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형 님이

1,000,000만원을 송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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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밖에 없지? 리듬을 맞춰 어깨를 으쓱이는 여우 이모티콘에서 이랑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빨간 하트를 던지던 여우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다시금 금액을 확인 할 수 있었다. 0을 몇 번째 세고 있는 것인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용돈이라기엔 과한 숫자였다. 이걸 주고 형이 어디 가버리려는 건 아닐까. 뭐 잘못 먹었어? 토도독. 자판을 눌렀다가 결국 지움을 눌렀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괴롭히던 이랑은 결국 며칠 전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짤렸어?

용돈 떨어졌을까봐 보너스 탔어 

저녁 약속있어

늦는다. 먼저 먹어 


 Bye. 꼬리를 살랑 흔드는 여우 이모티콘을 노려보며 이랑은 자판을 톡톡 눌렀다. 누구랑? 전송 버튼 위를 멤도는 엄지 손가락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랑 단 둘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랑 다같이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굴 만나든 제 상관할 바도 아닌데 괜스레 잠잠하던 기분에 뾰족한 모가 돋아났다. 누구 만나? 다시 쓴 말도 자존심이 용납하지가 않아서 그냥 지웠다. 대신에 OK 스케치북을 드는 여우이모티콘을 보낸다. 여우형제티콘이라던가. 형님버젼 아우버젼이 있다. 그래서인지 랑이 쓰는 여우 이모티콘이 좀 더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크기도 작다. 


 이랑은 공책 구석에 여우 이모티콘을 따라 그렸다. 멍청이. 이연. 길쭉한 여우형님을 그리고는 화난 작대기를 여러개 그린다. 얼굴에 수염을 그리는 낙서도 하고 나서야 기분이 좀 풀렸다. 옆에 작고 동그란 여우를 그려넣고 별을 두 개 붙인다. 느낌표도 하나 그리고 하트를 저도 모르게 만들던 이랑은 화들짝 놀라며 북북 그어 만들다 만 하트를 덮어 버렸다. 하트는 무슨 얼어죽을.    


 종소리와 함께 삼삼오오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랑도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쌀쌀한 날씨에 벌써 손끝이 차가웠다. 이랑은 교복 위에 덧입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룡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서랍을 비우고 있었다. 이랑은 룡의 책상 위에 걸터 앉았다. 너 우리 집에 올 거냐? 그렇게 물으려다 이랑은 넌지시 말했다.


"기사님 와 계셔?" 

"너 이제 우리집 차 안 탄다면서요." 

"아침에만 안 탈 거라고. 아침에만."


 82번 자주 오더라. 그거 배차도 3분 간격이야. 룡이 고개짓으로 교문 쪽을 가르켰다. 교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째째해가지고. 이랑은 눈을 흘겼다. 저를 지나쳐 복도로 나간 이룡을 쫓아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잰걸음으로 따라와 앞을 가로막았다. 룡이 한 발 옆으로 비켜서자 다시 한 번 따라붙으며 바로 코 앞까지 바짝 몸을 붙였다. 까만 눈을 깜빡이다 살풋 내리깔며 목소리를 낮게 깐다. 이랑은 입술을 비죽이며 불쌍한 척 코를 훌쩍였다. 


"나 추워."

"……."


 방금 그건 좀 치사한데. 이룡은 겸연쩍은 기분을 감추며 이랑의 팔을 끌어당겼다. 가자. 그 말이 떨어지고나서야 새초롬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너와 나의  ¾ 







"구슬아. 형한테도 좀 와 봐."

"백날 불러봐라. 얘가 너한테 가나. 얜 너 싫어해."


