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속 재생"으로 배경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호석이는 착하니까 혼자 잘 놀 수 있지?

사실은 혼자 노는 거보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그림책도 읽고, 공놀이도 하며 놀고 싶었어. 난 아직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8살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보다 더 어린 동생들이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우니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어른들은 우는 아기는 예쁘다고 안아줘도, 우는 아이는 싫어하잖아. 찡얼대면서 고집부리는 아이는 미움받는걸.

―네! 저 혼자서도 잘 놀아요!

―아유, 착하다. 우리 호석이.

착한 아이는 부모님께 미움받지 않아. 비록 부모님의 사랑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고 싶은 말은 늘 마음에 꾹 담아두고 괜찮은 척 생글생글 웃을 줄만 알지, 사실은 내 의견 같은 건 하나도 말 못 하는 바보가 바로 나야. 내 의견, 내 생각을 말하다가 미움받는 게 싫었거든.

“정호석, 못 알아듣겠어?”

그렇게 20년간 살아와서일까? 나를 기만한 애인, 아니 이제는 구 애인이 될 게 확실한 놈에게도 한마디 못 했다.

“착하면 뭐 하냐. 재미가 없는데. 넌, 사람을, 질리게 해. 알아?”

타과대 강의실에서 새 애인으로 보이는 여학생의 팬티를 벗기고 섹스하려던 장면을 나에게 들키고서도 뻔뻔하게 자신의 바지 지퍼를 끌어 올리며 날 탓하는 그놈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앞서서 병신처럼 눈물만 나왔다.

“이만 끝내자.”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으며 그놈과 헤어졌고, 여학생은 나를 비웃으며 그놈과 함께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강의실을 나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 괜찮았잖아. 이렇게 갑자기 변하는 게 어딨어. 나는 그저 네가 기뻐하는 게 좋아서 네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었을 뿐인데. 네가 하자는 거, 먹자는 거, 가자는 거, 갖고 싶다는 거, 전부 맞춰 줬는데. 그게 너를 질리게 했던 거야?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거야?

“흐으…… 흐엉~”

그래도 이런 식으로 바람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차라리 헤어진 뒤에 만나지 그랬어. 그럼 이렇게까지 내가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지진 않았을 거 아냐. 어떻게 양다리를 걸칠 수 있어. 누가 봐도 네가 잘못한 거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근데 왜 내가 나쁜 거처럼 느껴지는 거냐고.

이런 때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정말 내게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싶어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졌다.

그때 내 앞으로 하얀 손과 함께 깔끔하게 4등분으로 접힌 체크무늬 손수건이 나타났다.

“흑…… 윤기 혀엉…….”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교양 수업에서 조별 발표 준비를 하다가 친해진 윤기 형이 내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 본 걸까? 봤든 안 봤든 상관없었다. 차였다는 쪽팔림보다는 위로를 위해 건네는 손수건에 담긴 다정함이 더 마음을 채웠으니까.

“……복수하고 싶어?”

“흐으…… 네?”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 콧물을 닦는 내게, 형은 느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낡아빠진 캔버스화, 밑단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오래된 청바지. 목이 늘어진 까만 티와 그 위에 덧입은 유행 지난 빨간 체크 남방,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길러 눈을 가린 거로도 모자라 스냅백을 푹 눌러쓴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너드였다.

너드의 정석을 닮은 외모만큼이나 그의 전공 역시 외모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컴공과였다. 그것도 수석 장학생.

“널 상처입힌 놈한테 복수하고 싶다면 도와줄게.”

마치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 같았다.

“……흑, 어떻게요…….”

“네게 다시 돌아오게 하면?”

“…….”

“잘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

눈도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붉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듣기 좋은 저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드에게 고백을

SUGA X J-Hope

for. 민설탕💜 님

written by 휴위







재수 없는 그놈에게 차인 호석은 실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 왔어?”

문을 열자 룸메이트이자 한 학번 위의 석진이 잔뜩 멋스럽게 차려입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며 클럽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석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충 대답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고, 그 모습에 석진이 뒤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어? 왤케 기운이 없어?”

“……차였어요.”

“……뭐!? 아니 왜! 차도 네가 차야지, 차이길 왜 차여!”

석진은 자신의 일처럼 흥분해서 외쳤다.

