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데요. 진짜 괜찮은데요."


킁, 대답과 동시에 시목의 콧물 들이마시는 소리. 여진은 으이구 소리를 내며 티슈를 뽑아 시목의 코 밑에 들이댄다. 옥탑방에 들어서자마자 여진은 부랴부랴 창문을 열고, 공기청정기 파워를 최고로 올리는 분주함을 떨었고 그 사이 시목은 슬쩍 여진이 건네준 티슈로 코 밑을 훔쳤다.


"정말로 동물 털 알러지는 아닙니다. 환절기마다 오는 일시적인 계절성 비염이에요. 경험상 1-2일이면 가라앉고요. 적응 되면 충분히 여기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절성이든 뭐든 비염인데 고양이 털이 도움이 될리가 없다니까요."


검사님 관사에 있는게 나은 것 같은데. 거 봐, 들어 오자마자 재채기 바로 반응 하잖아. 그러나 여진의 타박과 걱정 그 경계에 선 말들은 시목의 왼쪽 귀로 들어가서 오른쪽 귀로 그대로 통과해 흘러 나올 뿐. 두 눈과 정신은 온통 여진의 가슴팍에, 정확히는 그 안에서 가르릉거리며 시목에게 하악질로 경계하는 작은 회색 털뭉치에 쏠려 있으니까.

여진이 말한 먼저 오신 손님. 그게 바로 저 주먹만한 새끼 고양이였다.


"얘는 또 왜 이렇게 검사님을 경계하지? 어구구 우리 애기. 누나가 하루 집 비워서 외로웠쪄용?"


인간된 도리로 차마 쬐끄만 고양이에게 맞서서 질투할 수는 없지. 시목은 애써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꾹 눌러 삼켰다. 여진의 품에 안겨서 쓰다듬는 손길에 의기양양해진 저 주먹만한 털뭉치가, 이제는 마치 시목더러 보라는 듯 엥웅거리며 더더욱 품으로 파고든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집사를 독차지한 걸 자랑하는 거 같은데. ...부럽다. 저렇게 마음대로 경감님한테 얼굴을 부벼댈 수 있다니. 부러워서 견딜 수 없다.


"가만 있어봐. 사료는 또 왜 남겼어. 진짜 어디 안 좋나? 새 물 줄 테니까 물부터 마시자."


여진은 품에서 고양이를 떼어 바닥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자리를 떴다. 크에오에엥! 여진이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앙큼한 가면을 벗어 던진 고양이가 제 집사를 공유하려는 불청객을 향해 꼬리와 털을 바짝 세우고 바락바락 화를 낸다. 아효. 그래도 경감님 집에서 머물려면 털뭉치랑도 잘 지내야 하니까. 시목은 각오를 다지고 고양이 쪽으로 슬슬 다가갔다.


"이름이 뭡니까?"

"걔요? ...스타크씨."


그, 며칠 전에는 토니씨도 있었거든. 여진이 다시 다가와 스타크씨를 안아 들며 멋쩍게 웃었다.


가끔 근처에 길냥이 임보 공지가 뜨면 자원봉사를 하곤 하는데, 지난주에는 두 마리가 동시에 여진의 집 근처에서 구조되어 둘 다 여진이 맡게 되었다. 토니씨는 금방 좋은 새 주인과 함께 떠났고, 스타크씨의 새로운 주인은 꼭 데려가고 싶은데 이번주는 사정이 안 돼서 힘들고 다음주에 데려가겠다고 해서 며칠 더 함게 지낼 예정이었다. 저번 주부터 특검 수사팀에 투입되느라 일정이 바빠져서 스타크씨를 혼자 두는 시간이 많아서 미안했는데, 어제는 외박까지 했으니 단단히 심통이 났는지 사료도 물도 일부러 남기고 시위를 하는 모양새. 길냥이지만 아직 새끼라서 그런가 유난히 여진을 잘 따르는 스타크씨가 안쓰럽고 정이 간다. 근데 이제 이 집에 시목까지 같이 지내게 되면 스타크씨 눈치도 봐야하고, 환자인듯 아닌듯 요상스러운 상태의 시목도 챙겨야 하고. 중간에서 등 좀 터지겠는데? 왠지 머리가 지끈거려 여진의 손이 저절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니까 검사님. 그러니까 회복 빨리 하시려면 관사가 더 나을 수도-"

"저는 이 방 쓰면 됩니까."


그냥 여기 쓰겠습니다. 쫓겨날까봐 후다닥 제 짐을 들어 남는 방에 밀어 넣는 검사. 허, 재빠르다 정말. 이쯤 되니 여진도 설득시키기를 체념했다.


