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높아도 너무 높은 슛

 

 

미도리마와 나를 묶어 보는 사람들은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나 타카오 카즈나리는 친구가 많다.

그렇다, 친구. 서로 깊은 속내도 보여 주고, 개인사도 어느 정도쯤 알고, 누가 ‘너 걔랑 친하냐?’고 묻거든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이. 서로를 가깝고 편하게 느끼는 관계 말이다. 이를테면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 반년 넘게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가 어색하지 않은 녀석이라거나.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을 때 나는 손목 아대를 찾아 방을 뒤지던 참이었다. 분명 방 안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어디쯤이었는지 가물가물했다. 휴대 전화를 어깨에 끼고 방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난 잘 지내지…. 넌 밴드부? 그래, 기타 좋아했었지.” 눈썰미가 좋은 편인데도 어째 그거 하나가 보이지를 않았다. 여기였지, 하고 들춰보면 번번이 없고 빨래통에 집어넣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침대 밑을 들여다보고 옷가지 더미를 들추고,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시간이 없었다. 녀석도 이쪽의 대답이 건성인 걸 알 테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중학 농구부에서 함께 뛰던 시절에도 그런 점이 잘 맞았었다.

흘긋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곗바늘이 아홉 시 이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가려던 시간까지 오 분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이런 사정으로 늦었다고 실실 쪼개서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는 열 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와 달리 모든 것에 진지한 녀석이라 어렵다고나 할까. 오늘은 손목이 조금 뻐근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서둘러 후드 점퍼를 어깨에 둘렀다. 이런 빠른 포기가 나의 장점이었다. 외투에 팔을 끼우며 식탁에서 토스트를 집어 물고 우물거리니 휴대전화 너머에서 킬킬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씩 양말을 신고 미끄러지듯 복도를 통과해 신발장에 아무렇게나 놓인 낡은 농구화에 발을 꾹 밀어 넣었다.

“어디 가냐?”

“농구부.” 현관에 앉아 신발 끈을 묶으며 대답했다. “주말인데?” “곧 윈터컵 본선이거든! 전국 강호는 휴일에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지.” 그랬다. 내가 속한 슈토쿠 고등학교 농구부는, 지난주 지역 예선을 공동 우승으로 마치고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쥔 참이었다. 전국 강호의 전통인지 본선 기간에 들어서니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연습하는 것을 다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일 학년인 그 녀석이 가장.

이제야 제 방에서 나오는 늦잠꾸러기 동생에게 다녀오마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우산꽂이를 넘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십일월 오전의 하얀 햇살과 차고 신선한 공기가 이쪽으로 훅 밀려들었다.

실내 조도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부시다.

“카즈?”

“지금 나왔어. 날 좋다, 야.”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녀석에게 대꾸했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니 적응이 잘 안 되었다. 난 눈이 좋은 만큼 빛에 약한 면이 있었다.

전화선으로는 아까의 화제가 계속 이어졌다. “본선이면 전국 대회지? 와…….”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치였다.

“내가 아니라 슈토쿠가 대단하지. 원래 강호기도 했고.”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늘 가던 대로 대신 오른편의 좁고 으슥한 지름길로 빠졌다. 건물 사이 골목이라 어둡고 풍광도 나쁘고, 경사가 심해 챠리어카를 끌고 가기엔 위험하지만 혼자라면 얼마든지.

휴대전화 너머의 녀석이 계속 말했다. “너 거기서 농구 계속하는 것도 대단하고.”

이 속도로 걸었을 때 학교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느라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빠르게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난 더할 맘이 안 들더라고. 우리 학년에 그런 애들 많았잖아”

비탈을 디뎌 내려가던 발이 잠깐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지금 같은 팀인 거지?” 누구라고 콕 집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

“그때가 작년 여름이었으니까……. 이제 일 년 지났네.”

그보다 훨씬 까마득한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고 보면 벌써 시간이 그만큼 갔다.

나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인데, 막상 떠올리려니 신기하게도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 경기에서 돌아오고 일주일이 되지 않아 삼 년 내내 함께 뛰었던 동기들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퇴부 신청서를 가져왔다. 주장 자리를 맡고 있던 녀석조차 그랬으니 말 다 했지. 주전 중 나만이 부에 남았다.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계속하는 것도 나뿐이었다.

녀석은 괴로운 추억을 떠올린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요일 오전의 골목길은 지나다니는 차 한 대 없이 고요해 수화기 너머의 한숨이 가느다란 숨결까지 또렷이 들렸다.

“정말……. 대단했지.”

정말 그랬다.

 

나와 녀석이 졸업한 중학교 농구부가 인터하이 본선에 진출한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지역 4강 언저리를 맴도는 나름의 강호교였지만 전국 진출에선 번번이 고배를 마셨는데, 그해 우리에게 유달리 행운이 따랐는지 아니면 불운이었는지.

