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스콧른 교류회 참석을 위해 썼고, 이후 쩜오온에서 재판했던 단편입니다. 본즈>커크<스코티에서 본즈스콧이 되는 과정을 얼렁뚱땅 다루고 있습니다. 오래 전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넌 항상 짐의 이야기를 해 

 제임스 T 커크는 돌연 나타났다가 돌연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다. 금발과 푸른 눈은 그의 영웅적 행보에 비논리적인 신빙성을 심어준다. 천사 같아요. 혹은 신이나. 말도 안 되는 일들도 그럭저럭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레너드 맥코이가 제임스 T 커크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엉망진창이고 볼품없었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리버사이드 쉽은 스타플릿으로 향하는 예비 생도들을 빽빽하게 수용했고 생도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와 커크뿐이었다. 아침의 햇살 아래서 군데군데 부식한 쉽의 표면은 한껏 도드라져 보였다. 그게 레너드 맥코이를 불안하게 했다. 쉽의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온 무중력 상태의 각종 바이러스와 질병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불안감은 털털거리며 이륙 준비를 하는 쉽의 바닥을 밟았을 때 현실감으로 가중되었다. 화장실에 앉아서 갈게요. 안절부절 못 하는 그를 생도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의사에게 가보세요. 가긴, 내가 의산데. 레너드가 허우적거리자 생도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앉으세요. 화장실에 가있겠다니까요! 실랑이를 하는 동안 생도가 그를 빈자리로 익숙하게 밀어 넣었다. 제가 비행공포증이 있어서……. 레너드가 포기하지 않고 의자 앞에서 어물거리자 생도는 눈을 부릅떴다. 곱게 앉지 않으면 제가 직접 앉혀드리죠.

 “……알겠어요.”

 “고맙군요.”

 의자는 엉덩이보다 조금 좁았다. 레너드는 몸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어깨에 벨트를 두르고 고개를 드니 금발의 청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레너드가 그의 얼굴, 자잘한 흉터와 기껏해야 어제 혹은 그제 튄 혈흔, 피멍과 찢어진 입술을 훑었다. 스타플릿의 숭고한 임무수행을 준비하기로 다짐한 사람보단 뒷골목에서 병나발을 불다 덜미를 잡힌 갱단 끄나풀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회색 맨투맨 목덜미에 튄 핏자국이 그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레너드는 그제야 쉽 안에서 평상복을 입은 사람이 저와 눈앞의 청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구토감이 솟았다.

 “토할 지도 몰라.”

 레너드가 경고했다. 청년이 얼굴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이거 안전할 걸요.”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길 희망하는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이 놈은 비행경험이 없는 거야. 사천 미터 상공에서 요동치는 기내를 경험한 적도 없겠지. 트라우마 없는 자들이 고통에 대하여 넘겨짚듯이. 레너드 맥코이는 전혀 위안 받지 못 했다.

 “함선에 슬쩍 금만 가도 우린 타죽어. 눈 깜짝할 사이에 통닭 신세가 되고 말지. 온몸이 지글대고 압력으로 눈동자가 터져나갔을 때도 지금처럼 태연할 수 있나 보자고.”

 그는 정말로 함선이 추락하거나, 혹은 녹아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훈련소에 정박된 쉽에 탑승하기 전 레너드 맥코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함선의 표면을 확인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대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스타플릿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다음 정거장을 기약하며 트럭을 타고 사흘 밤낮으로 달려 나갈 수도 있었다. 생도가 그를 끌어당기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까 레너드는 정말 함선 바깥쪽으로 반쯤 몸을 빼놓고 있었다.

 “우주는 질병과 위험, 어둠과 끔찍한 침묵의 온상이야.”

 레너드가 퍼붓자 청년은 좀 질린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스타플릿 함선이 우주를 떠날 수는 없잖아요. (달리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레너드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조이는 벨트가 단단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험 삼아 당겨보고 마구 흔들었다.

