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늘 주변에서 친구를 사귀었었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아주 어렵고, 아주 쉬웠어요.
몇 밤 지나고 나니 이미 친해진 친구가 있는가 하면 친해지고 싶어 주변을 맴돌아도 선뜻 거리가 좁혀지지 않다가 우연히 짝이 지어진 시간을 계기로 훅 가까워진 친구도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과 우연을 함께 보내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던 사람도 있었고요. 함께 보낸 시간보다는 함께 나눈 마음이, 서로를 스치다가 같은 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던 눈길이 관계의 거리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때부터 알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늘 약간은 아웃사이더 같은 친구들과 더 쉽게 친해졌어요. 사람을 안 좋아하면서도 외로움을 타던 성격이라, "혼자 있는 게 좋은데 필요할 때에는 같이 놀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어."같은 느낌의..리릇빗..지랄맞은 성격이었습니다. (혹시 이런 욕망을 가졌던/가지고 있는 비언 계신가요? 아, 걱정 마세요.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주류에서 벗어나고, 또 자기 세계가 뚜렷해 남에게 큰 관심이 없어보이는 학생들에게 시선이 쏠렸습니다. 저 같았거든요. 게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면 그 친구들은 꽤 반겨주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다가가면 반가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는 예전 반 학생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얼굴들은 꿈에 나왔어요,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얼굴들이요. 또 최근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나온 화제에서는 친하지 않았으면서도 제가 꽤 호의를 느꼈던 옛날의 얼굴이 퍼뜩 되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름까지도요! 제가 개명하면 가지고 싶었던 이름이 고작 말 몇 마디 해본-같은 반 단발머리 학생의 이름이었다는 사실도 그 때가 돼서야 깨달았습니다. 어딘가 허술한 성격에 대체로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 친구는 신기할 정도로 균일한 중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한 학년이 지나는 내내 머리 모양이 바뀌지 않던, 유독 결이 좋고 언제나 같은 모양을 유지하던(아마 미용실에 자주 갔겠죠) 머리모양이 인상에 깊이 남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그 친구를, 사실 친하지도 않았던 그 학생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발머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생활도 사회생활이니, '눈치'란 게 필요했잖아요. 반에서 힘을 가진, 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집단이 있으면 반에서 발언권이 적고 중심에서 뚝 떨어져 있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타인이 보는 내 이미지에 갇혀 살던 저는 후자에 가까웠지요. 그리고 전자에 속한 학생들은 후자에 가까운 학생들을 종종 적극적으로 무시했습니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특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과 배제•적극적 타자화는 내부의 결속력에도 각자의 사회적 위치 공고화에도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잘 나가는' 무리에 속해 있던 그 단발머리 친구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반의 그런 흐름에 무지했습니다. 자기 무리와 조가 갈라져도 태도가 바뀌는 일이 없었고, 다만 자기 친구들 앞에서 더 편해 보였을 뿐이었어요. 반에서 소외되어 있던 학생들을 대할 때에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줬었습니다. 사실은 그 태연함이 당연한 거여야 했지만, 그 학생의 다른 친구들은 그와는 다른 모습을 예사로 버여줬었기에, 늘 한결같은 단발머리 학생이 유독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거겠지요.

아주 친한 게 아니었고 함께 다니는 무리가 아니었음에도 마주치면 아주 반갑게 인사해주던 친구, 그래서 제가 정말 좋아했던 친구의 이름도 이제야 생각났네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꾸준히 나를 잊지 않고 챙겨주던, 냉랭해 보이기만 했었던 친구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수많은 연 중 지금까지 이어지는 연은 많지 않아요.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 친구였든, 연락 주기가 어떻든, 얼마나 친했든 상관 없이- 서로를 잊지 않은 친구들과는 오래도록 연결될 수 있었어요. 또 그리고 그 중에는, 20년지기 친구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나 친해졌고 스무 살 무렵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 공통 관심사가 적어 함께 떠들 화젯거리가 적다고만 생각했던, 제게 가장 오래된 친구요. 스물 두 살 무렵이었을까요? 어느날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뭐든 재밌어 해주기에 제가 장난도 많이 치고, 뭐든 제게 맞춰주던 그 친구는 늘 제게 먼저 연락을 해줬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를 지나치게 편하게 대한 적은 없지만, 먼저 찾아주는 친구에게 너무 익숙해졌었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퍼져나가던 어느날, 연락이 잘 안 돼 너무 이상하다 싶어 몇 달 만에 (그간 정신없이 바쁘긴 했지만 반성하고 있어요. 걱정만 할 시간에 전화 한 통이라도 해볼걸- 싶더라고요.) 카톡을 하려고 들어가보니 마지막 카톡이 저를 부르는 친구의 말이더군요. 인식도 못한 새에 제가 읽씹을 했던 겁니다. 사과와 함께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연락을 통 하지 못했던 이유는 입원 때문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어요.

친구는 아직 입원 중이지만 드문드문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친구의 연락이 두어 달쯤 끊겼을 때, 무슨 일 있나 불안해 하지 말고 제가 먼저 연락을 했다면 더 일찍 소식을 알고 도움도 줄 수 있었겠지요. 속으로 걱정할 시간에 걱정의 마음을 직접 전할 수도 있었을 테고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친구가 늘 먼저 연락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버렸었나 봅니다.

세상에 그 무엇도 당연한 건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면서, 저를 무척 배려해주던 친구에게는 정작 소홀했던 저를 기록하고 반성하는 의미로, 글을 남깁니다. 세상에 당연한 마음은 없다는 걸 잊고 싶지 않으니까요.






글로 세상을, 또 당신들을 만나는 여성주의자이자 레즈비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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