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이젠 안녕.


W. 강군






그저 지켜본 것만 벌써 반년째다. 정확히 따지면 7개월 정도. 그마저도 사실 매일같이 본 것은 아니였으니까 정말로 세세히 따지고보면 만나는 날만 세서 한달즈음 됐을거다.

원래가 타고나길 잘 아프지도 않을 뿐더러 아프더라도 잠만 잘 자면 금세 털고 일어나는 건강체질이라 병원 갈 일이라고는 한달에 한번도 되지 않는데. 하필 그 몇번 되지 않는 병원을 갈 때마다 마주치는 그 사람을 보며 괜히 설레여하는 그 바보같은 짝사랑의 시간이. 벌써 반년이나 되었음에 새삼 놀라웠다.






며칠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뚝 떨어지는 기온이 또 지긋한 환절기가 왔구나 생각했다. 조금 쌀쌀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 둔 것이 결국 문제가 됐다. 며칠 째 미친듯이 작업만 해대서 꼴이 말도 아닌데 씻을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나 성운은 결국 참다참다 대충 후드만 뒤집어 쓰고 길을 나섰다.

설마 오늘도 마주칠 리는 없겠지.

오늘만큼은 그 기적같은 우연도 빗겨가길 바랄 정도로 몰골이 초췌해 살그머니 병원 문을 여는데 다행히도 그 남자가 없음을 확인하곤 안도했다.

휴.. 다행이다.

깊게 한숨을 내쉰 성운이 안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접수를 하고 한 쪽에 자릴 잡고 앉아 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고 10분쯤 지났나. 방금 전 안도하며 하늘에 감사한게 무색하게도 그 남자가 병원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만큼이나 상한 얼굴을 보며 안쓰러워 한 것도 잠시, 접수를 마치고 대기석을 둘러보던 남자가 때마침 비어있는 성운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씨! 나 오늘 안씻어서 냄새날텐데.. 어떡하지..


남몰래 제 옷에 코를 묻고 킁킁대며 냄새를 확인하던 성운이 제게 닿는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고개만 돌리면 바로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에 성운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제 후드를 더 뒤집어 쓰곤 끈을 쭈욱- 잡아당겼다.

으슬으슬 춥게 느껴지던 공기가 갑자기 덥게 느껴졌다. 아마도 달아오른 제 귓가와 얼굴의 온도겠거니 이미 알아챈 성운이 더 갈 곳도 없는 구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어이 무리하던 몸이 고장이 나버렸다. 곧 있을 월말평가에 매달리느라 환절기엔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하는 제 체질임을 알면서도 며칠동안 연습실 바닥에서 먹고 자고 했더니 역시나 였다.

연습실 화장실에서 대충 씻어내던 몰골이 말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더 방치하다간 평가고 뭐고 어디 실려갈것 같이 골이 울려대서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설마 오늘도 있을까.

병원 문 앞에서 조금 망설였다. 딱히 어떤 말이 오간 적도 없고, 그냥 병원에서 마주친 사람일뿐인데 우연이 자꾸 겹치다보니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신경이 쓰이던 한 사람때문에.

숙소가 이 동네로 이사오고 난 뒤 겨울에서 봄이 지나는 환절기에 처음 찾은 그 병원에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후로도 제가 아파서 병원을 찾을 때마다 기막히게도 계속 마주치던 남자.

저와는 달리 작은 체구를 오들오들 떨며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다니엘은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스스로도 어이없는 생각을 했었다.

안아주고 싶다고. 안쓰럽게 떨고있는 그 작은 인영이 제가 안아주면 왜인지 괜찮아 질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안아주는 저도 꼭 같이 그런 위로를 받을 것만 같다고.

그렇게 시작한 감정이 짝사랑으로 변하고, 그 짝사랑을 한지도 벌써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번 성운의 차례보다 다니엘의 차례가 먼저였는데 오늘은 먼저 접수한 성운의 이름이 불렸다. 그에 벽에 붙어있던 몸을 후다닥 일으켜 성운이 진료실로 향했다.

