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POLAROID







“혹여나 걔한테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형.”

“왜, 새꺄.”

“걔 그렇게 생겼어도 성격 아주 씨발임.”


남자 고교생 두 명이 학원가를 지나치며 바삐 중얼거렸다. 일과처럼 들르는 PC방으로 가기도 전이었다. 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화장실도 거르고 튀어나왔다. 급히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걸음이 아주 재발랐다. 형이라는 놈이 재차 물었다.


“그냥 번호 달라고 하는 것도 안 돼?”

“낌새만 보여도 그때부터 안 뚫어줄걸요.”


안 된다고 떠드는 놈은 확고했다. 괜히 객기 부려서 일 거스르지 말라는 듯. 소문 자자하고 정평 났고 답 나왔다고, 절대 안 된다고만 못 박았다. 형은 실망할 틈도 없었다. 목적지의 간판이 보이자 후배라는 놈이 풀쩍풀쩍 뛰기 시작했으므로.

일곱 걸음, 다섯 걸음, 문까지 한 걸음. 곧 홱 열어젖혀지는 유리문. 딸랑. 경쾌한 종소리. 후배가 들어선 곳은 동네에 서너 개씩 있는 프랜차이즈 편의점이었다. 둘은 긴장하지 않은 척 당당하게 매장 안으로 섰고. 그리고 거기서 그 둘이 마주친 건.


“어, 우리 예약한 13번인데. 연락받았지?”

“……”


무표정으로 선 계산대의 김민정이었다.






/

민정은 펼쳐놓았던 문제집을 잠시 덮어두고 기계처럼 중얼거렸다.


“48,000원.”

“어, 어.”


민정은 계산대 컴퓨터로 보이는 CCTV가 멈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남고생은 오만 원짜리 지폐를 펄럭 펼쳐 민정에게 건넸다. 민정은 돈을 받아 빠르게 주머니로 넣고 거스름돈 이천 원과 함께 담배 여섯 갑을 건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쭈뼛거리던 두 녀석이 금세 신이 난 얼굴로 담배를 받아들고 매장 밖으로 사라졌다. 민정이 무심한 얼굴로 다시 문제집을 펼친다.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 금요일 6시 15분. 매장의 CCTV가 지난 데이터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멈춘다. 15분의 데이터 정리가 끝나면 깔끔하고 쾌적해진 상태로 다시 매장 녹화가 시작된다. 최소 보름은 녹화 파일을 가지고 있어야 맞지만, 자린고비에 아프고 나이 들어 모든 것에 게을러진 점장은 고물 컴퓨터도 녹화 시스템도 바꾸기 싫어했다. 본사에서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직원도 혀를 내두르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큰 사고만 당하지 말라고. 그래서 민정은 그 15분 동안 일대 고등학생들에게 담배를 팔았다. 한 갑에 4,500원 하는 것이 민정에게 사면 8,000원. 시세는 누구에게나 같았으나 때때로 변했으며 가격에 토를 다는 이와는 다시는 거래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민정만큼 확실하고 꾸준하게 담배를 공급하는 간 큰 고딩은 없었으므로 예약은 늘 풀. 모두가 순서를 못 받아 안달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지잉, 지잉, 지잉. 철 지난 민정의 스마트폰으로 예약 문자가 연신 도착한다.


“……”


문제집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할 만큼 밀려오는 문의.


“……”


한참이나 말없이 액정을 바라만 보던 민정이 문득 뇌까렸다. 나직하게.


“좆같아……”


김민정은 늘 좆같았다. 예약이 홍수처럼 밀려온대도 자신에게 지워진 가난의 기한은 굳건했으므로.








/

흑사 고등학교, 교실.


“아우, 얘는 진짜 예약 문자 드럽게 늦게 읽어.”


지민이 제 책상에서 손거울을 보는 동안이었다. 지민의 단짝이 휴대폰에 대고 틱틱거렸다. 지민은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거울 속 제 속눈썹과 눈매 끝에 집중하며 물었다. 왜, 뭔데. 연신 새 문자를 작성해 전송하던 단짝은 마치 묻길 기다렸다는 듯 부루퉁한 입술로 구시렁거렸다.


“아, 왜. 청솔 앞에 편의점 있잖아. GS.”

“그게 뭐.”

“거기. 아, 왜 있잖아. 블랙 마켓……”


그냥 담배 뚫어주는 데라고 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교실 주변 친구들에게 걸릴세라 블랙 마켓 어쩌고를 떠든다. 지민은 알아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또 원규 사다 주게?”