 “하긴, 달리 갈 데도 없어.”

 안전으로부터 확신을 얻은 레너드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누라가 이혼하면서 행성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을 청구했거든. 뼈만 남겨놓고 다 털어간 셈이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브랜디를 목구멍으로 넘기자 울렁거리던 위장이 주춤거렸다. 알코올은 목구멍을 덥히며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줬다. 발밑이 진동했다. 함선이 출발하는 동안 레너드 맥코이는 죽음, 금 간 함선, 녹아내리는 시체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옆 자리 청년에게 브랜디를 넘겨주자 그는 거절하지 않고 남김없이 마셨다. 

 “제임스 커크에요.”

 “레너드 맥코이야.”

 그 다음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누군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푸르게 빛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함선은 최대 속력을 출력하며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몇 마디 대화를 더 했지만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구토감이 치솟은 레너드가 입을 다물었던 탓이다-그래도 토하진 않았다. 그들은 생도가 됐고 스타플릿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함선에 탑승했다. 그리고 우주로 나가게 됐다. 이혼이니 행성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금액이니 뼈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떠들어 댔던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인지 제임스 T 커크는 첫 만남 이래로 쭉 레너드 맥코이를 본즈라 불렀는데, 그 호칭은 함선에 탄 이후에도 함장석에 앉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언젠가부터는 주변 사람들도 그를 하나 둘 본즈라 부르기 시작했다. 별명은 애칭에 가까워졌다가 어느 순간 호칭으로 바뀌었다.

 “닥터 맥코이.”

 이야기가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스콧이 조용히 잔을 채워주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출렁이는 잔을 기울여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인 주인 없는 잔에 건배했다. 스콧이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함장을 위하여(For our captain.).”

 쨍, 하고 잔이 부딪쳤다. 둘은 말없이 위스키를 반 모금씩 머금었다가 잔을 흔들며 내려놓았다.

 말하자면 짝사랑 클럽 첫날이었지만 평소와 별반 다른 건 없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침묵하고, 잔이 비면 채우고 건배사를 읊은 후 제임스 T 커크에 대해 이야기한다. 테이블 가운데엔 언제나 주인 없는 잔이 있다. 술잔의 주인은 9시까지 브리지 교대를 기다리다 개인실로 들어가자마자 뻗을 것이며, 메디베이 혹은 기관실로 내려올 일이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제임스 커크는 비실거리며 아침부터 칭얼거렸기 때문이고, 그가 한밤중에 예고도 없이 메디베이로 들이닥친다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기 분명한데-섹스, 혹은 플러팅-그럴 일은 전무한데다가 비슷한 이유로 그가 기관실에 내려갈 일은 만일에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이 제임스 커크를 위해 술자리를 물린 적은 없었다. 테이블 사이엔 늘 커크가 마시지 못 할 그의 잔이 준비되어 있고, 레너드와 스콧은 자리 없는 잔의 주인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다. 커크의 잔은 술이 바닥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규칙은 아니었지만 둘은 항상 그 몫의 잔을 남겼다가, 그대로 버렸다.