오랜만이라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자리가 그 쪽 밖에 없기도 했지만 평소라면 그저 서있었을텐데 오늘은 좀 용기를 내서 옆자리에 앉았건만. 제가 앉자마자 벽 쪽으로 달라붙더니 오늘따라 후드티 뒤로 얼굴을 꽁꽁 숨긴 성운에 다니엘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성운이 나오자마자 바로 다니엘의 이름이 불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진료비를 계산하기 위해 바로 접수대로 쌩하니 가버리는 성운의 뒷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진료실 문이 닫히고 빼꼼 뒤돌던 성운 역시도 겨우 눈에 담은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지만 오늘만큼은 절대 보여주질 못할 자신의 모습을 지켜낸 것에 그나마 위안 삼고 있었다.






사실 성운이 다니엘을 마음에 품게 된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였다.

오한이 단단히 든 몸을 질질 끌고 패딩으로 중무장한채 병원 한 켠에 자리를 잡았던, 겨울에서 봄이 넘어가던 그 어느 날, 다니엘을 처음 보았다.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긴 했지만 딱히 제 지금 몸상태가 누굴 관심있게 볼 만한 상태가 아닌지라 그때까진 별 관심도 느낌도 없었다. 멍하니 앉아서 오들오들 몸을 떨다가 제 이름은 언제 불리나 고개를 든 순간 진료실에서 나오던 다니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성운은 잠시 멈칫했다.

빌어먹을 이 놈의 취향은 어쩜 하나도 변한게 없지. 이 상황에도 눈이 돌아가냐, 이 등신아.

스스로를 한심하다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똑같이 저를 바라보던 다니엘의 눈이 마치 지금 지칠대로 지쳐있는 저를 위로하는 듯 순간, 일렁대고 있어서.


왜 나를.. 저런 눈으로...

언젠가, 어디에선가 본 듯한 구절이 떠올랐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 순간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인거라고. 당신을 그렇게 바라봐 주는 따뜻한 사람이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이니까.


정말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잘 되던 작업도 계속 꼬인 채 도무지 풀리지 않았고 몇 번을 그리고 또 그려도 하나같이 쓰레기 같았다. 감정소모가 많은 일이다보니 그럴 때마다 제 감정도 같이 쓰레기통을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다가 그나마 그런 절 위로해주던 오랫동안 키웠던 반려견도 일주일 전 무지개 다리를 건너버렸고. 그런데 몸까지도 말썽을 부리는 탓에 모든 멘탈이 무너진 상태였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쁜 생각을 가지지 않고 병원까지 찾아 온 게 기적일 정도로.

그런 제게, 이 타이밍에, 일렁이는 눈빛만으로 위로를 건네는 저 남자를 보고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안그래도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있던 그 틈안으로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는 건 정말이지 아주 찰나이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다시 훅 끼치는 찬 기운에 성운은 처음 만났던 날의 다니엘을 떠올렸다. 낑낑대며 제 얼굴에 부빗부빗 복실거리던, 다신 볼 수 없는 사랑스런 녀석도.

그러고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잊고 살았다. 유일한 제 가족이였던 녀석인데.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고 쫓기듯 나와 시작한 독립이였다. 그나마 제가 부릴줄 아는 잔재주라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거였고 그렇게 일러스트 작업을 해가며 점차 자리를 잡았다. 바쁘게 제 살길을 찾느라 몰랐는데 먹고 살 만해지고 나니 지독히도 외로웠다. 그래서 들인 녀석이었고 그 녀석으로 충분히 그 외로움을 채워갔다.

커밍아웃을 한 게 무색하게도 애인은 만들 시간도, 생각도 없었으니까 유일무이하게 저와 애정을 주고 받은존재였다.

제가 우울하고 외로울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저를 올려다보던 그 까만 눈동자가, 꼭 처음 만나던 날 절 바라보던 다니엘과 닮아보였다.

어쩌면 그 때 다니엘을 만난 건 그 녀석이 제게 보내준 선물같은 위로는 아닐까 성운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다시 후드를 고쳐 쓴 성운이 괜히 시큰해진 코 끝을 스윽 훔치며 길을 나섰다. 바로밑에 있는 약국을 피해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료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계산을 하고 다니엘은 걸음을 서둘렀다. 제 바로 앞에 나갔으니 어쩌면 약국에서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맘에.