호석은 다시 눈물을 글썽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석진은 ‘그 새끼 죽여버리겠어!’라고 길길이 날뛰며 양 소매를 걷고 뛰쳐나가려는 걸 호석이 놀라 매달리다시피 허리를 잡으며 말렸다.

“너도 너다! 그 새낄 그냥 놔둬!? 두 번 다시 좆질 못 하게, 개소리 지껄이지 못하게 불알 터뜨리고 강냉일 우수수 털어버렸어야지!”

“…….”

호석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착한 게 뭐 어때서! 어장 관리하거나 꽃뱀 짓 안 할 테니 얼마나 좋아! 그 새끼 완전 복에 겨워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 됐어! 그딴 새끼 잊어버려! 클럽 가면 그 새끼보다 백 배, 천 배 나은 애들 수두룩 빽빽이야!”

“나는…… 그런 만남은 그다지…….”

호석은 유희가 아닌, 정말로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줄 사람을 원했다. 구 남친이 그럴 줄 알았건만, 자신이 잘못 본 거였다.

고딩 때부터 친구였다가 연인이 된 케이스였다.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첫 남친이었기에, 처음은 언제나 특별했기에, 호석은 미련이 가득해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슬펐다.

“난 좀 잘게요. 형은 잘 놀다 와요. 오늘은 꼭 ‘슈가’라는 분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

“아, 그, 쉽지 않아. 한 달 전부터 통 안 보이더라고.”

홍대에서 가장 핫하다는 클럽 ‘디보이’의 죽돌이인 석진이 보고 싶어 하는 핫 피플 슈가라는 사람은 한 번쯤 클럽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유명 인사였다.

핑거링만으로도 사람을 극락으로 보내버리는 엄청난 테크니션이라더라,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임신한다더라, 한 번이라도 자면 그의 육욕의 노예가 된다더라, 얼굴이 한류 스타 뺨칠 정도로 잘생겼다더라 등등 별 전설 같은 이야기가 뒤따르는 사람이었다.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 경험하고 싶은 남자가 바로 슈가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석진은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홀에서 춤만 열심히 추고 와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한 달 전부터 클럽의 그 누구도 슈가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에 관해 알려진 거라곤, 원나잇 상대가 슈가의 지갑에서 방단대학 학생증이 있는 걸 우연히 본 거로 인해 그가 방단대 학생이라는 것뿐이었다.

이후로 소문이 쫙 퍼져 클러버들은 눈에 불을 켜고 방단대학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슈가의 ‘ㅅ’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잘 놀다 와요.”

“……올 때 야식이라도 사올까?”

“괜찮아요.”

“그래, 다녀올게.”

석진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호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기숙사를 나갔다. 호석은 침대에 앉더니 스르르 베개를 베고 누웠다.

―널 상처입힌 놈한테 복수하고 싶다면 도와줄게.

눈을 감으니 윤기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게 다시 돌아오게 하면? 잘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호석은 눈을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괜히 복수하겠다고 한 걸까…….”

그의 계획이 영 미덥지 않았다.

“윤기 형…… 이상한 사람…….”

정말로, 그는 묘한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와의 첫 만남은 절대평가에 학점 잘 주기로 소문났다며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수강하게 된 서양 철학 강의 때였다. 서양 철학 사상가들 중 하나를 정해 생애, 사상, 저서, 현실 적용점 등등에 관해 조별 발표를 해야 했는데 교수가 임의로 짜준 조에서 만나게 되었다.

5인 1조였지만, 싸가지 없는 이들의 무임승차로 인해 결국, 조사부터 ppt 제작과 발표까지 도맡아 한 것은 저와 윤기 둘뿐이었다.

너드에, 사회기술이라곤 1도 없어 보이는 무뚝뚝함과 냉한 모습에 편견을 가졌지만, 의외로 자료 조사를 열심히 하고, ppt 젬병인 저와 달리 기업 발표 프레젠테이션용처럼 멋지게 제작한 것은 물론, 멋진 목소리로 발표하는 모습에 편견이 사라지고 호감이 생겼다. 이후로 선배님이라는 호칭 대신 형으로 부르게 되었고.