도착한 경기장에서 올려다본 여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했고, 주위를 둘러보면 전국의 쟁쟁한 강호 교표가 수놓인 색색의 운동복이 계속 계속 지나갔다. 모르는 학교 이름이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공식 팸플릿 페이지를 넘기며 전국 랭킹을 확인해 보곤 했다.

오자마자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 팀은 첫날 두 경기를 다 이겼다. 첫 시합이 끝났을 때는 믿기지 않았고, 다음 시합까지 마쳤을 땐 둘째 날까지 남는다는 게 그저 기뻐 풍선처럼 들떴다. 우리는 초등학생처럼 서로에게 얼음물을 뿌려 대었고 체육관 주변을 마구 달리려다 감독님께 야단을 맞았었다.

다음 날에도 경기가 있었지만 긴장감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삼 년 동안 땀 흘린 부 활동을 전국 무대에서 마감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청춘의 한 페이지가 지금 넘어가고 있다는 감각, 그걸로 충분했다.

차라리 그날 졌다면 조금은 아쉬웠을지언정 다 같이 어깨동무한 기념사진이나 한 장 남기고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둘째 날, 3회전에서 우리와 만나게 되어 있던 팀은 시드에 배정된 작년의 우승교였다.

공식 랭크 S등급, 도쿄의 테이코 중학. ‘기적의 세대’의 이름쯤은 알고 있었다. <월간 중학농구>에 서너 달에 한 번꼴로 테이코 특집편이 실렸으니 농구 하는 중학생으로선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그날 밤 숙소에서는 다들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의 경기가 두려워서, 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테이코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홀로그램 카드처럼 반짝이는 ‘기적’이라는 이름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토너먼트에 나온 이상 언젠가 지긴 할 터, 기왕 떨어질 거라면 대단한 구경이나 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다음 날,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이 울리고 나서야 우리는 입장하는 내내 사방에서 쏟아지던 동정의 눈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적의 테이코에 경기를 즐기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 팀은 엉망진창이었다. 팀플레이는 무슨, 패스 연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포워드 둘은 대놓고 점수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골대 주변을 서성거리만 하는 센터는 연신 하품을 해 댔으며, 주장은 그 모든 걸 수수방관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농구의 방식은 턴제 카드 게임과 달라 한 번 놓친 흐름은 이쪽으로 알아서 돌아와 주지 않는다. 그리고 흐름은, 완전히 테이코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 사회인과 유치원생의 대결 같았다. 뒤쳐졌다고 느끼자마자 점수 차가 무섭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따라 달리려 했지만 그들은 빈틈을 주지 않았다. 간신히 공을 빼앗아 와도 골대까지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클릭 미스로 너무 어려운 난이도 게임에 들어와 버렸을 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관중석의 응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 분이 지나자 손바닥에 식은땀이 찼고, 첫 십 분이 지나자 네 쿼터를 다 뛴 것처럼 숨이 가빴다. 체력의 문제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센터는 2쿼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폼으로 덩크를 내리꽂는 테이코 에이스를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골 밑으로 달려가 그 녀석 대신 공을 잡아챘다. 속공을 외치며 테이코의 골 밑으로 달려가다 공을 스틸당했고, 다시 수비하러 우리 코트로 돌아와 있는 힘껏 뛰어오르고 나동그라졌다 다시 달렸다. 턱까지 찬 숨이 머리를 울렸고 땀이 흘렀다. 우리 팀에서 나만이 그렇게 뛰고 있었다.

무엇이 내 발을 그렇게 움직였을까. ‘그래 봤자’라는 걸 몰라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미 점수는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테이코를 내버려 두면, 두 손을 늘어뜨리고 40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경기가 끝나고 코트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들이 완전히 망가져 있을 거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전반전이 끝나 갈 때가 되자 스코어는 거의 트리플이었다. 전광판이 농담을 하는 것만 같았다. 저들은 이십 분 동안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지도 않았다.

하프 타임까지 남은 시간 십오 초. 서서히 다리가 멈췄다. 온몸에서 땀이 흘렀고 숨이 헐떡여졌다. 그때.

내 바로 앞에 선 선수에게 공이 돌아갔다. 이 시점에? 하늘색과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거기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였다.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나가려는데 별안간 그가 믿을 수 없는 자세를 취했다. 여긴 하프 라인이었다. 골 앞도, 3점 슛 라인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이 자리에서 슛을 쏘아 올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그는 두 발로 코트를 박차고 떠오르고 있었다.

주황색 공이 허공에 그리는 포물선을 따라 내 고개도 천천히 뒤로 넘어간다.