 이랑은 보란 듯이 제 품에 안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온통 새까만데 눈밑과 콧잔등만 허얘서 분칠을 한 얼굴이었다. 검둥개라는 임시 이름으로 불리던 강아지는 이랑의 집에 온 뒤로 구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껌딱지마냥 이랑의 어깨에 두 팔을 올린 안긴 강아지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쓰다듬을 때마다 꼬리에 모터를 달아둔 듯 흔들기 바빴다. 이룡이 손을 뻗자 강아지는 이랑의 품으로 쓱 모습을 감췄다.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옹송그린 모습에 이랑은 뿌듯해하며 제 강아지를 꼭 끌어 안았다. 이랑은 보송거리는 강아지의 머리와 작은 앞발에 입술을 대고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고, 발랑 배를 까뒤집고 누운 강이지의 배를 쓰다듬었다.  


"저 형아는 싫지, 그치? 구슬이는 엉아만 좋아하지?"


 엉아. 룡은 애교 섞인 랑의 목소리에 입을 헤 벌렸다 닫았다. 강아지 앞에서만 나오는 저 목소리와 평소와 달리 풀어진 얼굴로 연신 웃는 얼굴이 예뻤다. 강아지 앞에서만 나오는 모습을 보는 맛에 구슬이가 온 뒤로 이 집에 더 드나들게 됐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이랑의 집에 도장을 찍은지도 석 달 쯤 됐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이랑의 반려견은 룡에게 곁을 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동안 사다 바친 간식만해도 넘쳐났는데 한 번을 쓰다듬지도 못했다. 유기견 출신이라 그래. 겁도 많고, 가족 말고는 다 싫어해. 아, 신주 형 빼고. 룡은 손을 뻗었다가 외면받자 혀를 차며 머쓱해진 손을 거뒀다. 벌써 28번째 실패를 맛보는 중이었다. 랑의 무릎 위에서 내려 올 일 없는 강아지는 몸을 앞으로 쭉 길게 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몇 번을 와도 살갑게 반겨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구슬이의 산책도 끝났고, 이번에 새로 산 게임도 튜토리얼까지는 끝났다. 스토리 진행부터는 스포일러가 될까봐 서로 돌아가고 나면 플레이하기로 한 탓에 더는 할 게 없었다. 룡은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동실 서랍을 열자 열을 맞춰 정리되어있는 아이스크림컵을 보고 허, 하고 기가 찼다. 몇 번을 놀러와도 참 한결같은 냉동실이었다. 민트초코뿐. 이럴 거면 치약을 얼려먹지. 


"다른 맛은 없냐?"

"야. 도로 갖다 넣어. 우리 형 그거 숫자 세."


 구슬이에게 삑삑이 공을 던져주던 이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지 형이 우선순위였다. 평소에는 형에 대해 불평 불만을 쏟아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형'이라는 말을 썼다. 모든 말에 '우리형이~'하고 수식어가 붙었다. 형제가 없는 외동인 룡으로써는 원래 형제자매가 있는 애들은 다 이런가 싶었다. 어느 날은 철천지원수 같다가도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휘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너가 하나 먹었다고 해."

"난 그거 안 먹는 게 아니고 아예 못 먹어."

"그러면 다른 맛도 좀 사놔."

"난 아이스크림 안 좋아해." 


 손에 집었던 아이스크림을 넣다 뺐다 하던 룡은 좀처럼 선택을 하질 못했다. 바를 먹을 것인가 컵을 먹을 것인가의 고민을 하는데 제 뒤통수가 따가웠다. 게다가 말은 더 톡 쏜다.


"전기세 나가. 닫아." 

"넌 이 집에서 뭐 먹고 사냐."


 어차피 고민해봤자 맛은 똑같은데 룡은 기어코 바를 하나 꺼내와 입에 물었다. 입안이 홧홧하고 차갑기만했다. 이게 뭐가 좋다고. 그래도 그 뱃속에 들어갈 게 하나 적어진다 생각하니 왠지 몰래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 까는 소리에 거실에 앉아있던 사람 하나 그리고 강아지 한마리가 룡을 같이 쳐다본다. 하나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싶어 눈이 반짝이고 하나는 죽일 듯 노려본다. 


"야! 너 그거 채워놔."

"싫은데."  


