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이를 전해들은 해담의 얼굴은 금세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요.”

“…….”

“얼굴에 적혀 있지 않아요? 완. 전. 건. 강.”

“…….”

“타. 고. 난. 건. 강. 체. 질.”

 

한자 한자 강세를 주어 말한 후 입매를 씰룩대는 얼굴을 보며 예림은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아픈 곳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마냥 안도하기엔 해담의 태도가 너무 얄미운 탓이었다.

 

진료는 소염진통제를 처방받는 것으로 끝났다. 검사 결과가 정상인 데다 해담 본인이 극구 멀쩡함을 주장하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수납까지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11시. 시간이 다 어디로 샜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림 씨, 배 안 고파요?”

“아.”

 

해담의 묻고 나서야 예림도 뒤늦은 허기를 느꼈다. 곯은 배를 부여잡은 채 마주보던 둘은 이내 푸시시 웃어버렸다. 누구에게서 먼저 시작된 건지 모를 웃음이었다.

 

날이 날인만큼 어딜 가도 사람에 치일 게 뻔한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구내식당에 가긴 싫었다. 어쨌거나 데이트. 그것도 첫 데이트. 오늘 만남의 목적 정도는 둘 모두의 머릿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병원 후문 쪽에 위치한 24시 분식집이었다. 말이 분식집이지, 실은 주먹밥부터 백반까지 없는 메뉴 빼곤 다 있는 식당이었다.

 

해담의 먹성은 예외 없이 빛났다. 쫄볶이와 김밥, 돈까스며 튀김까지. 예림은 둘이 가서 4인분을 시키고, 4인분을 마치 2인분처럼 뚝딱 해치우는 진귀한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왜요?”

“잘 먹어서요.”

“…너무 먹나?”

 

예림은 선선히 제 감상을 전했다.

 

“보기 좋아요. 잘 먹어서.”

 

언제 봐도 해담은 참 잘 먹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많이 먹는데, 그 먹는 모습이 또 보기 좋았다. 시라카와고에서도 느꼈던 바였다.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거리의 풍경에 압도됐다. 루미에나리가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길은 인파로 꽉 채워진 채였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사람은 아까보다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 둘은 사람들에게 떠밀리듯 걸었다. 길을 채운 체온들 덕분일까. 꽤 오래 걸었는데도 둘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스터디 룸을 겸한 24시 카페 앞에 도착했을 즈음, 해담은 괜스레 걸음 속도를 늦추고 입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들어가자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예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오늘 무리하면 어떤 식으로든 내일 일에 지장을 겪는 법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외과에서 작은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예림은 요행에 스스로를 맡길 만큼 저 자신에게 관대한 타입이 아니었다.

 

데이트의 최종 목적지는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였다. 그나마도 ‘첫 데이트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해담의 주장에 예림이 넘어간 덕이었다.

 

둘은 나지막한 그네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낡은 그네였지만 워낙 관리를 잘해서인지 삐걱대는 소음 하나 나지 않았다.

 

쭉 뻗은 기다란 다리로 그네를 설렁설렁 움직이며, 해담은 주머니 속의 꿀물을 만지작댔다. 왼쪽 주머니엔 핫팩이, 오른쪽 주머니엔 따끈한 꿀물이 담긴 유리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 편의점에 들러 사온 것들이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응급실에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결의 정적은, 꼭 온 세상이 잠든 듯 느껴지게 만들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깨어있는 것 같은 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단지 곳곳을 수놓은 꼬마전구들만이 알알이 깜빡이고 있었다.

 

“오늘 고마워요.”

 

예림이 해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질 뒷말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사실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제 아픔과 결핍을 내보이는 일. 그래도 하고 싶었다. 예림으로부터 동정이나 연민을 이끌어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예림이 제게 물러지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막연히 알려주고 싶었다. 정예림이라는 사람이 오늘 제 하루를 얼마나 특별하게 만들어줬는지. 그것이 해담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 것인지.

 

“사실은 오늘 절에 다녀왔어요. 부모님 위패 모신 절에.”

 

예림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해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뱉은 숨을 따라 뿌연 김이 길을 그렸다.

 

“여덟 살 때 돌아가셨어요, 두 분 다. 사고…, 그냥, 운 나쁜 사고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충격이긴 했나 봐요. 그때 기억이 드문드문한 걸 보면.”

 

이미 입속에서 예행연습을 거쳤음에도 말은 어설프기만 했다. 처음이라서 그랬고, 혹여 예림에게 부담스럽게 들릴까 걱정되어서 더 그랬다. 해담은 답지 않게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어…. 이런 말로 동정 사려는 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서 하는 얘기예요.”

“…뭔데요?”

“고마워요.”

“…….”

“오늘 나랑 같이 있어줘서, 안 가고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해담은 약간의 틈을 두고 덧붙였다.

 

“덕분에 크리스마스가 조금은 좋아졌어요.”

“…….”

