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혁과 난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아. 물론 이동혁을 모른다는 건 아니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존재는 할까. 이동혁. 그 이름이 딱 그랬다.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양궁 주니어 라인을 그대로 타고 올라가 국가대표 명찰을 당당히 걸었다. 가슴 위엔 언제나 태극마크가 달려있다. 활을 당기는 자세는 거침없다. 눈빛은 맹렬했다.
방송에 나올 때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떠나는 발걸음까지 돌렸다. 떴다 하면 뉴스였다. 그렇다 한들 내가 네 팬이란 건 아니었다. 고작 이름, 그리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 아는 건 그 정도뿐이다. 선을 넘는 그 이상까진 잘 몰랐다. 소문에 어두웠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현실이 그랬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 해도 말을 섞을 기회는 없었다. 있다 한들 섞을 수도 없다. 이동혁은 자신만의 울타리가 강한 사람이었다. 안녕.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을 향했던 눈길을 거둔다. 용기를 내 인사한 상대방이 민망하리만큼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아무도 그 애를 욕하지 않았다. 아마 유명해서겠지. 유명한 이동혁이었으니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무시 받으면서도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공통점이 없는 나조차도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썩은 내를 풍겨대는데 그걸 모를 리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이동혁에게 관심이 많다, 생각하겠지만 글쎄. 어차피 이 정도는 교내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별할 거 없는 정보다. 이동혁은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고 선망의 대상이며.
양궁 국가대표 이동혁 실종 689일째. 그는 대체 어디에?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어.
대한민국. 아니,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도록 사라져버린 사람이었으니까.
처음엔 변덕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뉴스 기사들이 그랬다. 언론사들이 떠들었다. 국가대표라는 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우승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보니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자주 한다, 단정했다. 이동혁의 빈 자리를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연맹은 남모를 긴장이 맴돌았다. 이동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리를 잠시 비운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긴장시키는 위치에 서 있다.
떠들어 대는 보도에 그런 줄 알았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무거워 잠시 훌쩍 떠났구나, 생각했다. 언론의 말에 깜빡 속아 일상을 지내던 중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이 왔을 때, 그제야 이 모든 건 변덕이 아닌 진짜 실종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동혁은 사라졌다. 대한민국에 비상이 걸렸다.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가 사라졌으니, 여기저기서 이동혁의 마지막 발자취를 찾았다. 이동혁의 이름을 건 방송이 너도나도 늘어났다. 여론을 이기지 못한 담당 코치가 사실을 실토했다.
실종 전날 밤,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편의점을 가겠단 그가 사라졌다. 코치의 말을 근거로 그 근방의 CCTV를 다 돌렸다. 작은 단서조차 놓칠 순 없다며 눈이 빨개지도록 지켰다. 긴 시간 속 많은 사람이 지나간다. 먹고 마시고 웃고 우는 사이, 우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편의점을 다녀오겠다던 이동혁은 가장 아낀다고 말했던 활과 화살을 들고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니까. 마지막 발자취는 어딘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화살의 수를 세는 모습이었다. 그리곤 증발했다. 말 그대로 증발,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CCTV의 천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이후로 한 번도 찍히지 않을 수 없으니까. 1년이 지난 지금도 이동혁의 꼬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리고 이동혁이 했다는 마지막 말은.
지긋지긋한 꿈, 머리가 아파. 형.
무슨 의미였을까.
이동혁의 실종을 두고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외계인이 데려간 거다, 사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주술에 걸린 거였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까지. 그런 말들이 많았다. 죄다 헛소리였다. 반증이 없고 삿된 얘기뿐이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가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반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는데 조회는 높았으나, 댓글은 하나도 없었다. 공감을 얻지 못했다. 생각이 두 가지로 갈린다. 볼까, 말까. 한참 망설이던 커서가 반짝거린다. 그래. 뭐. 반응이 없어도 좋은 글일 때가 있으니까.