 너 초코 떨어트리지마. 구슬이 먹으면 큰일 나. 씩씩거리며 다가와 냉동실 문을 열더니 텅 빈 한 칸을 노려본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하늘이 무너질 일도 아닐텐데 우왕좌왕하던 이랑은 결국 신발장으로 향한다. 운동화에 신발을 구겨신는 이랑을 보며 어이없는 듯 룡은 물었다. 


"너 뭐하냐."

"뭐하긴 편의점 간다. 구슬아, 산책 한 번 더 가자."


 산책을 한 번 더 갈 수 있다니 산책이라는 소리에 쌩하니 뛰어온 구슬이는 벌써 하네스를 차고 나갈 준비 만반이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잖아." 


 춥다면서 외투도 없이 나서는 걸 보고 이룡은 얼른 소파에 걸쳐져있던 후드를 챙겨 따라나섰다. 


"너도 참 번거롭게 산다."

"그럼 먹질 말든가. 우리형 꺼라고."


 이랑은 궁시렁거리며 룡이 입으라고 들고 있는 후드에 양 팔을 찔러 넣었다. 후드 지퍼를 잠궈주는 일도, 끝이 살짝 풀린 랑의 신발끈을 단단하게 묶는 일도 이룡의 몫이었다. 이랑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이미 빨간 불이 들어온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했다. 저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단번에 고층으로 올 일도 없는데 이랑은 애꿎은 버튼에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룡도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점수 얻기 어려운데 가진 점수마저 몽땅 차감되고 마이너스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줄게. 사주면 되잖아."

"당연히 니가 먹었으니 니가 사야지. 니가 우리형 꺼 먹었는데.""


 왜 이름표 붙어놓으라하지. 그 말은 참았다. 무슨 말을 꺼내도 본전도 못 건질테니 지금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산책을 가게 된 구슬이만 신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어갔다.  





"먹고싶은 거 있으면 담아."


 그 말에 과자라고는 잘 입에도 대질 않던 녀석이 과자코너를 기웃거린다 싶었다. 민트초코칩이며, 민트초코 팝콘을 민트초코 글자만 보이면 족족 집는 손을 물어버리고 싶었다. 처음 보는 민트초코 관련 제품을 다 챙길 셈인건지 이번엔 바구니 안으로 민트초코우유 담기지만 꺼낸 말이 있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훔쳐 먹었다가 배로 돌려주는 중이었다. 장바구니를 손에 쥐고 이랑의 뒤만 따라 걷던 룡은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 매대에 섰다. 2+1 행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랑이 룡이 먹은 민트초코맛 바를 집자 룡은 마저 다른 맛을 골랐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도 역시나 이룡이 들었다. 양손을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랑은 자꾸만 궁시렁거렸는데 너가, 아이스크림, 형꺼. 비슷한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들 뿐이라 룡은 얼른 아이스크림을 까서 랑의 입에 물렸다. 


"나 딸기 먹을거야."

 

 아직 뜯지 않은 룡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쳐다보며 이랑은 눈썹을 이죽거렸다. 너가 이거 먹어. 나 캬라멜 싫어. 잇자국이 그대로인 초코코팅 아이스크림을 룡은 흘끔 쳐다봤다. 이랑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던 자리. 


"왜 입 닿아서 싫어?"

"싫기는."

"그럼 좋냐? 그게 더 이상하거든. 아, 됐어. 내놔." 

"아, 바꿨으면 끝이지. 딸기 먹고 싶다며."  


얼결에 입에 물렸던 캬라멜맛 아이스크림대신 제가 원하는대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이랑의 눈꼬리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아직 산책 연습 중인 구슬이가 산책줄을 있는대로 꼬면서 걷느라 이랑은 손이 바빴다. 


"저녁까지 먹고 갈 거야?"

"어."

"너는 갈 데도 없냐. 맨날 우리집."

  

너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오는거지. 룡은 야속한 이랑의 뒷통수를 보며 그 말은 다시 한 번 삼켰다.  갑자기 구슬이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개의 힘에 이끌린 이랑도 어쩔 수 없이 맞춰 뛰기 시작했다. 앞서서 뛰어가다말고 뒤를 돌아본다. 뭐해. 빨리 안 오고. 내심 버리고는 안 가네 싶어서 룡은 마음 한켠이 으쓱했다. 






