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 테일드x여로드

※ 모든 재앙을 해결한 후, 평화로운 어느 시간선의 이야기

※ 하드 8-16까지 읽고 쓰는 글입니다. 미미한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동인설정 및 캐해석 주의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요한이 되뇌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 안에 낮은 한숨이 울렸다. 뒤척이는 대로 이불이 구겨지고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당연한 어둠이 눈을 떠도 가득하다는 것이 낯설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달빛조차 막은 방은 멀리 떨어진 왜성 같다. 그렇게 느끼는 자신에 실소가 나왔다. 암흑이야 익숙하지 않나. 더러운 뒷골목, 당장의 허기라도 달래려 그곳을 헤매고 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도처에 어둠이 깔려있지 않았나. 이제는 그때와 같지 않은데, 커튼을 걷으면 쏟아질 달빛도 그때처럼 시리고 날카롭지 않은데도 그것을 열고 싶지 않았다.

어떤 빛을 바랐던 걸까. 어린 날, 어둠 속에 웅크렸던 자신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었던 그 빛이 그가 목격하고 간직한 최초이자 마지막의 빛일 것이다. 그것은 항상 구원자와 군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충의에 섞여든 당치 않은 연정이 거기에서 연인의 상마저 보도록 이성을 흐리고, 시야를 왜곡했을 뿐이다. 바라보다 눈이 멀지언정 손을 뻗어서는 안 됐는데. 이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한 데 대한 벌이다. 그분을 위해서, 라는 미명으로 욕심을 부린 대가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날부로 로드에 대한 제 쓰임이 다한 것이라면, 그저 이전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불찰이다. 징벌과 대가라는 이름을 붙여서라도 제 주제를 되새겨야 했다. 제게는 본래의 자리만도 과분하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괴로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

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고된 훈련으로 녹초가 된 몸도 그 머리와 마음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했다. 방 안을 빽빽이 채운 어둠을 더듬는 시선이 가라앉아 있다. 커튼을 열자 들어오는 달빛이 오랜만에 차가웠다.

고요한 시선이 창가에 놓인 화분을 훑었다. 제라늄이 시들었다. 그 옆, 꽃봉오리를 펴지 못한 채 말라죽은 꽃이 눈에 박혔다. 그것이 꼭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자 요한은 다시 한번 실소했다. 바라는 해답을 얻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든 꽃을 내려다보면서.

 

[요한로드] Take Me to Church (6)


요한에게 더는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 그날, 로드는 밤을 새웠다. 불면으로 자지 못한 게 아니다. 그간 회복한 체력으로 오랜만에 밤새 정무를 봤을 뿐이다. 함께 곁을 지키던 루인이 오랜만에 커피를 갖다주었다. 먼저 들어가도 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밤새 정무를 보시는 것이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반갑습니다. 농담이지? 그렇다고 해두지요. 글자와 숫자, 행과 열, 지도와 책만 번갈아 보던 그 밤은 잡념 없이 지나갔다. 제 방에 돌아와 몸을 씻은 뒤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같이 밤을 새운 루인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어 놀랐다. 도대체 무엇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건지.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왕의 의무를 이행하고는, 오랜 시간 자지 못한 몸을 침대에 누였다. 그러나 낙관은 거기서 끝이었다.

침대가 이렇게 컸던가? 지긋지긋한 두통보다 먼저 다가온 물음에 의아해졌다. 로드는 서랍장을 뒤져 어릴 때 안고 자고는 했던, 시녀들이 깨끗이 세탁해 넣어둔 커다란 인형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왜 이걸 생각을 못 했는지. 이불 속에서 인형을 끌어안은 로드가 눈을 감았다. 아직 어렸던 날의, 생각할 것도 많지 않고 무서운 것도 별로 없었던 나날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제 그 모두를 밀어내는 두통이, 그리고 그것을 사라지게 했던 남자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녀가 힘주어 인형을 끌어안는다. 나는 이제 경이 필요하지 않아. 필요로 해서는 안 돼.

그렇게 새벽녘에야 선잠이 들었다가 두 시간도 자지 못한 채 일어났다. “로드, 일어나! 아침 먹으러 가야지!” 활기차게 문을 연 프람이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깨우자 버석버석해진 눈을 떴다. 피곤해도 한 번 깨우면 다시 잠들 수 없는 이상한 상태인 걸 알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좋은 아침이야, 프람. 인사를 듣자 상쾌하게 나가버리는 프람을 보며 웃었다. 세수를 하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가관이었다. 눈 밑이 검은 건 당연하고 표정 자체도 어두워 이렇게 아파 보일 필요까지 있나, 하고 생각했다. 세면대를 짚고 한숨을 쉬다 깨달았다. 그러니까, 혼자 잔 지 고작 이틀 만에 이렇게 되었다는 거군.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 그날과 어제. 그간 요한과 함께한 충전과 회복이 이렇게 빨리 사라졌다는 게 허탈하고도 씁쓸했다.