저런 게, 있어도 되는 거야……?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솟아오른 공은 한순간 거의 천장에 닿을 것처럼 보였다.

공이 림을 통과함과 동시에 전반전을 끝내는 호각이 울리고 이어 우레와 같은 환성이 체육관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테이코의 7번은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 반.

한 걸음 반의 거리가 높이 솟아오른 공과 코트 바닥의 그림자만큼이나 멀었다.

테이코 주장이 7번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하프 라인이라니 무리한 거 아니야? 이번에도 버저비터네.’

‘그게 가장 전의를 꺾기 좋으니까.’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주장을 따라 저희 벤치로 걸어가 버렸다.

이후 경기 내내 그는 한 번도 내 쪽을 보지 않았다. 하프 라인에서 쏘아 올린 건 한 번의 버저비터뿐이었지만 안쪽에서 던지는 슛도 굉장했다. 그에게 패스가 돌아가면 이쪽에서 달려가 보기도 전에 곧장 전광판에 3점이 반짝였다. 그 슛은 높아도 너무 높아, 아무리 높이 뛰어올라도 손끝조차 닿지 않을 것 같았다. 7번이야말로 기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장 냉정하고…… 까마득하다.

그 무력감이 사십 분 시합 내내 마음을 까맣게 태워 이제는 아무도 달리지 않는 코트를 불쌍할 정도로 땀 범벅이 되어서까지 뛰도록 했다. 하지만 힘껏 달리다가도 7번의 손이 공을 던져올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분했으니까.”

귀에 댄 휴대 전화가 슬슬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섯 배의 점수 차로 패하고 경기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단체 사진을 찍는 것도 잊어버렸었는데 만일 찍었다면 인생 최악의 몰골을 사진으로 남기게 됐겠지. 경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그날의 환상에 시달렸다.

“그래도 카즈 네가 그날 끝까지 뛸 줄 몰랐다. 우리 모두 널 다시 봤어. 사실 그렇게 진지한 모습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나는 짐짓 머쓱하니 부끄러운 척 웃었다. 하긴, 다들 놀랐을 만도 하다. 경기가 시작도 하기 전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온 게 바로 기적이 아닐까.’라느니, ‘전년도 우승팀이라니 이만하면 져도 할 말이 있다.’라는 등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흐리던 녀석이 다름 아닌 나였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기적의 세대 슈터를 꺾겠다며 고등학교 입시에 매진하고, 여차여차 슈토쿠 고교 농구부 주말 연습에 녀석과 함께 출석 도장을 찍는 나날을 보내게 되다니 인연이란 참 얄궂다.

“그래도 우리 중에 카즈 네가 가장 잘했지. 그러니 슈토쿠에서도 해내고 있는 걸 거고.” 녀석은 계속 농구 얘기를 했다. 떠들다 보니 어느새 삼거리 교차로였다. 여기서 왼편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미도리마의 집이 있는 고급 주택가가 나오고, 직진하면 슈토쿠 고등학교다.

“너희 팀에 있는 게 그 슈터지? 옆에서 보면 어때?”

미도리마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아침저녁으로 매일같이 페달을 밟는 길이 여기였다. 장난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제안이 뭐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미도리마의 성미 탓에 벌써 반년이나 이어져 거의 동네 명물이 다 돼가고 있었다. 

“장난 아니지……. 가끔은 우리랑 같은 고등학생인지 모르겠다니까.”

리어카를 연결한 자전거 페달을 밟고, 별자리 운세 아이템을 조달하러 시내 팬시점을 순례하고, 중학교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모든 황당한 일들은 이제 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 친구 녀석과 괴로운 추억을 곱씹고 있으려니 그 모든 일상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그럼 기적의 세대는 주전이고 카즈 넌 벤치냐?” “저기,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이거. 나도 엄연한 주전에 스타팅이거든?” “어, 그럼 너 걔랑 같이 뛰어?” “어쩌다 보니. 둘이서만 일 학년이기도 하고.”

“우와…….” 녀석은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일종의 기습 같은 질문이었다.

뒷덜미를 잡아채인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너 이제 걔랑 친해?”

 

글쎄…….

내가 무어라고 답해야 했을까?

 

직접 만나 본 미도리마 신타로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우선 겉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지. 일본인 같지 않게 남들보다 머리 하나 반은 큰 키부터 그 독특한 말투, 매일같이 텔레비전 별자리 운세 아이템을 들고 다닐 건 또 뭐야. 여자애냐? 아니, 별자리 운세 좋아하는 여동생도 그거에 그렇게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녀석을 알면 알수록 그 우스운 행동거지 밑에 깔린 지독한 집념이 체감되어 그저 비웃기도 어려웠다. 녀석은 한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지켰고, 구닥다리 같은 좌우명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냥저냥 평범한 보통 애들과 함께 있을 때 미도리마는 고만고만한 잡초 틈에 불쑥 솟아난 대나무 같았다. 모든 면에서 특별했고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스스로 던져 올리는 슛처럼 그렇게 높았다.

