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복 재 생




본디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김여주는 지금 이동혁이 멋대로 입술을 들이민게 정녕 실수 인지, 고의 인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제대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맞닿은 부분이 하도 뜨거워서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못 됐다. 김여주에 의해 밀쳐진 이동혁은 잘만 잤다. 몸을 축 늘어뜨린채 아무 것도 모르고 자는 모습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방금 일어났던 일을 다음 날 기억할까? 원래 알코올을 마시면 필름이 끊긴다고들 하는데 김여주는 이걸 이동혁이 기억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기억하면 어쩔건데, 어색해질 건 뻔하고 그러면 나재민이나 이제노가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비밀이란건 바로 이런게 아닐까. 김여주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신호음은 금방 끊겼다.



- “여보세요.”



이제노와 나재민 둘 중 그나마 이동혁과 가까운 나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던 중이었는지 목소리가 한껏 잠겨있었다. 괜히 미안했다. 



“어… 자고 있었어? 미안.”

-“아냐…. 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불을 걷히는 소리인 듯. 진짜 자고 있었나봐. 정말 잠을 깨운 것 같아서 이동혁을 업어가라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고, 손톱만 튕겼다. 어…음…. 시원하게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자 나재민은 조금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뭔일인데.



“이동혁 좀 데려가라고…”

-“이동혁? 걔 지금 집 아냐?”



그렇지, 원래라면 집에 있어야할 이동혁인데 왜 우리 집 앞 놀이터에서 잠을 처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입 밖으로 나올 뻔한 험한 욕을 꾸역 꾸역 집어넣고 대충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이동혁의 입술 박치기는 빼고. 



-“하…그 새끼가 진짜…. 기다려. 지금 가.”



자고 있던 잠을 깨워서 인지, 아니면 이 시간에 이동혁을 데리러 와야한다는 것 때문인지, 그냥 둘 다인지. 나재민은 제법 험한 말을 하며 짜증을 냈다. 나재민은 다정한 면모 보다도 더욱 보기 어려운게 화를 내는 모습인데, 어지간히 짜증이 났나 보다 싶었다. 전화를 끊고 앞의 이동혁을 내려다봤다.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냐는게 방금 전의 상황을 대비한 빅 픽쳐였다니.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내일 이동혁의 필름이 끊기지 않는다면 사과를 할까?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을 할까. 뭐가 됐든 앞으로 이동혁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에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긴 하지만. 학교에서 평소처럼 대해야 할텐데, 삼총사 중에서도 눈치 빠른 나재민이 김여주가 이동혁 앞에서 삐걱 대는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 생각하긴, 전 날 둘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기억 못했던 이동혁도 기억을 더듬 더듬 끄집어 내 기어코 떠올릴 지도 몰랐다. 이러나 저러나 골머리를 앓게 됐다. 이동혁과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김여주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할 수 밖에 없는방법은 하나였다. 

그저 평소 같이 이동혁을 대하는 것.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심각한 낯의 김여주 눈에 저 멀리서 대충 후드티를 입은 나재민이 들어왔다. 나재민은 벤치에 꼴아 자고 있는 이동혁과 그 옆 벤치의 김여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가 빨리.”

“너 혼자 들 수 있어?”

“택시 타고 왔어, 그냥 끌고 갈거야.”



들고 가는 게 아니라 끌고 갈거라던 나재민은 이동혁의 팔을 제 어깨에 두고 정말 말 대로 ‘끌고’ 갔다. 가뜩이나 축축 늘어지는 몸에 나재민이 틈틈이 한숨을 쉬었고 택시 앞까지만이라도 도와주려 이동혁의 반대 팔을 잡았다가 키가 크고 제법 덩치가 생긴 이동혁의 몸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됐어, 내가 할게. 나재민은 끙끙거리던 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그래도 택시 타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괜히 자신 때문에(이동혁 때문에) 고생하는게 아닌가 싶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자 별안간 나재민은 이동혁을 들쳐 맨 몸을 틀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가도 돼.”

“…미안하잖아.”

“네가 왜.”

“너 자는데 깨워서.”

“..안 잤어.”



금방이라도 까치가 와서 집 지을 것 같은 머리를 하고서는 나재민은 자지 않았다 변명했다. 아 그래? 알지만 눈 감아주었다. 정말 말처럼 질질 끌고가는 나재민이나, 질찔 끌려가면서도 깨지 않는 이동혁이나 새삼 대단하다 생각했다. 놀이터 입구에는 나재민이 여기까지 타고 온 택시가 놀이터 앞에 서 있었고 택시 기사 아저씨한테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를 하더니만 뒷자석에 이동혁을 그대로 밀어(쑤셔) 넣었다.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 잠시만요. 힘이 들긴 한 모양인지 숨을 고르던 나재민은 택시를 타지 않고 뒷 좌석 문을 닫고 그 뒤로 기대 김여주를 마주봤다. 