“어. 이 새끼 뭘 사다 줘도 그것보다 좋아하는 걸 못 봤어. 명품 사줘도 팔아서 담배 살 새끼야.”


지민의 단짝은 담배 냄새라면 질색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비흡연자였으나 한 살 연하 남자친구가 지독한 꼴초라 종종 담배를 사다 바쳤다. 사실 지민은 저것보다 한심한 짓은 없을 거라고 늘 생각했지만, 친구에게 싫은 소리 하는 성격은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뭐든 오래 못 가는 애니 곧 헤어지지 않을까. 아마 졸업하기 전에 헤어지겠지. 지민은 손거울을 책상 위로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펴 앉으며 말했다.


“꼭 예약을 해서 가야 돼? 그냥 가서 사면 안 되고?”

“야, 존나 철저해. 그딴 거 없어. 어지간한 샵보다 철저한 예약제야.”


일대 흡연자 고교생을 꽉 붙들고 있는 학원가 블랙 마켓 딜러 이야기라면 예전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몇 번 들은 적 있다. 1년 전쯤부터 혜성처럼 나타나서 서서히 입소문 돌기 시작한 앤데, 남자애도 아니고 예쁘장한 여자애라고. 그래서 좀 의아했던 기억이 지민에게도 남아 있었다. 단짝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줄줄 털었다.


“걔 원래 집이 존나 부자라던데. 왜 거기서 그런 거 하는지 몰라.”

“부자래?”

“억 소리 나게 부자래. 집이 어마어마하다던데. 근데 뭐 소문일지도 모르고.”

“야, 4,500원짜리 8,000원에 팔아서 3,500원 남긴다며. 그런 짓 하는 애가 뭐 부자야.”

“근데 존나 잘 팔려. 용돈벌이하나?”

“부자면 용돈벌이를 왜 자기가 해.”

“아, 몰라. 걔 우리 학교 2학년이라는데, 한 번 물어물어 찾아가 볼까?”


우리 학교? 우리 학교면 좀 사는 애들이 많이 다니는 사립 고교가 아니던가. 지민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았다. 모르는 담배 팔이 소녀와 단짝의 한심한 짓에 별 큰 관심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보충 수업 얼른 끝마치고 학교에서 나가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거 언제 살 수 있는데. 원규 생일파티 내일이라며.”

“아, 그니까. 좆됐어. 오늘 딱 파는 날인데……”

“너 징징대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빨리 오늘 끝내. 같이 가 줄게.”

“진짜지?! 아싸.”


단짝은 신이 난 얼굴로 가방을 챙겼다. 지민은 귀찮아도 하루만 참기로 했다. 2주 후면 고3 첫 모의고사가 다가오고, 그전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시간은 내일 파티뿐이었다. 파티 열기 좋아하는 단짝이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 파티. 최대한 잡음 없이 놀고 싶었다. 친구의 징징대는 소리도 없이, 그냥 온전히 파티만.







/

유지민은 결핍을 몰랐다.

단짝 친구가 남자친구에게 매달려 간이고 쓸개고 내어주는 것도 영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안달복달일까? 뭐가 그렇게 간절할까 싶었다. 지민은 어려서부터 가지고자 하면 늘 가졌고 가지면 그런대로 만족했다. 공부도 취미도 연애도 하면 하는 대로 상위의 목푯값이 나왔다. ‘이만큼 하고 싶은데 되지가 않아.’ 같은 게 애초에 별로 없었다. 못 하는 것은 숫제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서 상관없었고, 하고 싶은 것은 늘 잘 해냈다. 모든 일에 갈망이 없다. 그런 단어는 국어 시간에 문제 풀이할 때나 어렴풋이 이해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지민의 목표는 항상 릴렉스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지치지 않고 힘들지 않고 즐거운 것. 그것 말고는 기대되는 것이 별로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건 뭐야?”

“이거? 폴라로이드. 너네 파티할 때 몇 개 찍게.”


지민의 집, 핑크색 폴라로이드를 챙기는 지민에게 단짝 효진이 물었다. 둘은 블랙 마켓에 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지민의 집에 들렀다.


“존나 귀엽네. 어디서 샀어?”

“몰라, 기억 안 나. 전에 유럽 여행 가서 샀나 그랬던 거 같은데.”

“생파 내일인데 지금 그건 왜 챙겨.”

“오늘 나가는 김에 필름 좀 사고 찍어보게. 이거 꺼내 본 지 오래돼서.”

“아싸! 나 그럼 화장하고 갈래!”


