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데에다가 무심하게 구는 승철이지만, 사실 정한이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잘나가는 래퍼인 덕분에 상당히 부자인 그가 정한에게 뭘 하나 해준다고만 하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한은 매번 그 스케일에 질려서라도 뭐가 필요하다는 소리를 못했다.

준휘가 찾아왔던 그 공연 날에도 그랬다. 정한이 두 사람이 준휘의 차인 벤츠를 타고 사라지는 걸 바라본 것은, 준휘가 한이를 태워주느라 문을 열어주는 걸 보고 부러워서였다. 그런데 그런 정한의 시선을 눈치 챈 승철이 너도 차 사줘? 라고 물었던 것이다.

 

“뭐. 볼보 같은 데에서 함 골라 볼래?”

“아 무슨 볼보야! 미쳤어?”

“그게 제일 안전해. 비행기랑 같은 패널 쓴대. 접때 보니까 버스랑 부딪혀도 버스가 찌그러지더라.”

 

정작 저는 섹시하다며 포르쉐를 타면서 정한에게는 볼보를 권했던 것이었다. 정한이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리고 차를 사도, 나는 경차면 충분해.”

“뭐? 안 돼, 어차피 탈거면 큰 거 타. 크고 좋은 차타야 사람들이 알아서 비키지.”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정한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승철은 진심이었다. 진짜로 볼보 팸플릿을 가지고 와서 정한을 질리게 하기도 했다.

 

“너는 위험하게 스포츠카 몰면서, 내가 무슨 볼보야…?”

 

황당해 하는 정한에게 예의 무심한 얼굴로 승철은 그냥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기가 위험한 것과 정한이 위험한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러게, 사랑한다니까?

 

*

 

정말이다. 승철은 정한이 제게 뭔가를 쉽게 말하지 않는 사람인 걸 잘 알았다. 그가 여전히 정한의 눈물에 약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건 정한의 성격이었고, 이제 승철은 정한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한이 원하는 것이 생긴다거나, 제 상태에 대해 무던하게 굴더라도, 귀신같이 눈치 채고 알아서 챙겨 주는 건 승철이었다. 정한만 승철에게 예민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이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형은 정한이 형한테 막 윽박지르고 그러는 거 같아도, 손으로는 계속 뭔가 챙겨주긴 해.”

 

한번 두 사람의 집에 놀러와 술을 마시고 취한 날, 피곤해하는 정한의 앞에 따뜻한 차를 챙겨주던 승철에게 했던 말이었다. 물론 술 깨고 나서, 자기는 당시에 심신미약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꼭 한이의 그런 말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한은 승철이 저를 사랑하는 것을 나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정한의 얄팍한 인간관계 안에서, 어쨌든 그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내는 건 승철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여전히 좀 툭툭대는 것 같아도, 좋을 때는 또 한없이 좋은 것은 모두 그런 덕분이었다.

그건 비단 당근을 빼 주는 것 같은 일만은 아니었다. 승철이 정한의 취향에 맞춰서 챙겨주는 것들이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주변에서는 하나도, 심지어는 승철 본인도 모를 때가 많았다. 무심결에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한 적 없었는데도 정한이 좋아할 법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 음악을 틀어준다거나, 사진전에 가자고 불쑥 먼저 말한다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이 빠지면 왜 또 살 빠지지 하고 주변도 둘러본다거나 하는 것들.

그걸 정한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승철에겐 너무 유리한 일이다.

 

*

 

그러니까 어느 날인가 또 한 번 정한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날에는, 멤버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던 좀 쫓아 가 주라는 말이 확 와 닿는 날도 있었다.

그날도 왜 싸운 거였는지는 뻔했다. 그놈의 질투였다. 멤버들이 전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도대체 뭘 질투하는 거냐고, 부탁인데 그런 사랑싸움은 부디 너희 집에 가서 해 주라는 (이 말은 물론 지훈의 말이긴 했다. 사랑싸움은 상당히 순화된 표현인데, 실제로 그는 ‘지랄’이라고 말했다.) 말을 하는, 그런 일이었다.

원래는 그런 날이면 지훈이나 원우가 정한이 상처 받은 것 같다며 얼른 쫓아가 보라고 하고, 그러면 승철이 잔뜩 불퉁한 얼굴을 한 채 싫다고 해야 맞다. 뭐래. 지가 왜 상처를 받아. 라며 씩씩 대는 게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근데 그 날은 달랐다.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렇게 싸우고 마음이 상해 돌아가는 날에도 승철이 집에 돌아가 보면 정한은 부엌 식탁 불을 켜 놓아 주지 않던가. 승철이 손만 씻고 정한이 잠들어있는 이불을 들추고 모르는 척 만지거나 안거나 하면 좀 낑낑대다가 먼저 사과하기도 하니, 아무리 무심하고 고집스러운 어린애(!) 라고 할지라도, 그 한결같은 애정을 의심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알 수밖에 없을 것이긴 하다.