“안 타?”

“탈거야.”

“타, 빨리. 너네 가면 들어갈게. 어차피 바로 앞이잖아.”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또 사람을 꿰뚫어 볼 듯한 눈이 심장을 관통한다. 예전에는 무슨 할 말이 있냐며 계속 마주 봤을 텐데 어째서 인지 이동혁과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 그런가, 도통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재민이 알아차릴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아 왜.”



부러 눈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나재민은 지긋이 김여주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똑같이 시선을 돌렸다.

똑 같은 출발선에 선 줄 알았다. 똑같이 총소리를 듣고 달릴 줄 알았다. 고작해야 얼마되지 않을 것 같은 거리는 마라톤이었고 길고 긴 시간을 감내하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순간이 찾아와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어 주저 앉다가도, 이상하게 뒤에 있던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갔다. 도대체 어느 틈에? 분명 뒤를 돌아봤을 때는 없었는데. 

나재민은 조금 억울했다.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고 다가가게 만들면서, 김여주란 피니시 라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앞질러 가는 놈들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 있다 나온 것이냐고. 



“내가 전에 말했잖아.”

“…뭐를.”

“누가 더 잘 아는지 모르는지 따지지 말라고.”



열 다섯, 수학 여행 선선한 바람이 나부끼고 귀뚜라미의 합창 속에서 나재민은 김여주에게 그리 말했다. 우리 셋 중에 너에 대해 모르는 사람 없어. 누가 더 아냐 모르냐 따지는 건 무의미해. 그 날 기억을 상기시킨 김여주는 손을 들어 심장 주변을 긁고 싶었다. 또 저 소리 하네. 아 그랬지. 아무 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따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자꾸.”

“내가 더 잘 알아야겠어.”

“………………….”

“그러니까 이동혁이 무슨 말 했는지 말해줘.”



오만에 가까운 확신. 삼총사 사이에서 김여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워낙에나 넷이서 함께 자주 놀았기 때문에 삼총사가 아는 건 김여주가, 김여주가 아는 건 삼총사가 안다. 나재민 말이 맞았다. 삼총사와 김여주 사이에서 누가 더 잘 아느냐 모르느냐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네가 아는건 나도 알고, 나도 아는 건 네가 아니까. 

그럼에도 길고 긴 마라톤에서 놈들이 자신을 앞질러 갈 수 있었던 이유.



“이따 전화할게.”



‘자각’ 이라는 쉼터에 잠시 들렀다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여주는 그 날 나재민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빠동생들




본디 시험이 끝나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기말 전에 6월 모의고사가 코앞에 있지만 중간고사를 끝낸 삼총사와 김여주는 나름의 자유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이동혁은 다음 날, 학교에서 김여주 옆에 붙어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백번 아니, 오 백번 정도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눈과 입을 시옷자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하도 괘씸해서 무시했더니만 김여주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으로 이해한 이동혁은 그 날 하루 종일 껌딱지 처럼 김여주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가?”

“아 화장실!”



오죽하면 화장실까지도 따라올 기세였다. 대충 점심 먹을 때쯤 사과 받아줄 테니까 그쯤 해두라 일러주려 했건만. 하필 이동혁은 축구 반 대항 전 선수로서 점심을 일찍 먹게 되었다. 김여주 나 응원해야돼!! 당연한 일인데도 이동혁은 운동장으로 나가면서 외쳤다.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이동혁. 축구를 좋아하진 않지만 잘하는 나재민. 이번 대항전에 나재민은 자의로 후보 선수가 됐다. 당연히 이동혁과 같이 운동장을 누벼야할 실력이었지만 나가기 귀찮다는 나재민의 완강한 주장이 컸다. 후보 선수 1로서 운동장 벤치에 뚱 하니 앉아 있는 나재민이 보였다. 원래라면 이제노와 같이 경기를 봐야했지만 학급 회장이 된 이제노는 이만 저만 바쁜게 아니었다. 



“너까지 미안하다고 하지마. 노이로제 걸릴거 같아.”



풀이 죽어서는 금방이라도 이동혁처럼 미안하다고 할 거 같아서 먼저 입을 막았다. 얼른 가보라며 손을 젓는 김여주 옆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이제노가 고개와 몸을 반쯤 기울어 더욱 다가왔다.