농구부 에이스에 학년 톱에 가까운 성적이래도 너무 괴짜라, 다들 함부로 하진 못해도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미도리마 녀석은 그런 문제, 이를테면 나 말고는 반에서 그에게 말 거는 아이가 없다는 문제를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 녀석에겐 사람들 마음에 들고 싶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에서나, 농구부에서나……. 누구에게 살가운 말 한번 해 주는 일 없이 무뚝뚝하고,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정말이지 제멋대로다.

아무리 감독님이 ‘와가마마’를 받아주신대도 엄연히 선배님들이 계신 자리에서 이번 쿼터의 공을 전부 저에게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일 학년이 어디 있어? 당시 미도리마 녀석은 상급생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는 처지였다. 내가 폭소로 깨뜨리기 전의 그 얼음장 같던 공기가 아직도 피부에 선하다. 나는 미도리마의 등을 부러 마구 치며 큰 소리로 웃어 대었었다. “과연 신쨩이야, 세상 저 혼자 살지!”

진심이었다. 너, 다들 싫어할 거 알면서도 그러는 거지? 앞으로 어떤 냉대를 받게 될 줄 알고? 말도 안 되는 자신감. 얼마나 대단한 프라이드인지! 녀석은 세상과 자신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높은 벽을 쌓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벽 안에 있는 건 아마 자기 자신과 그만큼 높은 목표뿐이겠지.

그래서 녀석이 싫었냐면, 오히려 반대였다. 특이함이 지나치니 현실에 튀어나온 만화 캐릭터처럼 느껴졌달까. 엉뚱한 행동거지며, 진기할 정도의 진지함이며. 그놈 곁에 붙어 있으면 하루하루가 연재만화의 새로운 에피소드였다. 녀석은 나와 같은 반에 앞뒷자리로 앉았고 알고 보니 꽤 근처에 살기까지 해, 나는 어쩌다 보니 날마다의 일상을 녀석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옆에 붙어 녀석의 괴짜 행각에 어울려 다닌 게 반년이니, 다들 나는 미도리마와 친한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미도리마는 지금껏 내게 변변찮은 자기 속내 한 번 이야기해 준 적이 없다. 전화를 걸면 바로 끊어 버리고, 보통 애들과 친해질 때 하던 것처럼 어딜 놀러 가자거나 뭘 같이 하자고 제안하면 면전에서 거절해 버리기 일쑤다. 미도리마에게는 항상 더 중요한 일 – 가족 행사라거나, 공부 따위 – 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가아아끔 어울려 주기는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따라왔다는 느낌이지.

늘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이상한 별명을 불러서 속을 긁지 않으면 반응다운 반응도 볼 수 없고.

녀석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텐데 이쪽에서만 그의 심기를 읽는 데 익숙해지고, 스탠딩 코미디언이라도 된 것처럼 끝도 없이 속 빈 말을 떠들어 댄다. 그럴 때면 뭐랄까, 목석을 옆에 두고 말하는 기분이지.

내가 먼저 말을 붙이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오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미도리마도 보통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기적의 세대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기적의 세대뿐이라던가. 테이코의 동창들, 같은 기적의 세대들 틈에 끼어 있을 때면 미도리마도 상대의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보여 주고, 대답도 퍽 길게 하고, 먼저 말을 걸기도 하는 것 같다.

미도리마와 다른 기적의 세대가 함께 있을 기회가 생기면 나는 녀석을 그곳에 둔 채 한 발짝 떨어져 관중처럼 자리를 잡았다.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세이린과 카이조를 만났을 때, 또 여름 합숙지에서 세이린 녀석들과 마주쳤을 때가 그랬지. 나는 모르는 사람처럼 멀찍이서 턱을 괸 채 미도리마의 시시각각 변하는 낯빛이며 내게 보여 주지 않는 얼굴들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럴 때면 녀석과 나 사이엔 텔레비전 공연 무대 속의 연예인과 브라운관 이쪽만큼이나 먼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매일같이 그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지만 가끔은 그가 아직 테이코의 7번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만이 그 거리감을 알고 있다.

 

휴일의 학교는 너무나 조용해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다. 색색의 단풍 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오전 열 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목을 꺾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높다. 겨울을 한 달 앞둔 십일월의 서늘한 햇빛에 오래된 건물의 창이란 창이 다 연한 금빛으로 빛났다.