두 번의 클릭으로 열린 글을 찬찬히 읽었다. 자신은 이동혁의 꽤 오랜 골수팬이고, 매 경기를 보러 다녔을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동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피곤한 낯빛,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잠을 가장 많이 자는 걸로 알려졌다. 피곤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경기를 기다리는 순간순간 조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꾸벅이던 고개가 잠에서 깨면 뭔가를 경계하듯 굴었다. 경기를 기다리는 선수의 눈이 아니었다. 날이 강하다. 생고기를 먹어야 하는 짐승의 눈. 처음엔 코치의 무능함을 탓했다. 벅찬 연습량을 조절해야 한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이동혁의 몸이 말라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올라가 어느 날.“
과녁을 꿰뚫어버렸다. 일반 양궁 선수는 꿈도 못 꿀 슈팅이다. 시합에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에도 이동혁은 덤덤했다. 카메라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작성자 또한 좋아하던 중, 스치듯 지나가는 그의 한 마디에 몸이 굳어버렸다. 꿈인가, 현실인가. 존나 헷갈리네. 고작 한 마디.
”...헷갈린다.“
그 뒤로 작성자는 이동혁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행동 하나 말 하나를 퍼즐처럼 맞췄다. 정확하진 않으나 윤곽을 보였다. 이동혁은 현재 수면 부족 상태이며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다. 또한 꿈속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일 거란 가설이었다. 흥미로웠으나 신빙성은 없다. 근데, 정말 만약 이 사람의 말이 진짜라면 이동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만약 진짜라면 실종 당일, 활과 화살을 챙겨 나간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면 이동혁은 지금, 살아있긴 할까.
친분도 없는 네가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뒤로 계속해 이동혁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자주 간다는 음식점부터 시작해, 이름이 실린 기사들을 모조리 읽었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긴 날고 긴다는 경찰과 형사들도 머리카락 하나 찾지 못했다. 그들이 찾지 못한 걸 내가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기사를 읽던 눈이 창밖을 향한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 몰린 먹구름인지 하늘이 온통 까맣다. 비가 내리고 있다. 이동혁. 얼마 없는 화살로 잘 살고는 있을까. 이름만 아는 네가 궁금해지는 하루였다.
하염없이 네 이름을 검색하고 연습 영상을 찾아보던 눈이 피로를 토로했다. 혹사당했다며 시큰거린다. 언뜻 본 눈은 실핏줄이 옅게 터져있었다. 깜빡. 깜빡. 눈꺼풀이 이유 없이 무겁다. 무거워진다. 위아래로 뜨고 지는 행동이 굼뜨다. 점점 더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깜빡. 깜빡. 어둠과 빛. 점멸하는 세상. 이내 완전한 어둠이 눈을 짓밟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끌림으로 계속해 널 찾았을까. 너와 나는 어떤 접점도 없다. 있다 한들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네가 보일까. 이동혁. 왜 나였을까.
...아직 이게 작동하는지 모르겠는데 만약 작동한다면, 그렇다면 누구든 좋으니까 제발... 사람 좀 만나고 싶어.
알 수 없을 절벽에 다다른 네가 다 망가진 카메라를 쥔다. 화면을 바라보다 헛숨을 들이킨다. 모든 게 엉망이다. 방송에서 보던 말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엉망진창이다. 다치고 찢긴 상처뿐이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간다. 손바닥 위로 배인 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지쳤다. 지쳐 보인다. 찢어진 손가락으로 렌즈를 문지르다 입술을 문다.
이동혁. 너는 지금 어디인 걸까. 어디기에 상처투성인 얼굴과 얼마 없는 화살을 지니고 있을까. 화살촉에 말라붙은 피는 또.
이동혁. 힌트를 줘. 너는 어디야. 어디에 있고.
젠장, 망할 꿈...
왜 내게 발견된 걸까.
#
그리고 그날, 기묘한 꿈을 꾸게 된다. 최근까지 이동혁의 이름에 혈안이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인과관계는 따질 수 없다. 꿈속의 세상은 끔찍한 곳이었다. 건물들은 모두 무너졌고 하늘은 회색빛을 지녔다. 태양이라는 게 있었나. 구름이라는 게 있던가. 아무리 둘러봐도 남은 건 무너진 건물과 텁텁한 바람뿐, 인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곳이다.