"근데 맨날 왜 너가 밥 사?"

"나 용돈도 있고. 우리 형이 원래 집에 누구 초대하면 대접해야지. 돈 쓰게하지 말랬어." 

"니네 형이 그거 검사하냐?" 

"빚지는 거 제일 싫어해. 우리 형." 


피자상자 바닥이 여전히 뜨끈했다. 예상 배달시간이 50분이였는데 20분도 안되서 도착한 덕에 여전히 따끈한 피자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연이 제일 자주 시켜먹고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시켰다. 메뉴는 어플에서 알림도 뜨고, 할인 쿠폰까지 얹어주는 신제품으로 시켰다. 무료로 사이즈도 업도 되고, 사이드도 치킨윙에 파스타도 오는 세트라서 둘이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룡이 피자를 집으려하자 이랑이 손사레를 쳤다.


"아, 내가 할래. 너 가만히 있어."


웬일로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는 건가싶어 룡은 피클 뚜껑만 열었다. 여기는 수제 피클인가보네. 피클을 하나 집어 우물거리며 룡은 이랑은 쳐다봤다. 그냥 손으로 집어도 될 텐데 피자칼까지 쓰며 8조각 중에 심혈을 기울여 피자 두 조각을 자르는 걸 보며 유난스럽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 행동은 의아함이 스멀스멀 밀려 올라왔다. 랑은 선반을 뒤적이더니 꽃무늬가 들어간 그릇을 골랐다. 8조각의 피자 중에서도 토핑이 듬뿍 올라가고 모양도 잘 잘려진 쪽을 골라담는다. 뭘 이렇게까지 챙겨주나 싶어 내심 머쓱하던 이룡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이랑이 든 접시를 받으려다말고 기시감을 느꼈다. 이랑은 피자 두 조각을 빼둔 접시를 옆으로 밀어두더니 피자 상자 째로 먹으라며 상자를 쓱 룡의 앞으로 밀었다. 


"저거는 뭐야."

"우리 형 줄 건데."


 그럼 그렇지. 이랑이 형에게 줄 피자 위에 얹어둘 덮개를 가지러 간 사이 룡은 이랑이 심혈을 기울여 골라둔 피자 두 쪽을 겹쳐 먹었다. 우왁스럽게 피자 두 쪽을 씹어 삼키면서 말을 돌렸다.  


"너 이제 진짜 우리집 차 안 탈거야?"

"아침에만 안탄다고. 아침에만. 이제 아침엔 형이 데려다준데." 

"쭉?"

"어. 몇 번을 물어봐. 야. 너는 무슨 피자를 두 개씩 겹쳐먹어. 하여간 있는 놈이 더 하다니까." 


피자상자에서 피자를 집어 한 입을 베어물던 이랑은 뒤늦게 골라둔 피자조각이 없어진 걸 알아챘다. 이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챙겨 들거온 덮개를 내팽개쳤다. 덤덤한 얼굴로 보란듯이 겹쳐 잡은 피자를 먹고있는 룡과 빈접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왜." 


기껏 토핑도 많이 올라가고 예뻐보이는 조각을 심사숙고해서 골라놨는데 하필 그걸 집어가 먹어버린 룡을 노려보던 이랑은 피자박스를 치워버렸다. 너 먹지마. 아예 상자를 들고 싱크대로 간 이랑은 남은 피자조각 중 뭘 고를지 고민했다. 아까 그게 딱 크기도 적당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는데 성질이 났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내려가는데 외제차 한 대가 천천히 이룡의 앞에 멈춰선다. 뭐지? 길 물어보려는 건가? 이쪽 동네 살지 않아서 물어봐도 대답을 못할텐데 괜히 긴장이 됐다. 이룡은 의심스럽게 운전석 쪽을 바라봤다. 룡의 시선을 느꼈는지 바로 창문이 내려간다. 아. 룡은 숨을 삼켰다. 와인빛 머리카락과 연예인 뺨치는 얼굴이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 랑이랑 놀다 이제 가니?" 