나는 반만 열린 정문을 통과해 본관으로 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운동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계속 걸었다. 실습실, 특별부실 따위가 있는 구관 바로 옆 커다란 건물이 우리 농구부가 사용하는 체육관이다. 고작 반년밖에 다니지 않은 학교인데 어찌나 들락거렸는지 발이 이미 길을 외워 눈을 감고도 정문에서 체육관까지 곧장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결 밝아진 햇빛이 벽시계를 반짝 빛냈다. 몇 시일까. 발걸음이 뛰듯이 빨라졌다.

두꺼운 철제 문고리를 열자 탁 트인 직사각형의 코트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골대 밑에는 이미 주황색 농구공이 수북이 구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은 열 시였는데 너는 언제부터 나와서 혼자 연습하고 있었던 걸까.

창마다 오전의 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주말 오래된 체육관에 사람이라고는 너뿐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네 뒷모습의 윤곽선이 빛을 받아 아른아른했다.

네 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는 너를 지켜볼 때면 흔히 서곤 하는 기둥 밑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골대를 마주 보고 곧게 선 네 뒷모습은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에 떠오를 것처럼 익숙하다. 변치 않는 한결같은 뒷모습. 윈터컵 예선이 끝난 다음 날 아침에도 너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섰지. 매일 가장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고 오늘도 이렇게.

그러고 보면 얼마 전 세이린과의 경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변했다나.

이상하지. 내가 보는 너는 언제나 이렇게 변함없는데. 팀플레이를 제안했다지만 그건 이기기 위한 것일 뿐이고, 세상에 혼자뿐인 건 늘 똑같은걸.

슈터의 숙명인지 네가 쏘는 슛은, 언제든 어디서든 세상에 오직 골대와 너 둘뿐인 것처럼 고요하다. 변함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 혼자 사는 녀석이지만, 열 받는 말만 골라 하는 녀석이지만, 아무도 너를 미워할 수 없는 거다.

미도리마 너는 곧게 서서 골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팔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조금 굽혔다. 지금은 올 코트 라인이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구나. 하나, 둘…… 나는 입안으로 수를 센다.

네가 뛰어오르자 흰 손끝을 떠난 공이 기적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른다. 몇 번을 봐도 까마득해, 저기에 손을 대는 건 나로서는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네가 변했다면……. 조금이라도 변했다면 그건 네 공에 손이라도 대 볼 수 있을 특별한 녀석들 덕분이겠지. 나 같은 보통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미도리마.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아직 열감이 가시지 않은 휴대 전화가 만져진다. ‘그 녀석과 친하냐’는 친구 녀석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 라고. ‘아니, 안 친해. 못 친해졌어.’

‘<기적의 세대>잖아.’

철썩- 소리를 내며 공이 림을 통과함과 동시에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는 거다.”

“아니, 그 슛 말이지. 언제 봐도 너무 높다니까.”

“…….”

언제나처럼 표정이 없던 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 얼굴이나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미안, 나쁜 뜻으로 하는 말 아닌 거 알잖아. 아, 이제 딱 열 시네. 시간 잘 맞췄지? 늦잠 자는 바람에 얼마나 서둘렀는지 모른다고~”

“……흥. 그런 건 자랑이 아니라는 거다.”

한심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고 너는 골대 밑에 구르는 공들을 정리하러 가 버린다. 네 뒷모습이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런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중학 시절의 기억이 현재에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너에게 말한 적은 없다.

발치까지 굴러온 농구공을 나도 하나 주워든다. 그러고 보면 너와 함께한 반년 새 내게도 변화라면 변화랄 게 생겼다.

첫째로, 가끔 악몽으로나 꾸던 중학 시절 테이코와의 경기도 어쩌면 긴 인생 한 번쯤 겪어볼 볼 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처음 보았을 때는 미치도록 분했던 너의 3점 슛. 그것도 한 발짝 물러서 올려다보고 있자면 이제 아름답게도 느껴진다. 뭐, 인생은 즐기는 자가 승자인 법이니까는 나는 별로 아쉽지 않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너를 꽤 많이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뒷모습뿐인 너에 의해 나만 이렇게 바뀌어 간다. 물론, 이 점도 전혀 쓸쓸하지 않다.





2. 천재의 파트너

 


미도리마 신타로의 상상을 한다.

책상에 엎드려서, 밥을 먹을 때에도 수업 시간 중 잠깐 창 너머를 보다가도. 선생의 판서 소리를 들으며, 페달을 밟으며, 일어나자마자 매일 잠들기 전에도 꿈에서조차. 강박적으로 나는 그를 상상한다. 미도리마는 저 하나에 붙은 상대 팀 선수 셋의 마크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와 경기하는 팀들은 코트 어디서건 3점을 넣는 녀석을 우선 봉쇄하러 나오기 마련이지. 적들은 필사적인 데다 실력도 상당하고 미도리마에게 공이 가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기세다. 아무리 패스의 귀재인 나라도 그 장벽을 뚫고 에이스님에게 공을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공중에서라면 어떨까.

