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10월, 리칸이라는 영지에서 작은 소요가 있었다. 리칸의 영주인 마헬이라는 자가 사소한 문제로 거리의 아이를 죽였는데, 이에 반발한 영지민들이 영주에게 사과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소요는 반나절 정도 일어나다가 간단히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며칠 동안 물과 땅을 건너 수도에 닿았을 때, 왕실에서는 아무도 이 사건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건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이 평범한 일이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심지어 면적도 작고 인구도 적어 이름을 들으면 다시 되물어야 할 정도의 마을에서, 영주의 행동에 영지민들이 잠깐 반발하는 일들을 일일이 사건이라 칭할 정도로 왕실은 한가하지 않았다. 그 소식을 우연히 전해들은 몇몇 귀족들만이 혀를 차며, 아이 하나 죽은 일 정도로 소요가 일어나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도 소문과 사실이 다름을 눈치 채지 못했다.

 

 

 

죽은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부모가 누군지, 어디서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골목을 떠돌아다녔고 가끔 밥을 빌어먹었다. 여섯 살쯤 되었을 아이는 어느 평화로운 오후에 영주의 정원에서 꽃을 따다가 들켰다.

 

꽃 따는 일은 사실 별 일 아니었는데도, 영주는 크게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아이를 죽였다. 아이가 지나치게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잘 다듬어진 정원 한가운데 가느다랗게 피가 흘러 디딤돌 아래로 고였다.

 

거기까지도 별일이 아니었다. 영주는 밥 먹다가 얼쩡거리는 새를 쏘아 맞춘 것 이상의 감흥이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서 영주를 바라보던 하녀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와 영주를 번갈아 보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옷자락 속에 쑤셔 넣었다. 품에서 번쩍이는 나이프가 쑥 뽑혀 나왔다. 별안간 괴성을 지르며 영주에게로 달려드는 하녀를 호위기사가 막아섰다. 돌발 상황인 탓에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아 이번에는 기사의 검이 하녀의 허리께를 그었다. 하녀가 쓰러졌고 두 번째 피가 분수처럼 흩어졌다.

 

당황스러운 적막이 흘렀다. 영주가 버럭 화를 내며, 식사 직후에 이런 꼴을 봐야 하느냐고 모두에게 일갈하는 순간, 살인사건의 저택에서 삼천 야드쯤 떨어진 리칸 유일의 포메로식 요릿집 주인은 돌연 찾아든 발작적인 수전증에 국자를 떨어뜨렸다. 그의 아들이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라고 물어보자마자 주인의 눈동자가 잘 든 칼처럼 시퍼런 빛을 띠더니, 아무 말 없이 주방의 부엌칼을 빼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포메로 음식의 주재료로 쓰이는 샤리나무 껍질이 유독 단단해 일반 칼로는 다듬을 수 없는 탓에, 웃돈을 얹어 왕립 기사단의 검에나 쓰이는 최고급 철을 강수해 만든 칼이었다. 아들은 황망한 얼굴로 제 어머니의 뒤를 쫓아 나왔지만 주인은 어느새 영주의 저택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사람을 죽이다니 네가 그러고도 인간새끼냐?> 등등을 외치며 난데없는 괴력으로 저택의 철장 담을 뛰어넘어 영주에게로 달려든 포메로식 요릿집 주인이 사망한 뒤, 연이어 저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시장에 장 보러 나갔던 대장장이의 아내가 갑자기 남편의 가게로 돌아오더니 도끼를 뽑아 들어 휘두르며 뛰쳐나갔고, 병환이 깊어 오늘내일 할 거라던 옷감집 노파도 어디서 난 기운인지 저택 앞에서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했다. 그 다음엔 이 사건의 시초가 어디인지 찾아보았다. 아이가 죽은 그 순간까지는 별 일이 아니었던 것들이, 사망자가 하나 둘 늘어가는 와중에 점점 별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두세 다리 건너면 다 지인인 작은 영지에서 사람들은 사망자들과 붙잡혀 감금된 이들의 목록에 경악했고, 가까운 사람들의 난데없는 죽음에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하나둘 저택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모든 일이 고작 며칠 사이에 리칸을 휩쓸었다.