“나한테 크리스마스이브는 늘 기일이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질 것 같아. 마지막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사실상 혼자 떠드는 쪽이었던 해담이 입을 다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둘 사이엔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림은 문득 고개 돌려 해담을 응시했다. 해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유려한 선으로 이어진 옆얼굴은 흠 잡을 곳 하나 없었다. 그리고 해담은, 왜인지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담을 안기고자 꺼낸 말이 아님을 안다. 해담의 부연이 없었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그녀가 아는 해담은 그랬다. 병원 안팎의 해담을 모두 겪어보았기에 할 수 있는 소리였다.

 

해담은 늘 앞과 뒤가 같았다. 적어도 얕은 수는 쓰지 않는 사람. 쓸 줄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얄팍한 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단단한 자기애와 자존감을 가진 사람.

 

실은 예림도 해담에게 답하고 싶었다. 고맙다고. 해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기억 속에 크리스마스의 악몽 한 조각을 품고 있었다고. 그날의 악몽이 오늘의 기억으로 새롭게 덮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나 예림은 망설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응급실 앞에서 겪은 일이 가슴 속에 턱 걸려 있었다. 선연수와 해담. 해담과 선연수. 둘을 함께 떠올리는 머릿속은 복잡했다.

 

처음 만난 시라카와고에서도, 운명의 장난처럼 재회한 서울에서도 예림은 해담으로 선연수를 묻었다. 선연수의 약혼 소식을 들은 날엔 해담과 밤을 보냈고, 서울에서는 다시 시작하자는 해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은 여기까지 왔다.

 

―보여줄 거면 제대로 보여줘야죠.

 

선연수를 등진 채 해담이 남긴 말은 예림의 마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남겼다. 물의 표면 위에 연이어 그려지는 동심원처럼, 생각들은 잔잔하고도 집요하게 뻗어나갔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들. 제가 정말 해담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연수에 대한 미련이 이렇듯 빠르게 자취를 감춘 데에 해담의 영향이 없다고. 안 그러는 척, 그저 끌려가는 척 굴며 실은 해담을 통해 제 외로움을 채우고 있다고.

 

예림은 늘 그래왔듯 스스로를 의심했다.

 

“으아, 일기예보가 맞았네.”

“…응?”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난데없이 괴성을 내뱉은 후, 해담은 빨갛게 언 코끝으로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엄청 춥다. 그죠?”

“그러게. 춥네요.”

“들어갈까요?”

“그래요.”

 

예림은 코트 주머니 속의 손을 꼼질거렸다. 효용을 다한 꿀물은 차게 식은 지 오래였다.

 

문득 해담이 멈춰 섰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와, 눈.”

 

해담의 말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눈송이는 가로수 위로, 두 사람의 머리와 코트 위로, 거뭇한 아스팔트 위로 나풀대며 떨어져 내렸다.

 

“진짜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일기예보대로.”

“그러게요.”

“그거 알아요?”

 

해담이 양 입매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 눈 되게 자주 보는 거?”

“그랬나.”

“예림 씨랑 나랑 같이 눈 맞은 게 다섯 번도 넘을걸요?”

“겨울이잖아요.”

 

티 나게 들뜬 해담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이 무감각한 대답이었다. 예림을 내려다보던 해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집게손가락을 들어 예림의 어깨를 톡 건드린 해담은 대뜸 비명을 내질렀다.

 

“아얏!”

“…….”

“아휴, 따가워라….”

 

또다시 ‘가시’인지 ‘까시’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해담은 양껏 불쌍한 척을 해댔다. 예림은 콧방귀만 한 번 뀔 뿐, 이젠 어이없다는 반응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저놈의 ‘까시’ 타령에 많이 당해본 탓이었다.

 

해담도, 예림도 한동안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딱히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그랬다. 두 사람이 말없이 지켜보는 동안 느릿하게 떨어지던 눈발은 차츰 굵게 변했다. 나풀대던 첫 눈송이를 몇 개 뭉친 것만큼 불어난 눈송이는 사뭇 빠르게 낙하했다. 말 그대로 함박눈이었다.

 

“예쁘다.”

“그러게.”

“…….”

“예쁘네요. 진짜 크리스마스 같아.”

 

예림은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해담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단지를 둘러싼 나무들이었다. 겨울나무의 헐벗은 가지에서 반짝대는 알전구. 그 위로 쌓이는 흰 눈송이들. 예림의 말마따나, 진짜 크리스마스 같다고 할 법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예림은 모를 터였다. 해담이 무심결에 중얼거린 예쁘다는 말은 예림을 두고 한 소리였단 걸. 해마다 보아왔을 저 풍경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겨울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예림을 보던 해담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진짜 갈까요? 집에.”

 

해담은 퍽 당연하다는 태도로 예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이제까지 늘 손을 잡아왔던 사이인 양. 내내 핫팩을 만지작대던 손엔 손끝까지 보기 좋은 혈색이 돌았다.

 

“가요.”

 

예림의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자그마한 핫팩을 사이에 둔 채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 낀 두 손은 자연스레 해담의 코트 주머니로 향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늦은 밤의 아파트 단지엔 둘 뿐. 구태여 손을 잡을 이유도, 손잡은 모습을 보여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예림이 잡은 거였다. 잡고 싶어서. 떠밀려서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잡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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