 둘은 대체로 기관실에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일 자체도 종종 있는 일은 아니다. 질병과 부상은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한 수백 명의 대원들처럼 쉬지 않고 쉬프트 근무를 하기 때문에 메디베이의 침대가 비는 일은 천운에 가까울 지경이고, 메디베이가 비지 않으면 레너드 역시 술 생각은 진작부터 접는 게 좋았다. 몽고메리 스콧의 사정도 다를 건 없어서 대체로 야간근무에 시달렸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얌전한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속은 깐깐하고 섬세해서 걸핏하면 안전지대를 벗어난 수치로 기관실을 앵앵 울리는가 하면 워프코어의 에너지가 마구 뒤섞이고 있다고 모니터 가득 경고문을 띄웠다. 진땀을 빼며 밤낮으로 거기 매달려 있다가 바닥 혹은 개인실 근처에 엎어져서 잠이 들면 삭신이 쑤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손으로 꼽아봐야 한 달에 서너 번 정도였다. 직책의 문제는 아니다. 함선은 넓었고 일은 많았다. 대원들은 누구나 공평하게 바빴다. 그래도 시간이 나면 다들 꾸역꾸역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몇 명은 섹스를 하고 몇 명은 키스를 하고 몇 명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거나 토론을 하거나 가상현실에 빠져 있거나 그리고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은 잔을 든다. 술을 마시고 잡담을 한다. 대게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다. 이따금 조지 커크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고 금방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메디베이가 비는 날엔 그곳에서 마시고 그게 아니면 기관실에서 마셨지만 전자는 드물게 벌어졌으므로 대게 후자였다.

 처음 기관실에 내려갔을 때, 요란한 엔진소리를 막연히 상상하던 닥터 맥코이는 조용한 충격을 받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원들은 말이 없고 침착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직책을 수행하느라 기계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랬던 것 같다. 바닥과 기계, 파이프와 엔진을 타고 울리던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진동소리는 물 위로 잔잔하게 퍼지는 파동, 혹은 작게 자맥질하는 심장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폭력성이 없어서 그 어떤 것도 소음으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느껴졌다.

 스콧은 그를 기관실 안쪽, 코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개인실로 안내했다.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하나는 낮고 작았다. 킨저의 것으로 보였다), 벽면에는 찬장과 책이 두세 권 놓여 있었다. 책 표지마다 둥근 물 자국이 남아있어서 레너드는 두꺼운 전공서적과 얇은 시집 두 권으로 물기 있는 무언가를 받치고 있을 스콧과 킨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물 자국이 없는 건 엔터프라이즈 도면이 그려진, 그렇게 두툼하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책 한 권뿐이었다(쏟으면 곤란하기 때문이겠지, 라고 그는 넘겨짚었다). 스콧은 찬장에서 위스키와 잔 두 개를 꺼냈다. 슬쩍 열린 찬장 문틈으로 장미가 보였다. 레너드는 눈을 의심했다. 가만 보니 가지런히 놓인 찻잔들이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꽃잎 하나하나의…… 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찬장 문이 닫혔다.

 스콧은 잔을 두고 그를 앉힌 후 위스키 마개를 퐁 소리 나게 빼냈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꿀렁꿀렁 술이 잔 안으로 쏟아졌다. 레너드는 킨저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불편했지만 술맛이 좋아서 금세 엉덩이를 잘 오므리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취할 때가 걱정됐지만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술은 지상에서도 요크타운에서도 심지어는 함선에서도 마셔본 적이 있지만 몽고메리 스콧과 잔을 들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둘은 제임스 커크와 가깝게 붙어있는 와중에도 정작 서로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에 낀 커크가 빠지면 그 몫의 빈자리를 남겨두고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마땅한 타이밍이 없어서기도 했고 같은 근무지의 아주 다른 환경에 놓여 있던 데다가 연령 차이도 나고 아카데미 졸업 날짜도 다르고 첫 만남 이후 커크가 제대로 소개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유(핑계)는 많았다. 인간관계를 좁힐 기회를 놓친 중년들은 보통 어떤 노력을 하려 들지 않는다. 젊고 좀 더 힘이 넘치던 시절엔 달려가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보다 수동적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내달리는 때가 있었지. 레너드 맥코이 최후의 노력은 제임스 커크에서 끝났다. 아카데미에서 지대하게 관심을 가지고 친밀감으로 구애하여(마땅한 대체 용어를 찾지 못 했다) 성공적으로 좁혀진 관계 말이다. 그 뒤론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좁혀진 거리감과 관계성만 남았다. 몽고메리 스콧도 다를 건 없어서, 그리고 심지어 그는 노력 하나 없이 제임스 커크의 가까운 관계가 되어서(그래서 그 관계성은 급한 만큼이나 엉성했다) 한동안 커크와 연결된 엔터프라이즈호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얼떨떨한 위치를 고수했다. 돌이켜보자면 첫 등장부터 그런 위치였다. 물에 젖은 잠바와 뒷덜미에 착 달라붙은 탁한 금발 뒤통수가 기억난다. 워프 코어의 사고가 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브리지에서 말다툼이 있은 직후 스팍이 임시 함장 직을 내려놓고 떠났다. 스콧은 엉거주춤 서있다 말고 활짝 웃었다. 여기 난장판이네! 이 함선 맘에 들어. 능청스러운 중얼거림이었다. 분위기 한 번 더럽게 못 읽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둔하고 무신경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찻잔들이라니. 섬세한 장미와 아름다운 컵받침, 극도의 미감이 끌어올려진 잔 손잡이와 우아한 곡선을 그린 사치품들은 무신경함과 제멋대로의 품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 안목으로 꼽을 수 있는 류의 것도 아닌 것 같다. 깨지기 쉬울 텐데 어떻게 보관하는 걸까. 미세한 고정 장치로 움직이지 않게 조여 놓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다. 찬장엔 그런 찻잔이 들어 있는데 책꽂이에 꽂힌 책의 표지엔 하나같이 물 얼룩이 졌다. 섬세한 사람은 책 위에 물기 있는 잔을 얹어두지 않는다. 깨지기 쉬운 찻잔 옆에 유리로 된 병속에서 찰랑거리는 위스키를 두지도 않는다.