"스타크씨랑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경감님, 그러니까 저 그냥 여기서 경감님이랑 함께 지내게 해주세요."


코 끝으로 사료를 톡톡 건드리는 고양이를 향해 조심 조심 다가가는 시목. 그의 손에 비장하게 들린 고양이 낚싯대 끝에 매달린 깃털이 파르르 떨렸다. 나머지 손에는 휴지를 꼭 붙잡고. 

푸하, 여진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크씨. 누나 회사 갔다올게용. 검사님 말 잘 듣고 있어."


뒷덜미에 여진의 턱 끝 부비부비 세례를 받는 스타크씨가 눈을 슬쩍 감고 갸르릉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렇게 보면 세상 순한 냥이가 따로 없다니까. 궁둥이를 툭툭 두드리는 여진의 손바닥 리듬이 가벼웠다. 저거 다 가식입니다 경감님. 어제 스타크씨의 실체를 목격한 시목은 뭐라 말도 못하고 괜히 아랫턱을 부루퉁 눌러버렸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계장님이 자주 하던 농담이 떠올랐다. ...이미 진 것 같다.


"진짜 괜찮겠어요?"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밥도 꼭 챙겨먹고. 물은 많이 많이 마셔요. 그래야 약 성분이 빨리 몸에서 빠져나가지."

"알겠습니다."


스니커즈를 발에 꿰며 콩콩 신발 끝을 찍는 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목은 결국 한 마디를 덧붙여버렸다.


"근데 저한테는 말로만 인사 해주십니까? 스타크씨처럼 저한테도..."

"스읍."

"아. 죄송합니다."

"어유, 이 양반. 환자니까 내가 참는다."


원래 저렇게 검사님이 엉큼했던가? 약기운이 펼쳐내는 미드 스타일의 서스럼없는 애정 갈구에 여전히 적응이 덜 된 여진은 붕붕 허공에 주먹을 들어보이다가 후다닥 사라졌다. 

띠릭, 도어락 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정적.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한껏 경계하는 고양이와 단 둘이서 10시간 정도를 보내야 하다니. 아효.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오는 한숨이 낯설지도 않다.

스타크씨는 힐끗 시목을 쳐다보더니 스윽 몸통부터 꼬리까지 시목의 발목을 부벼대며 지나쳐 햇살이 잘 드는 창가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남색 면바지 끝단은 스타크씨의 회색 털들이 덕지덕지 보기 싫게 흔적이 남아버렸다. 설마 일부러 그런거냐?


"삐에오옹."


뭐라고 대꾸를 하긴 하는데. 고양이는 야옹 이라고만 우는게 아니었다. 돌돌 몸을 말면서 눈을 감는 스타크씨를 보며 시목도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골무 낀 엄지손가락이 쉴 새 없이 서류를 훑어 넘긴다. 여진이 내 준 숙제, 2L 짜리 생수병 두 통 중 한 통의 절반이 비었다. 뻐근해진 목을 이리 저리 돌려보는데 어느새 스타크씨가 회색 꼬리를 붕붕 흔들며 사뿐 사뿐 바닥을 걷고 있었다. 우에이옹. 놀아달라는 뜻인가? 왼손으로 고무생쥐가 달린 낚싯대를 성의 없이 흔들어 보았다. ...본 척도 안 하고 물만 한 모금 홀짝이더니 스크래처나 벅벅 긁는다. 머쓱해진 고무생쥐를 내려놓고 다시 특검팀에게 쓰던 이메일로 정신을 집중한다. 아무리 강원철 검사장이 버럭버럭 날뛰었다지만 특검은 1분, 1시간을 흘려 보낼 수 없다. 눈에 띄지 말랬으니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일을 하면 된다. 특검 주임검사가 1주일이나 병가를 낸 사상 초유의 사태를 기자들이 알게 하는 것은 원철도 원하지 않을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동 때문에 놓쳐버린 하루치 업무를 따라잡으려 붙잡고 앉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 종이 위로 여진의 푸스스 웃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아른 겹쳐 떠오른다. 떨치려고 고개를 휙휙 털어대면 평소에는 뛰는지도 몰랐던 제 심장박동이 빠른 박자로 펄펄 뛰어대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진정하자. 가라 앉히려고 물을 마시면 '물 많이!' 하며 머그컵을 건네던 하얗고 가느다란 여진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참 예뻤다 싶고. 가팔라지는 호흡조차 여진을 향한 생각에 지배당하는 것 같다. 가끔 조사실에서 지켜보던 마약 중독자들의 이상행동들을 이제야 이해 하겠다. 이렇게 후험적 방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또 휴대폰을 들었다. 어떤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전화해서 여진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누르면서 대신 채팅창을 켰다. 사라지지 않은 1 아래로 기어코 새로운 1들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경감님]

[아침에 커피는 드셨습니까]

[저는 지금 내리고 있습니다]

[스타크씨는 잘 지냅니다]

[사진]

[사진]

[경감님 점심은요]

[메뉴 정하셨습니까]


"후에옹."


