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까마귀
2020년, 9월
얇은 긴팔을 입으면 딱 좋았던 선선한 가을밤





까마귀    근데 너는, 왜 갑자기 디자인 분야로 간거야? 


나          나는, 나는... 더 이상 기획 일을 하고싶지 않아졌어. 그러니까 기획 자체는 재미있어. 평생 하고싶어. 근데 돈 받고 하는 기획말고, 못 벌더라도 내가 하고싶은대로 만들고 싶다.


나는 여전히 곱창이 수북한 전골을 국자로 휘휘 저었다. 


까마귀    그치. 나도 그런데. 


나          하하하. 정말 뻔한 얘기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건 일로 하면 안된다는… 그 정말 뻔한 말을 깨달은거야. 그래서 아, 그러면 내가 엄청 좋아하진 않지만 내 적성에 맞는 어떤 기술을 배우자, 생각을 했어. 그랬을 때 내가 글도 좋아하고 텍스트 편집도 대충 배우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거야. 그래서 나는 디자인을, 내가 사랑하진 않는 일이지만, 하하. 할 수는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한거지.


까마귀    맞아. 사랑하지 않는 일을 하는게 중요한 것 같아.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면.


나          그치그치. 사랑하지 않은 것 중에 가장 나은 것을 찾았더니, 디자인 쪽이 있더라고. 그래서 이직을 해서, 애정은 없으나 성실히 일을 하고. 칼출근 칼퇴근 하고. 그러고 있지. 하하하. 아, 굉장히 좋더라. 안정적인 근무 형태를 갖추고 나니까, 이제 남는 시간에 내 기획을 할 시간이 생기는거지. 


까마귀    나도… 나는 이 분야에서 썩을 인재가 아닌데. 하하하. 


나          그래. 너는 혼자 할 수록 더 밝게 빛나. 히히. 


까마귀    솔직히 지금 내 페이가 또래에 비해서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진 않은 것 같거든. 그런데도 지금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나 일의 강도를 생각해보면 월급이 적다고 느껴지는거야.


나          아.. 그러면 받는 돈이 얼마든 행복하지 않잖아.


까마귀    그렇지. 월급이 들어와도 의미가 없어. 그냥 들어왔네, 하고 말아. 그냥… 내 삶에 내가 없는게 너무 싫은 것 같아. 


우리가 사라진 우리의 삶은 어디로 빠져나가고 있을까?


까마귀    돈을 벌려고 사는게 아니라, 살려면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는거잖아? 그런데 나는 일하느라 행복이 사라지고…


나          그리고 나는 일에서 자아실현을 하라는 그 말이, 존나 개 거짓부렁이라는걸 알아브렀어.


까마귀    일에서는 자아실현을 할 수가 없어.


나          자아를 없애면서 해내는 것이 일인데 어떻게 자아실현을 하지? 몰랐어. 고등학생때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어. 


까마귀    나한테도. 하하하. 


나          구라쟁이들. 


맥주 한잔도 마시질 않았지만 우리는 신이 나서 낄낄댔다.


까마귀    근데 다른 사람들 말로는, 이 업계에 그래도 좋은 사람들도 많대. 


나          오오. 


까마귀    그러니까 조금 더 겪어보고. 


나          그래, 다음엔 이 사람보단 더 나을 수도 있지. 


까마귀    그러니까. 이 사람까지 겪었는데 이제 뭔들 힘들까. 이젠 뭐든지 쉬울 것 같아. 


나          오, 그치. 왠지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까마귀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 그래. 그러면서 마음에 꿈을 계속 갖고 있으면 되지. 내가 여기서 언젠가는 도망갈거야! 하는 준비 태세를 흐흐흐. 놓지 않는거지.


까마귀    그래! 내가 언젠간 떠날거다 새끼들아. 


나          맞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기회가 딱 났을 때 확 잡을 수 있는거지.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길고양이들 밥 먹을 때 뒷다리 하나 정도는 늘 빼놓고 있는 것처럼. 뭔지 알지? 하하하.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엉덩이를 쭉 빼고 도망갈 준비를 마친 길고양이처럼 사는 것은 인생을 얕고 즐겁게 사는 방법이다. 


까마귀    그래. 사실 지금 이 작업도 내가 욕심이 있어서 선택한거지만 처음부터 쎄했어. 역시 쎄한 느낌은… 느낌에서 끝나면 안돼. 피해야 돼.


         조상님이 옆에서 속삭이는거야. 도망가라고. 


까마귀    내가 몇 십년 동안 겪어온 경험과, 조상님들의 속삭임이 계속 나한테 말을 걸었는데 내가 그걸 무시하고… 돈 벌겠다고 영혼을 팔았네 내가… 


나          아하학.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어. 지금은 일을 골라가면서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잖아 우리가. 