 

영주가 사람을 죽인 일이 별일인가? 영주 마헬은 억울했다. 그는 그렇게까지 좋은 영주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히거나 폭정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아이를 죽인 건 조금 충동적이었으나 귀족의 신분으로 그 정도는 잘못이라 부를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나중에 알아보니 영지민도 아니었고,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모르는 아이였다. 그런 애가 감히 영주의 저택까지 기어들어오다니, 그게 애가 아니라 악의를 가진 침입자였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아이를 죽인 직후 그에게 달려드는 몇을 더 죽이긴 했지만, 그것도 다 그들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리고 사냥 나가서 짐승을 죽였다고 죄를 묻는 이는 없지 않은가? 고작 이 정도로 영지민들이 몰려드는 건 너무했다. 너무하다 못해 괴이쩍었다. 그는 집무실에 처박혀 앉아 머리를 굴렸다.

 

그에겐 짚이는 바가 있었다. 이제 곧 추수철이었고, 그가 봄에 선정을 베풀어 사람들에게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을 때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다지 큰 이자를 붙이지도 않았지만 멍청한 평민들은 그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아까워하곤 했다. 이건 아무래도 이에 욕심이 생긴 누군가가 사람들을 선동해 영주에게 되도 않는 꼬투리를 잡아 폭동을 일으키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여야 살인을 운운하는 법이지, 이건 전혀 그에 해당사항 없는 일이지 않은가.

 

역시 사병을 풀어야겠다. 그는 결심했다. 성 안의 기사들로는 부족하니 다른 영지에 요청해 사병대 지원을 받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왕에게도 보고를 올려 이 어이없는 폭동을 잠재우리라. 이곳은 80년째 그의 가문이 다스리는 땅이었다. 이런 일은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지금껏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더욱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다. 주동자가 누군지 찾아내 가장 잔인하게 참시하고 성문 앞에 목을 걸리라.

 

영주 마헬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옆 영지에 보낼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새벽, 리칸 외곽의 숲.

 

여자는 눈을 떴다.

 

낯설고 낮은 천장이었다. 아주 낡은 통나무집 같았다. 여자는 팔을 천천히 들어 제 어깨며 다리를 여기저기 짚어 보았다. 겨울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파삭했다. 마르고 힘없고 주름이 많은 몸이었다. 침대 옆엔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작은 화로와 나무로 만든 탁상, 몇 가지 약초를 찧다 내버려둔 흔적이 보였다. 약초들은 그새 누릇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낯선 풍경인데도 막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익숙했다. 여자는 어릴 적 읽던 동화책을 떠올리면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경첩이 삐져나온 문 밖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이었다.

 

여자는 덮고 있던 낡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희끗하고 빳빳한 머리털이 손에 잡혔다. 없던 기침이 폐 끝에서 밀려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가만가만 벽을 짚었다. 혼이 아직 자리를 덜 잡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고른 뒤, 문을 열고 발끝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바싹 마른 흰 땅이 여자의 발밑에서 푸스스 먼지를 일으켰다.

 

“이번엔 마녀의 몸이네.”

 

숲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소리로 착각할 만큼 작고 가늘었다. 여자는 뒤집어쓴 담요 끝을 여며 뼈에 시리는 추위를 막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내뱉는 목소리는 잔뜩 쉬고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게 이번의 내 사인死因인가 보군.”

“그렇지.”

“화형은 싫은데. 타죽는 거 너무 아프다고.”

“그건 내 탓이 아냐. 네가 화형의 시대로 온 걸 어떡하겠니.”

 

여자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촛불이 훅 켜지는 것처럼 분명하고 갑작스럽게. 숲처럼 깊고 어두운 녹색의 비로드 천을 온 몸에 감고 있었다. 눈밖에 보이지 않는 녹색의 사람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샨이었다. 여자는 샨의 새카만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리칸은 잘 진행됐어?”