순간, 나와 미도리마는 세 명의 상대 선수들은 알 수 없는,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 사이에서만 가능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경기장은 이제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일종의 도면으로 전환. 미도리마의 위치는 하프 라인 오른편이고 공을 가진 건 적의 에이스다. 스크린을 쓴 내가 우리 골대로 달리는 적 뒤로 접근해 스틸에 성공, 그 순간 미도리마는 두 손을 위로 올리고 슛 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약 2.5m. 미도리마의 위치는 하프 라인이다. 녀석이 그곳에서 점프에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정확히 알고 있다. 수백 번도 더 머릿속에서 돌려본 시뮬레이션대로 미도리마의 농구화 밑창이 코트를 박차고, 경악에 찬 적들의 눈이 녀석의 빈손을 향하는 순간 나는 그의 점프 최고점에 패스를 -.

언제건 어디서건 나는 슛 동작으로 뛰어오르는 미도리마의 빈손에 공을 보내는 순간을 상상하고 있다.

 

미도리마가 이 말도 안 되는 슛을 제안한 건 예선 결승이 끝난 다음 주 주말이었다.

입시 상담 행사로 선배들은 일찍 자리를 비워, 창으로 노을이 떨어지는 시간 체육관에는 미도리마와 나 둘뿐이었다. 녀석은 한 시간이 넘게 한마디 말도 없이 골대에 3점 슛만 던져 대고 있었다. 세이린전의 무승부 이후로 한층 기세가 맹렬해진 녀석은, 음……. 승리에 목말랐다, 라는 느낌일까. 그래도 수위 아저씨 순찰 전에 청소를 마치려면 슬슬 그만두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차, 미도리마가 슛 폼으로 들어올리던 팔을 털썩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농구공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야. 눈을 끔벅거리는데 갑자기 녀석이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녀석은 전쟁을 앞둔 장수라도 되는 양 비장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얼이 빠진 내 앞에 거대한 소나무처럼 우뚝 선 미도리마가 별안간 폭탄 같은 말을 꺼냈다.

“타카오, 윈터컵에서 라쿠잔과 만나면 난 슛을 던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뭐?”

뭐라고? 입이 딱 벌어졌다. 녀석의 말이야 늘 뜬금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이건 순위권이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내 반응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양 이어 말했다. 

“기적의 세대로서 아카시의 능력은 상대의 다음 행동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한 행동을 봉쇄해 버리지.”

아카시 세이쥬로, 라쿠잔에 진학한 기적의 세대 주장. 프로필 키는 나랑 비슷하고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 그런데 그 능력은 뭐야, 남자 고등학생이 아니잖아, 초능력자입니까? 나는 황당함을 온 얼굴 근육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미도리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아무것도 이상할 게 없다는 양 태연한 투로 말했다.

“라쿠잔과 만나면 아카시가 나를 마크하게 될 거다.”

정말? 그 키 차이로?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건 말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미도리마는 올 코트 슛을 던지면서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아카시한테는 상대의 미래 행동을 저지하는 능력이 있고, 신쨩은 거기 막힐 거다?”

“최악의 경우라면.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만.”

하지만 지금 녀석은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도리마는 눈을 내리깔고 코트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겐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체육관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노을빛이 녀석의 창백한 얼굴을 물들였고, 붉은빛이 홍조처럼 일렁이는 뺨에 드리운 긴 속눈썹 그림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미도리마가 오늘 하루 내내 내게 하고 싶어한 말이 이거였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타카오, 뭔가 수단이 필요하다. 세이린전도 고작 무승부였어. 라쿠잔을 상대하려면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미도리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머뭇대듯 뜸을 들였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재촉하듯 거칠게 말했다.

“그래서, 수단이란 게 뭔데. 생각이 있을 거 아냐.”

“……실제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거다. 무모하고, 실패 확률이 높아. 실패했다간 팀 사기가 떨어지겠지. 가능하면 쓰지 않고 끝내고 싶다. 그렇지만,”

오죽 망설여지는 모양인지 녀석은 서두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대체 뭐야. ‘아카시 세이쥬로’ 초능력에 대항하는 필살기?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방과 후 고백이라도 하는 여학생처럼 가슴 졸이며 돌려 돌려 말하는 건데? 미도리마는 심지어 불안해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분위기가 점점 어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녀석 쪽에서도 내 기색을 살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그래서 본론이 뭔데 신쨩, 서론이 너무 길잖아. 설마 우리 둘이서 비장의 필살기 같은 거라도 만들어 보자는 건 아니겠지~?” 나로서는 분위기를 환기할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이었다.