까마귀    맞아… 그런데 작업 초반에는 정말, 몸이랑 마음이 다 망가졌다고 했잖아. 심장이 너무 아프고. 숨이 답답한거야. 그래서 역류성 식도염인가? 해서 병원에 갔는데, 나한테 스트레스 많이 받냐고 물어봐. 그렇다, 했더니 위장약이랑 신경안정제를 주더라고. 그 신경안정제 먹으면서 일하는데, 이렇게까지하면서 왜 이 일을 해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나도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내가 왜?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있잖아, 나는 예전 회사 근처만 가면 숨이 잘 안 쉬어졌었어. 그래서 회사 근처를 3바퀴? 맨날 그렇게 돌다가 들어갔어. 출근을 해야하는데 회사 건물에 못 들어가겠는거야. 저기 들어가면 죽을 것 같고. 그래서 근처 뱅뱅 돌다가 들어가고… 


까마귀    후엥… 


         하하. 그때는 그랬지… 그럼 너는 지금은 괜찮아졌어? 약 더 안 먹어도 돼? 


까마귀    그때 신경안정제 먹으면서 버티던 중에, 직원들이랑 같이 힘든거 얘기하다가 눈물이 팡 터졌거든. 내가 진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약간, 초탈했다는 느낌? 울기 전까지는 맨날 아 씨발 저새끼 왜 저러지? 나한테 왜 저래? 이런 마음이었는데, 확 울고나니까 아… 그래. 이거만 버티면 이제 너랑 나랑 끝이다. 그런 생각만 들더라. 


나          눈물로 해소가 좀 됐나보다. 


까마귀    응. 뭔가 좀 마음이 사그라들었어. 


나          계속,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끝이 없더라고. 쟤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나도 뭔가 잘못한게 있지 않을까? 내가 잘못한 건가? 계속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잖아. 그러지 말고, 아 몰라. 하하. 다 꺼져. 이러고 살아야 돼.


까마귀    배째라 씨발. 이게 최선인데 뭐. 이러고 있지. 이제는 그냥 아, 제발 잘라주세요. 잘라주세요. 그러고 일한다니까? 흐흐.


나          어휴. 뭔지 잘 안다. 근데 어떻게 4개월이나 했어.


도저히 다 못 먹을 것 같은 양의 곱창이 남았다. 우리는 종업원을 불러 볶음밥을 주문했다.


까마귀    그러니까. 미련한거지. 


나          흐흐.


까마귀    나는 이걸 미련하다고 정의합니다.


나          하하. 


까마귀    이것은. 예… 그렇습니다. 


까마귀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오직 견뎌낸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단단함도 있었다.


나          고생했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틴대? 네가 제일 다이렉트로 당하는거고 그 사람들은 괜찮은거야?


까마귀    내가 당하는걸 옆에서 보고, 그러고 나면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해지니까 그 분위기가 힘들겠지. 


나          헐 그렇구만. 그 구조가, 권력이 한 사람한테만 우와악 몰려있는 구조인거잖아. 그게 진짜, 안 좋은 것 같아. 그 밑의 사람들이 아무리 성격이 좋던간에 메인 한명이 이상한 인간이면 죄다 빡치는거잖아..


까마귀    그것도 그렇고. 그리고 너무 이기적이고. 내가 한번은,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 다른 사람이 해놓은 업무를 보여주면서 이거 너무 이상하다고. 다른 사람이 한거를 왜 굳이 날 불러서 얘기를 하냐고. 


나          왜 너를 굳이... 


까마귀    다 그런 식이야. 다른 사람들이 일을 거지같이 해도 내 문제인거야. 


나          존나 욕받이야?


까마귀    어 맞아. 일이고 뭐고, 일단은 무조건 자기 얘기 다 들어줘야 돼. 언제는 있잖아, 다른 사람이 서류 정리해놓은걸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놓으면 어떡하냐고 난리를 치는거야. 그러면서 서류 테이핑한걸 다 뜯겠대. 다시 정리한다고. 근데 걔가 뭘 어떻게 하겠어.
내가 커터칼 가져와서 대신 떼주고 있었거든. 그러면서 한시간동안 그 년 얘기를 듣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아니, 이 미친년이 내가 칼을 들고있는데 왜 나한테 이러는거지?


         하하학. 야 너 어떡하냐.


까마귀    아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면, 아 진짜 저 새끼 죽이고 싶다. 이런 정도로 생각할 순 있지. 나는 이미 나는 죽일 의사는 빵빵하고, 그 와중에, 내 손에 칼이 있는데 저 새끼가 저러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거지.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되니까… 내 자신이 너무 무섭더라고. 


나          심각했다 진짜. 


까마귀    맞아. 그때가 한창 절정이었어.


뜨끈한 볶음밥을 한입 가득 퍼먹었다. 아무래도 이 볶음밥도 다 먹진 못할 것 같았다.


나          으응… 고생했다. 그래도 좀 더 나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까마귀    다음엔 정말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걸까? 


나          그러게. 그래야지. 


까마귀    암튼 분명한 건, 내 인생에서 이제 이 새끼는 없어. 영원히.


         맞아. 꺼져라.



***

쓰고싶은 글을 쓰는 사람 / 에세이, 소설을 씁니다

하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