그래서 (역시나) 정한과 싸우고 작업실 들어와서 (또) 소파에 퍽 엎어졌다가, 하나, 둘, 셋- 하는 숫자를 세기도 전에 아이 진짜! 하고 벌떡 일어나서 휙 뛰쳐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 (더러운) 성질머리가 어디 가지는 않아서 진짜, 윤정한! 하고 막 버럭 대며 불러 세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정한은 놀라운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승철도 그날 정한이 혼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걸 발견한 셈이라 좀 놀랐다. 다시 말하지만, 정한이 승철이 앞에서만 잘 안 운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울먹거리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정한이라니. 후다닥 뛰어가 얼마 멀어지지도 않은 마른 몸을 돌려세우고, 놀란 얼굴의 눈매가 발그레 달아오른 걸 보자마자 잔뜩 미안해 진 것이다. 휴. 그런데 어쩜 이렇게 못났는지. 곧 죽어도 미안하다 소리가 바로는 안 나왔다. 그래서 또 윽박질렀다.

 

“야. 너 진짜 시위해? 어?”

 

놀란 정한이 어버버 하거나 말거나, 승철은 정한의 뺨을 쥐고 엄지로 눈물 쓱 닦았다.

 

“…하지 마.”

“뭐 맨날 하지 말래. 네가 하지 말라면 안 하냐? 어?”

 

물론 정한도 좀, 뿌리치긴 했다. 나 봐. 나 봐. 하고 재우치며 베어나는 눈물을 닦아주는 거친 듯 섬세한 손길에 기어코 설움을 북받치게 만들어 진짜 울어버린 게 결론이었지만 말이다. 왜 이래, 진짜. 너 혼자 성질 내 놓고, 또 나한테 뭐라 그러려고. 정한이 훌쩍거리면서 투정하듯 말하면, 그런 그를 와락 껴안은 승철이 멍청이 같은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긁지 말라고. 너는 뭐 이기지도 못 할 거 맨날 긁어서, 이씨….”

 

이런 식이면 정한이 뭐 어쩌겠는가. 결국 저를 꽉 껴안은 승철을 뿌리치길 포기하고 안겨서 씨근덕대다가 진정할 밖에.

 

“나랑 밥 먹고 들어 가.”

“…너 뭐 녹음한다며.”

“아는데 와서 이렇게 굴고 너 혼자 가냐? 어?”

 

근데 진짜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돼? 정한이 다시 입을 꾹 다물면, 눈치를 보던 승철이 가만히 있다가 주절주절 변명처럼 달래는 말을 덧붙였다.

 

“이따 밤에 하면 돼. 어차피 나 말고 원우부터 하기로 했었어. 나도 밥 먹어야 해. 저번에 그, 애들이 말한 데 가서 밥 먹자. 너 또 이러고 들어가면 아무거나 주워 먹고 누울 거잖아. 하이씨. 진짜 손 많이 가, 하여튼….”

 

끝까지 투덜거리면서도 끌고 가겠다고 살그머니 잡아오는 손은 따뜻했다. 게다가 승철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라 정한도 결국 내키지 않은 듯 끌려가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승철은 정한과 마주 앉아서 그의 입맛에 맞는 찬을 밀어주며 이거저거 먹이기도 했다.

 

“오늘 나 늦어. 먼저 자.”

 

어쩐지 데면데면한 느낌의 식사 뒤, 승철이 정한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정한이 바로 돌아섰다. 하. 근데 가는 뒷모습이 왜 또 그렇게 쪼끄맣고 그런 거야?

 

“야!”

 

승철이 담배를 빼 물다 말고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정한을 불러 세웠다. 정한이 돌아보자 후다닥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울지 말고 가라? 그리고 그의 뺨을 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미안해. 하고도. 그럼 정한은 또 삐죽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울 것 같아서. 그래도 울지 말랬으니까 열심히 참는 미련퉁이.

 

*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승철이 전화를 했다.

 

-어디야. 집 들어갔어?

“아니야…. 아직 가고 있어.”

-왜 아직도 안 들어갔어. 좀 빨리 가지, 늦었는데.

“…….”

-오늘은 꾸마 산책 하지 말고 그냥 자.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해.

“알았어.”

-…야.

“왜애.”

-…울려서 미안해.

 

승철의 목소리는 무척 낮고 부드러웠다. 정한은 또 살짝 숨 막히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비싯 웃음이 났다.

 

“…뭐야, 갑자기.”

-푸, 그러게. 뭐냐, 갑자기. 에이씨. 야, 나 인제 녹음해. 얼른 들어가서 자. 집 가면 카톡 해 놔. 알았어?

“응.”