하지만 유유상종이라 하더니 그 주변에도 너드들이 가득했다. 우연히 학생 식당에서 밥 먹는 그와 마주쳤는데, 복붙했나 싶을 정도로 비슷한 옷차림과 비슷한 용모를 한 너드들이 회식 나온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같이 온 친구들은 컴공과는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비웃었지만, 저는 단번에 윤기를 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눈에 들어왔다. 무기력하게 친구들과 뭐라뭐라 말하며 밥을 깨작깨작 먹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로 옆자리에서 강의를 들으며 시험 준비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곤 했다. 외모는 너드였지만, 목소리는 정말 환상적으로 멋졌고, 손가락도 마디마디가 굵고 큰 멋진 손에, 배려가 몸에 밴 다정한 성격이라는 거에 호감이 갔다. 정말 좋은 형이라고 생각했다.

“…….”

호석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차인 저를 위로해준다고 건넨 손수건은, 그의 체크 남방과 세트인 것처럼 체크무늬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계획…… 있어요?

복수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으니 윤기가 웃었다.

―질투심 유발. 남자들은 단순해. 싫어서 버렸다 할지라도 버린 게 나보다 더 잘난 놈 손에 들어가면 눈 돌아가기 마련이거든.

―……그래서요?

―이제부터 넌 진주가 되는 거야. 잘난 놈 손에 들어간 최고급 진주.

―…….

―그놈이 내 손에서 너를 되찾아오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잠도 못 잘 정도로, 매력적인 진주가 되는 거지.

부우웅―

호석은 손수건을 쥔 채 가방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핸드폰을 꺼냈다.

윤기 형    내일 기숙사로 데리러 갈게. 첫 수업 몇 시야?

9시요.

데려온다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일단 답장을 보낸 호석이었다.

윤기 형    시간표 찍어줄래?

시간표는 왜요?

‘시간표는 또 왜?’

윤기 형    내 수업이랑 겹치지 않는 선에서 에스코트하려고.

“네!?”

호석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너드가 에스코트라…… 아무래도 이거 아닌 거 같은데…….

호석은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놈이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패션 센스나 말주변이 좋아서 나름 인기가 있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너드가 질투를 일으킨다? 과연?

윤기 형    걱정하지 마. 내일부터는 너드가 아니니까.

“아…….”

그걸 제일 걱정하는 걸 어떻게 알고 답장을 보내는 걸까. 아무튼, 너드가 아니게 꾸며온다는 걸까?

“꾸며봤자……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데…….”

호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 시간표 사진과 답장을 대충 보냈다.

넨네 기대할게요^^

그러나 속으론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호석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호석은 1교시 수업을 위해 기숙사를 나올 때였다. 기숙사 주차장 광장에서 남녀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거기엔 석진도 있었다. 석진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호석이 다가가 석진에게 물었다.

“호석아! 대박! 우리 학교에 진짜 슈가가 있었어!”

“……네?”

호석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석진이 호석을 끌어당겨 제 앞에 서게 하더니 정면을 보게 했다.

“!?”

척 봐도 고급 브랜드인 게 느껴지는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입은 잘생긴 나안의 남자가, 바다색을 닮은 파란 페라리 운전석에 기대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연예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시니컬해 보이는 백사자처럼 잘생긴 얼굴이었다. 존잘남, 만찢남이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그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석은 제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발신자가 윤기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형.”

“나 도착했는데. 나오고 있어?”

“네, 지금 기숙사 광장에 사람들 모인 곳에 있는데…… 형은 어디예요?”

호석은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윤기를 찾았다.

그러자 페라리에 기대 서 있던 이가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두리번거리던 호석과 눈이 마주쳤고, 웃으며 성큼성큼 호석을 향해 걸어왔다.

호석은 그 웃음에 순간 심장이 두근거려서,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해 윤기를 찾았다.

“크흠, 형? 어디에요? 안 보이는데…….”

남자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호석 앞에 멈췄다.

호석은 갑자기 뚝 끊기는 통화에 의아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가자, 석아.”

“!?”

호석은 고개를 퍼뜩 들어 존잘남을 응시했다. 믿을 수 없게도, 이 존잘남의 목소리는 제가 아는 너드 민윤기의 것이었다.

‘너드가, 존잘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어!?’

호석이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진도 슈가와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놀란 눈으로 호석을 바라보았다.

윤기는 피식 웃으며 호석의 손을 잡고 파란 페라리로 데려갔다. 호석은 엉겁결에 끌려가 윤기가 열어주는 조수석에 앉았다. 윤기는 직접 안전벨트를 매주곤, 운전석에 가 시동을 걸어 기숙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에에에에엑!?”

