 음료수를 80만원어치를 샀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준우는 소속사에서 내건 연애금지조항을 어기고 미나를 만나고 있는 거라 개인시간이 없었고, 그게 미나가 남자친구 얼굴을 볼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까.

공준우가 왜 왔냐고 화냈어? 막무가내라고 헤어지쟤? 응급실의 누가 들을 새라, 내가 소리 낮춰 물었다. 공준우를 죽이러 가려면 그 정도 사유는 되어야 하는데, 미나는 병원 침대에 앉아 수액을 맞으며 엉엉 울면서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난 2층에 있었고, 준우는 내가 온 줄도 몰랐어. 말 안 했으니까. 무대 위 얼굴만 보고 난 바로 집에 왔어.”

“근데 대체 뭐가 문젠데? 준우가 못 알아봐서 서러웠어?”

“아니. 그게 아니라…”

 

탈수 기운 가시니까 또 눈물이 나냐? 세희가 허리를 짚고 미나에게 화를 냈다. 저 수액을 빼 버려야 해, 아주. 다 눈물로 간다니까. 미나의 불안정한 연애를 계속 탐탁치않아 했던 세희라, 올 것이 왔다 싶었나보다. 내가 세희의 팔을 붙들고 겨우 진정 시켰다.

 

“너희도 알지. 우리가 어떻게 만나는지. 겨우 짬 내서 준우가 택시타고 C시에 오면 내가 걔네 본가에 미리 가 있다가 안에서만 겨우 보잖아.”

“그래. 알지. 너희 둘이서 영화 한 편 못 보고 외식 한 번 못 한거.”

“난 항상 준우가 스케줄 다 끝내고 녹초가 된 얼굴만 봐. 그런데 거기선, 무대 위에선 생기가 넘치더라. 걔가 그런 눈빛이었는지, 그렇게 또렷한 목소리였는지 나는 잊고 있었거든. 늘 피곤하고 예민한 준우 눈치만 보기 바빴어.”

“…….”

“팬들한테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막 그러는데 나한텐 그런 말 언제 해 줬는지 기억도 안 나더라. 준우는 자기 에너지를 여기서 다 쏟아 붓고 오는구나, 나한테 쓸 건 하나도 안 남겨놓고… 그런 생각 하니까 그냥 너무… 슬펐어.”

 

미나가 발음이 뭉게지도록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내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고, 세희가 뽑아주는 티슈를 받아 미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무 특수한 경우다보니 어떻게 위로를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나야, 너 너무 울면 또 탈수 온대. 힘들어도 일단 울음 참고. 죽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 퇴원하지. 응?”

 

미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세희를 쳐다봤다. 준우는? 미나 아픈 거 알아? 내 물음에 세희가 미간을 구기곤 고개를 저었다. 공준우한테 말했다간 자기 죽어 버릴 거래.

 

“그렇다고 아주머니 아저씨께 말씀 드릴 수도 없잖아.”

“당연하지. 얘네 부모님 아시면 공준우 존재 탄로 나는 것도 시간 문젠데.”

“일단 너 들어가, 세희야. 이제부터 미나 퇴원할 때까지는 내가 같이 있을게.”

 

 

 

 

미나가 수액을 다 맞고, 근처 죽집에 데려가 저녁까지 먹이고 나니 저녁 여덟시가 가까웠다. 몸도 잘 못 가누게 휘청이면서도 미나는 바빴는데, 아홉시인 통금 시간 전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내 부탁으로 날 병원에 내려주고, 내 짐 가방을 집에 대신 갖다 준 동영이가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택시를 타고 미나를 집에 데려다 준 뒤에 나는 버스 정거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버스 승강장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동영이가 대충 상황 설명을 했을 테지만 어쨌거나 아빠에게 직접 얘기하지 못했다. 지금 들어가겠다고 문자라도 해 둬야지. 화면을 켠 나는 잠시 놀랐다. 배너 메시지로 부재중 전화와 부재중 메시지들이 찍혀 있었는데, 모두 이겸이에게 온 거였다.

 

[오늘 돌아온댔지.]

[종일 연락 없어서. 무슨 일 있어?]

[전화 안 받네. 연락 줘.]

 

마지막 메시지는 삼십 분 전이었다. 지금 시각이라면 저녁을 먹거나, 막 먹은 뒤일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전화까지 했지? 잠시 고민하다 내가 엄지를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돌아와서 바로 미나 만나느라.]

