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타는 쿠로오 가의 작은 주인님을 좋아했다. 

맛있는 과자를 많이 준다. 실수를 해도 웃으며 넘어가 준다. 몇 번이나 쫓겨날 뻔한 자신을 언제고 보듬아 주어서 계속 쿠로오 가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히나타는 쿠로오 테츠로라는 작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직업은 메이드. 

사실 히나타는 메이드 일을 하기에는 손끝이 야무지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쿠로오 가에서 일을 해왔지만 그런 것 치곤 덜렁거리고 실수를 하기 바쁘다. 언젠가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다가 실수로 카펫에 옮겨 붙어 방 하나를 태워버릴 뻔한 일이 있었다.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기 충분한 사건이었으나 쿠로오 테츠로가 히나타 대신 열심히 변명을 해주어 벌써 10년이 넘도록 이 저택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친구라는 말은 건방지지만 그만큼 가까운, 친밀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존경하는 대상이었다. 


이 작은 세계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코즈메 켄마의 소개가 불가피하다. 누구냐 하면, 쿠로오의 친우이고 히나타로썬 아주 먼발치에서 종종 봐왔던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였다가, 노란 머리였다가, 지금은 그 두 개가 섞여 있어서 히나타로썬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쿠로오의 특이한 머리 스타일에 비하면 아주 얌전한 편이지만. 

코즈메 켄마도 쿠로오와 히나타처럼 오랫동안 쿠로오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코즈메는 쿠로오의 저택에 출입은 한 적이 상당이 적었다. 1년에 한 번 올까말까. 귀찮고 느긋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런대도 둘이 오랫동안 친구 사이인 것이 신기했는데, 듣자하니 쿠로오가 대부분 켄마의 집에 찾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근래 들어 켄마의 출입이 잦았다. 쿠로오의 담당은 히나타이니 매번 코즈메가 올 때마다 간단한 다과를 들고 둘에게 놓아주는데 히나타는 왠지 모를 시선을 느꼈다. 

눈치가 없는 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히나타여서 처음에는 부러 신경을 쓰지 않다가 어느날 코즈메의 눈과 마주쳐 버렸다. 그것은 날카롭고, 다 삼켜버릴 것 같았다. 아주 가끔 마주치는 그 시선이 각막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았다.


쿠로오 가는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지역의 작은 화과자점으로 시작한 쿠로오 화과점은 5대 째를 이어 제과 제빵계의 큰 손이 되었다. 쿠로오 일가는 물론이고 고용인들 또한 이 거대한 저택에서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된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야 하고 입은 무거워야하며 걸음걸이는 구름 위는 걷는 것처럼 차분해야 한다. 또한 옷은 단정하고 정갈하게. 얼룩 따위가 있으면 안 되고 식사는 일을 시작하기 전 20분까지 끝내도록 해야 한다. 음식 냄새를 풍기면 모시는 주인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손님과 눈이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 

처음 히나타는 무슨 이유에서 마지막 규칙이 있는 것인지 몰랐지만 계속 이 저택에서 일을 하고 나니 저절로 깨달았다. 대부분의 손님은 내로라하는 집안의 사람이거나 큰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종종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도 없이 '한 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뒤부터 저 규칙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히나타에게 이런 규칙은 필요 없었다. 히나타 만의 작은 세계. 쿠로오 테츠로의 방. 오직 작은 주인만 모시는 메이드. 나의 주인님. 히나타는 오직 쿠로오 테츠로의 곁에 있어야만 존재의 의의가 생긴다. 



"거기, 너. 쿠로 담당 메이드던가?"

"앗, 네...! 네!"



히나타가 허리를 숙였다. 히나타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켄마였다. 히나타는 켄마의 발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켄마가 한 발자국 히나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단발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시원한 샴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은은한 과일향이 나는 쿠로오와는 달랐다.



"쿠로 집에 올 때마다 항상 보는데 인사해본 적이 없어서."

"테츠로님은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방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냐. 오늘 쿠로 없는 거 알고 왔어. 너랑 한 번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 거야. 고개 좀 들어줄래?"


규칙도 잊고서 히나타는 켄마의 말에 따라 순순히 얼굴을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마

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켄마의 말에 입을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코즈메 가는 침구류로 유명한 회사를 소유한 가문이었다. 백화점에서 조차 함부로 입점 되어 있지 않았고 가격은 상상을 초월을 할 정도. 그러니 분명 코즈메의 집에도 발에 치일만큼 많을 메이드나 사용인이 많을 텐데 고작 자신에게 관심을 준다는 것이 이상했다.