그날 현장을 목격한 기숙사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페, 페라리라니…….’

죽기 전에 탈 수나 있을까 싶었던 차를 타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윤기의 모습이었다.

“어…… 저…… 형?”

“왜?”

한 손만으로도 능숙하고 안전하고 부드럽게 핸들을 조정해 운전하는 윤기였고, 호석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무리하지 못해 그를 불렀으나 뒷 말은 잇지 못했다.

“많이 놀랐어?”

“네에…….”

호석의 대답에 윤기가 웃었다.

‘와…… 웃는 거 대박.’

그걸 본 호석은 심장이 두근거려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왜 두근거리는 건데?’

“이 정도는 되야 그놈이 질투 느끼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에. 아니, 근데 형, 왜 평소에는…….”

호석이 차마 ‘그 단어’를 말하지 못하자 윤기가 피식 웃으며 대신 말한다.

“너드로 사냐고?”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편하니까. 말 거는 사람도 없고, 관심 갖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편한데.”

“…….”

“일단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 목적 달성할 때까지 사귀는 거로 하자.”

“네!?”

호석이 놀라 외쳤고, 윤기는 조심그럽게 뒷말을 잇는다.

“물론 가짜로.”

“아, 넨네.”

“친구나 지인에게 우리가 가짜로 사귄다거나 그런 거 말하지 말고.”

“당연하죠.”

“우리 첫 만남은 교양 강의 듣다가 내가 너한테 반했고, 너 차이자마자 내가 고백해서 사귀는 거로 하는 게 좋을 듯한데, 어때?”

“……어, 음. 네…….”

“그럼 결정.”

윤기는 인문대 주차장에 도착해 주차하고 안전벨트를 풀고 내렸다. 호석도 안전벨트를 풀고 내려 인사를 꾸벅 하고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윤기가 호석의 곁으로 와 그의 어깨는 감쌌다.

“혀, 형!?”

“에스코트, 확실하게 해야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윤기는 호석을 국문과 전공 강의실로 데려갔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다정한 연인처럼 등장한 호석과 윤기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중엔 슈가를 알아보는 클러버들도 있었다.

호석이 긴장하며 자리에 앉자, 윤기는 호석의 볼에 짧게 뽀뽀하며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

눈이 동그래져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붉어진 호석을 향해 윤기가 웃었다.

“수업 잘 들어. 이따가 데리러 올게.”

호석이 어버버 거리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가 강의실을 나가자 강의실은 난리가 났다. 모두 호석에게 달려와 에워쌌다.

“방금 슈가 맞지! 슈가잖아! 진짜 우리 학교였어!?”

“호석아! 뭐야! 대체 뭐야! 너 언제부터 슈가랑 사겼어!?”

“대박! 대박!”

‘진짜, 인싸였어, 윤기 형. 아니, 슈가 씨.’

클럽 핫피플 슈가와 국문과 정호석이 사귄다는 말이 삽시간에 방단대학을 휩쓸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호석은 윤기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전 수업 어땠어?”

페라리에 올라탄 호석을 향해 윤기가 기대하며 물었다.

“대박이었어요. 제 인생 통틀어 그렇게 관심받아본 적은 처음이에요. 형, 진짜 인싸였네요. 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확히는 슈가겠지.”

“네, 맞아요. 핑거링 환상적이고,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임신하고, 형이랑 잔 사람은 형을 평생 잊지 못한…….”

“왁! 왁!”

윤기는 잔뜩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손을 뻗어 호석의 입을 막았다.

“…….”

“그, 그건 옛날 일이야. 손으론 한 건 맞는데 섹스는 안 했어! 진짜 맹세해! 자꾸 가짜 뉴스 퍼지는 거 나도 곤란하다고. 이젠 손으로도 안 해. 절대 안 해. 그때는 내가 그 뭐냐, 개인적으로 방황하던 시기라서…….”

윤기가 말을 더듬으면서 진심 어린 변명을 하며 부끄러워하자 호석은 ‘어라, 뭐지? 조금 귀엽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제 입술에 닿은 윤기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핸드크림 냄새가 밴 온기를 깨닫곤 조금, 마음이 설렜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윤기는 조심스럽게 호석의 입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네?”