“야자 끝나고 떡볶이 먹을까?”



보통 이제 고등학생이라면 야간 자율 학습을 하게 되는데, 필수는 아니고 각자 자유로 신청해서 진행 되는 야자에 당연하게도 이제노는 야자를 했다. 과외는 어쩌고. 이제노의 야자 소식을 듣고 김여주는 과외는 어쩌냐 물었을 때 이제노는 간단히 답을 내놓았다. 그만 뒀어. 원래 혼자서도 무엇이든 잘했고, 잘하고, 잘 할 이제노라 딱히 걱정은 안됐다. 걱정은 제 머리가 걱정이었다. 중학교 때 처럼 이제노 발목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학원을 다시 다닐까 싶었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럼 스스로 자율적으로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또 걱정이었지만 김여주는 자기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학원도, 과외도 안하는 몸 학교에 묻으리라. 야자 신청 접수 마지막 날, 이제노를 따라 야자를 신청한 김여주를 보고 이동혁과 나재민이 야자가 뭔 줄 알고 하는거지? 라며 놀렸더랬다. 

야자 3교시(21시) 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탓에 저녁을 먹어야하는 이제노와 김여주였고, 지금 이제노는 김여주를 두고 홀로 가는 게 마음에 걸려 떡볶이를 사주겠다 한다. 김여주가 애도 아니고 교실에만 있을 김여주를 물가에 내놓은 애 마냥 걱정하는 이제노를 가만히 보던 김여주가 낮게 이제노의 이름을 불렀다.



“제노야.”

“응. 어때? 좋은 생각이지.”

“계속 안 가면 배라까지 얻어먹는다.”

“좋아. 그럼 6시에 학교 앞에서,”

“야.”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하도 안 가길래 턱에 힘을 주어 낮게 소리를 내니 이제노가 입을 앙 다물었다. 그리고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바로 간다며 뒷문을 통해 나갔고, 나가기 전 최대한 빨리 오겠다는 이제노였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겨우 떠난 이제노를 보며 텅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주르륵 책상에 상체를 맡겼다. 운동장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아득하니 들려왔다. 

혼자가 된 김여주는 교실 창문으로나마 경기를 슬쩍 관람했다. 그런데 혼자 보니 재미도 없고. 대략 10분 정도 멍하니 경기를 봤을까 결국, 축알못 김여주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매점으로 향했다. 땀나게 뛸 이동혁이나 땡볕 아래 있을 나재민, 그리고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시달릴 이제노를 위해 대충 물을 사러 왔다. 얼음으로 가득한 아이스 박스에 담궈진 생수 세개를 꺼냈다. 손등 아래로 물줄기가 타고 흘렀다. 양 손에 500ml 생수 세 개가 꽉 찼다. 계산을 하던 도중 운동장에서부터 어수선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마치 누군가 부상을 당한 것 마냥. 설마 하는 마음에 거스른 동전을 아무렇게나 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생수들을 한아름 집어들었다.



“아 씨발.”



선명한 비속어가 귓가를 찔렀다. 다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그만 반대편에서 들어오고 있던 사람과 부딪힌 김여주의 손에서 데구르르 생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뒹구는 생수들을 줍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너 여기 학교 다녀?”

“……아.”



물기를 흠뻑 묻은 생수 표면에는 더러운 이물질들이 가득했다. 한번 씻어야겠네. 정확히 삼다수 두 개를 주울 때였다. 눈 앞에 떡하니 있던 삼선 슬리퍼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뜻밖의 알은 체에 고개를 들어 충돌의 주인을 바라봤다. 얼핏 보인 명찰 색이 한 학년 높다는 것을 알려줬고, 익숙하지만 어째 더 진해진 화장이 말해주었다. 같은 중학교를 나왔으며, 한 살 더 많고, 이제노와 썸을 탄다던. 수학 여행 때 이제노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 3학년. 이렇게 세상이 좁았나 새삼 느껴졌다. 아는 얼굴에 어정쩡하니 무릎을 폈다. 굽어진 허리를 점점 곧게 피기 시작했다.



“제노도 여기 학교야?”

“……네.”

“같은 반?”



묘하게 말이 짧다. 누구냐며 양쪽의 제 친구들 물음에 대답은 안하고 김여주를 아니꼽게 팔짱을 낀 채 바라본다. 별로 대답해주기 싫은데. 그냥 모른 체하고 갈 걸 그랬나. 같은 반이냐는 질문에 괜스레 대답을 미뤘다. 반을 알려주지 않아도, 어쩐지 반 하나 하나씩 살펴보며 이제노를 찾아낼 것만 같았다. 이제노와 당시 썸을 타진 않는다고 했지만 이제노도 그때 당시에는 제노야 하며 부르는 것도, 다 받아 줬던거 같은데. 또 이제노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딱히 이제노의 여자친구로서는 영 못 미덥지만 이제노가 좋다니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같은 반이냐는 질문에 대해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 왜 내 연락 안 받는대?”