 

그래서 고개까지 끄덕이고 베시시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

 

물론 승철이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정한이 가장 고마워하는 부분은 승철이 제주의 가족들한테 무척 잘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석민이나 승관에겐 이따금씩 샘을 좀 내서 곤란하게 했지만, 그래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어린애처럼 구는 건 오직 정한 한정인지라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걸 제외하면 승철은 어른들을 정말이지 잘 챙겨드렸다. 둘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고 여기는 석민의 아버지나, 정한을 진짜 가족처럼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승관의 할머니와 어머니께 대하는 건 특히 자기 식구들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승철은 제주 식구들이 정한에게 제 2의 가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가 선물 받은 것이 좋으면, (예를 들어서, 승철의 누나 팬들 중에서 송이버섯이나 홍삼을 주는 누나들도 있었는데, 그런 게 정말로 좋으면) 따로 알아와 제주로 보내기도 했다. 정한에게 굳이 말을 안 하고 보낼 때도 있어서, 고맙다는 전화나 문자를 받으면 놀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어른들이 가장 좋아하신 것은 안마의자였다. 그건 두 사람의 첫 결혼기념일 즈음에, 승철이 느닷없이 승관의 집과 석민의 집에 각각 하나씩 배송 시켜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일주년을 맞아 휴가를 받아 제주도에 내려갔을 때, 승관의 할머니가 그에게 이렇게 착한데 왜 그렇게 정한을 속상하게 했냐고 하시기도 했다.

 

“저 안 착해요, 할머니….”

 

그러자 귀 끝까지 새빨개 진 승철의 얼굴이 꽤나 볼만해서, 정한도 웃어버렸던 것이다. 깔깔거리며 크게 웃는 정한을 바라보며 민망해 하는 승철의 눈빛이 따뜻해서 온종일 기분이 좋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여름만 해도 그랬다. 그러니까, 승철이 목이 좀 아프다고 해 모과차를 끓여 왔던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날이 너무 더워서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던 정한이 은행 일을 좀 보고 와서는 금방 코를 훌쩍였다.

 

“아니 나는 목이 아픈 게 아니라….”

“목 아픈 건 순식간이라니까? 가만히 좀 있어!”

 

승철이 당장에 정한을 붙들고 그의 목에 손수건을 감아준 것이다.

 

“답답해….”

“너 인제 목 간다고. 어? 그니까 내가 어제 옷 제대로 입으랬지?”

 

승철보다 답답한 걸 더 못 견디는 정한이 울상을 하고 싫다는 대도 굳이 손수건을 감아놓고 으름장을 놓아댔다. 그래도 늘 퉁명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골골 거리며 여름 감기를 앓기 시작하는 정한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한 것도 승철이었으니까.

 

“정한아.”

 

아프다고 일을 쉬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코를 훌쩍이고 약간의 미열이 있는 정한도 당연히 카페를 나가야 했다.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다는 승철이 굳이 그를 카페까지 데려다 주었다. 게다가 퇴근할 때에 데리러 오기도 한 것이다.

 

“어? 어떻게 왔어?”

“뭘 어떻게 와.”

 

승철이 냉큼 정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걸어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공영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벤에 정한을 태웠다. 메니저는 인사를 하고 곧장 집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하루 종일 승철의 스케줄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하는 정한이 눈을 깜박였다.

 

“너….”

“응?”

“너, 10시에 라디오 아냐?”

“맞아.”

“…근데,”

“근데 뭐. 괜찮아, 안 늦어.”

 

두 시간이나 남았으니 빠듯하게 움직인다면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승철은 정한을 집 앞에 내려 주는 게 아니라, 집 안까지 들어와 그를 침대에 눕히기까지 했다.

 

“너 늦어, 빨리 가.”

“알았어. 그러니까 얼른 자.”

 

정한은 이럴 때 새삼스러웠다. 편안하게 베개를 돋아 눕혀준 승철은 침대 옆 콘솔 위에 물까지 떠다 주고 정한이 덮은 이불을 한 번 더 확인 한 뒤에야 일어났다. 자고 있어. 얼른 올게. 그러니까 승철이 사랑한다는 것은, 정한이 사랑 받는다는 것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정한의 물 잔에 물이 비워지면 물을 따라주는 일이었다.
커피를 살 때 정한의 몫으로는 꼭 아이스초코라떼를 시켜 스트로우 챙겨온다거나,
집중하고 있으면 훅 고개 숙여서 입술을 쪽쪽 빨고, 놀래서 바르작대면 아주 꾹 안아주는 일.

방금 무대에서 내려와 흥분감이 최고조일 때에도, 주변의 스텝을 챙기며 인사를 하고 지나쳐 정한을 보면 씩 웃는, 그런 것들이었다. 아직 공연의 여운이 남은 표정의 승철이 막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자마자 정한의 몸을 꽉 껴안았다.

 

“너 땀 엄청 났다.”

“싫어?”

“아아니-”

 

웃는 목소리로, 그럴 리가 있느냐는 듯 대답하는 정한을 꼭 안은 승철이 속삭였다.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재밌었어?”

“아니. 너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정한은, 승철이 저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툴툴대는 거라는 말을 도무지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휴. 그러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니까.

 

 

 



to be c'o'ntinued.

윤른 위주 셉페스 올라운더, 한 마리의 새우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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