왠지 오늘은 꼭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다니엘은몸보다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그 맑은 얼굴을 마주하고나면, 안아주고 싶은 그를 보면 마치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하지만 성운은 쉬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미 떠난 듯 약국에 성운은 없었다. 후-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반갑게 맞아주는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밀고 털썩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은 꽤 공부를 잘했다. 딱히 그래야 한다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저조차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저 어린 다니엘에게 공부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는 부분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필요한 참고서를 사고 집으로 가는 길버스킹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노래하는 팀과 춤을 추는 팀이 함께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근방에서는 이미 유명한 사람들인지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다니엘 또래의 소녀들이 응원하는 소리도 꽤 컸다.그렇게 처음 다니엘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어느새 공부보다 춤 영상을 찾아보고, 학교에서 춤 좀 춘다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에게 하나둘 춤을배우기 시작했다. 뒤늦게 합류한 다니엘이였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였고 그래서인지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이였다. 그렇게 다니엘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고 행복한 일을 찾았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날, 다니엘은 처음으로 불같이 화내는 부모님을 봤다. 뭐든 알아서 스스로 했고,또 잘했기에 갑작스런 다니엘의 고백은 부모님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다니엘의 부모님이 다니엘에게 공부에 대한 압박이 없던 건 그저 다니엘이 알아서 잘했기 때문이었지 관심이 없던 것이 아니였다는 걸 다니엘은 그 때 깨달았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다니엘이 부모님에게 실망한 마음을 다시 춤으로 풀어내며 밖으로 나돌고, 그런 마음을 위로해주던 친구와 마음을 나누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꿈을 꾸며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해주던 감정이 불안정한 십대였으니까.

그마저도 부모님께 걸린 다니엘은 그대로 집에서 쫓겨났다. 딴따라도 모자라 동성연애라니. 이미 깊어버린 감정의 골은 다니엘과 부모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그렇게 18살에 서울로 상경했다. 같은 꿈을 꾸던 그 친구가 현실을 찾아 떠나고도, 저는 끝까지 놓지 못한 꿈을 찾아서.

그렇게 닥치는대로 알바를 하며 고시원 방을 찾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변변찮은 기획사를 전전하다 지금의 기획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형기획사의 합격소식에 처음엔 뛸듯이 기뻤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고, 곧 데뷔가 눈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데뷔의 기회를 놓쳤다. 기획사에서 준비하던 보이그룹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였지만 다니엘은 점점 정상을 향해가는 그들을 보며 좌절해갔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더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렸고, 여기서 한번 더 좌절하면 다신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월말평가에 사활을 건 것이 제몸을 망가뜨리는지 알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덕분에 단단히 병이 나버렸지만.






지난 날을 떠올리며 한껏 침울해진 다니엘을 깨운건 약사의 부름이었다. 주의사항을 읊어주는데 딱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충 대답을 해주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손에 들린 약봉지가 보스락 소리를 냈다. 지금은 이런 약보다 다른 게 필요했다. 절 기운나게 해줄 그런 존재. 하지만 서울에 상경한 뒤로 그 흔한 친구조차 만들지 않은 다니엘은 제 폰을 뒤적거리다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훅 하고 불어온 찬 바람에 절로 몸이 움츠려들었다. 한없는 우울함을 결국 날씨 탓으로 돌리며 다니엘이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신호등 앞에 서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다 번뜩 정신을 챙겼다. 이미 깜빡대며 숫자로 바뀌어버린 신호등을 보며 다음에 건너야겠다 생각하던 순간 반대편 약국에서 성운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 어!!!

달려나가려는 순간 무심하게도 빨간 불로 바뀌어버린 신호에 빵- 하는 클락션 소리와 함께 다니엘이 뒤로 황급이 물러났다.

다니엘의 간절함에도 터벅터벅 제 걸음을 옮기던 성운이 그대로 골목을 돌아 모습을 감췄다. 신호가 다시 바뀌자마자 성운이 사라진 골목으로 뛰었지만 이미 성운은 사라진 뒤였다.

텅빈 골목을 바라보다 다니엘이 손에 든 약봉지를 꾹 힘주어 잡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정말로 말을 건네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몇번이나 수정을 거듭하며 속썩이던 작업을 드디어 마무리 해서 넘긴 성운이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어느새 환절기도 지나고 금세 가을이 와있었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녀석도 없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계절이 온 것을 깨달으며 불현듯 성운은 외롭다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외로움이였다.

