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ward :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을 때는 불확실한 희망 밖에는 가질 수가 없지만, 확실한 결과는 실천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향해서 진군합시다.



'Lady Macbeth'







18.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소리 없이 입술로만 울린 목소리. 석진이 오물거린 그 한 마디에 주변이 온통 뒤집혔다. 태형은 석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계속해서 정말이냐 물었고,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된 후엔 곧바로 의사를 데려왔다. 하지만 석진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예전에도 일어났던 일이야. 언젠가 태형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던 듯한데……, 그게 언제더라?


"……."


아, 그래. 태형과 처음 할머니를 보러 갔던 날. 내가 왜 수화와 말을 동시에 하는지 물었던 그에게 이렇게 답했었다.


"그런데 석진 씨는 왜 수화랑 말을 동시에 해요?"

"아아……. 저희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했잖아요."

"네."

"그때가 아마, 제가 6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

"충격이 커서 실어증을 앓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기억은 잘 안 나요. 정말 오랫동안 말을 못 했다 그러던데……."

"……."


돌이켜 보니 남일처럼 말했었구나. 바보 같기는. 석진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의사가 하는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딱히 이유 있는 병도 아니기에 시간을 기다리라는 말뿐. 어느 날 자연스레 돌아올 거라 한다. 의사는 그렇게 당연한 말을 하고는 간호사를 통해 링거 몇 개를 추가한 뒤 떠났다. 시간……. 시간이라…….


'하지만 나에겐 시간이 없는걸.'


『맥베스』는 2주 뒤가 개막이니까. 게다가 내 목소리가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런 기약이 없다. 아아,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감당하기 벅차 회피하는 건가.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솔직한 말로는 슬프지도 않다. 그저,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 하는 생각뿐. 그렇게 의사가 떠난 뒤, 눈만 깜빡이던 석진에게 태형이 손을 쥐며 말을 걸었다.


"석진 씨."

"……?"

"괜찮아요.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


끄덕끄덕. 자신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건만, 눈앞의 태형은 세상 불행을 다 끌어안은 표정이다. 당신이 왜 그런 표정 지어요. 석진은 태형을 향해 살짝 미소 짓고는 손을 움직여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연출가님한테 연락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다가 문득. 아, 선배는 수화를 모르지. 그래서 핸드폰을 들어 토독토독 문자를 친 뒤, 태형에게 보여 주었다. 그제야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아까 연락했어요."

-다행이에요.

"너무 걱정 말아요.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거니까."

-2주 이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석진이 꽤 덤덤한 표정으로 누른 메시지에 태형은 대번 얼굴을 굳혔다.


"그런 말 말아요. 이제 와서 석진 씨 없이는 상연하지 못하는 거 알잖아요."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어요. 대관 날짜에 무대까지 완성되었잖아요.

"……금방 돌아와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

"일단 오늘은 쉬어요. 연극제에……, 이것저것 피곤했을 거야. 윤기 형도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고."


태형은 그리 말하며 석진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기에 그만두었다. 게다가 피곤한 것도 사실. 그래서 석진은 가만 누워 멍하니 병실의 형광등만 바라봤다. 


"……."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짐 좀 챙겨와야 할 것 같아서. 괜찮아요?"


끄덕끄덕.  


"진짜 금방 다녀올게요."


태형은 꼭 어린아이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표정이냐구요. 걱정이 한가득인 그 모습에 석진은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핸드폰을 토독토독.


-괜찮으니까, 천천히 다녀와요.

"나 없을 때 무슨 일 있을까 봐 걱정돼."

-안 그래요. 잠깐 잠이나 자고 있을래요.

"응. 쉬고 있어요."


태형은 석진의 앞머리를 넘겨주고는 이마 위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뗐다. 따뜻해. 태형만이 가진 온기가 이마를 스쳐갔고, 자신의 햇살은 곧 오겠노라 하며 병실을 떠났다. 그러자 하얀 형광등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시리게만 느껴졌다.


"……."


하지만 비로소 혼자가 되었어. 병실에 홀로 남게 된 석진은 작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푸욱 기댔다.


"……."


그리고는 괜히 입술을 벌리고, 아, 아. 소리가 나오는지 확인을 해본다. 역시나. 소리 없는 숨소리만이 힘없이 새어 나온다. 


"……."


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기가 차서 안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석진은 다시금 제 손을 눈높이까지 올려 보았다. 하얗고 말간 손.


