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카게스가.

-카게야마 시점 1인칭 서술.

-사망소재 주의. 우울증 언급.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설정입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가을 같은 사람이었다. 여름과 겨울 그 중간 어디쯤에 있으면서 제 스스로도 아침저녁으로 온도차가 깨나 큰, 다소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 그는 대부분의 시간에 봄 같았으나,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속 알맹이는 오히려 한겨울 고목나무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의 따스함은 제 스스로를 태워 나온 것이 아닐까한다. 갈비뼈를 부러트리고, 척추를 으스러뜨려 그것들을 한데 모아 활활 태워 만든 온기.

 

 스가와라 코우시와 2년을 함께 하면서, 나는 그의 다정만을 보았다. 아니, 다정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 맞겠다. 그는 철저하고도 치밀하게 본인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눈치도 없는 내가 그의 겨울을 보기란 사실상 불가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딱 한 번, 그 속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전국대회 진출이 실패로 끝나고, 3학년이 은퇴를 앞두고 있었던,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는 평소와 같이 히나타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 서브와 토스를 연습하고, 체육관 정리를 마친 후 부실로 갔었다. 도시락 가방을 챙기려했던 것인데, 불 꺼진 부실에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려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불을 켜자, 그곳에는 부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스가와라 선배가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 그대로 나를 보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그의 눈 속, 거기에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건조한 표정의 그를 보면서 답지 않게도 당황하여 실례합니다, 내뱉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교문 앞에서 히나타와 다시 만나고서야 도시락 가방을 챙기지 않은 것이 생각났지만, 왜인지 다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의 점심은 매점에서 해결했다. 그 이후 나는 스가와라 선배에게서 그 날의 모습이라곤 털끝만한 잔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그 밤의 모습은 헛것이었던 양, 그는 철저하게 ‘우리가 아는 스가와라 코우시’로 돌아가 있었다. 내게도 그 밤에 대해 일절의 언급조차 없었고, 나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

 

 그 후 아무 일 없이 3학년은 은퇴를 했고, 졸업을 했다. 졸업하는 날, 우리를 하나하나 안아주고 격려하던 그의 품이 유독 내게서 빠르게 떨어지는 것 같았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꽃다발을 안고 멀어지는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보였다. 졸업 이후, 그와의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는 학교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끝이었다. 나는 그가 그리웠나? 잘 모르겠다. 내가 2학년이 되고, 엔노시타 선배가 부장이 되어 다시 인터하이를 준비하고 있을 때, 다이치 선배가 한 번 찾아왔었다. 스가와라 선배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학 가더니 저를 다 잊은 것이냐며, 서운하다고 했던 것 같다. 우리들 중에서도 그와 연락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를 궁금해 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세상이 하얗게 물들던 무렵, 다이치 선배와 아사히 선배가 함께 찾아왔을 때 그들은 스가와라 선배의 소식과 함께였다. 스가가 대학을 자퇴했대. 왜요? 모르지. 갑자기 다 그만두고 잠적했다던데. 그들도 본인을 직접 만난 것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게 건너건너 얻어 들은 것이라 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모두가 걱정했다. 사랑받고 있구나, 생각했다.

 

*  *  *


눈에 덮였던 앙상한 나뭇가지가 제 모습을 드러낼 때 들려온 그의 소식은, 부고였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거라고 했다. 그답지 않게 떠들썩한 자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다운 게 뭐지? 문득 그 날, 그 밤 부실에서의 그가 눈앞을 스쳐가,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정리를 위해 배구부원들과 선배가 혼자 살던 자취방에 방문하게 되었다. 어째서 가족도 아닌 우리가 그 일을 하느냐 물으니, 다이치 선배가 스가와라 선배의 부모님은 선배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배는 본인도 이번에야 그 일을 알게 되었다며, 더는 별 말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취방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흩어져 서랍 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 박스에 옮겨 담고, 책장 속의 책들을 꺼내고… 살림살이가 많지 않은 자그만 원룸이었지만 사람들은 괜스레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우연히, 선배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함께 왔던 사람들은 책장을 방 밖으로 들어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심스레 펼쳐본 내지에는 그의 정갈한 필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도 없잖아 있었지만, 호기심이 먼저였다. 그런데 처음엔 날짜도 제대로 이어지고 열심이던 일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필체도 엉망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삼학년의 가을즈음부터 시작된 그의 일기에는, '사건'이 없었다. 오로지 감정만 있었다. 그것은 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을 쏟아내는 오물통에 가까운 것이었다. 더이상 읽어내려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숨을 들이마시며 서둘러 일기장을 덮어버렸다. 별다른 장식 없이 깔끔한 회색 커버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다, 조용히 그것을 책이 담긴 박스 맨 아래에 밀어넣었다.

 

 그 '일기'의 내용들은 내겐 꽤나 충격이었다. 나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안에 정립되어 있던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산산조각 나버린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하던 미소와 회색 일기장, 그리고 그 밤의 눈빛은 내 안에서 엉망으로 섞여 내가 알지 못하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려낸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종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를 제대로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을 안고도 어느 날엔가 결국엔 그의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겠지. 그러나 오늘 밤의 회상으로 나는 또 얼마간은 그를 떠올리며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다정한' 당신을 그리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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