 

이제 집에 가는 길, 이라고 마저 쓰려는데 순간 1이 사라졌다. 이 속도라면 카톡 창을 켜 놓고 있었거나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확인을 했다는 건데 둘 중 뭐든 이겸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괜히 긴장하는데 난데없이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얼굴을 보자고 한다고?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았다. 보이스톡 하려다가 잘못 눌렀다고 생각해 취소하려다가, 나도 얼결에 손가락을 잘못 놀려 영상 통화를 받아버렸다. 어떻게 종료를 누를 새도 없이 곧 분할된 화면 중 큰 것 안에 이겸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영상이 연결될 준비라곤 없어서 전면 카메라가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을 비추고 있었다.

 

―버스 기다려?

“아, 응.”

―얼굴이 안 보여, 모래야.

“어두워서 그래. 밤 다 되어 가.”

―모래 너 집에 들어가면 다시 걸까.

“그럴 거 없어. 왜 전화했어?”

―나 용건 있어서 너한테 연락한 적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

―왜 기분이 안 좋지, 모래는.

 

화면 속 이겸이는 표정이 다 사라져서는 물었다. 그걸 이제 알았냐고 쏘아 붙이려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말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안다고 해도 이겸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니, 사실 내가 이겸이에게 바라는 건 너무 간단하고 쉬웠다. 아주 작은 것. 너무 사소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조차 내가 너무 못나지는 기분에 여태 기다리기만 했을 뿐이다.

…보고 싶다고.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해 내가 얼마나 갉아 먹히고 있는 줄 아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동시에 할 수 없어서 난데없이 서러움이 차올랐다.

어두우니까 울어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버스가 한 대 정차해 주변을 비추자 작은 화면 속에서 내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게 선연했다. 급히 손바닥으로 볼을 감쌌지만, 버스가 떠나 다시 사방이 어둠속에 잠식된 이후로도 이겸이는 말이 없었다. 들켰다고 생각하자 감정은 더 추슬러지지가 않아서, 이제는 아예 훌쩍이며 수 분간 더 울었다. 울컥하는 걸 추스르기까지 이겸이는 전화를 끊지도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미나가 좀 아파. 병원에 같이 갔다가 집에 데려다주고 가는 길이야.”

―…….

“그래서 그래.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좀, 기분이 안 좋은가봐.”

―…….

“참, 이겸아. 미나 아팠단 사실 준우한테는 절대 비밀로,”

―모래야.

 

나직한 음성. 내 어설픈 변명을 묵묵히 듣던 이겸이가 말을 잘랐다. 음성통화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쁜 스피커에서는 자꾸만 지직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나는 화면 속 이겸이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번 갈까, 보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겸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이 너무 명확해서 꼭 우리 사이의 화면이 없고 이겸이가 내 눈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넌 다 알았구나, 내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하는거. 알면서도 그 말을 안 해주는 거구나.

 

―아카데미 며칠 쉬어도 돼. 직항 없어도 경유는 있을 거고. 내가 지금 바로 티켓팅 해서 최대한 빨리…

“아니, 이겸아. 그럴 거 없어.”

―어?

“네가 왜 날 보러 와? 내가 너한테 뭐라고.”

―…….

“나 너한테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 아니잖아.”

 

수화기 반대편 이겸이는 조용해졌다. 아니라고, 오해라고 반박 하지 않는다. 이겸이의 침묵은 인정의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상하게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때마침 20번 버스가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다가왔다. 나는 남은 눈물기를 서둘러 닦아냈다.

 

“버스 온다. 끊어야겠어.”

―…….

“안녕.”

 

이겸이가 대답할 틈 없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 생각 않으려 노력했고, 아빠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베개에 묻고 있던 얼굴을 돌려 옆을 보면, 내 방 벽에 걸린 이겸이의 교복 재킷이 보였다. 드라이클리닝 맡겨 비닐을 씌워둔 채로 영화 포스터처럼 걸어둔 것. ‘강이겸’ 노란 자수로 된 글자를 보자 홧김에 몸을 일으켰다. 이겸이의 옷을 벽에서 떼어 옷장 속에 욱여넣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쾅, 나무 옷장이 닫히는 소리가 내 마음 속에서도 났다.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감정들이 닫힌 마음의 문을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걸, 내가 옷장 문을 등으로 밀고 버텨서 섰다. 그러자 이겸이의 교복이 걸려 있던 자리의 빈 벽을 마주했다. 언제부터 이게 저기에 걸려 있었다고, 빈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없이도 잘 살았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이, 내가 내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는 불편했다. 이렇게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휩쓸리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원한 건, 정말 이런게 아니었다. 빈 벽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리곤 결연하게 말했다.

 

“이제 너랑은, 친구도 안 해.”




나는 사랑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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