어느새 식탁 위로 가볍게 올라 앉은 회색 털뭉치가 사라지지 않는 1을 같이 쳐다본다.


"물 좀 줄까."


스타크씨는 앞에 들이대는 머그잔을 홱 무시하고 아까부터 호시탐탐 노리던 목적지로 곧바로 향해갔다. 시목의 손이 떠난 뜨뜻한 노트북 자판 위에 자리 잡고 식빵을 굽기 시작한다.


"...스타크씨. 비켜."


하필 또 핑크젤리 앞발에 눌린게 ㅗ 자판. 순식간에 화면이 ㅗㅗㅗㅗㅗㅗㅗㅗ 로 가득 찼다. 이대로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참사가 없기를. 스읍, 여진이 하던 것처럼 겁을 줘도. 노려봐도. 꿈쩍 없는 회색 식빵. 어쩔 수 없이 조심조심 식빵 통째로 들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아야...!"


손등에 선명한 뻘건 줄만 몇 가닥 얻고 성과는 없다. 슥슥 아픈 손등을 문지르며 시계를 보는데 이제 겨우 점심시간. 여진의 퇴근은 7시간은 더 남았다.

경감님... 보고 싶습니다. 원래도 보고 싶었지만 유난히 더.






"다녀왔습니다아."

"이제 오십니까?!"

"우오에엥."


힘차게 열린 현관문을 들어선 여진과 먼저 눈이 마주친건 분명 시목인데, 품 안으로 와락 뛰어올라 부비적 거리면서 여진을 독차지 하는건 고양이였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이라고. 고양이 따위에게 질투를 하지 않아.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열을 겨우 눌러댔다. 오구, 스타크씨, 잘 놀았쪄? 앙증맞은 회색 고양이와 동글동글한 큰 눈꼬리를 한껏 휘어지게 웃으며 얼굴을 부벼대는 여진의 투샷은 아주 잘 어울린다. 팩트 기반의 객관적 평가에 기대어 평생을 살아온 시목이니 그건 인정할 수밖에.

하지만 저 작은 털뭉치가 경감님과 같이 발로 뛰어다니며 현장조사를 다닐 수 있나? 무언가 발견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걸 알면서도 기꺼이 한강에 바지를 걷고 함께 들어가줄 수 있을지? 술잔을 기울이며 흥얼이는 경감님의 콧노래를 들어줄까? 이따금씩 건네는 그림 조각들을 꼬박꼬박 모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냔 말이다.

분하다. 까득 소리 없이 입 안을 씹었다. 그냥, 그저, 나도 경감님 품에 한껏 매달려서 원없이 체향을 맡으며 얼굴을 부비고 싶다. 또 다시 벅차오르는 심장 박동은 이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해도 믿을 지경. 씨근덕대는 숨을 조절하느라 귀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하지만 이 모든걸 참아야한다. 약에 취했든 뭐든, 스스로를 컨트롤 못하는 저 때문에 경감님이 곤란해 하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검사 황시목'의 마지막 남은 인격을 겨우 붙잡으며 스타크씨가 할퀸 자국이 선명한 왼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추며 옆으로 물러섰다. 


"만두 사왔는데, 저녁 아직이죠? 검사님 근데 왜 이렇게 시무룩해. 일이 잘 안돼요?"

"아니요. 아닙니다. 만두는 좋습니다."

"음. 아까 낮에, 피의자 운전기사 했던 사람 만나고 온거요.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아, 그리고 이거 검사님꺼. 여진이 내민 허연 불투명 약국 봉지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코끼리가 박힌 코 세척 키트가 담겨 있었다. 언젠가 코미디언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과장해서 이걸로 코 세척을 하는걸 본 적이 있기도 한듯. 별안간 아까와는 또 다른 뜨거운 몽글거림이 명치 근처를 간질였다. 어쩐지 몸이 가볍게 붕붕 뜬 것 같기도 하고.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온갖 감탄사를 쏟아 부을 것 같은 기분.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걸 '감동'이라 이름 붙인다. 