“보시다시피.”

 

샨이 손을 뻗어 여자의 뺨에 가볍게 대었다. 손가락 끝까지 칭칭 감긴 비로드의 부드러운 감각이 살갗에 닿는 순간, 여자의 머릿속에서 영상 하나가 파드득 몸을 떨며 솟아올랐다. 영상은 마치 흔들리는 불꽃처럼, 이리저리 모양을 엉키며 옛날 영화 필름을 감듯 차르르 돌아갔다. 영주의 저택 앞에서 횃불을 들고 모인 사람들, 사병과 대치하고서도 이상하리만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창에 분명 뱃가죽을 꿰뚫렸는데도 눈을 뜨고 도끼를 휘두르는 어떤 여자의 모습……, 영주가 급히 보낸 전령이 숲 속에서 피살당한 채 쓰러진 장면, 저택을 점거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회의하는 장면, 다른 영지로 퍼져나간 사람들이 하나하나 간판 떼듯 영지들을 점거하기 시작하는 장면, 잔인하게 참시되어 성문 앞에 내걸린 영주들의 목, 보고를 무시한 채 한가로이 시간이 흘러가는 수도의 풍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여자가 말했다.

 

“저 여자들이 다 나야?”

“그렇겠지. 아마도. 최소 절반은?”

“그럼……, 나는 이제 몇 조각이나 된 걸까?”

“글쎄다. 세본 적 없는데. 너도 알잖아. 나 옛날부터 수학 잘 못하는 거.”

 

샨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잠깐 찌릿, 하고 여자의 머리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혼이 기존의 몸과 맞물리면서 내는 소음이었다. 때로는 몇 분, 길게는 며칠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여자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많이 쪼개졌는데도 의식이 아직 남아있을 수 있구나.”

“앞으로도 얼마나 더 쪼개지나 볼까? 내 생각엔, 시간축이 돌아서 다시 2031년이 될 때까지도 네 의식은 그대로일걸.”

“그 전에 내가 미치겠지.”

 

여자가 웃었다. 샨은 따라 웃는 듯했지만, 입이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걱정 마. 미치면 내가 다시 죽여서 혼을 쪼개 줄게.”

“네가 미쳐버리면?”

“그럴 리 없어. 그럴 수 있다면 벌써 했을 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2031년의 세계로부터 이곳으로 내던져졌을 때에도 그들은 거의 미칠 뻔했지만 살아남았다. 리셋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사고체계가 정상분포 범위로 돌아오기 때문에 미친다는 행위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샨에게는 리셋이 제공되지 않았지만 대신에 낡지 않는 몸과 영혼이 있었다. 낡고 싶어도 낡을 수 없는.

 

한 번 죽을 때마다 혼이 여러 개로 쪼개진다는 것은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쪼개진 혼이 제곱되어 무한대로 늘어나 세상을 지배해버리면 더 신났겠지만 쪼개지는 과정에서 일정량의 혼은 사라지고, 일부만이 남아 누군가에게 스며들었다. 혼은 어떤 몸에서는 그대로 몸의 일부로 녹아들었지만 어떤 몸에서는 기폭제처럼 터져서 강렬한 충동을, 몸이 가지고 있던 무의식적인 분노를 일깨울 정도의 충동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깨진 혼들은 작은 조각이나마 그들이 원래 하나였음을 기억하는 듯, 새로운 몸에게 기이한 연결감을 심어주곤 했다. 이 혼과 저 혼은 원래 하나의 혼이었어. 태초부터. 무의식에게 속삭이듯이.

 

그 흩어지는 혼들 중에 단 하나의 조각에만 본체의 기억과 의식이 숨어 있다가 적절한 토양의 몸을 만나면 싹을 틔웠다. 여자는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살았다. 영생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꾸려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지금까지의 모든 삶에서 살해당했다.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게 여자가 이 세계로 끌려온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걸 여자는 서른여섯 번째 죽음쯤에서야 간신히 깨달았다.