그에 가슴 한 쪽에 고이 넣어둔 다니엘을 꺼내보았다. 얼마 전 병원에서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던게 뒤늦게 후회됐다. 꽁꽁 싸매 감추고, 굳이 길건너 약국까지 이용하면서 피할 필요가 애초에 있었을까 싶었다. 제가 품은 마음조차도 그는 알 턱이 없을텐데.

깊게 내쉰 한숨이 천장까지 닿을 기세로 성운은 몇번이고 그렇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몸이 쑤시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러고보니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일만 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무거운 몸을 살짝 움직였다가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챙겨먹자. 생각하며 성운은 그대로 스르르 잠에 빠졌다.

오랫동안 시체처럼 잠만 자던 성운이 힘겹게 눈을 떴다. 밤새도록 앓은 이부자리가 땀으로 축축히 젖어있었다. 끙끙 앓다못해 결국 잠에서 깬 성운은 겨우 팔만 움직여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119를 불렀다.






눈을 뜨자 보이는 새하얀 천장이 낯설었다. 여기가 어디지 생각하던 다니엘은 끊어진 기억을 떠올리며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월말평가를 무사히 마친 다니엘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미친듯이 연습했다. 이번 월말평가에서 좀처럼 볼수 없는 만족한 표정을 짓던 대표님의 얼굴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니엘을 다른 연습생들은 독종이라 놀리면서도 한편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저러다 쓰러지는거 아니냐면서. 그럴 정도로 다니엘은 밤낮이 없었다. 아프지 않은 연습생들이 다니엘을 따라 연습하다 병이 날 지경이였으니이미 아프던 다니엘은 더 아플게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체로 댄스 클래스를 받던 중 다니엘은 꼭 누군가 스위치를 끈 것처럼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다. 그렇게 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것이다.

폰에는 다른 연습생들의 걱정 어린 문자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였다. 그동안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같이 땀흘리며 쌓은 정이 있었나보다. 그에 답장을 해주려 움직이던 다니엘의 손이 낯선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에 그대로 우뚝 멈췄다.


하성운씨?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고개를 돌리니 저와 같이 링겔을 꽂은 채 누워있는 성운이 보였다. 먼저 정신차린 저와는 달리 이제 막 깨어난 듯한 성운은 간호사의 질문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링겔 다 맞고 열 내려가는거 확인하셔야 가실 수 있으니까 일단 이거 다 맞을동안 누워서 쉬고계세요. 아시겠죠?

.. 네.


처음 들어보는 성운의 목소리였다. 그러고보니 반년을짝사랑한 상대의 목소리도 몰랐다니 새삼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성운 쪽에서 링겔을 조절하던 간호사가 바로 등을 돌려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깨셨네요? 강다니엘씨도 이거 다 맞아야 가실 수있어요. 쉬고 계세요.

네.


자려고 감았던 성운의 눈이 번쩍 띄였다. 무뚝뚝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부르는 익숙한 이름에. 어느새 간호사는 다른 베드로 사라진 뒤였고 고개를 돌린 성운과 다니엘이 그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성운의 놀란 눈을 이해한다는 듯 다니엘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성운도 누운 채로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반년만에 처음 주고받는 인사였다. 동네 병원에서 이어지던 기가막힌 우연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 신기한 인연에 놀라움과 동시에 인사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잔잔한 웃음소리를 깨고 다니엘이 먼저 성운에게 말을 건넸다. 이 역시도 반년만에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성운씨.. 맞죠?”

“네.”

“저는 강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알아요.. 다니엘씨.”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여기서도 만나죠, 우리?”

“그러게요.. 하하..”

“많이 아파요?”

“아, 지금은 괜찮아요. 다니엘씨는요? 괜찮아요?”

“저도 지금은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네, 성운씨도요.”



정신없는 응급실 안에서 각자 베드에 누워 나누는 대화가 잘 들리긴 하려나 싶은데 두 사람은 잘도 대화를 나눴다.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어서인가 이상하게도 서로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히 잘 들렸다.

이 갑작스런 상황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동안의 쌓인 시간들이 고마웠다. 아무것도 아니였던 그 반년의 시간이 오늘에서야 의미있어졌다.