“……………….”

“톡 보내도 안 읽씹하고, 제노 페북 안 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사람 아니었나? 연락을 피한다는 이제노의 행실을 들으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영문을 모르는 듯한 얼굴의 김여주를 보더니 아 됐다, 너도 모르는 모양인데 제노 보면 내 연락 받으라고 전해. 그저 통보 하나를 전하더니만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치마는 딱 달라 붙고, 짧았다. 이제노가 저 연락을 피하는 거라면, 그때 이제노가 좋아한다는 사람은 누구지? 감이 잡힐락, 말락 잡히지 않았다. 손에 든 두개의 생수병에서부터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합이 끝나고, 경기를 직관한 학생들이 부채질을 하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아차, 싶어 가장 구석으로 굴러간 하나를 집어 먼지를 탈탈 털었다. 물 때문에 손에 달라붙은 이물질이 찝찝해 밖에 있는 음수대로 다가갔다. 대충 겉에 묻은 이물질만 씻어내고 들어가려 했는데 때마침 운동장 중앙 에서부터 경기를 치룬 각 반 애들이 땀에 절은 얼굴이나 바짝 마른 목을 물로 대충 해결하려 음수대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동혁과 나재민도 포함이었다. 이동혁은 입은 반팔을 펄럭였고 나재민도 후반 전은 뛴건지 대충 앞머리 끝이 젖어있었다. 그렇게 들어가기 싫다더니 결국 들어갔나보네. 가만히 둘이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김여주,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전날 밤, 전화를 받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다음날 아침 피곤해서 그냥 잤다는 카톡을 남겼는데 나재민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뭐야 김여주. 여기 왜 있어.”

“…이거.”



아까보단 덜 차갑지만 그래도 시원한 물을 하나씩 건너편 이동혁과 나재민에게 던졌다. 왜 여기 있냐는 이동혁은 센스 미쳤다며 벌컥 벌컥 들이켰고 나재민은 또한 답지 않게 쭉쭉 넘겼다. 남은 이제노에게 줄 물만 매만지다 방금까지의 혼란스러움이 다시 한번 애꿎은 궁금증과 함께 찾아왔다. 있잖아, 아까. 상세한 설명 보다 어물쩍하니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보려 음수대를 돌아 이동혁과 나재민 앞으로 다가갔다.



“………너 팔 왜이래?”

“아 영광의 상처랄까.”



이동혁의 팔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 전 어수선한 웅성거림의 주인이 이동혁이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상대 반 애 한명과 제법 강한 충돌이 있었던 듯 싶었고 이동혁의 팔에는 넘어져 쓸린 상처가 여실히 생겨났다. 보는 사람까지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상처. 이동혁은 영광의 상처라며 김여주가 건넸던 물을 원샷하고서 빈병을 옆 분리수거 함에 골인 시키더니 음수대 수도꼭지를 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에다가 그대로 상처를 가져다댔다. 



“아아악… 진짜 개쓰려…!”

“야 그냥 보건실 가라고.”



보는 사람까지 쓰라릴 만큼 이동혁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냥 빨리 보건실을 가라는 나재민. 그 말에 전적으로 김여주 또한 동의했다. 빨리 다녀오라며. 수도꼭지를 끄고 이동혁을 부추기니 이동혁은 혀를 차고는 손에 있던 카디건이나, 짐들을 나재민에게 건넸다. 내 자리에 좀 놔주고.



“가자 김여주.”

“나?”

“아 혼자 가면 심심하다구.”

“다음 미적분이거든? 물귀신 작전 쓰고 있어, 혼자 가.”



다음 5교시가 미적분 과목 수업인데 해당 과목 선생님이 유독 빡세고, 출결에 가장 예민했다. 자신보다 늦게 오면 가차 없이 1점. 피치 못할 상황을 제외하고는 가차 없이 수행 평가 감점시키는 선생님인터라 나재민은 물귀신 작전을 쓰고 있는다며 김여주 카디건을 잡아 끌었다.



“진짜? 나 혼자 가…?”



이동혁은 슈렉 고양이 마냥, 미련 가득한 전 남친 마냥 질척거렸다. 은근슬쩍 앞의 김여주에게 다친 제 팔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아, 나재민 너 먼저 가. 이거 이제노 주고.”