“그래.”

“응?”

“타카오. 내가 슛 동작에 들어간 후 내 손에 패스해 줄 수 있겠냐는 거다.”

“신쨩……?”

나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신쨩 오늘 무슨 날이야? 11월에도 만우절이 있어? 미안, 나 미처 몰랐는데…….”

“농담이 아니라는 거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물론 미도리마는 심각한 정도로 늘 진심인 성미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 하지만 신쨩……!”

커다란 종 같은 거에 꽝 하고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뛰어오르는 슈터의 손바닥으로 패스, 슈터는 공중에서 그걸 잡아서 그대로 3점 슛? 우와, 만화냐~? 아니면 기적?

물론 이 말을 꺼낸 미도리마는 기적이라는 단어가 심하게 어울리는 녀석이기는 했다. 코트 어디서든 백발백중의 3점 슛을 쏘는 기적의 세대 넘버원 슈터……. 이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난 발상은 정말로 미도리마쯤 되는 녀석이 아니고서야 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만 웃음이 목구멍으로 피식피식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항상 그랬듯 한 번 터진 웃음은 잘 멈춰지지 않았다.

내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하자 녀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타카오! 그만 웃으라는 거다!”

“아, 미안 신쨩, 미안. 농담 아닌 거 아는데, 너 아니면 누가 이런 생각을 하겠냐고…… 진짜 말도 안 되는…….”

나는 거의 흐느끼듯 웃고 있었다. 배가 다 아팠다. 주저앉고 보니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배에 손을 얹고 복식으로 거듭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호흡이 진정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표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드니, 여전히 그 무식하게 높은 높이에서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이 보였다.

“할 수 있겠냐는 거다.”

녀석이 말했다. 그렇게 웃는 걸 봐 놓고도, 또다시 나에게 진심으로 묻고 있다.

아, 정말이지 도망갈 여지라고는 주지 않는 녀석이었다. 안경 너머 녀석의 눈이 보였다. 너무 진지해서 농담이라고는 모르고, 항상 무서울 만큼 전력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그래서 회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게 만드는, 나를 사로잡아 버린 눈. 그래서 결국 나는

“그래.”

라고 말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사실 녀석이 나에게 뭔가를 제의한 순간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신쨩의 와가마마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무서운 선배들 중에서도 거의 없었다.

“그래. 해 보자, 신쨩.”

나는 쾌활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지만. 마음을 감추는 건 내 특기였다.

“이런 생각을 다 하고……. 신쨩 요새 안 하던 짓 많이 하는 거 알아? 세이린이랑 붙기 전에도 그러더니.”

“이기기 위해서다.”

아, 세이린전을 앞두고도 했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미도리마는 허공의 한 점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그 한 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백번이라도 말하겠어. 아카시에게 이기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거다.”

저기 신쨩,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 거야? 뜨거운 공기처럼 들떴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허공에 대고 말하는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녀석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잘 몰랐겠지만.

청소를 마치자 우리 둘 다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왔고 언제나처럼 리어카를 끌고 귀가했다. 그렇지만 녀석과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눈을 감고 그가 오늘 처음 보여 준 여러 가지 모습들을 떠올려 보았다.

기적이라고도 하는 재능과 엮이게 되면 녀석은 전에 없던 모습을 하나하나 보여 준다. 미도리마, 너는 ‘쿠로코’를 의식하고 ‘카가미’에게 투지를 불태우며 ‘키세’와 ‘아오미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아카시’를 앞두고 전에 들은 적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구나.

 

윈터컵 대진표대로라면 우리는 준결승에서 라쿠잔을 만나게 된다. 본선에서 처음 붙어 보는, 기적의 세대가 있는 학교다. 미도리마는 당연히 우리가 4강에 들어 아카시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윈터컵 날짜가 다가올수록 녀석은 점점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나 정도나 되어야 느낄 수 있는 수준이지만 녀석 주변의 공기에 나날이 날이 서 갔다. 어느 날은 주변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기계처럼 슛 연습만 하기도 했다. 테이코 동창이 있는 학교라지만 다른 때보다도 더욱 유별났다. 상대가 ‘아카시’이기 때문일까?

기억 속 테이코전에서 미도리마의 등을 두드려 주었던 주장. 아카시 세이쥬로는 기적의 세대 중에서도 가장 알려진 게 없는 녀석이었다. 경기를 보러 가 볼 만한 토오나 카이조와 달리 라쿠잔은 교토에 있는 학교였고, 미도리마가 말한 ‘능력’이 찍힌 경기 비디오도 없었다.