그 질문에 호석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놈은 단 한 번도 제게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나면 늘 놈이 원하는 중식류만 먹었으니까.

“저는 딱히…… 아무거나 괜찮아요. 형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나도 아무거나 잘 먹어. 흠, 그럼 하나 골라 봐. 양식, 중식, 일식, 한식, 베트남, 인도, 그 외.”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지금까진 그놈이 좋아하는 중식만 주구장창 먹어서 물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게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거나 골라 보라고 선택지를 준 적이 없었다.

“……양식이요. 파스타 먹고 싶어요.”

사실은 파스타나 리소또, 스테이크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말이다. 호석의 대답에 윤기가 씩 웃었다.

“그럼 결정.”

페라리가 움직였고, 학교 부근의 파스타 전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2층 창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파스타 2개와 스테이크, 호석이 좋아하는 딸기 에이드를 주문했다.

서버가 식기를 놓고, 컵에 물을 따랐다. 두 사람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호석은 아무리 봐도 너무 신기해서 윤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믿기지 않아요.”

“뭐가?”

“형이요.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싶어서요.”

“의외로 쉬워.”

“그럼 혹시 금수저예요? 페라리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아니면 렌탈했어요? 멋진 사람 연기를 위해서?”

호석의 말에 윤기가 풉 웃으며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곤 손으로 턱을 괴며 호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 자수성가.”

“네?”

그 모습이 멋있어서, 호석이 움찔했다.

“다 내 돈 주고 산 거야. 혹시 모바일 게임 좋아해?”

“아, 아니요. 저 게임 젬병이라 그런 거 안 해요. 하나도 모르고요.”

“그래…… 음, ‘에브리 팡’이라고 친한 애들이랑 팀 만들어서 구슬 터뜨리기 게임을 개발했는데 그게 꽤 대박 나서 돈 좀 벌었어. 후문에 있는 솝빌라 1층에 사무실도 있어. 다음 달에는 좀 더 큰 곳으로 이사할 계획이고.”

“오! 컴공과라서! 게임도 만들 수 있군요~ 대단해요! 멋지다~”

“비밀로 해줘.”

호석이 눈을 반짝이며 치켜세워주자 윤기는 으쓱하며 물을 마셨다.

“비밀이라면서 저한테 말해도 돼요?”

“내 애인이니까.”

“…….”

가짜인데요? 호석은 태클 거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으나 어쩐지 심장이 간질거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이드가 나오더니 곧 주문한 요리도 나왔다.

호석은 그놈과 있을 때 늘 하던 대로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자르려 했지만, 윤기가 먼저 손에 쥐더니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다. 이어서 집게를 들어 호석의 접시에 파스타도 조금씩 덜어주었다.

늘 제가 그놈에게 해주던 거였는데, 이렇게 윤기가 해주는 걸 보니 조금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색 좋아해?”

“네?”

“빨대.”

윤기가 에이드에 꽂힌 보라색과 파란색 빨대를 보며 가리켰다.

“저는…… 보라색이요.”

“그럼 난 파란색으로 먹을게.”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제 의견을 묻고 선택권을 먼저 주니 말이다.

“맛있다.”

윤기는 자신의 접시에도 파스타를 덜고 포크로 돌돌 말아 호로록 먹으며 웃었다.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

“……네에.”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에이드 하나 더 시킬까?”

“이거로도 충분해요.”

제 의견을 물어봐 주는 윤기가 고마워서 환하게 웃었다. 윤기는 멍하니 그 웃음을 보다가 헛기침하며 스테이크를 먹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겼다.

“그럼 지금은 렌즈 낀 거예요?”

“아니, 원래 시력 좋아. 안경은 데코용. 너드의 필수품이잖아.”

“풉―”

동의한다며 호석이 하트 입을 만들며 하하 웃었고, 그 모습에 윤기도 빙그레 웃었다.

“역시, 호석이 넌 웃는 게 예쁘다.”

“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다음 수업 가야지?”

“네. 잘 먹었습니다.”

“나도 잘 먹었어.”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호석은 또 늘 하던 대로 계산하기 위해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고, 윤기가 당황하며 호석의 카드를 빼앗아 되돌려주며 제 카드를 내밀었다.

“호석아, 이건 내가 살게.”

“네? 왜요?”

“사주고 싶으니까.”

“…….”