 몽고메리 스콧의 내부엔 양극의 성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레너드는 그것들에 대해 묻고 싶어졌지만,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몽고메리 스콧과의 거리감을 실감한 것은 그 때였다. 내가 눈앞의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 좁혀야 할 거리감이 보이는 것.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무엇이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잔씩 비우는 동안 둘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딴 생각에 빠져 있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그는 시선을 옮겨 개인실 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코어로 시선을 돌렸다.

 넌 저런 걸 보면서 술이 넘어갈 수 있단 말이지. 레너드의 말에 스콧이 고개를 돌려 코어를 마주보았다. 어휴, 근사하지 않아? 아니, 끔찍해. 왜? 내 목숨이 걸려있는 기계의 중심부가 너무 거대해서. 스콧은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거대한 함선을 돌아가게 하려면 내부의 것도 커지기 마련이야, 닥터. 내부가 크기 때문에 함선이 크단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레너드는 위스키를 두 잔이나 더 마셨고 그럼에도 충분치 않았으므로 길게 손을 뻗었다. 스콧이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줬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너머의 접합부들을, 코어와 기계 사이를 잇는 파이프와 그 속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몇 갤런 어치의 물들을 내려다보았다.

 난 저기서 빠져죽을 뻔 했지. 스콧이 중얼거리자 이번엔 레너드가 시선을 돌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커크와 스콧, 얼음장 같이 차갑던 브리지가 떠오른다. 축축하게 젖은 뒤통수와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혼자 해맑던 얼굴, 낡아빠진 점퍼와 브리지 바닥으로 고여 조금씩 흐르던 물. 그건 너무 강렬한 장면이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니까. 숨은 막히고, 그 금발머리는 밖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벽이나 두들기고 있지… 압력 때문에 귀가 터질 것처럼 아팠어. 그러다 별안간 바닥이 쑥 꺼졌지. 짐이 비상 개폐구 밸브를 열어버린 거였어. 떨어질 때 분명 관절 몇 개가 망가졌을 거야. 당시엔 몰랐는데 브리지를 벗어나고 나니 삭신이 쑤셨거든……. 스콧이 입을 다물자 개인실이 기관실의 고요한 진동으로 가득 찼다. 레너드는 반쯤 남은 위스키 병을 흔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도움은 결정적이지만 늘 엉망진창이야. 딱히 위안하려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 녀석이 내 멀미를 없애겠다고 뭘 했는지 알아? 남은 브랜디를 전부 마셨어. 스타플릿 쉽에 타고 있었는데… 내 주머니에 그게 있었거든. 우리의 첫 만남은 나중에 말할게. 여하튼 술기운을 빌어 우주선을 타는 건 멀미의 지름길이라고 하더군. 짐이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길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난 금시초문이었어. 사실 알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망할, 난 의사였고 그건 마지막 브랜디였다고.