걷고 또 걸었다. 걷는 이유를 몰랐다. 다만 걷다 보면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했다. 세상은 조용했다. 개나 고양이가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범퍼가 열린 차는 모조리 멈췄으며 웃음소리나 대화도 없었다. 조용한 세상, 무너져버린 문명사회 그리고 알 수 없는 울음이 들렸다. 그건 동물 같기도 했고 사람의 소리기도 했다.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울려온다. 봐달라는 듯 짖는다. 호기심을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가던 찰나였다.
"씨발. 너 돌았어?"
"..."
"여기가 어디라고 멍청하게 서 있어.“
"...이."
"...우선 뛰어."
"...동혁...."
어디선가 달려온 네가 팔을 낚아채듯 잡고 끌었다. 뛰라고! 다급한 목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뛰었다. 또다. 이유도 모르고 뛴다. 반쯤 끌려가는 몸이 무겁다. 발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몽롱하다. 꿈이라 졸린 걸까. 그래도 네가 뛰라니 뛰어야지. 꿈이니까 괜찮았다. 이 정도 뛰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러나 놓칠 생각 없이 강하게 잡은 손길은 진짜였다. 이끌려 이리저리 뛸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현실처럼 다리가 당기고 폐가 찌르르 벅찰 때쯤, 주변을 살피던 네가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폐건물 안으로 끌고 어둠에 몸을 숨긴다. 꿈인데, 생동감이 넘쳤다. 땀에 젖은 이동혁, 몇 개 없는 화살을 가지고 있는 이동혁.
한 손엔 활을 든, 그 이동혁.
"...너 뭐야. 어떻게, 어떻게 여기.”
"..."
"씨발. 이거 꿈인가? 설마 또.“
"...꿈은...내가 꾸는 것 같아."
"미치겠네."
답답한지 머리를 쓸어올리던 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경계한다. 꿈일 뿐인데 뭐가 나타날 것처럼 굴었다. 왜 꿈에서 네가 나온 걸까.
어색하다. 안면이 없으니 할 얘기도 없다. 이마를 세게 내려쳐도 그렇게 아프지 않다. 이건 역시 꿈인 거다. 이동혁의 꼬리를 자꾸 따라다녀서, 실종이 궁금해서 찾다 보니 꿈을 만들었다. 뇌가 기억한 조각을 맞춘 시답지 않은 꿈이다. 진실일 리 없다. 그러나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된 일인지. 꿈이라 진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어쩐지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물쭈물하던 입술이 멋대로 움직인다.
"...왜 사라졌어?"
"뭐?"
"사라진 지 일 년이 넘었어. 어디서 뭘..."
"...잠깐 조용히 좀 해봐."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길고 찢어지게 울렸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보다 과격하다. 이동혁은 방향을 향해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모든 과정이 꿈답게 느리게 흘러갔다.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는 동작이, 유려하게 활시위를 뒤로 잡아당기는 자세, 그리고 목표를 정확하게 고정하는 눈이 하나하나 느리게 흘러갔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현실이 아니라 그랬다. 경기 중 하나를 보는 것 같다.
끝없이 당기던 활시위를 놓는다. 화살 하나가 날쌘 소리를 내며 이동혁의 손을 떠났다.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화살은 정확하게 목표를 뚫고 지나갔다. 기묘하다. 수상했다. 그는 과녁을 꿰뚫을 정도로의 힘은 없다. 아무리 세다고 한들, 힘의 범주가 다르다. 말도 안 되는 세기. 그러나 그는 마치 그게 당연하단 듯 굴었다. 일상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그에겐 그랬다. 문득 글에 있던 문장이 생각났다. 잠을 못 자 피곤하고, 밥을 잘 먹지 않는지 말라가는데 실력은 날로 좋아져 과녁을 꿰뚫어버렸다고. 바람처럼 스친 문장은 턱을 잡고 목표를 향해 돌렸다. 봐야겠다. 이동혁이 방금 조준한 슈팅을 봐야 했다. 확인해야 한다. 그러고 싶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돌아가는 시야는 반쯤 가다 막혔다. 타의였다.
"보지 마."
이동혁의 손이 턱을 잡아 돌린다. 영상에서 익히 보던 날카로운 눈빛이다.
"그래도 봐야겠다면.”
"..."
"...씨발, 그냥 안 보면 안 돼?"
