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은 조헌이 자리에 앉자마자 가져오라던 책이나 기타 잡다한 이야기도 없이 물었다. 



"그래 부인의 이름은 알고 계시는지? 보내준 서한에 성과 사는 곳만 있기에.."




 조현은 그녀가 바로 본론을 물어오자 자세를 바로하여 공손히 대답하였다.




"알고 있습니다. 감히 언급하여 일이 어스러질 시에 누가 될까 싶어. 적지 않았습니다."




서연은 조현이 서신을 보낸 후 직접 허씨 부인을 찾아가 보았다. 물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였고 자세한 일은 연화에게 알아오게 하였다. 며칠뒤 서연은 외출을 하는 길에 잠시 연화에게 들렀다. 물론 무당집을 사사로히 반가의 부인이 갈수는 없었고 둘이 마주한 것은 서연의 집안이 운영하고 있는 포목점 이었다.


연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어 서연에게 내밀었다.  그곳에는 여자의 성명을 물론이고 집의 숟가락 수까지 적혀 있었다. 서연은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내용들을 꼼꼼히 읽고는 그대로 화롯불에 던저 넣어 태웠다. 종이 타는 향이 매캐하게 낫지만 곧 사그라 들었다.




"이건 천륜을 넘나드는 일이 아닌가. 저번의 그와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자네가 나에게 보냈다고 조현 그자가 자기 입으로 말하였네."




서연은 연화에게 책임을 묻기에 목소리가 커졌다. 이 포목점은 고급의 것만을 취급하기에 구매하는 사람을 가려 받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마님께서 그런 관계를 그리 생각하실지는 몰랐습니다."




서연은 아화와의 일이 있었던지라 도둑이 재발 저린다고, 연화의 말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이 들리기에 속이 내심 좋지 않았다.




"흠.. 설사 그 부인이 혼사를 허락한다고 한들. 어떻게 그의 비밀을 평생 숨길 것이오, 알린 다 한들  지켜줄 것 이란 말이오."




"비밀이라뇨?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님께 나서 달라고 부탁을 드린 거죠. 그럼 어찌 사람을 속여 일을 성사 시키려 하겠습니까"




"뭐? 그가 불알이 없는 거를 안다고?"




서연은 연화의 말에 놀라 자신의 지위도 잊어 입으로 상스러운 단어를 뱉어버렸다.




"쉬쉬..."



"........흠...흠"




"그 상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예진작에 짐작하였다고 답하였습니다."




"어찌.."




"저도 그 부분이 의아하지만 그분이 안다고 하니. 제가 먼저 나서서 설득할 것도 없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그 부인은 신기하게도 어릴 때부터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일이라니?"




"한번은 남정네처럼 꾸미고 다니는 노비가 불온하게도 부인을 헤치려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겪다ㅂ니 감이라는게 생겼다고 하는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 저번 일도 내 황당했지만, 이건 또 어떤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난 정말 말 그대로 다리만 놓아주면 된다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마님"





***





서연은 조헌이 감쪽같은 분장 아래에 숨긴 초조함을 몰래 즐기었다. 조헌은 결코 마음속으로 감추어둔 정인이 이미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음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었다.




"넉넉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양반가 부인의 재가이니 부모가 승낙할지 모르겠소. 뭐, 이대로면 곧 반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해질 듯 보이긴 했지만. 모아놓은 재산은 좀 있으신지?"





'여자쪽집이야 그 정도면 좋게 말해서 상거지였지'





"제가 일찍이 부모님이 소천하시어 빈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기를 늦지 않았고 쓰임이 없어서 가산을 성실하게 모았습니다. 게다가 먼 곳의 집안 어른께서 조금 남겨주신 재물이 또한 있습니다."




그런걸 물을줄 알았는지 조헌은 망설임 없이 준비해온 대답을 내어놓았다. 오래 망설인 끝에 처음으로 한발을 내 디디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호히 당돌하였다.



" 부인의 이름은 원선으로, 5년전에 평소 병약했던 남편을 사별한 후 시부모와 함께 살았더군요. 뭐 종을 많이 쓸 수 있는 집이 아니기에 말이 며느리지 집의 종처럼 부려지는 듯 하더이다."



빈한한 집에서 잡다한 집안일을 직접 거들어야 했기에  원선은 반가의 부인치고는 자주 집을 나서야 했다. 서연은 특별한 노력 없이 그녀의 집 앞에 기다려 쉽게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단아한 매력이 있긴 했지. 조현은 여자의 몸으로 남성을 꾸미고는 마음은 여인에게 빼앗기다니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구나!'



"그렇습니다. 부인께서는 선국에 실학 공부를 들여오신 허목을 아버님으로 하시는 분이지만 남편은 겨우 진사에 머물었죠.."