효진이 호들갑을 떨며 지민의 화장대 앞으로 붙었다. 지민은 필름 없는 카메라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냥 쓸만한 카메라. 두어 번 찍어본 것 같은데 괜찮았던 기억이 있다. 누구와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지민은 흐릿한 기억과 함께 카메라를 가방에 처박으며 물었다.


“근데 그 담배 사는 거 시간 정해져 있다며. 15분 안에 사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시간외거래가 또 있으셔. 근데 그건 웃돈이 더 붙어. 갑당 만이천 원.”

“씨발, 무슨, 완전 날강도네.”

“그래도 펑크 안 나고 물량 부족 없고 확실하니까……”


지민은 만나보지도 않은 그 담배 팔이 소녀의 모습을 슬쩍 그려봤다. 어두운 골목,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음침한 여자애. 으. 금세 몸서리를 쳤다.








/

까만 밤거리, 낡은 다세대 주택 앞. 


― 정말 집에 안 들어올 거니? 너 그렇게 나간 지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아빤 민정이가 걱정돼서 밤마다 잠을 못 잔다. 아빠랑 같이 사는 게 정 싫으면 좋은 방을 구해줄게. 생활비를 줄게. 그것도 안 되겠니? 정말 걱정돼서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 있겠니…… 아빠가 잘못했다. 아빠가 미안해. 민정아, 꼭 답 줬으면 좋겠구나.


찬바람이 민정의 코끝을 훑었다. 집에서 거래할 담배를 챙겨 나온 민정은 표정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로 찔러넣었다. 보름에 한 번씩 이런 문자가 온다. 전화도 때때로 온다. 절대 받지 않지만.

밤에 귀가하거나 집을 나설 때는 민정의 아빠가 붙인 직원인 듯한 사람도 뒤를 쫓는다. 이 주택촌을 오가는 으슥한 길에 이상한 놈은 없나 살피는 게 목표겠지. 그러나 그 자체가 민정에게 공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을 것이다. 민정은 아빠의 그런 점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눈에 보이는 걱정을 앞세우느라 간과하는 모든 사소하고 섬세한 것들. 그 틈새에서 민정이 느끼는 공허, 상처, 결핍,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부재의 감각들이.

민정이 상념으로 멍하니 하얀 한숨을 허공에 날리고 있을 때였다. 민정의 어깨 뒤로 창문이 드르륵 요란하게 열렸다. 철창살 사이로 삐죽 보이는 부스스한 얼굴 하나.


“언제 들어올 건데?”

“금방 와.”

“올 때 라면 좀 사 와라.”

“너 먹을 건 알아서 좀 사놓으라고.”

“아잉, 민정 씨. 제발 사다 주세용.”


민정은 대답 없이 뒤돌았다. 민정의 룸메이트 기석은 방긋 웃으며 또 요란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알겠다는 뜻인 줄 벌써 다 알았다는 듯. 민정은 바람막이로 손을 콕 처박으며 경사진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택촌에서 역까지는 5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오늘 거래는 역 앞 고장 난 분수대 뒤에서 한다.

기석과는 유치원 때 알게 되었다. 잘나가는 기업가 집안 조찬 모임에서. 기석의 부모와 민정의 부모는 거대 협력업체로써 잘 지내야 했고, 그래서 기석과 민정도 자연히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게 되었다. 둘은 초등학교에도 함께 들어갔고 그 후 중학교도 같은 곳으로 갔지만, 같은 고등학교까지는 가지 못했다. 기석이 집에서 쫓기듯 나와 학교까지 자퇴한 탓이다. 기석은 귀한 집 외동아들로 대를 이어 기업을 경영해야 했다. 그는 똑똑하고 단정하며 싹싹했고 교양과 예의, 지식을 두루 갖춰 기업의 황태자 역할을 하기에 모자란 곳 없이 출중했다.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기석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기석은 뭐가 뭔지 모르는 영유아 시절, 놀이터에서 놀 때도 여자애들보다 남자애들이 좋았다. 기석에겐 단순한 문제였지만 기석의 부모에겐 집안이 풍비박산 날 대형 문제였다. 끝까지 들키지 않았다면 집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똑똑하고 단정하고 곧은 성정의 백기석은 제 인생을 정정당당하게 꾸릴 줄 알았다. 기석은 16세에 집을 나왔다. 노발대발하며 정신병원에 저를 처박으려는 부모와 연을 끊었다. 그런 기석의 행보가 민정에게도 도화선이 되었다.