다소 억센 애원에 그러기로 했다. 꼭 봐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자유를 얻었다. 미심쩍단 눈빛에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 턱을 쓸고 입술을 물다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아 입술이 움찔거린다. 그러나 네가 먼저였다. 무산된 단어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낸다.
"이름."
"응?"
"이름 뭐냐고."
"...서여주?"
"그래, 서여주. 경고하는데 다신 여기 오지 마."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다시는 여기에 올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씨발, 여기서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죽고 싶단 거나 같으니까, 그냥 뒤도 보지 말고 뛰어. 앞뒤 설명 없이 경고한다. 사이렌은 멈추지 않는다. 적색을 보인다. 반짝. 반짝. 아름답게 위험을 고했다. 서여주.
다시 불린 이름에 고개를 들자 화살 하나가 조준된다. 활시위가 다른 방향으로 당겨진다. 햇살이 실력을 질투해 화살촉 위로 빛을 부순다. 질투하고 사랑한다. 이동혁의 머리 위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떴다. 이상하다. 태양의 모습이 퍽 이상하다.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 다신 그 이름 생각도 하지 마."
"..."
"그냥...씨발, 이왕이면 네가 죽도록 싫어하는 새끼한테 내 이름을 말하든가.“
"...왜?"
"알 바야? 그냥 사는 것만 생각해."
"...저기, 이동혁..."
"그 이름, 다시는 생각하지 마."
잘 가, 만나서 즐거웠다. 서여주.
무섭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놓인다. 번뜩이는 화살촉의 방향은 나였다. 이동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심장과 가까이에 있던 활은 얼마 가지 않아 가슴을 뚫었다. 순식간이다. 앞과 뒤로 화살이 통과했다. 흉통에 눈이 까무룩 감긴다. 모든 건 꿈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울어야 했다. 빠르게 점멸하는 시야 속, 네 표정은 고통스럽다.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말아 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뭐야."
고통에 놀란 상체가 벌떡 일어난다. 번개를 맞은 듯 부르르 떨다 주변을 살핀다. 두 눈이 바보처럼 끔뻑거린다. 내 방이다. 익숙한 나의 방. 꿈.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흐른다. 이동혁을 본 건 꿈이다. 확실하다. 꿈일 게 분명하고 당연했다. 그러나 감각이 다르다. 손끝이 빗장뼈 아랫부분을 더듬는다. 화살을 맞은 부분이 욱신거린다. 이상해. 이럴 리가 없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 구분하는 선이 명백하다. 그러나 혹시, 라는 단어 하나가 몸을 끌었다. 혹시 몰라. 문장 하나가 몸을 일으켜 잠옷을 벗게 만든다. 헐벗은 상체를 기꺼이 거울 앞에 세운다.
잔뜩 긴장한 눈이 거울로 향했을 때, 가까스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잠시간 동공이 흔들렸다. 심장이 쿵쿵 엇박자로 뛴다. 큰 북이 귓가에서 요란하게 울린다. 흉터. 흉터가 있다. 선명하게 남겨진 흉터가 있었다. 심장 부근에 화살을 맞은 듯한 흉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크게 넘어지거나 수술한 적 없는 내게 흉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 자국은 이동혁을 만난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과 같다. 맙소사. 두 손이 입술을 틀어막았다. 경악을 일삼았다. 이동혁은 그곳에 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뭔가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곳. 그리고.
내게서도 시작된 두통.
어떡하지. 이동혁.
나 그 말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
그 뒤로 계속되는 두통은 나를 꿈속으로 이끌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눈을 뜬다. 눈을 연신 깜빡여도 똑같다. 또 그 꿈이다. 몽롱한 시선을 가진 채 폐허가 된 세상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뭘 위해 걷는지도 모르면서 걷다 보면, 활을 당기고 있는 널 만나곤 했다. 두 번째 만남은 목표를 맞춘 네가 화살을 빼 촉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에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넌 픽 웃고 말았다. 오지 말라니까.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이다.
우리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화는 없다. 화살촉을 다 살피자마자 또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반복이다. 당기면 일어난다. 잊지 못할 고통으로 이름을 각인시킨다. 꿈을 꾸면 일어나야만 했다. 강제성이 짙었다. 다시 한번 가슴 부근에 흉터 하나가 남겨졌다. 너는 잊으라면서 잊지 못하게 흉터를 남긴다. 고통을 선물했다. 악의와 배려, 어느 쪽일까.