 

여자는 수많은, 의도치 않은, 혹은 의도한 죽음을 경험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누군가에게 숨을 빼앗기면서, 죽는 순간의 고통과 분노와 회의를 그대로 안고 다른 혼으로 쪼개졌다. 여자가 살해당해온 역사만큼의 분노가 축적되어 다음 혼으로, 다음 혼으로 흩어졌다. 살해당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그 감정이 점점 강렬해졌기 때문에 혼이 스며드는 사람들도 그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 현상은 대체 무슨 효용이 있는 걸까? 그 질문을 처음 던진 게 지금 여자의 눈앞에 선 사람이었다. 샨은 이전의 생, 2031년의 시간대에 머물던 여자의 최초의 생에서부터 여자와 함께 살다가 이곳으로 함께 던져졌다. 여자와 달리 샨은 불사였다. 하나의 몸으로 영생을 살았다. 미치지도 죽지도 않는 샨은 때때로 여자를 구하고 때때로 여자를 죽여주기도 했다. 샨은 시대를 읽고, 부활한 여자를 찾아내고, 여자의 의식이 하필 이때 이곳에 붙어 깨어난 이유를 추측해 이번 생의 죽음을 계획했다. 역시 2031년의 전생에서 역사 선생으로 15년을 해먹은 경력이 어디 가지 않는다며 그들은 다시 만날 때마다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 농담은 대부분 울음으로 끝나긴 했지만.

 

우리는 누군가 의도해서 이 세계로 던져진 거야. 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혼을 주고, 그들을 분노하게 하지. 너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온 거야. 2031년의 시간축으로 시계가 돌아갈 때까지.

대체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그것밖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우리라고 하지 마. 나잖아. ……나만 죽는 거잖아.

 

오로지 잘 살해당하기 위해 몇 번이고 태어나는 인생이라니.

 

“이번에 내가 마녀로 죽으면 그것도 이 시대에 도움이 되는 건가?”

“당연하지. 리칸 상황 보면 답 나오잖아.”

“모르겠는데. 뭘 위해서 죽으러 가야 하는지 그 잘난 답이나 말해 봐.”

 

샨이 손을 뻗어 얼굴에 칭칭 감았던 비로드 천을 천천히 풀었다. 샨의 어깨 위로 살며시 천이 내려앉았다. 마흔 줄에 들어선 무표정한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샨은 숲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이윽고 흉터 가득한 제 얼굴을 쓸어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혁명.”

 

눈앞에 붉은 빛이 탁 터졌다. 여자는 순간 자신의 눈에 핏줄이 터진 거라고, 혹은 예고 없이 머리가 터진 거라고 생각했다. 아찔한 시야에 빛이 명멸하다가 하나의 영상으로 다시금 피어올랐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성벽에 매달린 채 반쯤 불타고 있는 노파였다. 여자는 순간 그게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들리는 누군가의 아우성.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의 머리꼭지들. 달려 나와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어 올리는 어떤 여자. 그녀의 안에도 자신의 혼이 있는지 여자는 육안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거리에서 무언가가 터지고,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붉게 번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시퍼런, 날 선,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여자가 눈을 떴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샨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가 말했다.

 

“나는 혁명의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지겠군.”

“정확한 표현이야.”

“……언제쯤에야 나는 사람으로 죽을 수 있어?”

 

샨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담요를 다시금 죄어 매고, 어딘가로 흩어졌을 자신의 혼들을 생각했다. 영주의 정원에서 꽃을 꺾어든 순간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칼날의 감각과, 깨진 혼의 조각들이 흘러들어갔던 그 마을의 여자들에 대해. 당연한 분노를 터트리지 못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숨이 터진 그 순간에 대해.

 

위대한 불꽃을 위한 불쏘시개로 영생을 사는 자신의 죽음 아닌 죽음들에 대해.