민정의 엄마는 민정이 14세 때 외국 지사로 일을 보러 떠났다. 최소 6년이 걸리는 출장이었다. 아빠는 한국의 기업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 남았고, 민정은 아빠와 살아야 했다. 아무 불만 없었다. 민정은 늘 엄마보다 아빠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엄마와 함께 떠나는 조기 유학도 거절하고 한국에 남았으니까.

그런데 민정의 아빠가 변했다. 가족의 추억이 가득한 저택에 다른 여자를 들이기 시작했다. 민정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어린 민정이 알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마음 약한 민정은 그 환경에 상처받은 제 마음보다 다칠 엄마의 마음이 걱정돼 그 참담한 비밀을 혼자만 알고 앓았다. 울면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마다 다짐했다. 엄마에겐 비밀로 남기자. 그런데 엄마는 민정이 스무 살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더는 그 집에 살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모든 것이 싫었다.

그래서 작년 겨울 기석에게 연락했다. 먼저 길을 터 준 선배에게 도움받는 격으로. 기석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주택촌 조그만 투룸에 살았고, 민정에게 기탄없이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원체 서글서글하고 통이 큰 기석은 심심했는데 잘됐다고만 했다. 처음 기석의 집에 도착했을 때, 김민정이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던 것은 전혀 모른 채.


“2년도 안 남았어. 이 짓거리도 2년만……”


민정은 찬바람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걸으며 중얼거렸다. 2년 후에 엄마만 돌아오면 돼. 엄마만 돌아오면, 엄마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살면 돼. 민정이 틈날 때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혼잣말이다. 대로변으로 나가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촌 거리를 걷다 뻥 뚫린 하늘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으므로.


“춥다. 별도 많고.”


민정은 집을 나온 이후로 말을 잘 안 하는 편이었지만 혼자 있을 때면 종종 예전처럼 굴었다. 이렇게 별이 밝은 날이면 하늘을 보고 배시시 웃기도 했다. 모든 게 괜찮아질 스무 살을 생각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그리고 행복하게 웃었던 사진 속 제 얼굴을 떠올리며.








/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11시.”

“아, 뭔 마약 거래냐. 왜 이렇게 늦게 해.”

“얘가 시간이 그렇게밖에 안 된대.”

“진짜 담배 한 번 사기 존나 힘드네. 난 평생 안 피운다.”


지민이 팔짱을 끼고 뜨끈한 숨을 연신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열한 시까진 십 분이 남았다. 친구 효진은 와중에도 남자친구와 카톡하느라 정신없었다. 할 일 없는 지민만 어깨를 웅크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고장 난 분수대 뒤가 거래 장소라니. 암거래답게 장소도 음침한 곳으로 골랐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 분수대가 고장 나지 않았을 때가 떠올랐다. 제대로 작동했을 때는 이 분수에서도 멋진 조명과 노래가 나왔었는데. 멍하니 분수대를 올려다보던 지민이 부스럭 가방을 만졌다. 그리고는 챙겨온 핑크 폴라로이드를 꺼냈다.


“야, 사진 한 방 찍어볼래?”

“뭐 이런 데서 찍재? 존나 어둡구만.”


여전히 남자친구와 이모티콘 날리기 바쁜 효진은 별 관심 없어 보였다. 그럼 혼자라도 찍어야지. 지민이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돌렸다. 효진 말대로 이곳은 매우 어두웠다. 그럼 여기 말고. 지민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좀 더 밝은 곳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세 걸음, 다섯 걸음. 일곱 걸음.


“……”

“……”


새까만 바람막이, 새까만 레깅스와 볼캡. 온통 새까만 것들을 뒤집어쓴 누군가. 그가 고개를 들자 뽀얗게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중얼거렸다.


“레종 프렌치 블랙 한 보루. 맞죠.”


지민이 폴라로이드를 들고 멍하니 앞에 선 김민정을 봤을 때였다. 즈, 즈즈. 희미한 전기음과 함께 팟, 빛이 터졌다. 고장 난 줄로만 알았던 분수대가 형형색색 빛을 내고, 온통 암흑이었던 민정에게 환한 빛이 떨어졌다.


“……”

“……”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민은 홀린 듯 찰칵, 제 앞에 선 민정을 찍었다.


“뭐야……”


민정은 작은 목소리로 당황했고,


“미안, 나도 모르게……”


지민은 몽롱한 얼굴로 넋을 놓았다. 둘은 그제야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잠들었던 핑크 폴라로이드의 첫 장이 천천히 인쇄되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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