"네."

"그래. 잘 가."


크고 하얀 손을 흔들며 다시 차를 몰고 가버리는 차 꽁무니를 쳐다보던 룡은 갈길을 갔다. 괜히 보도블럭 위에 신발 밑창이 끌리게 걷다말고 뭔가 밑도 끝도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저 자식은 왜 얼굴도, 차도 명품이지. 까만 폰 액정에 괜히 제 얼굴을 비쳐본 룡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옆으로 넘겨보다 이내 머리를 털고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중간하게 주방과 거실 사이에 멀뚱히 서있던 이랑은 현관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뛰어와 소파에 안착했다. 그리고는 쿠션 아래 감춰져있던 리모컨을 찾아내 급하게 TV를 켰다. 랑아. 형 왔다. 아이고, 구슬이 엉아 마중 나왔어요? 구슬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연에게 달려가자 랑은 눈을 흘겼다. 배신자. 랑은 까만 꼬리를 째려봤다. 


"앞에서 니 친구 봤다. 더 놀다가라고 하지." 


구두를 벗으며 들어오던 이연이 흘끔 TV를 봤다. 노친네냐. 무슨 바둑채널을 봐. 작게 따라붙는 웃음소리에 이랑은 끌어안은 쿠션에 고개를 푹 묻었다. 아이씨. 채널을 미처 안 살펴봤네. 씻으러 들어간 큰형이 사라지자 구슬이는 다시 소파 위로 뛰어올라와 쿠션과 랑의 틈을 파고 들었다. 어떻게든 랑의 무릎 위에 몸을 비집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뭐야. 이 배신자. 너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며. 우리형 왔다고 그렇게 쪼르르 가버릴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랑은 구슬이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이연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오자 이랑은 슬쩍 준비해둔 피자 접시를 소파 앞 테이블에 잘 보이게 끌어다 놨다.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이연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랑은 리모컨을 눌러 넷플릭스를 틀었다. 이거 볼 거지? 맥주를 마시던 이연이 눈짓으로 맞다 얘기하자 랑은 바로 이어보기를 눌렀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보질 않았다. 왜인지 영상물은 집중력이 떨어졌다. 차라리 책을 보는 게 나았다. 그럼에도 이랑은 그저 이연의 곁에 앉아 가끔 같은 장면을 보며 맞장구를 치고 얘기거리가 많아지는 이 시간이 좋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괜히 리모컨 위치를 바꿔보고, 쿠션도 품에 안았다 다시 등 뒤에 기댔다하며 자리를 바꿔보는데 이연이 말을 걸었다. 

"피자 시켜먹었어? 이거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괜히 우쭐해진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랑은 씰룩이려하는 입꼬리를 단단하게 붙잡으며 톡 쏘아 붙였다. 

"저녁 먹고 왔다면서.  ...애인?" 

"애인은 무슨. 그래도 이건 먹어야지. 원래 피자는 식은 게 맛있지. 잘 먹을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금새 얼굴이 풀어진 이랑은 포도맛 탄산음료만 홀짝였다. 화면 속에서는 금고털이에 성공한 범인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할로윈 때 저 복장할까? 우리 구슬이랑 신주까지 껴주자. 형의 말에 이랑은 그게 뭐냐며 대답대신 팔꿈치로 이연의 옆구리를 밀었다. 빨간 죄수복에 커다란 표정 없는 동그란 눈을 가진 마스크라니. 이미 콧수염까지 멋들어지게 그려지 가면이라 따로 콧수염 붙일 일은 없겠지만 이랑은 난 거기서 빼줘 하고 싶었다. 멋들어지게 기관총을 든 것처럼 포즈를 잡는 이연을 보며 이랑은 이번엔 쿠션을 들어서 아프지 않게 제 형을 때렸다.     






종종 생각나는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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