"저... 요?"

"응. 너. 이름이 뭐야? 쿠로가 부르는 걸 한 번도 못 봤어."

"히, 히, 히나타 쇼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떨 거 없잖아? 나는...  응, 그래. 친구. 너랑 친구 되고 싶어서."

"친구요...?"

"응. 쿠로가 너랑 굉장히 친하다고 하는데 나도 쿠로 친구니까 나도 너랑 친해져보고 싶어서."

"저는 그냥 메이드..."

"뭐 어때."



켄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겨우 그런 것이 뭐가 대수냐며 웃음으로 넘겼다.

켄마가 히나타의 옷깃을 잡았다. 히나타가 더 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도록, 그리고 히나타를 당겼다. 옅은 색 켄마의 눈동자는 히나타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네가 마음에 들어. 

켄마가 속삭였다.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지 않았던가. 히나타는 무어라 답해야할지 몰랐다. 켄마가 이어서 말했다. 

쿠로오랑 하는 그거 나랑도 하면 안 돼? 켄마의 입술이 히나타의 목, 깊숙이 자리잡은 어느 붉은 자국에 닿았다.

히나타는 단숨에 그 자리를 도망쳤다. 







***

"쿠로오 님..."

"응, 왜? 우리 둘끼리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라고 했잖아."

"테츠로... 그만해주세요. 숨 못 쉴 것 같아..."

"에이."



납작한 히나타의 가슴을 터트릴 듯이 주물렀던 쿠로오의 손이 드디어 치워졌다. 노골적인 분위기 보다는 심폐소생술을 당하는 느낌이여서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슴에만 집착할 거면 차라리 여자가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쿠로오에게 가까이 지내는 여자는 없는 느낌이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름 한 자 정돈 들을 수 있었겠지. 

히나타는 가슴 앞을 풀어 헤치고 붉은 손자국이 남는 가슴을 쓸어 보았다. 쿠로오에게서 받은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보기 좋네."



목과 가슴에는 키스마크가, 가슴과 허리에는 손자국이, 엉덩이와 허벅지에는 말할 것도 없이. 

히나타는 여름에도 꼭 옷깃을 여미고 다닌다. 더운 여름에는 고용인들의 옷도 좀 더 얇고 목이 시원한 옷으로 바뀌는데 쿠로오가 진득하게도 남기는 이 붉은 자국들 때문에 히나타는 한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다녔다.  

능글능글 웃으며 다시 히나타에게 달라붙은 쿠로오가 이번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히나타의 발목을 낚아챘다. 와그작하고 이번에는 잇자국을 냈다. 깜짝 놀란 히나타가 결국 쿠로오를 다른 쪽의 발로 뻥 차버렸다. 나동그라진 쿠로오가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킥킥 웃었다. 



"히나타."

"네, 왜요? 또 다른 쪽도 물려고요?"

"너 켄마 어떻게 생각해? 알지, 코즈메 켄마. 투톤머리 내 친구."



히나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와 쿠로오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알고 있던 사이인 코즈메 켄마. 적어도 이 집에서 모를 사람은 없었다. 쿠로오의 친구는 퍽 많았지만 코즈메와 같이 아주 어릴 적부터 알던 친구는 소꿉친구는 그 한 명 뿐이었다. 



"켄마님은 왜요?"

"우리 히나타는 켄마를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뭐, 뭐... 생각이랄 것도 있나요. 대화도 제대로 못했는데..."



히나타는 손사레를 쳤다. 간신히 잊고 있었던, 옷깃을 들쳐보던 켄마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예민한 목에 닿았던 기다란 손가락은 차가웠었다. 내가 그 얼굴에서 뭘 봤더라. 무언가 긴장했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껏 쿠로오에게 숨기는 것은 없었고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던 히나타는 애써 켄마의 얼굴을 지웠다. 

켄마와 자신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었다. 전날, 그는 그저 실수로 옷깃을 잡았던 것뿐일 것이다. 그래, 그 뿐이었다. 작은 주인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히나타는 벗었던 셔츠를 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조금이라도 복장이 흐트러진다면 괜히 동료들에게 꼬리가 잡힐 것이기에 히나타는 치마 주름까지 잡아당기며 멀끔한 행색으로 다시 탈바꿈 하였다. 



"벌써 가려고?"

"빨래가 쌓였거든요."

"나 심심한데."