많이 피곤해보여요. 우리 이거 다 맞을 때까지 일단 한숨 잘까요?

다니엘의 제안에 성운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줍은 미소에 다니엘의 얼굴에도 자동으로 미소가 걸렸다. 제대로 보는 서로의 웃는 얼굴에 두 사람은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니엘씨는 아픈 얼굴도 멋있더니.. 웃는 얼굴은 더 멋있네.

아픈 사람 피부가 뭐 저렇게 좋아.. 저러고 웃으니까 꼭 광 내놓은 예쁜 사과 같다.

옆에 서로를 두고 이거 두근거려서 어디 잠이나 들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게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저를 깨우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성운이 부스스 눈을 떴다.

나 언제 잠든거지.. 아! 다니엘씨는....!!

옆을 돌아본 성운은 바로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가버린건지 누가 있긴 했냐는 듯 베드는 텅 비어 깨끗히 정리되어 있었다.

간호사가 일러주는 주의사항을 대충 듣다가 이내 성운이 스륵 제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왔다. 분명 몸은 다 나은거 같은데 어쩐지 한 걸음 한 걸음 딛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뭘 기대한거야. 멍청이..

한껏 축 처진 어깨로 수납을 마치고 성운이 터벅터벅 병원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다 고개를 푹 숙인 성운이 후우-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지금 막 원망하려던 대상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성운씨!

금세 성큼 성운의 옆으로 온 다니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기다렸어요. 같이 가려고.

제 눈앞에 있는 다니엘에 눈을 끔뻑대다 정신을 차린 성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 저, 저는.. 먼저 가신 줄 알구...”

“곤히 잘 주무시길래 깨우기가 그래서.. 밖에서 기다려야겠다 하고 먼저 나왔어요. 어차피 간호사가 깨워줄 것 같아서.”

“.. 날이 추운데 아픈 사람이... 왜 밖에서..”

“괜찮아요. 얼마 안 있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손이 차요..”



저도 모르게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여 먼저 나가버린 손이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덥썩 잡혀버린 손에 잠시 당황하던 다니엘이 뒤늦게 제 행동을 깨닫고 빼려는 성운의 손을 다시 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제 후드집업 주머니로 쏙 넣었다.



“이럼 되죠. 성운씨 손 따뜻한데요?”

“... 아... 저...”

“안.. 되나요?”

“..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구..”

“가요, 성운씨.”

“네..”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발걸음을 옮기는 다니엘을 따라 성운도 함께 걸었다. 어정쩡했던 자세가 자연스러워 질 즈음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고, 여전히 마주잡은 손은 다니엘의 주머니 속에 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도 마주잡은 두 손만은 따스해서 먼저 손을 놓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놓쳐버린 타이밍에 둘 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성운이 다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 저, 다니엘씨..”

“네?”

“불..편하지 않아요?”

“아, 불편 하세요?”

“... 아니요.”

“저도요.”



오랜만에 제대로 느껴보는 사람의 온도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그 온기만으로 지나온 모든 외로웠던 시간들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선뜻 놓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 혼자 시작한 사랑의 상대라는 것 또한 한 몫 했으리라. 이렇게 단 번에 가까워지게 만든 계속된 우연 속 또 한 번의 기적. 또한.. 어쩌면 다신 오지 못할 시간, 다시 안 올 기회인 것만 같은 생각은 두 사람 다 같았을 것이다.

헤어지는게 아쉬웠던지 집에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도 약속이나 한 듯 다니엘과 성운은 그대로 말도 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부웅- 하고 떠나는 버스가 한참이나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푸흡, 하고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왜 안 가요?”

“그러는, 다니엘씨는요?”

“우리.. 참 바보 같네요.”

“네.. 지금 엄청 바보 같아요. 근데.. 요..”

“..?”



머뭇대는 성운의 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성운 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시선은 땅에 둔 채로 성운이 수줍은 미소를 띄고 아주 조심히 한자 한자 입 밖으로 꺼냈다. 음절이 끝날 때마다 조금씩 얼굴을 붉히면서.



“.. 좋아요. 꼭.. 꿈만 같아요..”



오물거리는 그 입술과 살짝 내리깔린 속눈썹이 아주 천천히 다니엘의 눈동자를 통과해 목을 타고 넘어가 스르르 가슴까지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퍼지는 간질거리는 따뜻한 기운에 다니엘은 눈을 찡그렸다.