조헌이 덧붙인 말은 서연에게 하기 보다는 혼잣말 같은 한탄이었다. 게다가 여자의 집은 소소한 정치싸움에 휩쓸려 몰락하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치보다는 공부에 매진한 학자여서 다행이지, 조금만 줄을 잘 못 섰어도 조헌은 오늘날 여자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흠... 흠.. 게다가 재가를 한다면 그 분의 아들을 자네가 양자로 맺지 않으면 그의 과거 길이 모두 막힐 것입니다. 그 부인은 아이를 무척 아끼는 듯 보였는데 과연 이 혼사를 받아들일까 싶습니다"




서연이 마지막으로 여자를 본 것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외진 빨래터였다. 아무래도 체면이 남아있기게 여자는 멀어도 그곳까지 가는 듯 했다. 차가운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중간중간에 아이와 부단히 놀아주려 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유모가 아이를 키우고 자신과 크게 대면하지 아니하였던 서연에게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제 적자로 적에 올릴 것입니다."




조헌은 이또한 이미 결정을 내린 답이었다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였다. 서연은 어딘지 찜찜한 마음이 있었기에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버럭 화를 내었다.




"당상관께서 원하는 바가 부인을 맞이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들입니까? 그대가 대를 이을 양자를 들이고 싶다면 더욱 적절한 이를 알아 보아줄 수 있습니다."




"저는.. 저는 둘 다 원합니다. 그녀는 결코 아이를 놓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아이를 이미 친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있습니다."




조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기에 서연의 분노를 맞이해도 차분할 수 있었다.



***




둘이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여 말을 섞어 본것은 외진 우물가였다. 그녀는 조헌을 처음 보았겠지만 둘이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지만 조헌이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 지아비의 상을 치르는 날이었다. 원선의 남편은 갓 입관한 말단 관리였기에 그가 급사하자 관청 사람들은 진중한 조헌을 대표로 하여 조문을 보냈다.




'사람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인 순간은 처음이었다.'



상복차림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부인은 무어에 지쳤는지 생기가 없었다. 조헌이 보기에 그것은 남편을 잃은 슬픔이 아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조헌은 자신과 같은 공허함을 여자가 가지고 있음을 느끼었다.




"부인, 물을 한잔 마실 수 있을까요?"




동이에 한참 물을 붓고 있던 원선은 다가온 낯선 이를 경계하였다. 그는 아마도 몹시 목이 말랐보였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인데도 망건 아래에 땀이 보였다. 그래도 체면에 손수 우물에서 물을 떠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 씨 부인은 조헌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별다른 수작 없이 자리를 떠서 가버렸다. 어딘지 이상함을 느꼈다. 원선은 물 항아리를 손으로 들어본 후 몇 박아지를 퍼 밖으로 버렸다. 그녀가 들고 갈수 있는 무게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도 우물가였다. 원선은 그곳이 너무 외진 듯하여 꽤 오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양민이 사용하는 우물로 물을 길었다. 그러다가 다시 마주친 것이니 경계심과 인연을 함께 느꼈다.




"두 번이나 실례를 하게 된 은인의 이름을 청해도 될지요?"




결혼한 몸으로 외진 곳에서 남자와 마주쳤으니 처음에는 삼가고 경계하였으나 조현은 몸집이 크지 않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 원선...입니다"




"조헌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이름만 듣고는 떠났다. 물을 건네받는 손과 몸선이 고왔다.




'혹시... 그런 걸까'




처음 듣는 목소리는 변성기의 소년 정도의 낮은 울림이었다. 그녀는 남들과 다른 것을, 발견하는데 특별한 눈이 있었다.




세 번째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을 때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저 선비가 자신의 신분을 낮게 보았음이 분명하기에 허 씨 부인은 부끄러웠다. 원선은 자신의 차림이 일반 양민과 다를 게 없고 옆에는 물동이까지 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물을 달라고 하면 어디 반가 부녀자에게 일을 시키냐고 호통을 쳐야지'




싶다가도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점잖았기에 나서기가 마뜩잖았다. 거리가 있기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원선의 예상과 다르게 조헌은 우물가에서 멈추지 않았다. 빠르지 않은 걸음이라 해도 무거운 물동이를 옮기는 원선의 속도와는 달라 금세 가까워졌다.




"앗!"




조헌은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동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또 앞서서 가버렸다.




'내.. 물동이...'




물동이는 귀한 물건이 아니니 훔쳐 가는 것도 아닐 것이고... 원선은 머릿속에 물음이 가득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꽤 무거운데도 힘이 좋은지 속도는 줄지 않아 중간쯤 가서는 멀찍이서 보였다. 그는 어찌 알았는지 자신의 집 앞에 동이를 내려놓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허참... 은혜를 갚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 두 잔에?"




허 씨 부인은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DTJ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