윤기는 계산을 마치고 호석의 허리를 감싸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호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이 닿은 허리에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가는 듯했다.

‘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그놈과 마주친 호석이었다. 그놈의 옆에는 어제 강의실에서 본 여자와 함께였다.

“세상에! 슈가잖아!”

윤기를 단번에 알아본 여자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그녀도 만만치 않은 클럽 죽순이인 듯했다. 그러나 곧 슈가가 허리를 감싼, 애인으로 보이는 호석을 보며 표정이 팍 찌그러졌다.

“너…….”

그놈은 호석과 슈가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코웃음 쳤다.

“뭐냐, 정호석? 너도 양다리였냐? 나한테 차이자마자 얼씨구나 물었어?”

‘무슨!’

호석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양다리 걸치는 잘못한 게 누군데!’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울컥하는 마음에 호석은 입술을 앙다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시끄럽게 어디서 개가 짖지?”

“뭐, 뭐!”

윤기의 묵직한 말에 그놈이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윤기가 서늘한 삼백안으로 그놈을 노려보았고, 기백에 눌린 그놈은 움찔하며 더는 말하지 못했다.

“개 따위에겐 우리 호석이가 아깝지.”

윤기는 호석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 맞추었다.

“남자 보는 눈이 저렇게 형편없어서야, 큰일이네.”

윤기는 그놈이 아닌 그놈 옆에 선 여자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곤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페라리에 올라타 사라져 가는 이들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인문대 주차장에 도착한 윤기는 말없이 새로운 체크무늬 손수건을 호석에게 내밀었다.

호석은 킁, 콧물을 훌쩍이며 손수건을 받아 꼭 쥐었다.

윤기는 호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위로했다.

“당당하게 있어. 너 잘못한 거 없어. 애인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은 그 자식이 잘못한 거니까. 알겠어? 누가 잘못했느냐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그놈 욕할 거야.”

“…….”

쓰다듬는 손길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호석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형은, 왜 이렇게 다정해요?”

“…….”

“그놈이랑 비교되게 왜 이렇게 다정한 거야…… 흐엉~”

“…….”

호석은 손수건을 꼭 쥔 채 윤기에게 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

왜 다정하냐는 질문에, 윤기는 대답하지 못한 채 호석의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줄 뿐이었다.










방단대학 후문의 솝빌라 1층 ‘어거스트 개발사’ 사무실. 사무실이라고 해도 파티션으로 반을 나눠 한쪽은 컴퓨터를 놓은 작업실, 다른 쪽은 간이 침대와 소파가 놓인 숙소였다.

“마, 쩡국아! 우리 대표 성님은 왜 또 지지리 궁상이고. 오늘 아침부터 안 하던 짓 한다고 때 빼고 광내고 한껏 슈가로 꾸며 나갔다 아이가.”

일체형 동물 잠옷 차림에 웅크린 등을 보인 채 소파에 누워 침울해하는 윤기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는 지민이었다. 그는 윤기와 함께 대한민국 국민 모바일 게임 에브리 팡의 개발사 어거스트의 직원이자, 컴공과 너드 중 한 명이었다.

“뻔하져, 뭐. 차였겠져.”

컴퓨터 앞에 앉아 버그를 잡던 다른 컴공과 너드 직원 정국이 안경을 올려 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 너드 민윤기가 아닌 슈가 모습인데도 차였따꼬!?”

윤기는 움찔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하이고, 우짜노. 글케 클럽 좋아하던 사람이 교양에서 만난 이쁜이 때문에 클럽도 뚝 끊더니만.”

―형은, 왜 이렇게 다정해요?

윤기는 번데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호석의 말을 곱씹었다.

―그놈이랑 비교되게 왜 이렇게 다정한 거야…….

대체 제가 뭘 어쨌다고 다정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평소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하던 대로 한 것뿐인데 말이다. 제게는 당연한 행동이 그놈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고작 그것만으로도 다정하다고 느끼며 우는 호석의 모습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안녕하세요! 국문과 20학번 정호석입니다!

첫인상은 환하게 웃는 얼굴이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참 예쁜 아이였다.

―저…… 선배님도 힘드시면 저 혼자 발표 준비할게요.

두 번째 인상은 싫은 소리 못하고, 부조리해도 저 혼자 모든 걸 끌어안는 미련스러우리만치 착한 아이였다.

―우와~ 선배님 너무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ppt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저도 가르쳐주세요! 네?

