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創世)


세상이 열리며,
 

 상편


그 날, 아를렌은 신의 구원과 동시에 지옥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

 

세상사가 모두 마음 가는 대로 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인세의 이치는 신조차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신의 대리인과 계약한 인간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를렌은 달렸다. 이미 인간을 초월한 그녀의 몸은 피로를 쉬이 느끼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려있었다. 자하드와 동료 십인을 피해 브이와 도망친 지 어언 열흘. 한숨도 못 자고 쉴 새 없이 끝의 가장자리로 도망쳤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몇백 년을 함께한 동료들이 자신들을 찾지 못하게 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수천 번의 전투를 동거동락하며 서로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아를렌은 도망치기로 한 그 순간부터 이 도피가 성공하리라 믿지 못했다. 자하드 한 명이라면 또 모를까, 다른 동료들도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들 부부-자하드는 인정하지 않았다-를 찾고 있었으니.

 

열흘가량을 쉬지 않고 달려 드디어 저희들을 숨겨줄 관리자의 그늘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마저도 숨을 수 있는 기간은 이틀 남짓이겠지. 구스트앙이 관리자들의 동태를 살피지 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급하게 챙긴 생필품을 조달한 후, 부부는 예기치 않은 신혼의 불행에 슬퍼하다 마주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하드가 아를렌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 저녁, 아를렌과 브이가 그늘에서 벗어나 어느 층의 잡림 속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날은 아를렌이 불침번을 서는 날이어서 브이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에 들어 있었다. 기상 현상 따윈 흔치 않은 내탑에서 불길한 바람이 불어와 아를렌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얗게 뜬 모 층의 달은 새하얗게 부서지며 그들의 위치를 노출했다. 아를렌은 불안했다. 달 따위, 뜨지 않는 것이 낫다. 불안정한 이성과 달리 그녀의 감성은 달에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가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아도 완연한 빛은 식은 가슴에도 처연함을 불어넣고는 했으니. 달만이 오롯이 빛나는 눈물진 하늘을 바라보며, 아를렌은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 속으로 기도했다. 내일의 우리가 살아있기를. 내일의 우리가 함께하기를. 옅게 들리는 숨소리, 규칙적인 심장박동이 아를렌이 그 밤의 초입에서 느낀 전부였다.

 

브이는 이제, 동료를 등진 아를렌의 전부였다.

 

별을 헤아릴 수 없는 밤은 지루했다. 새까만 하늘을 멍청히 응시하는 것밖에 그녀에겐 남은 할 일이 없었다. 혹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남편의 얼굴을 보던가. 그새 추적자가 쫓아올세라 긴장을 늦출 수도 없으니 이도 저도 그녀에게는 마땅치 않은 밤이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자하드는 사탕발림을 하는 심술궂은 요정처럼 다가왔다.

 

“안녕.”

 

그는 아를렌을 정확히 ‘찾아’ 왔다.

 

창백한 달이 묘한 기류를 어루만졌다. 아를렌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수십 수백 가지의 경우의 수가 머리 속에서 휘몰아쳤다. 브이의 옷자락을 불안하게 틀어쥔 채로 아를렌은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잔뜩 긴장한 분위기와 맞지 않게 자하드는 유쾌한 소년이 모험을 떠나려는 듯이 걸어왔다. 소년은 짧은 새에 청년이 되었고, 곧 사랑하는 여인의 무릎에 누워있는 연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는 달밤을 가르고 유유히, 소위 ‘신’답지 않게 가벼운 걸음으로 발소리를 죽였다. 원한다면 숲의 계절도 바꿔버리는 왕에게 풀벌레조차 목청을 줄여, 이윽고 월하에 살아남은 것은 정적뿐이었다. 아를렌은 당장 어디론가 튀어나갈 기세로 주변에 주술 진을 펼치고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아를렌도 알고 있었다. 일대일 싸움에서 자하드를 이길 자는 이 탑에 없었기에. 그래도, 자신이 이리 하면 브이는. 그이만은 어떻게든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를렌은 결심을 굳히고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발악이 될 주술 인을 맺으려 했다. 어딘가 비틀려 버리고야 만 개구진 입술 새로, 소년을 잃어버린 왕은 짧게 명령했다.

 

“브이는 재우는 게 좋을 거야, 아를렌.”

 

그 말 한마디에 웅웅 거리며 떨던 주위의 공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를렌은 주술 인을 맺으려던 걸 포기했다. 대신 손을 들어 브이의 눈가를 쓸었다. 한숨 같은 동작에 자하드는 미소 지었다. 브이를 끌어안은 채 자신과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아를렌을 보고, 자하드는 시선을 맞추려 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이는 아를렌에게 자하드는 악동처럼 웃으며 물었다.

 

“아를렌, 그거 알고 있어?”

 

무엇을. 목적어가 빠진 물음에 아를렌은 분노와 공포로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을 들어 자하드를 마주했다. 교교히 빛나는 창월은 겁에 질린 아를렌의 독기 어린 눈동자를 또렷하게 비추었다. 달밤의 손님은 달을 등지고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하얀 송곳니 사이로 악의 가득한 진실을 속삭여 주었을 뿐.

 

“너의 그이는 불사의 계약을 맺지 않았어.”

 

그걸 너는.

알고 있었어?

 

아를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가 무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천천히, 그 의미가 살아 숨을 쉬며 그녀의 심장을 파고 들고나서야 아를렌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온몸으로 울부짖었다.

 

“그게 대체 무슨, 그럴 리가 없어.”

 

자하드가 적색삼안 안대를 풀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글쎄다, 아를렌. 그의 평소 성정을 잘 생각해봐. 자하드의 황금빛 눈이 이 달밤에 태양이라도 띄우려는 듯 번득였고, 무한한 신뢰로 가득하던 아를렌의 두 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하드는 마치, 그가 청혼하던 그 평화로운 저녁처럼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아를렌에게 달콤한 독주를 주었다.