 

피로했다. 여자는 깊은 피로를 느꼈다.

 

 

 


그 해 12월, 드디어 불꽃처럼 밀어닥친 혁명의 분위기가 왕실에까지 번졌다. 리칸의 작은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폭동이 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전국을 뒤덮은 이유에 대해서 당시 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당시 이웃한 프로이든의 전쟁 위협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감, 영주들의 불공정한 수탈 방식 강화, 이를 바탕으로 귀족 계급의 사치와 향락이 보편화되던 사회적 분위기, 무능한 왕실에 대한 신뢰감 하락이 혁명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하였다. (…) 리칸은 당시 별 볼일 없는 작은 시골로만 인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베르디 조약 때 프로이든이 정치적 위협의 일환으로 제시한 무역세 강화 정책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

 

또한 왕실이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재를 위해 파견된 노엄 백작이 폭동의 주동자를 처벌하겠다는 명목으로 리칸의 숲에 살던 노파에게 마녀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처형한 것이 두 번째 기폭제가 되었다. 백작의 입장에서는 당시 보편적이던 마녀사냥 문화를 이용,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신분의 사람을 본보기로 처벌하고 군중을 해산시킴으로써 적절히 상황을 종결지으면 된다고 판단하였으나 이는 뼈아픈 실책으로 (…) 당시 비공식적으로 군중을 이끈 것은 ‘도끼의 전사’ 엘리 헤셀로, 본래 리칸에서 대장장이로 일하던 칼 헤셀의 아내였으며 태생적으로 몸이 유약해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헬의 여아 살인사건 이후 직접 도끼를 들고 영주 마헬의 저택에 침입해 군중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리칸 마녀 사건>때 선봉에 서며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엘리 헤셀은 자서전에서 ‘그 혁명의 밤,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평생 이름을 잊은 채 살아왔던 깊은 분노와 귀족들에 대한 증오가 솟아올랐’으며 이것이 영주를 살해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

 

(…) 이상이 1674년 8월 19일, 신분제가 완전히 폐지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리칸 혁명>의 시작으로 (…) 이에 혁명이 처음 발발했던 1669년 10월을 ‘붉은 10월’로 통칭하고 1994년부터 매년 이를 기념하는 ‘불타는 숲’ 행사를 현재의 리칸 지역 일대의 숲에서 개최하고 있다.

 

/ 샨 메이어 바딤, 《혁명의 역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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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By. 시엘라


‘붉은 시월’이라는 제목은 실제로 10월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영화 및 역사적 사실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 (오해를 피하기 위한 사족) 몇 년 전 동명의 영화를 개쩌는 심리스릴러 영화라고 추천받아서 봤었는데 제게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없어서 최악의 영화 TOP10 안에 이름을 올린 기억이 있네요... 아무튼 아무 상관 없는 글입니다. 혁명이 나오긴 하지만.

 

오늘 마카롱의 주인공은 죽음을 경험하면 혼이 쪼개져 일부는 소멸의 길로, 일부는 사람들 속의 혁명의식을 깨치는 역할을 하며, 본체의 의식이 담긴 혼은 다시 타인의 신체에 흡수되었다가 강렬한 이미지로 죽음으로써 사람들의 생각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기능을 맡습니다. 어떤 거대한 역사적 대의를 위해, 완전한 타의로, 오로지 도구화된 죽음을 실천하고자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살해당한 여자들의 역사 속에서 집단무의식을 공유하며 자라나는 여성들의 삶을 비유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축적되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오기 마련이니까요. 그 외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글이 짧고 불친절해져 아쉽습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배경으로, 이 세계와는 상관없는 이방인 두 명이 거대한 힘에 의해 이곳으로 던져지고,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며, 이 세계의 사람들이 모르게 세상일에 난입해 영향을 미친다는 서사를 좋아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네요. 올해 마카롱의 몇몇 이야기들은 디테일만 다를 뿐 유사한 서사구조의 뼈대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즐겁지만, 연말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써보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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