꿈으로 가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두통이 잠을 몰아온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다. 남모르게 잠이 들면 피할 수 없는 세상이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 생명이 숨 쉴 수 없는 생사. 반복되는 이별과 죽음을 선물 받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몇 번의 만남과 죽음으로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졌고.
"또 왔네."
너는 언제부터인지 눈을 뜨는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무너진 벽돌 위에 앉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화살을 바로 뽑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안 보내?"
"빨리 보내나, 늦게 보내나 어차피 같잖아."
"..."
"또 올 거잖아. 너."
흥미를 잃은 말을 들으며 힘겹게 벽돌 아래에 주저앉았다. 시멘트 가루가 풀썩인다. 그래. 그러겠지. 보내도 자꾸 오는 이곳을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넌 왜 여기에 있어?"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아닌데."
"나가는 방법 없어?"
"없어."
"나는?"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오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래도. 투덜거림을 가만히 듣던 네가 대뜸 일어나 옷을 탁탁 턴다. 가자. 어딜? 그냥 어디든, 여기만 아니면 돼. 이동혁의 말에 주저 없이 일어나 똑같이 옷을 털었다. 행동을 따라했다. 천에 달라붙어 있던 먼지들이 힘없이 떨어진다. 삭막한 세상이었지만 네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뭐였을까.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경기를 매번 챙겨보는 팬도 아니었다.
충분조건은 없었다. 앞장서 걷는 널 뒤쫓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그건 계속해서 날 보내려는 끈질김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팔을 당겨 등 뒤로 숨기는 행동 때문이었을 거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오늘은 안 갈래."
"가."
"싫대두."
"가라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다. 기이한 세상에 존재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런 날 달래는 건 언제나 네 몫이다. 까칠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뜻은 같다. 언제나 이별을 종용했다. 선뜻 등을 밀었다. 두 발로 단단히 서 버텨도 이길 수 없다. 화살 하나면 이야기는 언제나 마무리되니까.
내가 꿈에서 깨어나면 너는? 너는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하는 걸까. 또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겠지.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할 거야. 이 끔찍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망설임에도 너는 단호했다. 가.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같다.
"가. 서여주."
"...치."
"가선 다시 오지 마."
"맨날 그 소리."
"진심이야. 다신 오지 마."
우습다. 다신 오지 말라며, 왜 항상 그 자리에서 날 기다려? 왜 그렇게 그리운 눈을 해? 너는 순 거짓만 보였다.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정해진 순서를 밟았다. 시간이 되면 보낼 준비를 했다. 옷으로 화살촉을 닦고 각도를 조절한다.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도록 손목이 비틀린다.
배려가 우스웠다. 어차피 꿈이고 정말 죽는 것도 아닌데 진짜처럼 행동한다. 한껏 진지하게 임한다. 세심한 노력은 새겨진 흉터를 숨겼다. 그래봤자 흉이 남는다,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이미 수도 없이 진 화살 흉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포기를 모르는 화살은 다시 심장을 뚫는다. 지겹지도 않은지 피를 머금는다. 그동안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혁아. 조금만 기다려. 내일 또 올게.
"서여주."
"응."
"오지 말라면 좀 오지 마."
"왜?"
"초조해."
"..."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아. 씨발. 돌아버리겠다고."
"...야..."
"넌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넌 하나도 몰라. 그러니까 제발 좀 잊어.
활시위가 과감하게 당겨진다. 사이렌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울리고 놓는다. 죽음과 함께 현실에서 번쩍 눈을 떴다. 또다시 방. 손끝이 덤덤히 심장 위를 더듬는다. 흉이 하나 더 늘었다. 자꾸만 날 죽이고 잊지 못할 흉을 남기면서, 잊으라 말했다. 멍청이. 잊지 못한다. 그렇게 해선,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한다는 걸 모르고 있다. 예전엔 네 실종이 궁금해 찾아다녔다면, 이젠 널 거기서 꺼낼 방법을 찾을 거야.
서여주, 다신 오지 마.
내가 못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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