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제공: 섭

“음.”

전파를 타고 흐르는 대화가 싱거웠던 탓에, 랜서의 시선은 산만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저녁의 길거리는 한적했으므로, 그는 연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가로등 불빛 아래 모여있는 하얀 나방들 따위를 번갈아 가며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래.”

시선을 옮겨 다니는 것에도 금방 물린 랜서는 몸을 살짝 틀었다. 살짝 옮겨진 그의 시야 안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이 들어왔다. 누구더라, 쉽게 흩어질 수 있었던 생각은 걸어오던 상대가 문득 멈춰선 덕분에 길게 이어졌다. 무표정한 얼굴은 흐린 빛을 받아선지 괜히 쓸쓸해 보였다. 아처네. 시선이 마주치자 랜서는 한쪽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보통 그가 이렇게 인사하면 아처는 지긋이 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슥 사라지곤 했다.

“….”

그러나 이번의 아처는 달랐다. 가만히 머뭇거리던 그는 천천히 랜서에게 다가갔다. 평소와 정반대의 행동이라, 아처가 어색해하는 만큼 랜서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보통 인사하면 이러는 편이 더 자연스럽긴 한데…잠깐만… 랜서는 전화 너머로 대화하던 상대를 순간 잊고 아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건 자연스럽다고 하기에도 너무 가깝지 않나…?

“….”

“….”

- 랜서?

“어? 어어.”

살얼음 끼듯 차오른 정적을 깬 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였다. 랜서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놀란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처는 눈을 내리깔았다.

- 뭐야, 안 듣고 있었어?

“그게, 잠깐 딴 생각을…? 으엇…?”

두 팔이 천천히 몸을 감싸는 것에 놀란 랜서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대답하느라 잠시 옆으로 돌아가 있던 랜서의 붉은 두 눈이 다시 아처에게로 쏠렸다. 랜서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감은 아처는 상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기에, 랜서는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

갑자기 남을 덥석 끌어안은 주제에, 아처는 그 이상으로 랜서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움직임은 그게 전부였고, 랜서에게 말을 걸거나 눈치를 주는 것도 없었다. 그런 침착함 때문에, 랜서는 어쩐지 아처의 돌발 행동을 저지할 의욕이 들지 않았다. 랜서는 어정쩡하게 늘어져있던 팔을 들어 아처의 목 뒤를 감쌌다.

랜서는 굳이 통화를 서둘러 끊으려고 하진 않았다. 아처의 행동이 의아하긴 했으나, 동시에 어쩐지 아처가 바라는 게 이 단순한 포옹이 전부라는 짐작도 들었던 게 이유였다.

“그래, 알겠어. 그럼…”

통화가 종료될 것 같자 아처는 처음에 안길 때 그러했듯이 조용히 몸을 떼어냈다. 여전히, 어떤 신호나 말은 없었다. 아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지만 랜서는 왠지 그 뒷모습이 몹시 눈에 밟혔다. 자신도 모르게 아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 랜서는 전화를 끊자마자 살짝 뛰었다.

“….”

“…왜?”

손목이 잡힌 아처는 처음과 같은 덤덤한 표정으로 랜서를 돌아봤다. 랜서는 할 말이 있어 그를 붙잡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입만 뻐끔거리다 애꿎은 아처의 손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생각하는 척 시간을 벌어보는 것이었으나, 여전히 랜서가 느낀 것을 적절한 언어로 바꿀 만큼의 시간은 아니었다.

“…할 말 없으면,”

“같이, 잘, 래…?”

투박하게 튀어나온 표현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라, 랜서는 혀를 잠깐 깨물었다.

“무슨…” 아처는 황당함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왜…?”

“….”

“너,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헤픈 쪽은 아니라서,”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잠만 자는…거…”

“그래도 여전히 같은 의미잖아. 언제부터 그만큼 친했다고.”

“....”