 

“내가 너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아를렌.”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 리 없어. 어떻게 그런….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아를렌. 그를 정말 믿을 수 있겠어?”

 

아를렌의 두 눈동자가 갈피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아를렌은 입을 다물고 신을 원망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다. 이 탑에는 존재하지 않는, 머나먼 기억 속에 묻어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를렌은 브이의 흑색 소매 끝을 적셨다. 자하드는 아를렌이 우는 걸 보통,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달리 다행히도, 지금의 그에겐 그녀를 달랠 손수건이 존재했다. 자하드는 색이 짙어져 가는 브이의 소매 끝을 노려보다 아를렌에게 담담히 말했다.

 

“사랑해, 아를렌. 돌아가자.”

 

눈물이 흐르는 두 눈이 원망을 가득 담아 자하드를 노려보았다. 그 명백한 거절에도 자하드는 희열을 느꼈다. 고지가 코 앞이었다.

 

“싫다면, 이거라도 받아줘.”

 

실연의 아픔을 품은 평범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키스라도 해달라 빌 듯이, 자하드는 품속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 아를렌에게 건넸다. 애증으로 뒤덮인 감정에 바들바들 떨리는 아를렌의 손이 그것을 조심스레 낚아챘다. 지도 안에 표시된 건 놀라웠다. 자하드는 웃으며 하얗고 긴 검지를 뻗어 엑스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여긴 구스트앙이 지키고 있는 곳.”

 

아를렌이 의뭉스러운 눈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이 깨끗하게 웃어 보인 자하드가 반대편을 살며시 눌렀다.

 

“이쪽이 내 관할. 내일 오후에는 이쪽으로 가.”

 

아를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어라 지껄이는 게야. 그녀의 악력에 지도가 구겨졌다. 입술을 하얘질 정도로 짓이긴 채로 아를렌이 씹어 뱉었다.

 

“무슨 의도로, 아니. 내가 이 이상 널 뭘 믿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환희가 찾아오는 걸 느끼면서 자하드는 아를렌의 귀에 걸린 적색삼안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날 반쯤은 믿기에, 브이를 재운 거잖아?”

 

아를렌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비에 젖은 새처럼 사람을 경계하는 그녀에게, 사랑을 기만하는 이 불안한 안정이 안온한 안식처가 되길 자하드는 빌었다. 그는 울창하게 뻗은 초목 사이로 걸어가며 주박을 걸 듯이 뇌까렸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아를렌.”

 

 

탑을 처음 오르던 그 시절처럼 웃으며 자하드는 달의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

 

그는 아를렌이 불침번을 서는 날만을 귀신같이 알아내 찾아와, 지도를 전해주고 갔다. 아를렌은 이 불협화음같이 간신히 이어지는 도피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지 몰라 두려워했다. 자하드가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몰랐다. 이 도망은 자하드의 손 안에서 굴려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래도 당분간은 이 도피를 끝장낼 생각이 없는지, 자하드는 지도를 건네줄 뿐 아를렌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를렌이 브이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던 몇몇 날들만 빼고.

 

아를렌이 브이의 품에 파묻혀 그의 체향에 절어 있을 때면, 자하드는 입술을 짓씹었다. 가면 넘어로도 분노에 차서 꺾인 눈썹이 보이는 듯했다. 아를렌에겐 그를 일부러 상처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를 동정했다. 쥐가 사자를 걱정하는 꼴이었다. 아를렌은 그를 동정해서는 안 되었다.

 

동정은 감정을 낳고, 적에게 적의가 아닌 다른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자하드에 대한 아를렌의 전의상실을 의미했으니까.

 

몇 주간의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이 층의 관리자가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다며 브이는 좋아했다. 사랑스러운 그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으면서도 아를렌은 자하드의 말을 떨쳐내지 못했다. 자꾸만 브이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정확히는, 바싹 마른 브이의 시체 앞에 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미래의 자신을 바라보는 꿈이었다. 소름 끼치는 해골을 부서져라 껴안으며 미래의 자신은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혀 죽을 수도 없이 살아가야만 했다. 그것도 영원히, 홀로.

 

다행히 아직은 꿈이었다. 눈을 뜨면 생생히 살아 고동치는 브이가 눈앞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를렌의 배신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바랐길래 당신은.

이 행복을 포기한 거야?

 

끝내 내뱉지는 못할 그 말이 혀끝에서 맴도는 나날, 자하드는 그 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브이의 어깨에 기대 점차 죽어가는 동공을 안타까워하며 자하드는 아를렌의 건강을 살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 아프지 않길 바랐다면 거짓말이었다. 자하드는 아를렌이 최대한 힘들기를 간절히 원했다. 썩을 놈과의 도피 생활 따윈, 그녀에게 충분한 충족감을 주지 못하길, 그래서 결국 자포자기한 아를렌이 제 발로 자신의 궁에 걸어들어오기를. 그는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그 얄팍한 복수심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걸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자하드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은 모질지 못해서, 결국 브이에게 틈을 주고야 말았다.

 

자하드는 그녀가 어느 정도는 안정된 삶을 살길 바라며 43층의 관리자를 구워삶았다. 억지로 그늘을 만들어낸 그는 그 꼴 보기 싫은 놈에게 결국 가정을 꾸릴 자리를 내어주었다. 연적에게 패배한 자의 한심한 말로라고 자하드는 되뇌었다. 그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아를렌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원대로 아를렌은 행복해했다.

비록 그게 자하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하늘을 기만하는 행복이라 할 지어도.

 

 

그가 브이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들려온 건, 그로부터 반년 후였다.




공방주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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