세 번째 인상은 모르는 건 뭐든 열심히 배워보려는 노력하는 아이였다.

―착하면 뭐 하냐. 재미가 없는데. 넌, 사람을, 질리게 해. 알아?

네 번째 인상은 그런 모욕적이고 상처가 되는 말을 듣고도 한 마디 욕설도 못 하고 엉엉 우는 가여운 아이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이 아이가 울지 않게. 왜냐하면, 정호석은 웃는 게 제일 예쁘니까,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사랑스러우니까.

그리고…… 제가 그를 좋아하니까. 그렇기에 호석도 저를 좋아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놈이 존재했고, 그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울 정도로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다.

“어떡하냐. 우리 대표 성님 성과가 없어서. 그렇게 이쁜이랑 그놈 깨지게 하겠다고 그놈 폰 해킹하고 일부러 메시지 보내서 이쁜일 바람피우는 현장으로 오게 했다 아이가.”

“맞아여. 교내 CCTV까지 해킹해서 그놈 동선 파악하기까지 했져. 들키면 우리 감방 가는 거 아닌가 몰라여.”

지민과 정국의 말대로였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깨지게 하고 싶어서, 그놈이 있는 곳을 CCTV로 파악했고, 강의실로 들어가자마자 카톡 메시지로 호석을 안내해 결국 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슬퍼하며 우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애인 행세도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는 그와 데이트하는 듯해서 행복하고 좋았지만, 그도 그랬을까? 저와 만나면서도 그놈을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우울했다.

“어? 대표 형, 그놈이 대표 형네 이쁜이한테 톡 보냈어여. ‘나와 봐, 할 말 있어.’라는데여? 찬 놈이 이런 거 보내면 백퍼 다시 사귀자는 시그널이라던데.”

“뭐!”

해킹 프로그램에 그놈의 문자가 뜬 걸 보고 읽은 정국이었고, 윤기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사무실을 뛰쳐나가려고 했다.

“에헤이! 성님! 돌았나! 옷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이가! 그 꼬라지로 어딜 갈라카노!”

다행히 지민이 재빠르게 윤기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말렸다.










나와 봐. 할 말 있어.

그날 밤. 기숙사에서 잠 못들어하는 호석은 늦은 시각에 저를 불러내는 그놈의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번호는 진즉에 삭제했지만, 차단하는 걸 깜빡해서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받았다.

나갈까, 말까 고심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어서 밖으로 나갔다.

“호석아.”

“…….”

“내가 잘못했어.”

“!”

그놈은 호석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 기집애 정리했어. 고분고분한 맛이 없더라. 자기주장이나 세고, 얻어먹기만 하고. 역시 날 위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너뿐이더라.”

“…….”

호석은 그놈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 있는 걸까? 사귀었던 사람에 대한 존중 같은 게 조금도 없었다.

언제는 착해서 질린다더니 이제는 그 여자와 달리 고분고분하고 자기주장이 없어서 좋단다.

어쩜 이렇게 역겨울까. 어째서 자신은 이런 놈을 좋아해서 그렇게 사귀었던 걸까?

“우리, 다시 만나자. 응? 너 나 아직 사랑하잖아. 내가 너 속상하게 해서 홧김에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랑 만나는 거지? 그 새끼 소문 존나게 더러운 거 알아? 거쳐 간 사람만 해도 지구 반 바퀴야. 임신시키곤 애 떼라고 돈 지랄한 게 몇십 건은 된대.”

윤기에 관해 쥐뿔도 모르면서 그를 모욕하니 호석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윤기 형은 그런 사람 아냐!”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그놈에게 소리 높여 외쳤다. 단지 아니라고 외쳤을 뿐인데 나쁜 짓을 한 거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놈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야, 정호석.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쳤냐? 나한테 화냈어? 와, 얼척 없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 아, 뭐야. 너도 그 새끼랑 잤냐? 내가 하자고 할 때는 그렇게 목석같이 뻣뻣하게 굴면서 거절하더니 벌써 잤어? 엉?”

그놈이 언성을 높이자 호석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유지한 채 악다구니를 썼다.