“내가 잠깐…너를 안았다고, 바로 나한테서 그만큼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좀 불편한데.”

“그…, 내가 말을 잘못 한 거 같아.”

“알면 됐다.”

“나를 재워줄 수 있냐고 물어볼걸…그랬네.”

“…뭐?”

“나, 잘 곳이 지금 마땅치 않아서, 음…” 랜서는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처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밤만, 안될까….”

“……진짜?”

“으응. 그, 싫다면…미안한데.”

“….”

“….” 랜서는 역시 수습이 망한 것 같다는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그냥 솔직하게 네가 내게서 바란 것을 그대로 바란다고 말할걸 그랬나. 아니, 근데 이게 뭔 말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손, 놓고 따라와라.”

“응… 응? 어어…” 랜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처의 손을 놓았다. “따라오라고…?”

“그래. 길바닥에 누울 생각이 들었다면 말리진 않을 거지만.”

“아니…! 고마워.”

“….”

랜서는 아까 전의 포옹을 이끌어낸 아처의 충동이 아직 조금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핑계에 흔들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불쑥 번복할 수도 있단 생각에, 랜서는 다시 입을 다문 아처에게 굳이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여분의 이불이 없군.”

“음? 괜찮아, 그냥 바닥에서 자도.”

“흠….”

조금 낮은 침대 옆에 풀썩 앉은 랜서가 벽에 등을 기댔다. 아처는 뭔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침대를 보고 있었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듯 아처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불을 툭 껐다.

“잘 자.”

랜서가 인사를 건넸다. 아처는 별 말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부스럭거리더니, 고개를 쑥 내밀었다. 랜서가 아처를 마주보자, 아처는 밧줄을 내려주는 것처럼 이불을 슬쩍 내밀었다.

“…? 너 덮어.”

“…나도 덮을 거야.”

“너 다 덮어도 되는데…”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슬금슬금 내려오는 이불자락에, 랜서는 말끝을 흐렸다. 기어코 반절의 이불이 내려왔고, 아처는 이불을 몇 번 펄럭거리며 랜서의 몸 위로 위치를 맞춘 후에야 만족한 듯 몸을 돌렸다.

정말 이상한 밤이네, 랜서는 멀건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이불은 전부 랜서의 몸 위로 올라와 있었다. 랜서는 그것을 보자마자 침대 위로 시선을 돌렸고, 아처는 이미 나간 건지 침대에 없었다. 묘한 기분은 아침이 된 후에도 휘발되지 않았고, 랜서는 괜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적막한 집 안을 살폈다.

“남을 집에 두고 나가는 건 무슨 생각인지…아침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천천히 일어난 랜서는 이불을 둘둘 말아 침대 위로 올렸다. 시각을 한 번 확인하고, 잠시 갈등하던 그는 책상 위에서 메모지를 하나 뜯었다. 전화번호가 휘갈겨진 메모지는 침대 머리맡의 벽에 붙여졌다. 아처의 연락을 기대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남기는 목적이 더 큰 행동이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은 모르는 전화번호 떠도 족족 받을 것 같네…” 약간은 탄식처럼 중얼거리며, 랜서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20분 후, 아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살짝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집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고, 아처는 마른 침을 삼켰다. 2인분의 식사가 담긴 비닐봉투를 식탁 위로 올려놓은 아처는 숨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둘둘 말린 이불을 힐금 보고 픽 웃은 아처는 벽에 붙은 메모지를 눈치챘다. 별 다른 말 없이 숫자만 써져 있는 메모는 의도가 모호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여분의 도시락이 있는데 사갈 거면 연락해라.]

답장은 금방 왔다.

[먹지 말고 기다려. 다시 갈게.]

짤막한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은 아처는 문득 속이 울렁거려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뒤로 눕기까지 했으나 울렁거림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텅 빈 천장이 오늘따라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이상한 놈…”

중얼거린 말은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과 거짓이 섞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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