오랜만에 특검으로 재회한 시목이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브리핑 하는걸 섬세한 여진은 금세 캐치했고, 도움 될까 싶어서 사 놓은건데 정작 줄 타이밍을 놓쳤다. 여러 사건들로 이렇게 갖다 주기까지는 또 며칠이 걸렸다는것 까지 시목이 알았다면 정말 '감동의 눈물' 이라는걸 이 자리에서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걸로 시원하게 코 헹궈내고 만두 먹기."


이거 주는게 뭐 대수라고 낯이 간질거리는지. 장난스럽게 꼬마야 코 흥 해봐 하는 바이브로 전환시키며 시목의 등을 욕실로 떠미는 여진의 손이 제법 허둥거렸다. 






다 먹은 만두 케이스와 젓가락을 정리하는 시목의 손등을 본 여진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단정한 손등 위에 사납게 죽죽 그어진 시뻘건 줄.


"이거 스타크씨가 그런거에요? 세상에, 피맺힌 것 좀 봐."

"아. 괜찮습니다."

"요 못된 고양이. 검사님 말씀 잘 들으래니까. 있어봐요. 이거 약 잘 발라야해. 냥이들 할퀸거 은근 오래 가요."


구급상자를 찾느라 몸을 일으킨 여진의 무릎에서 쫓겨난 스타크씨가 꾸에옹 불만 섞인 소리를 내며 붕붕 꼬리를 흔들어댄다. 시목의 손을 당겨 이리 저리 살피며 면봉으로 연고를 살살 펴바르고, 후 불어서 조심스레 말리는 여진의 속눈썹이 길었다. 숨이 닿는 곳마다 짜릿한 감각이 생겨나 머리 끝까지 번져서 찌잉 울려댄다. '우' 모양으로 뾰족하게 모인 입술 끝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왠지 입 안이 바짝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안락한 집사의 무릎을 뺏긴 털뭉치가 새초롬하게 눈을 뜨고 시목을 빤히 본다. 고양이를 상대로 이래도 되나 모르겠지만 이 득의양양한 기분을 당장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스타크씨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내일은 얼굴로 부탁한다, 털뭉치.   






"섬뜩하네."


종이컵을 입에 문 용산서 강력3팀 최팀장이 현장을 보며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도, 소름이 다 돋습니다."

"진짜 저래도 되나."


순창과 장건도 한마디씩 감상을 보탰다. 으으, 제 팔을 쓸어내리기 바쁜 순창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데 퍽, 등짝에 꽂힌 한여진의 손이 꽤 매워 이번에는 등을 문질러야 했다. 


"고추장. 너까지 그러면 안 되지."

"아오, 경감님. 진짜 아프다고요..."

"아 환자잖아요. 다들 그만 놀리시지?"


환자는 개뿔. 한창 몬스터 잡기 바쁜 장건이 꿍얼거리며 휴대폰에서 눈을 떼다가, 이글거리는 여진의 눈을 피해 다시 휴대폰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지켜보는 그 '현장', 뒤편 회의실 안에 시목이 얌전하게 눈만 굴리며 여진의 그림자를 좇다가, 여진과 눈이 마주치면 순하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씨익 웃어댔다. 산삼보다 귀하다는 황시목의 웃음을 처음 본 용산서의 소감은 귀신을 본 것 마냥 호러 일색.


"자기네 회사 놔두고 왜 여기서 저러고 있냐고. 한경감, 말 좀 해봐. 우리가 왜 황검사 때문에 회의실을 비워줘야 하냐?!"

"강원철 검사장님이 약 기운 다 없어지기 전에 눈에 띄면 가만 안둔다고 했거든요. 그 점잖으신 검사장님이 버럭버럭 하시는데 이해가 돼. 오죽해야 말이지. 내가 봤는데, 장난 아니었어요. 아니 막, 한경감한테-" 

"짱건! 경위님! 그만 하라니까요. 황검사님도 피해자에요. 다들 저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끔찍하네."

"자꾸 그러면, 한 컵 구해와서 경위님한테도 먹여버린다? 고추장한테 확 폴인럽 하게 해줘?!"


헙 입을 다무는 장건을 뒤로하고 최팀장에게는 연신 사과했다. 팀장님 죄송해요. 특검 일은 해야 하는데, 사정이 겹쳐서 일할 곳이 마땅치가 않데요. 다음주에는 돌려 보내겠습니다. 죄송함다! 우리 팀장님 멋쟁이시다! 어깨까지 주물러대며 혼을 쏙 빼는데 시끄러워서 최팀장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근데 황검사님이요. 경감님 댁으로 가신거 아니었어요? 거기서 일하면 되잖아요."

"야, 너 그건 어떻게 알았냐... 하여튼 눈치 빠른 고추장. 복잡해. 그럴 사정이 있어."