온 몸에 퍼져나가는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꿈만 같다는 성운의 말도 좋았지만 더 좋은 말을 해주고 싶어 다니엘은 계속해서 머리 속에 굴러다니는 예쁜 말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 사이 고개를 든 성운이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고는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드디어 다니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나를..”

“.......”

“..좋아해요?”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을만큼 둘 사이를 가르는 분위기가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방금 떠나보낸 버스를 통해 그것을 완전히 확신한 것처럼 성운은 머뭇대면서도 단번에 다니엘에게 감정을 물어왔다.

그에 잠시 멈칫한 다니엘이 이내 머리를 굴러다니는 말들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성운과 같이 제 가슴을 쓸어내린 후 눈꼬리가 휘어지게 성운을 보며 웃었다. 아주 해사한 그 미소와 함께 남자답고도 부드러운 다니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성운씨를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아아.. !”



다니엘의 고백에 작은 탄식을 뱉은 성운이 그대로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 살짝 얼굴을 붉히던 그것이 어느새 귀 끝까지 다다랐는지 양쪽 귀가 온통 붉어져 있었다. 확인해볼 순 없었지만 아마 머리 끝까지도 붉어져있을것만 같아 다니엘은 작은 소리로 하하, 웃음을 흘렸다.

주머니 안에 함께 얌전히 있던 성운의 작은 손이 꾸물대더니 다니엘의 기다란 손가락 하나를 꼬옥 제 손에 쥐었다. 원래도 알고 있었고, 나란히 걸어오면서 다시 확인도 했지만, 성운의 이 작은 행동 하나에 제대로 느껴지는 크기 차이가 새삼 놀라웠다. 제 손가락을 꼭 쥔 성운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쓸어내리며 이번엔 다니엘이 물었다. 아까의 성운보다는 덜 머뭇대는 걸 보니 이미 서로의 마음은 다 확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성운씨도 날 좋아하나요?”

“.. 네.”

“말해줘요. 듣고 싶어요..”

“저.. 다니엘씨를.. 좋아해요.”

“.. 우리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아요.”

“몰랐어요. 저는.. 정말로.. 저 혼자만.. 그런 줄..”

“저도 마찬가지에요. 근데.. 좋다. 오래 기다린 것 치고 어긋나지 않고 바로 찾아서.”

“고마워요. 먼저 아는 척 해줘서.”

“저야말로. 먼저 손 잡아줘서 고마워요. 너무 따뜻했어요.”

“.. 아... 네.”

“이제 진짜로 갈까요?”

“네.“

“다음 버스는 진짜 타는거에요. 더 밖에 있다간 둘다 다시 병원 갈 거 같아요.”

“알았어요. 다니엘씨나 놓치지 마요. 나보다 더 밖에 오래 있었으면서..”

“네, 알겠습니다.”



마주친 시선 속에 푸스스- 웃던 두 사람 앞으로 어느새 또 다음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하고 일어났던 두 사람이 떨어져야 할 자신들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거기!!!! 안 타요?

기사님의 커다란 목소리에 흠짓 놀라 얼떨결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버스가 또 다시 눈 앞에서 떠나고서야 다시 또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오늘의 메뉴는 돈까스 정식. 파스도 잘 붙였고, 2시부터 연습시작. 그대는?]


베개 밑에 넣어둔 핸드폰의 연달아 오는 진동에 성운이 부스스 눈을 떴다. 잠에 잔뜩 취해있는 얼굴로 부은 눈을 비벼가며 확인하자 메세지와 함께 돈까스 사진과, 파스를 붙인 팔목 사진. 그리고 밑에 자리한 브이를 그리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그에 베시시 웃은 성운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톡톡, 답장을 써내려갔다.


[ 어제 새벽에서야 작업한 거 넘기구 잠을 못자서 이제 일어남. 파스 잘 붙였네? 잘했다!! 근데 다니엘.. 으아아! 나 너무 졸려.]

[ 일찍 좀 자라니까 역시구나. 그래도 작업은 넘기고 잤다니 다행이다. 자느라 밥도 못먹었겠네?]

[ 응. 사실 밥보다 잠이 필요해. 더 자고 싶어.]