역시 한계까지 일하고 쓰러져 잠드는 방법밖에 없나. 시리도록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서 간만에 눈 밑에 분을 덧발랐다. 피로의 흔적을 가려야 했다. 아무도 걱정하지 않게끔. 특히 요한이 눈치채지 않게끔.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요한이 오랜만에 안경을 쓰고 있어 그녀는 의아해졌다. 알현이 시작되기 전 두런거리는 요한과 프람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프람도 안경의 등장이 궁금했는지 요한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갑자기 안경은 왜 썼어? 난 안 쓴 게 더 좋던데.”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냥 오랜만에 쓰고 싶어져서요.”

 “그래? 혹시 앞으로 계속 쓸 거야?”

 “음…”

 “내 말은, 잘생긴 얼굴 가리지 말라구.”

 “…당분간만요. 칭찬은 고맙습니다, 프람.”

지방관의 알현이 시작되고 곁을 지키고 선 요한은 안경 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로드는 몹시 피곤하긴 해도 오전 일정을 잘 마쳤고, 화장 덕분인지 누구도 제 피로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안도했다. 그래서 바람도 없고 겨울 볕이 따뜻한 날인 김에 정원에서 오찬을 즐기기로 했다. 물론 기사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정원으로 향하는 길, 저만치에는 시종들이 미리 준비해 둔 테이블이 보이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린과 샬롯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로드가 웃었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겨울 햇살이 눈에 부셨다. 겨울 낮의 공기는 한 번 들이쉬면 온몸을 돌고서 머리를 맑게 해줘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자 별안간 양팔에 달라붙어 오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꼬였다.

 “로드, 겨울 햇살도 따갑다구요!”

 “맞아요, 같이 쓰고 가요!”

 “아… 그럴까?”

양산 하나를 같이 쓰고 가던 린과 샬롯이었다. 그중 가장 키가 큰 탓에 자신이 양산을 들게 되었지만, 이어지는 웃음소리와 거리낌 없이 팔짱을 끼어오는 온기가 귀여워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셋이 쓰기에는 작은 양산이니 아마 본 목적은 그저 이런 예기치 않은 스킨십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 테이블에 도착하자 그 모습을 본 미하일이 조용히 입꼬리만 올려 웃고, 요한은 부드러운 농담을 건넸다. 안경 너머로 웃고 있는 회빛 눈에 늘 보아오던 상냥한 기색이 스며있다. 로드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곤함이 가신 건 아니고, 입맛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메인보다는 수프만 홀짝이던 로드는 마침 요한이 좋아한다던 그 수프라는 걸 떠올리고는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두 그릇은 먹을 거라던 수프를 한 그릇만 비워낸 요한은 메인요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제 몫의 매쉬드 포테이토 접시도 프람에게 양보하고, 오랜만의 야외 오찬에 시녀장이 야심 차게 준비한 디저트 트레이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정작 로드는 그런 요한을 보다가 수프만 두 그릇을 먹어버렸지만.

그렇게 시선으로나마 요한을 좇다 보니, 그가 엘펜하임에 가기 전 함께 한 산책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래 볼까. 정말 요한을 필요로 하는 걸 그만두기 위해서는 일방적 통보 같은 그날의 마무리를 다시 매듭지을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려는데, 찻잔을 비운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요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도 얼떨결에 같이 일어났다.

 “조금 걷다 오겠습니다, 로드.”

 “나도 같이 가지.”

 “…예. 호위하겠습니다.”

샬롯과 디저트를 걸고 게임 중이던 프람과 느긋하게 후식을 즐기는 미하일을 두고 로드와 요한은 또다시 단둘이 되었다. 산책 코스는 언제나 그렇듯 분수가 멈춘 호숫가다. 반 발자국 뒤의 걸음 소리가 아쉬웠다. 왕성 내에서 근접 호위를 할 때는 늘 그렇게 걷던 요한인데, 이번에는 왜 그 단정한 발걸음이 아쉬운지. 습관처럼 따라오던 병사들의 훈련 상태에 대한 보고도, 망설이듯 부드럽게 던지는 화두도 없어 어색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한, 혹시……”

뚝 멈추고도 돌아보기를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뭘까. 주저하다 겨우 몸을 트니 그는 이미 자신과 나란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다. 늘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예, 로드.”