쿠로오가 뒤에서 히나타를 껴안았다. 요즘 들어 쿠로오는 툭하면 히나타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살을 쪽쪽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부가 아플 정도이기에 히나타가 농담 삼아 모기냐고 작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쿠로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히나타의 목이며 쇄골이며 정신없었다. 어딘가 취한 사람처럼 말이다. 사실 쿠로오는 히나타의 허리 아래로는 건들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나름대로의 룰이었다고 해야 하나, 선을 지켰다고 해야 하나. 전혀 진지하지 않았던 관계가 색이 물든 것처럼 진해지고 있었다. 



"저 정말 가야해요. 안 그러면 혼난단 말이에요."

"나 때문에 늦었다고 해."



쿠로오가 히나타의 옷깃을 들쳤다. 쿠로오의 검지가 오늘 만들어낸 붉은 자국을 살짝 찔렀다. 잘 보이네.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쿠로오는 웃음기와 섞인 말투로 탄성을 지었다. 

히나타는 억지로 쿠로오를 떼어 놓았다. 지난번의 켄마의 행동과 오버랩이 되었다. 무슨 장난을 쳐도 웃고 있던 히나타의 얼굴이 꽤나 난처해 보였다.



"쇼요."

"네, 네...?

"딴 마음 먹고 있는 거 아니지? 평생 이 집에서 나만 모신다고 했잖아."



쿠로오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혔다. 무슨 딴 마음? 쿠로오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히나타는 도리질을 하고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심장이 아프다. 거짓말을 한 것처럼 양심이 찔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

쿠로오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것을 건들었다간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켄마를 언급했다. 켄마와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켄마와 똑같이 옷을 들쳐보았던 것은, 혹시나 그 장면을 직접 보아서 일까? 

난생처음 히나타는 쿠로오를 ‘바보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봐와놓고서 그렇게도 자신을 모른단 말인가. 히나타가 쿠로오를 떠날리 없었다. 쿠로오는 지금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히나타는 머릿속으로 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흐릿했던 첫인상이 지금은 수채화로 맑게 물들여 있었다. 쿠로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그 사람의 단정한 얼굴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히나타는 잡생각을 지우고 빨래에 집중을 하고 싶었지만 쿠로오의 질문과 켄마의 얼굴이 엇갈려 떠오르느라 머릿속은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이불시트를 품에 담고 있던 히나타의 걸음이 멈췄다. 저 멀리서 켄마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곧바로 뒤를 돌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지만 켄마가 더 빨랐다. 뛰어도 되는 손님이 아무리 급해도 뛰어서는 안 되는 메이드 정도야 쉽게 따라잡았다. 



"안녕, 쇼요."



성이 아니라 이름이다. 묘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시 나 피한거야?"

"아, 아뇨..."

"내가 무서워?"

"그럴 리가요..."

"근데 왜 내 눈을 안 봐?"



움켜지던 빨래만 바라보던 히나타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켄마의 눈은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다시 슬며시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자 켄마는 히나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히나타는 헉하며 숨을 삼켰다. 켄마의 눈에 사로잡혔다. 



"쇼요."

"네, 네...?"

"난 쇼요랑 친구가 되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싫은 거야?"

"싫은 게 아니에요."

"역시 나보단 쿠로가 더 좋은 거지? 둘이 오랫동안 함께였으니까."



당연한 소리다. 자신이 켄마에게 배정된 메이드면 모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히나타는 모순을 깨달았다. 자신은 결단코 그런 상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은 오직 쿠로오에게 속한 사람이며 그 곳의 주민이었다. 자신에 대한 정의이자 자아이기도 하였으며 곧 히나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였다. 

‘켄마의 메이드가 될 수 있는 히나타’라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내가 쿠로오의 세계에서 살지 않으면 뭐가 남지?

날카롭게 깨져버린 무언가를 느꼈다. 혼란스럽기도 하였고 손끝이 베어서 아픈 느낌과도 같았다. 히나타는 안고 있던 시트를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



"해도 돼?"



켄마의 얼굴이 바짝 히나타에게 다가왔다. 

무엇을요? 묻기 위해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켄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강하고 난폭하고 그만큼 강렬했다.

켄마의 어깨너머 서 있는 검은 머리를 언뜻 보았다. 놀란 히나타가 켄마의 혀를 피 맛이 날 정도로 강하게 깨물어버렸지만 켄마는 히나타의 어깨를 붙잡으며 히나타를 더 밀어 붙일 뿐이었다. 

히나른 혹은 흑우 주인공른 글 올라와요! @rego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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