[ 그럼 한시간만 더 자. 내가 깨워줄테니까.]

[ 아! 진짜 ?!! ]

[ 그 이상은 안돼. 너무 오래 굶으면 속 버리니까. 알았지?]

[ 네네. 알겠습니다아.]

[ 응, 착하다. 울 쪼꼬미.]

[ 아! 그렇게 부르지 말래두.]

[ 싫은데?ㅋㅋㅋ 얼른 자기나 해. 난 분명 한시간이랬다?]

[ 윽! 치사해.. 이따 해.]

[ 응. 잘자. 내 꿈 꿔!]


다니엘의 마지막 문자까지 보고 폰에 살짝 입맞춘 성운이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고스란히 머금은채로 금세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서로의 일과를 궁금해하고, 묻지 않아도 줄줄 자신의 일과를 보고하는 일상도 어느새 한 달이 꽉 채워가고 있었다. 그 날 응급실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 둘은 혼자일 서로를 챙겨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 들때까지 외로울 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첫날 성운의 머리를 맴돌던 그 구절처럼.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 순간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인거라고. 당신을 그렇게 바라봐 주는 따뜻한 사람이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이니까.

어느새 서로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 그 1년동안 나름 건강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절기마다 호되게 아프긴 했다. 역시나 그때마다 다니엘도 함께 아팠고. 여전히 신기하긴 했지만 지금은 덕분에 걱정이 두배가 되었다.

서로를 챙긴다고 챙겨도 타고난 바이오리듬은 어떻게 안되는 일이구나 생각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일단 성운은 중구난방으로 하던 일을 좀 줄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을 수도 없어 아플 것 같은 시즌과 그렇지 않은 시즌으로 나눠서 일을 이어왔다. 그러다 뜻밖에도 다른 곳에서 꽤 안정적이고 시간 조절을 잘 할 수 있는 일을 제안받았다.

동화책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이였는데 미리 스토리를 받고 기일내에 마무리하면 되는 일이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미리 볼 수 있다는 것도 맘에 드는 점 중 하나였고.

다니엘은 데뷔 준비를 시작했다. 월말평가 때 보낸 좋은 신호가 정확히 맞았다. 성운을 만나고 난 뒤 두어달쯤 지났을 무렵 대표가 다니엘을 필두로 연습생들을 불러모아 그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다니엘은 조절이 됐다. 계속 연습만 하던 전과는 달리 짜여진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다. 다니엘이 무리한다 싶으면 성운이 나서기도 전에 말려줄 이들도 많이 생겼다.

자유로운 제 삶을 찾아서, 제 꿈을 찾아서 걸어오던 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연인이 된 후에 일어난 일이라 역시 기적같은 서로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했다.

그 날, 응급실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용기 하나로 얻게된 수많은 나비효과였다.

그리고 그 나비는 두 사람의 봄날 속을 여전히 유영하고 있었다.

어둡고, 춥고, 외롭고, 슬펐던 나날들은 이제 끝이 났다.











언제 오는거야. 찌개 다 식겠네..


식탁에 앉아 작게 투덜대던 성운이 그대로 제 팔위로 얼굴을 묻었다. 잠이 부족했다.

밤낮이 바뀐채로 일하던 습관은 다니엘이 데뷔한 이후 바빠져 챙겨주지 못하는 시간동안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고치려 노력해보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부러 의식하며 많이 고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만큼은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하필 마감날과 다니엘의 입국날에 겹치는 상황이라 오늘 온전히 다니엘에게 집중하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일을 마무리 해야했다.

이제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다니엘의 문자와 함께 성운도 딱 맞춰 일이 끝났다. 네다섯시간 거리라 그대로 잠을 자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며칠동안 어지러놓은 집을 치우고 다니엘이 좋아하는 복숭아향 바디샴푸로 뽀득뽀득 씻었다. 다니엘이 어젯 밤 통화에 먹고 싶다 노래부르던 집밥도 준비했다.

그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곧 사랑하는 제 연인을 볼 생각에 흐응흐응 콧노래까지 불렀는데 예상시간보다 늦어지자 어째서인지 급 졸음이 밀려왔다. 까무룩 제 팔을 베고 잠이 든 성운은 삐빅거리는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뭐야. 왜 이렇게 집이 조용하지? 아! 어디 숨었나?