 “…….”

 “염려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말이든, 어떤 부탁이든 해도 될 것 같은 요한의 미소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힘이 있었다. 종종 거기에 기대 모든 속내를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만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는…

 “…이제 밤마다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 너무 갑작스럽지는 않았나?”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침실로 부른 것도 그랬지만, 그 반대도 그랬던 것 같아서. 이에 대해선 그때도 이야기하긴 했지만… 직위를 통한 강요도 없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그게 마음에 걸리셨군요.”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고 횡설수설했다. 잠자코 듣던 요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로드.”

 “…….”

 “그런 식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침실에도 불러주실 만큼 신뢰받는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안경으로 가려도 다정하게 휘는 눈꼬리가 선하다. 할 수 있는 답만을 골라내는 목소리는 단단하지만 따뜻하다. 로드가 조용히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로드의 밤을 지키는 데 있어 제 쓰임이 다했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갑작스럽다…고 말하기도 어렵지요. 저는 로드의 것이니 언제, 어디서 어떤 쓰임을 받아도 좋습니다.”

 “요한.”

 “로드께 쓰임 받는 것이 저의 소망이고, 소명이니까요.”

분명히 예상하고 기대했던 답이었다. 바라시는 대로 쓰임 받겠노라 말하는 게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최선의 대답이고, 여기에 그래도 나를 너 자신보다는 우선시하지는 말라는 게 익숙한 패턴이었는데도 오늘은 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로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로드께서는 가끔… 지나치게 다정하세요.”

어쩌면 이게 오늘 요한이 말한 유일한 진심일지도 몰랐다.

 “물론 저는 그런 로드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그래서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

 








책상에 앉으며 안경을 벗었다. 이를 쓰지 않았다면 그런 대답은 하지 못했으리라. 제게 일방적인 통보, 갑작스러운 명령에 승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괘념치 마시라는 그 말. 아니, 이렇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휘두르시는 대로 쓰임 받는 것이 제 소망이니 마음 쓰지 마시라고, 자신은 그런 다정함을 좋아한다고 말해버렸지. 구태여 단둘이 있을 때 그 낮을 도로 상기시키는 로드가 야속한 한편으로 혹시 제 맘이 상했을까 염려해주시는 그 다정함이 어쩔 수 없이 좋지만, 괴롭기도 해서. 충신의 가면을 쓰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말만 읊어놓고서 마지막에는 또 진심을 섞고 말았다. 다정하신 당신을 무척 좋아하노라고.

하지만 그 말을 제외하고는 선을 잘 지켰다. 언제고 로드를 좇으며 느꼈던 간지러운 기분, 두근거리는 가슴을 조용히 누르며 마냥 수줍어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할 일도 없을 테다. 물론 로드께서 다시 청하신다면 저는 그 청을 구실 삼아 정중하게 선을 넘어가겠지만, 이제는 손짓 한 번에 금방 물러갈 것이다. 자신은 그분의 길을 만드는 검이자, 그분의 세상을 넓혀나갈 도구일 뿐이니까. 그것으로도 족하니까.

 “…….”

요한이 안경을 꽉 쥐었다. 그것으로도 족해야 하는데. 그러나 로드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때, 드디어 제 방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야 사무치는 거리감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니 이런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잠들지 못하고 창가의 시든 화분이나 내려다보는 것도 유난이고 못난 불충일 뿐인데. 그런 제게 정신 차리라며 스스로 비수가 될 말을 주워섬겨도 떠오르는 얼굴은 늘 같았다.

이제는 그 민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에, 품에 파고들며 부디 감싸 안아달라 명하시던 그 몸을 다시는 안을 수 없다는 것에, 이야기를 들려달라시던 나지막한 목소리, 조금 장난스러웠던 미소, 낮고 부드러웠던 웃음소리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애끓는 마음은 어떤 회유와 질책으로도 돌아오지 않아서. 그는 테가 우그러드는 것도 모른 채 안경만을 붙들고 있었다.