...고양이한테 시달려서 (정확히는 싸우다 져서) 데리고 나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검사님 흑역사에 한 줄 추가 되는 거겠지. 어제 퇴근 했더니 한여진의 보물 1호, 20대 시절 영광의 덕질이 응축된 피규어 콜렉션 선반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고 시목의 몰골도 그만큼 엉망진창 이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후웅 빠방하게 볼까지 채워가며 스타크씨가 이렇게 했다고, 잡으러 다녀도 소용 없었다고 변명하던 시목의 축 처진 어깨. 오죽했으면 매일 공들여서 빵실하게 띄우던 앞머리가 어깨보다 더 처졌겠냐고. 거기 걸린 회색 털들의 존재도 모를 정도로 시달렸나봐. 옆에서 스타크씨는 나름대로 시목에게 불만이 있는지 뻬에옹 거리지, 여진의 눈치만 살피며 시무룩한 시목의 머리에 내려앉은 스타크씨의 잔해를 걷어주다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황검사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화는 커녕 그냥 깔깔 웃고 말았다. 

그치만 둘은 한 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 하는게 낫다는 판단을 곁들이면서.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 다가와 소곤거리며 묻는 순창에게 여진이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검사님 지낼 곳이 없어서, 그냥 하숙 치는 거야. 이상한 오해 하지 마라? 


"경감님. 잠시 상의드릴게 있습니다."

"어억, 깜짝이야!"


이 양반이 고양이가 되버렸나. 소리도 내지 않고 어느틈에 바짝 다가온 시목이 어째서인지 순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여진을 회의실로 데려간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검사님한테 찍힌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으으, 유순하게 웃어대던 사람이 싸늘하게 180도 돌변하니까 더 무섭다. 순창은 잔상을 떨쳐내려 고개를 휘휘 젓고 잰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 때문에 순창은 용산서 1층 입구를 벗어났다가 도로 들어와야 했다. 빗방울이 꽤 굵게 내리는 봄비는 맞아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어깨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며 선택지를 떠올린다. 점심시간 피크타임이라 층층이 다 서는 만원 엘리베이터를 꾸역 꾸역 잡아 타고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올 것인가, 혹은 요 앞 뼈해장국 가게까지만 씌워줄 동행을 찾아볼 것인가. 아무래도 다시 올라가긴 번거롭지. 귀차니즘이 발동해 두 번째 안을 실행시킬 안면 튼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하필 입구에 선 시목과 눈이 딱 맞아버렸다. 아오. 

여진이 주변에 없으니 평소의 그 살짝 불만이 있는듯한 뚱한 표정으로 돌아온 시목. 그런데 그 얼굴이 점점 순창을 향해 다가온다. 왜? 왜죠? 아까 한경감님한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던게 아직도 거슬리시나? 이게 뭐라고 피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일단 딴청 부리며 시선부터 돌렸는데 턱, 제 팔을 붙잡는 손에 저도 모르게 으어 하고 괴상한 소리를 뱉어버렸다. 


"박순경님. 우산 없습니까?"

"예? 아, 예."

"이거 쓰세요."

"예? 제가요?"


시목은 제 손에 든 우산을 순창에게 들이밀었다. 벙벙하게 서있자 빨리 가져가라고 한 번 더 순창의 손으로 들이밀며 재촉까지 한다.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검사님은 왜 안 쓰세요?"

 

라고 말하는 중인데. 시목은 다급하게 순창의 품에 우산을 안기다시피 하고서는 빠른 걸음을 걸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버렸다. 뭐냐. 이 찜찜한 상황은. 


"검사니임. 식당 먼저 가 있지 그랬어."

"경감님과 같이 가고 싶어서요."

"푸흐, 그 말 할 줄 알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지는 사람들 틈으로 용케도 여진을 찰떡같이 찾아내 직진하는 시목. 어차피 여진이 입구로 올텐데 그 세를 못 참고 저렇게 인파를 거슬러 가는 거야? 순창은 강매도 아니고 강제로 빌림 당한 우산을 펼쳐들며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뼈해장국이나 뜯자. 


"검사님 우산 없어요? 비 오는데."

"없습니다. 같이 쓰시죠."

"!"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어, 검사님 어깨 젖는다, 안쪽으로 좀 더 붙어봐요. 곁을 스쳐 지나가며 뻔뻔스럽게도 순창을 일별까지 하는 시목의 연기에 오늘 하루 여러번 돋아났던 소름이 또 다시 오소소 잘도 돋아난다. 

아니 저거는 약물 과다복용이랑 상관이 없는 문젠데. 스킬의 영역이 아닌가? 

황검사님 꽤 수준급이셨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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