 워프 코어 이야기를 할 땐 어물거리던 둘의 대화가 갑자기 물살을 탔다.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가 나오고부터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커크의 빈자리가 갑자기 채워진 것처럼, 그리하여 실상 둘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음에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둘은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들이 아는 커크에 대한 이야기였고 서로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그의 존재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흥미로운 텐션을 유지했다. 스콧은 커크가 델타베가의 눈을 뚫고 나타난 순간에 대해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였다. 레너드는 아카데미 시절 커크가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에 대한 일화를 스무 개 정도 풀어놓았다. 그들은 밤새 그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다가 각자의 근무지로 돌아갔다. 레너드는 커크와 자신의 첫 만남을 ‘나중에 말해주겠다며’며 미뤘지만 그 나중은 두 달 후에나 이뤄졌다. 그러니까 몽고메리 스콧이 어느 날 갑자기, 꼭 짝사랑 클럽 같고만. 이렇게 말한 후 가지게 된 첫 술자리에서다. 이야기가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간다. 둘은 위스키를 마시며 방금 막 레너드 맥코이가 본즈가 된 경위를 들었다. 스콧이 잔을 채웠고 그들 사이엔 브리지에 있을 제임스 T 커크 몫의 잔이 채워져 있다. 이 잔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좀 더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짝사랑 클럽 이야기가 나오던 날보다 조금 전이다.

 “이게 뭔가 싶다. 제기랄…… 청승맞은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레너드가 신경질적으로 잔을 비웠다. 그들은 드물게 메디베이에 앉아 있고 바깥으로 펼쳐진 우주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함선이 워프를 하고 있다. 기관실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스콧은 잠깐 동안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레너드의 잔을 채워준다.

 “늘 하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뭘 새삼스럽게…….”

 스콧이 킬킬거리자 레너드가 너 취했다, 라고 면박한다.

 “네 차례가 되면 너도 이렇게 생각할 거야. 오, 제기랄, 이게 뭐하는 짓이지? 그리곤 빌어먹을 이야기를 얼른 때려 치고 술이나 걸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 하는 이야기야 늘 뻔하지.”

 “귀에서 진물이 나올 지경이긴 해.”

 “난 그것 말곤 짐에 대해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

 스콧이 솔직히 고백한다.

 “넌 짐에 대해 늘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그러니까 기관실장과 캡틴 커크는 그럴 수 없단 말이야. 사적인 장소에서 풀어내기엔 너무 사무적인 일화들뿐이랄까. 그런 셈이지.”

 “오, 그래? 니들 첫 만남이 하도 드라마틱해서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건 줄로만 알았지.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빈약한 이유였군.”

 레너드는 커크의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아주 가까이서 본 적 있다. 아카데미 생도 시절 침대 위에서다. 둘은 룸메이트였는데 당연하게도 각자의 침대가 있었지만 술에 취한 날엔 커크가 꼭 레너드의 침대로 올라왔다. 본즈… 신세 좀 지자. 그렇게 말한 후 까무룩 잠이 든다. 레너드는 한숨도 잘 수 없다. 망할 짐. 속삭인 후에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크의 침대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못 박힌 듯 누워 눈앞의 청년을 시선으로 더듬어야 했다. 커크의 눈꺼풀은 단단히 감겨 있었지만 레너드는 손쉽게 첫 만남, 그러니까 스타플릿 쉽 안에서 마주쳤던 빛나는 파란 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걸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브리지에 짠 하고 나타난 몽고메리 스콧과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한 쌍의 파란 눈과……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인생 안으로 던져진 좀 기이한 풍경들.