정원에서 반걸음을 늦추어 걸으며 한 번 더 제 위치를 되새겼다. 자신이 로드와 나란히, 같은 눈높이를 점할 수 있을 때는 군주와 가신으로 이 나라와 세상에 대해 논할 때가 유일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이전에도, 이후에도 저의 군주는 로드뿐이니까. 그러니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자신은 아직도 꿈의 여운에 젖다 못해 못난 착각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 갑자기 당겼다가 밀어내 미안하다는 사과에서 다정함을 읽어내면서도, 로드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문 뒤에서는 한 조각의 원망까지 떠올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며칠 간의 밤이, 로드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까? 저를 수면제 삼아 잠드시기 전 나눴던 시선, 미소, 온기와 대화…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습니까? 한 번 시작된 원망 어린 질문은 끝을 모르고 머릿속을 채워가고는 했다. 로드로 인한 질문이라고 해도 로드를 원망해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사랑해 마지않는 그분의 밤을 지켰던 며칠 동안 자신은 알아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알고 싶었던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로드의 강함, 그녀의 약함, 로드의 미소, 그녀의 슬픔…… 한 침대 위에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던 그 밤 동안 자신은 그녀에게 그저 기사였을지 몰라도 자신에게 그녀는 그저 주군뿐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멈추기 위해서, 서툴렀던 시절 강박의 상징과도 같았던 안경까지 다시 뒤집어쓴 주제에, 문이 닫히고 그것을 벗은 순간 이런 웃기지도 않은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아.”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펼친 손안에 안경다리가 절그럭거렸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요한이 부러진 안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역시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강박 따위로 이겨낼 수 있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처럼 폐기되고 말았을 거다. 물기 어린 시선이 시든 제라늄을 향했다.

결국 바라던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가보다. 그분께 잠을 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저까지 밀어내게 만든 알 수 없는 조화가 이 못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가려도 피곤한 눈가, 웃고 있어도 맥이 없는 시선이 여전히 그분의 밤이 외롭고 괴롭다는 걸 보여주는데도 저를 밀어내시어, 당치도 않은 욕심을 알게 된 마음이 이리 오래 앓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누구도 잠들 수 없게 되었다면 여쭐 수는 있지 않을까. 이제 밤은 편안하시냐고. 자신이 없는 밤에도 꿈조차 찾아들지 않는 수마에 잠기시냐고. 함께 걷던 정원에서는 두려워 묻지 못했던 질문이 홀로 있는 지금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정말 제가 없어도 괜찮으십니까?

무슨 대답을 들어도 좋았다. 무어라 답을 돌려주시든, 자신이 마지막으로 고할 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자신은 괜찮지 않다고.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을 고할 자격은 없으니, 그렇게 편린이라도 토해내고 나면 정말로 제 주제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지키는 방패요, 적을 베는 검이라. 그대들의 충성은 세상을 향하고, 그대들의 마음은 사람을 향하라. 이토록 고결한 맹세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오로지 이 맹세를 새겨주신 그분의 말로만 꺾일 것이다. 분명히.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초에 불을 붙이려다 심지가 다 타버렸다는 걸 알았다. 역시나 잠이 오지 않는 밤, 천장에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이나 바라볼까 했더니 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는 바로 갈아두는데, 며칠 동안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수명이 다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요한이 있었던 밤에는 초를 켜지 않았으니까. 어스름 속에 끌어안은 그 몸이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그래, 결국 더는 요한이 없는 밤에도 그를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요한을 대신해 부둥켜안은 인형에 입술을 묻으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와 그가 나눠주었던 온기를 떠올렸다. 그가 저를 품에 안은 채 잠들지 못하는 모습을 그렸다. 입매는 나른하게 풀렸지만 두통과 불면이 가시지는 않았다. 아마 상상도, 그 무엇도 그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불도 끄지 않은 채 누인 몸을 뒤척였다. 저 자신이 우스웠다. 여상히 밀어낸 주제에 사뭇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요한을 필요로 하고, 요한의 다정함을 휘두르고, 요한이 주는 것만큼 돌려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껴도 결국 그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는 답밖에 주지 못했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가 있어 주기를 바라나. 괜찮냐고 물었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는데도 개운치 못한 기분이 머리는 물론이고 마음마저 짓눌렀다. 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나고도 똑같이 다정한 남자가 기껍지 않은가. 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할까. 다시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고, 그 품에 제 몸을 내맡긴 채로 그와 한 호흡을 공유하는 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 마치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 마냥……

 -로드.

문을 두드리는 소리보다 먼저 들려온 목소리가 실타래처럼 엉킨 마음 가운데 꽂혔다. 머리가 사고와 판단을 하기 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로드가 문고리를 잡았다.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종용했다. 어서 문을 열라고.







장래희망: 로드의 만년필, 요한의 안경닦이, 크롬의 장갑, 아이메리크의 고양이, 정대만의 왼쪽 무릎... etc. (계속 늘어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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