'……이젠 괜찮은 것 같아.'


제 손이 계속해서 붉어 보였을 땐, 자신이 미쳤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레이디 맥베스.



그녀의 당참과 포부를 닮고 싶었지만, 이런 것까지 닮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나의 레이디 맥베스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한 말로는 각오를 하고 있다.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지만 몇 달 동안 자신을 채워주던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니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 그래서 석진은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소리 없이 입술로만 읊었다.


「그 마녀들이 나타난 것은, 개선하던 날이었소…….」


레이디 맥베스의 첫 대사. 석진은 그 첫 대사를 기점으로, 몸이 기억하는 대사를 모조리 읊기 시작했다.


「오, 위대하신 그래미스 영주님! 훌륭하신 코더 영주님! 그리고 장차 더욱 위대하게 되실 분! 당신의 편지는 저에게 무지한 현재를 뛰어넘게 하여, 지금 이 순간 벌써 미래의 영광을 느끼고 있답니다.」


장차 왕이 될 맥베스를 향해 영광에 겨워 울리는 목소리.


「오! 태양은 영영 그 내일을 보지 못할 거예요!」


던컨 왕이 죽을 거라 말하는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


「참으로 나약한 생각도 다 하십니다! 그 단검들을 이리 주십시오. 잠들어 있는 자와 죽은 자는 그림에 불과한 것! 그림에 그려져 있는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어린아이들 뿐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맥베스를 다그치는 부인의 모습과.


「제 손도 영주 님의 손과 같은 빛이 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부끄럽게도, 영주님처럼 그렇게 겁에 질려 심장이 하얗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제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일을 단행하는 그녀. 석진은 그렇게 맥베스 부인이 되어 멈추지 않고 대사를 외웠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직도,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어…….」 


손에서 피의 환상을 보는 그녀의 모습까지 외워버리고 말았다.


「없어져라, 이 망할 얼룩아! 없어지라니까!」


"……."


……아. 석진은 꿈속을 헤매는 맥베스 부인을 닮아 허공에 비비던 손을 멈추었다. 


"……."


읊는 건, 그만두자. 석진은 저 자신이 그녀를 지나치게 닮아버렸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뭐 하는 거람. 잠이나 잘걸. 또 괜한 짓을 했다. 석진은 다 관두고 잠이나 자자며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자 어렸을 적의 기억이 다시금 자신을 덮쳐왔다. 돌진해 오던 트럭, 핸들을 돌리던 아빠와 나를 돌아보던 엄마, 그리고 회색의 연기와, 붉었던 세상. 


"……."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어떻게 이 기억을, 이날의 기억을.


'완전히 잊고 살 수 있었을까.' 


정말이지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데에는 선수구나. 석진은 스스로를 자조했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끔찍했으면 기억을 이렇게까지 꽁꽁 숨겼나, 싶기도 하다. 


"……."


석진은 멍하니 형광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벌써 한밤이야.'


깜깜하네. 태형이 윤기에게 연락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오늘 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눈앞이 깜깜하겠지. 정신이 없을 테니, 오더라도 내일 올 것이다. 게다가 태형은 조금 전에 떠났으니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고……. 석진은 가만 앉아서 눈만 깜빡였다. 때때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놀랍도록 적막하다.


'조용한 거, 오랜만…….'


예전엔 혼자 있는 게 당연했는데, 이런 적막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도 오는구나. 석진은 고요함에 파묻혀 오래도록 창밖을 보다, 밤이 되어 밝혀진 자동차의 붉은 등에 문득 떠올렸다. 

붉은 융단의 커튼을. 붉고 붉었던 그 그림을. 그것만 생각하면, 난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아아. 그런 건가.'


왜 있잖아. 높은 곳에서는 고백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 말이야. 높은 것에 긴장되어 올라가는 심박수를, 사랑에 빠진 거라고 착각하는 그런 것. 

마찬가지로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붉은 것'. 그 색채와 그림이 겹쳐서 그리도 심장이 뛰었던 걸까. 만일 그런 거라면 조금 억울하다. 왜냐하면 난 그게 무대를 향한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석진은 무릎을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로 검은 눈을 깜빡깜빡. 석진은 또 생각했다.


'몸의 기억이란 대단하구나.'