당연히 문 앞에 성운이 서있을 줄 알았는데 고요한 정적만이 다니엘을 맞았다. 그에 당연히 어디 숨어서 서프라이즈라도 하나보다 생각한 다니엘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들어섰다. 어디 숨었나 본격적으로 찾기도 전에 식탁에 엎드려 곤히 잠든 성운을 발견한 다니엘이 놀람도 잠시,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안봐도 훤한 혼자만의 생활패턴이 느껴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조용히 다가가 그 앞에 쭈구리고 앉아 잠시 자는 성운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식탁 위에 차려진 식은 음식을 보고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성운아..”

“...... 으음..”

“하성운..”

“.... 어.. 어? 언제 왔어?”

“미안해. 비행기가 연착되서 좀 늦었어. 기다리다 잠든거야?”

“응. 미안.. 너무 피곤해가주구..”

“가자. 들어가서 자자.”

“아! 나 너가 먹고 싶다던 거 해놨는데에.. 우웅.. 다 식어버렸네.”

“괜찮아. 이따가 데워서 먹으면 되지. 한숨 자고 일어나서 같이 먹자.”

“그래도 돼? 너.. 시간 없잖아.”

“그래도 돼. 나 시간 많아. 해외투어 다 끝나서 휴가 받았어. 삼일!”

“진짜? 삼일이나?”

“응. 그러니까 들어가서 자자. 업어줄까?’

“아냐아.. 나 일어날 수 있어.”

“흐음..”



눈가를 비비며 비척비척 일어난 성운을 보다 다니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성운을 번쩍 들어 안아올리자 파드득 놀란 성운이 다니엘의 목에 황급히 팔을 둘렀다.



“으아! 나 떨어져!”

“꼭 잡아, 그러니까”.

“내려줘어. 안그래도 피곤한데 무겁잖아..”

“하나도 안무거워. 깃털같아.”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깃털이 어딨어?”

“요기.”

“뭐야아, 진짜.”

“가자. 내 깃털!”

“.. 아아, 좋다.. 다니엘 냄새.”



한번 더 끙차 성운을 고쳐잡은 다니엘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성운이 킁킁 거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다니엘이 침실 앞에 서자 성운이 문을 잡아 열고, 바로 보이는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로 두 사람이 와르르 무너졌다.



“보고싶었어. 다니엘.”

“나도 보고싶었어. 너 덕분에 다치지도 않고, 건강하게 잘 다녀왔어.”

“에이.. 그게 왜 내 덕분이야. 너가 다 잘해서지.”

“너가 달아준 날개 달고 잘 다녀온거야. 내 깃털.”

“아아.. 낯간지러워 진짜.”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 너무 좋아.”



서로의 머리를 매만지고, 눈, 코, 입 그리웠던 얼굴도 쓸어보고, 따뜻한 품 안에 가둬보기도, 안겨보기도 하며 그동안의 그리움을 채우려는 듯 오래도록 두 사람은 온기를 나눴다.

언제든 돌아올 곳이 생겼고, 언제든 반겨줄 이가 생겼다. 찬란하게 빛날 앞으로의 나날들 속에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일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제 품 안에 잠든 사랑스러운 이 연인이 더이상 슬퍼할 일 없길. 저를 품에 안은 사랑스러운 이 연인이 더이상 외롭지 않길.

지나온 슬픔이여,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올 슬픔이여. 이제는 모두 안녕..

포근한 이불 안에 잠든 연인은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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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에 이어 계간운른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오타수정외에 내용이 수정된 부분은 없습니다.

이번 월간운른과 계간운른을 참여하면서 글 잘쓰시는 분들이 이렇게나 많고, 또 그 글을 널리 알려주시고자 스스로 수고스러움을 감수하시는 좋은 분들이 계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모두 워너원을 아끼는 같은 애정에서 나오는 맘들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감사하고 한편으론 존경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스스로의 부족함도 많이 깨닫고 아무리 저 좋자고 시작한 글이였지만 허투루 하지말자 책임감도 많이 느꼈어요. 

월간, 계간운른에 참여하신 모든 작가님들과 총대님, 그리고 그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소중한 시간을 제 글 읽는데에 내어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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