 아카데미 시절 날씨는 평온하고 대체로 온화했다. 다시 말해 눈이 온 적은 없었다. 커크의 금발머리는 햇빛 아래서 산뜻하게 빛을 났지만 눈 속에선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레너드는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지구와는 몇 광년 정도 동떨어진 행성에 버려져서, 비타민 블록을 먹으며 추위에 달달 떨다가 갑자기 나타난 금발미남과 조우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미래에서 온 이성적인 외계종족과 함께. 눈에 젖은 짐의 머리카락이 그 때도 빛나고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설령 빛나지 않았더라도 스콧은 일종의 광채를 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존재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광채를. 그것에 비하면 자신과 짐의 첫 만남은 좀 구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멀미 타령을 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브랜디는 운치 있었지만 커크가 다 마셔버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그런 종류의 감정은 좀처럼 느끼지 않는 사람임에도 스콧의 입에서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드라마틱한 첫 만남에 관해선 질투를 느꼈다. 그 감정은 착잡함에 가까운, 그러니까 불이라기 보단 진흙탕 혹은 비온 날 습하게 눅눅해진 바닥과 같은 온도였다.

 “Ah, 별로 드라마틱하지도 않았어.”

 스콧이 손을 내젓는다. 좀 부끄러운 눈치다. 지난 두 달 간 함께 술자리를 가지며 알게 된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몽고메리 스콧은 말을 돌리고 싶을 때나 부끄러울 때 손을 내젓는다. 그리고 애꿎은 술을 아주 조금씩 들이키며 입맛을 다신다. 쩝. 이렇게.

 “드라마틱한 걸로 따지면 너지, 의사 양반. 첫 만남의 대화가 평생의 호칭으로 굳어질 줄 누가 알았겠수?”

 “본즈가 드라마틱하다는 걸 보니 감성은 다 죽었구만. 뼈밖에 안남았단 소리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다들 그렇게 부르잖어.”

 “모르니까 부르는 거겠지. 짐이 하도 불러대니 내 이름이 정말 본즈인줄 아는 녀석도 있어.”

 “지구인은 아니지?”

 “아니지.”

 스콧이 낄낄거린다. 

 “그럼 내가 유일하겠군. 고백하자면 난 한동안은 정말 닥터의 이름이 본즈인 줄 알았거든.”

 “진심이냐?”

 레너드는 믿지 않는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 납득하고 있다. 브리지에서 혼자 씩 웃고 있던 스콧의 이미지는 양가적이고 이상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찬장에 나란히 놓인 술병과 찻잔 같은 것. 통상적인 불가능함을 적용하면 가능한 사건으로 도출될 것 같은 것.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무딘지 섬세한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스콧이라면 정말로, 어딜 봐도 남부에서 올라온 억양을 쓰는 남자의 이름이 ‘본즈’일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남의 이름을 착각했다는 고백을 부정당하니 펄쩍 뛰는 스콧은 웃기다. 특히 표정이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다.

 “그렇겠지.”

 레너드는 크게 반박하지 않고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싱거운 반응에 스콧도 곧 시들해진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잔을 채우고 가운데 놓인 잔에 짠, 하고 부딪친다. 함선은 여전히 워프 중이다.

 “우린 왜 항상 짐의 이야기를 할까.”

 레너드가 뜬금없이 던지자 스콧이 조용히 잔을 내려놓곤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몸을 기울인 채로 레너드를 올려다본다. 잔 안의 얼음이 녹다 말고 부서져 쨍하는 소리가 난다.

 “새삼스럽네.”

 스콧이 읊조린다.

 “넌 늘 짐의 이야기를 했어.”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20,863 공백 제외
3,0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