예전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예전과 같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


솔직히 말해서, 내면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을 땐,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랍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자 곧 괜찮아졌다. 그 증거로, 이젠 손을 쳐다보아도 붉은 환상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끊임없이 귀를 울리던 이명 소리와 자동차 경적음도 사라진지 오래.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데도 목소리가 안 나오다니.'


아아, 억울하다. 겨우 옛날 기억 따위에 발목이 잡히다니. 석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겨우 기억 따위에. 심지어 완전히 잊었던 일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기어 나와서는 나를 멈추게 만드는 거야.'


석진은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부러 닦지도 않았다. 대신 저 멀리, 자동차들이 줄지어진 도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작은 사람들이 작은 자동차를 타고 줄지어 이동하는 도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아.'


석진은 끌어안았던 무릎을 놓고,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그래. 나쁜 생각일랑 그만두자. 억울하다는 생각도 이제 그만하는 거야. 석진은 마음을 다잡자는 뜻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나는, 부서진 유니콘이 될 생각은 없어.'


반짝. 치켜 올려진 까만 눈동자에 작은 빛이 새겨졌다. 그래. 난 부서진 유니콘이 아니며, 그렇게 될 생각도 없다. 부서질 정도로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니거니와, 부서질 정도로 약하지도 않다.  


'난……, 바뀌었어.'


이제 난 혼자가 아니고, 나 자신을 불신하지도 않으며, 현실에 절망하고 있지만도 않다. 진흙에 빠져있던 예전과는 다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내게 가꿔준 해바라기 밭은, 당신이 내게 준 햇살은, 이제 나 스스로가 두 손에 쥘 수 있다. 언제나 당신이 건네주던 따뜻함을, 이제 나 스스로도 가질 수가 있다. 


'늘 좋은 말만 해주었지.' 


언젠가 알알이 주옥같은 말만 해주겠다던 그는, 단 한 번도 그걸 어겨본 적 없다. 그가 주는 따사로움 속에서 난 얼마나 평온했던가.


'나도 할 수 있어.'


그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 이루 말할 수 없이 반짝이던 '어떤 것'. 이제 나도 그것을 나눌 수 있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석진은 하얗고 말간 손을 꽉 말아 쥐며 다짐했다.


'절대로 안 부서져.'


목소리를 잃어 잠깐 삐끗했을 뿐, 내 재주는 어디 가지 않는다. 목소리는 돌아올 것이고, 난 그걸 다시 울릴 거다. 그럼 또다시 무대 속 허구를 실제로 만들 수 있을 테지. 그래. 『맥베스』의 무대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이 '레이디 맥베스'가 아니더라도. 나의 연기가 다시 시작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석진은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그러자 언젠가 제게 안광을 밝히던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너 욕심 있잖아." 


그래, 맞아. 난 욕심쟁이야.


"네가 아등바등하는 건, 하루살이처럼 비루하게 살아남으려 그러는 게 아니고, 깡다구가 있어서 그런 거야. 악에 받쳐서 그런 거라고. 난 알고 있지. 넌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어. 사실 넌, 누구보다 욕심쟁이야. 누구보다도 위를 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처절한, 야망 가득한 놈이라고."


그래요. 교수님 말이 다 맞아요. 나는 원래 그런 놈이에요. 그런 놈이었지만, 스스로가 모르고 살았어요. 스스로가 미워 죽겠는 나는, 나에겐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따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면 참, 선배는 신기한 사람이야.'


당신은, 나의 뭘 보고 내게 좋은 말을 해주었나요? 당신은 나의 뭘 믿고 계속해서 해바라기 밭을 가꾸었나요? 당신은, 당신이 가꾼 해바라기 밭이 이렇듯 만개할 줄 알았나요? 난 몰랐어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이렇게 목소리를 울릴 수 없을 때마저도 무너지지 않는 황금빛 물결을 준 사람. 그리하여 대단한 사람. 아니. 경이로운 사람.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몰라도…….


'내겐 좋은 사람.'


석진은 조금 전, 떠나기 직전의 태형을 떠올렸다. 그건 어쩐지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 아아,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고 대단한 사람이니까.


'얼른 돌아왔으면.'


빨리 돌아와요. 금방 돌아오겠노라 했잖아요. 나, 당신을 기다려요. 흐린 날도 흐린 날만의 낭만이 있고, 여유가 있고, 분위기가 있다지만. 난 여전히 태양이 필요해요. 어서 빨리 와요. 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석진은 태형을 기다리며 조용한 공간에서, 조용히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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