“아니라고! 너랑! 윤기 형이랑 같은 줄 알아!?”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또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윤기 형은, 윤기 형은…….”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정말, 바보처럼, 제 의견도 제대로 말 못 하는 바보 같은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윤기 형이 얼마나 다정한지, 배려심이 있는지, 얼마나 상냥하고 멋진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늘 하루였지만. 아니, 처음부터 그는 그랬다.

모두가 도망쳐도 그만은 남아서 저와 함께 자료도 찾았고, 제가 잘 못 한다고 하니 ppt도 멋지게 만들어 주었고, 발표 울렁증이 있다고 하니 발표도 해주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1학년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점심도 사주었고.

그와 함께하면, 존재만으로도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멋지고 좋은 사람이 저 때문에 저놈에게 욕을 먹는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억울했다.

그때 호석은 뒤에서 어깨가 잡혀 몸이 돌아가더니, 코앞까지 다가온 윤기가 호석의 허리를 감싸 키스했다.

“!”

말캉한 입술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잠시, 입술 틈을 파고드는 윤기의 뜨거운 혀가 호석의 치열을 훑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음~!”

구석구석 가지런한 치열을 하나하나 다 건드리며 여린 살을 탐하더니, 입천장도 간질이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타액을 꼴깍꼴깍 삼키는 이 상황에 호석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민윤기는 키스를, 정말, 잘했다.

호석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고 했지만, 윤기가 허리를 꽉 잡은 덕에 의도치 않게 그의 품에 폭 안기게 되었다.

“하아…….”

윤기는 호석에게서 입술을 떼더니, 더는 호석이 그놈을 보지 못하게 뒤통수를 꽉 감쌌다. 죽여버리겠다는 서늘한 눈빛으로,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삼백안으로 그놈을 노려보았다.

“내 애인이야. 개수작 부리지 마.”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극저음에 호석은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놈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둘만 남은 조용한 기숙사 광장에서, 윤기는 계속 호석을 안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 왜 다정하냐고 물었지?”

“…….”

“내가…… 널 좋아해.”

“!”

윤기는 남은 팔을 들어 호석을 좀 더 끌어안았다. 완전히 밀착된 두 사람이었고, 느껴지는 체온에 호석은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미칠 것 같았다.

“좋아해, 호석아.”

귓가에 속삭이는, 애절하기까지 한 다디단 고백에 눈물을 글썽거리는 호석이었다.

“정말, 좋아해.”

“…….”

눈물은 빠르게 차오르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놈보다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어. 나는 너 안 울려. 늘 웃게 해줄게. 평생 다정하게 대할게. 그러니까…… 너도 나 좋아해줘. 그놈 잊고, 나랑 사귀어줘. 부탁이야…….”

필사적인 고백에, 호석은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저를 갈구하듯이 좋아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마음이 벅차올라서, 눈물만 나왔다.

언제나 미움받기 싫어서, 마음을 숨기고, 하고픈 말도 꾹 참으며 살아온 착한 아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고 싶었다.

용기를 내야 해. 그래야, 마음을 전할 수 있으니까.

그가 너드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는 언제나 저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주었으니까.

“나도오…… 흐윽, 윤기 형이 좋아요…….”

저와 같은 마음인 호석의 고백을 들은 윤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굴 입을 만들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호석아…….”

그 어느 때보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잘 들리는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민설탕💜 님 후원 감사합니다~^^

너드공은 처음인데 마냥 너드면 곤란해서 여러가지를 섞어보았습니다. 일단 너드면 컴공과 아닙니까? 그래서 컴공+너드+겜개발+클럽 핫피플+계략+벤츠남.... 그랬더니 혼종이 되었네요?;;; 그, 그래도 열심히 썼답니다.... 부디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쭈굴쭈굴...;;;) 

너드도 참 매력 있어 좋네요. 하지만 그 너드를 벗어버리는 순간 매!력!폭!팔!

쓰레기 같은 구남친은 가고 벤츠남 뉸기가 왔습니다.

한국 사람은, 특히 여자들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많은 거 같아요. 착한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착하다는 건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해줄 수 있는 다정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착한 사람이 좋아요.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지고 나도 더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비록 주변에서는 착하면 바보 같다고 뒷담화하고 이용하는 시키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책하시거나 상처 받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 시키들은 인성이 쓰레기라서 그런 거니까요. 착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사람도 꼭 만나실 수 있으니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세요.(저 같은 사람이요ㅎㅎ) 여러분은 그 자체로도 참 예쁘고 소중한 존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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