이동혁의 짐 위로 생수 하나가 추가됐다. 얼떨결의 짐꾼 행세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도 잠시, 차라리 김여주 말고 자신이 갈까 싶었다. 제 품에 있는 망할 이동혁의 짐만 아니었으면. 김여주가 들 수는 있겠지만 들고 계단을 오르기에는 버거울 무게였다. 빨리 와.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고 짐을 고쳐 든 나재민이 먼저 등을 보였다. 



“역시 김여주, 제일 의리파야.”

“까불지 말고 빨리 와.”



엄지를 치켜 올리며 아부를 떠는 이동혁 옆에 선 김여주가 일부러 걸음을 빨리 했다. 다음이 미적분 수업이라는 것도 한 몫 했고, 전날 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이동혁과 함께 단둘이 있기에는 마음 깊은 구석에서부터 낯간지러워 몸이 더웠다. 다행히도 보건실은 1층에 위치해 있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게 도착했고 보건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넘어진 애가 너지?”

“아 쌤 그건 비밀….”



1층의 보건실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었고, 보건 선생님은 이동혁의 팔을 치료해주며 넌지시 물었다. 저가 넘어진게 창피한지 이동혁은 비밀이라며 중얼거리며 옆에 있는 김여주의 눈치를 봤다. 아니 내 눈치는 왜 봐. 꼭 들키기 싫은 어린 아이 마냥 눈치를 보길래 김여주가 저항 없이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아…아… 쌤 조금만 살살…”

“엄살은.”



소독약을 바르면서 인상을 안 찌푸리던 순간이 없던 이동혁이었다. 이동혁이 미간을 찌푸리면, 김여주도 찌푸렸고 이동혁이 아픈 신음 소리를 내면, 김여주 입도 저절로 벌어졌다. 일심 동체가 된 듯한 이동혁과 김여주의 행동에 보건 선생님이 약을 바르고나서 끼고 있던 위생 장갑을 벗고 붕대를 감아주며 물었다.



“둘이 사겨?”

“…………………….”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보통의 애들이라면 맞다는 의미로 멎쩍게 웃거나, 아니라며 제가 얘랑요?! 라며 노발 대발 소리 칠텐데 아무 말이 없는 뜻밖의 상황에 보건 선생님은 속으로 좋을 때라며, 붕대를 마저 감았다.



“…그냥 친구예요, 친구. 베프.”



붕대를 다 감자마자 이동혁은 팔을 내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김여주와 자신의 관계는 그저 친구, 베스트 프렌드라며 선을 그었고 보건 선생님은 믿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상처에만 물 안닿게 조심하고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붕대 갈러 와. 다음이 미적분 시간이라고 하니, 보건 선생님은 이동혁과 김여주의 방문증 두개를 써주었고, 각자 손에 방문증 하나씩을 받고 보건실을 나왔다.



“넌 뭐라고 써주셨음?”



외상이 없는 김여주의 방문증 사유를 궁금해하던 이동혁이 김여주의 손에서 방문증을 빼갔다. 그러나 금세 다시 김여주의 손으로 돌아왔다. 



“생리통 처음 보나.”

“…그런 거 아니거든?”



괜히 헛기침을 내뱉던 이동혁 옆으로 김여주가 방문증을 치마 주머니에 넣고 먼저 걸음을 뗐다. 1학년 층은 5층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든, 헉헉 대며 계단을 빨리 오르든 반으로 빨리 돌아가야 해야했다. 계단을 재빠르게 오르는데 느릿하게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느긋해 보이는 이동혁이 답답해 계단을 오르다 말고 반쯤 몸을 틀었다.



“아 빨리 와.”

“김여주.”



재촉 한번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이동혁이 올곧게 김여주 이름만을 입에 담았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던 발이 우뚝 멈춰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저 제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묘하게 평소의 이동혁과는 이질감이 들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직감이 제게 외치고 있었다. 아 지금 이동혁의 입에서 나올 말이 가벼운게 아닐 거라고. 



“……왜?”



이동혁을 마주 보기가 어려워 몸은 반쯤 튼 상태 그대로였다. 수업 중인 학교는 조용했고, 1층은 더더욱 고요했다. 굳게 닫혀있던 이동혁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를 수십번 반복하다가 이내.



“…내가.”

“…………………….”



답지 않게 긴장한 듯한 어조. 평소 같지 않게 느릿한 속도. 



“너 책임져도 돼?”



이동혁은 전날 밤 일을 전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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