지나가듯 아카시에 관해 묻자 미도리마는 의외로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우리 주장이었지.” “신쨩은 부주장이었지?” “그래.” 그리고 미도리마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난 한 번도 아카시를 이기지 못했다는 거다.”

“이겨 본 적이 없다고?”

천하의 미도리마가?

“방과 후에 두었던 장기에서지만.”

“아하.”

그 얘기라면야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월간 농구 테이코 특집편에 실려 있었다. 주장인 아카시와 부주장인 미도리마는 방과 후에 장기를 두곤 했는데 녀석이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나. 나는 미도리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작 장기일 뿐이잖아, 농구는 다를 거 아냐.”

“농구로는……. 우리끼리의 대결은 금지되어 있었다는 거다. 제대로 붙어 보는 건 나도 처음이야. 아카시도 많이 발전했겠지.” 그리고 녀석은 내 얼굴을 흘긋 보더니 덧붙여 말했다. “물론 이번엔 내가 이길 거다.”

누구와 붙든 미도리마는 자신의 우위를 거리낌 없이 장담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녀석에게선 기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표정은 태연했지만 말이 빨랐고 자세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다, 라.

동요의 이유는 그거일까. 나에게 슛을 처음 제안하던 그때처럼 녀석의 시선이 허공의 한 점을 향한다. 미도리마 같은 녀석에게 저렇게 집요한 눈빛을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 같은 녀석의 마음속에 저만큼이나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는 건? 중학교 때 마주쳤던 한 번의 경기조차 기억되지 못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어렵다.

범접할 수 없을 천재님들의 세계겠지. 나는 현실적인 성격이라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그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따윈 당연히 안 품는다.

하지만.

 

턱까지 찬 숨이 가빴다.

한 시간 가까이 계단을 오르니 다리가 뻐근했다. 산 중턱 신사로 난 가파른 계단 길을 이 늦은 시간에 오르는 사람은 나뿐이다. 허리를 숙이자 입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김이 초겨울 밤공기를 뿌옇게 적셨다.

학교에서의 연습은 파했지만 나는 미도리마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귀가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개인 훈련을 시작한 지 벌써 이 주째다. 체력 단련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길거리 코트에서 야간 연습을 하다 보면 새까만 하늘에 어느새 별이 총총하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오버 워킹이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자 익숙한 한 사람의 얼굴이 녹화된 영상처럼 돌아간다. 이 주 전 나는 너의 필살기 계획에 동참해 주겠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사실 더 전에도 나는, 너에게 하나의 약속을 했었다.

아마 너는 잊었겠지만. 그건 우리가 슈토쿠에서 처음으로 나누었던 대화다운 대화였다. 너는 그날 나에게 ‘특별한 적의라도 있냐’고 물어보았었지. 너는 보기보다 눈치가 좋은 편이지만, 역시 날 기억하진 못할 줄 알았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네 말에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너라면 그런 말 할 수 있었을까, 신쨩? 너에게 진 적이 있다고, 그래서 노력했다고…….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대화 내내 난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말했었지, 이제 너에게 인정받고 싶어졌다고. “그럴 마음도 없겠지만, 아직은 인정하지 마라.”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너의 무심한 눈빛을 기억한다. “조만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만한 패스를 할게. 기억해 둬, 신쨩!”

난 쿠로코 테츠야처럼 보이지 않는 패스를 할 수도, 아카시 세이쥬로 같은 기적의 포인트 가드가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신쨩, 네 손에 정확히 맞춘 듯한 패스만은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서 네 농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나일 테니까…….

사실 나는, 너에게 인정받겠다는 목표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 본 네가 너무도 까마득해 나는, ‘아, 역시 손이 닿지 않겠구나.’ 하고 물러서 그저 고개를 젖히고 네 세계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너는 그토록 불안해하는 얼굴로 내게 특별한 패스를 달라고 말해주었다. 라쿠잔은 전통 있는 최다 우승교였고, 한 학년 위에 ‘무관의 오장’을 셋이나 데리고 있었다. 그놈들은 분명 아카시 세이쥬로와 호흡을 맞출 것이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나도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 기술.

실전에서 쓰게 될지는 모른다. 쓰지 않고 끝내는 게 가장 좋겠지. 하지만 만일 네가 그 패스를 요구했을 때 내가 부응하지 못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아, 역시 포기가 되지 않았다.

밟아 죽였던 마음이 불씨처럼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기대하면 그만큼 위험해진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상상하게 된다. 만일 라쿠잔과의 시합에서 이 기술을 성공시킨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긴다면 신쨩, 미도리마, 그때는 너도 나를 인정하게 될까?

 

언덕을 오르는 계단참에서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불어온 찬바람이 땀을 다 식혔다.

지금은 십이월 초입, 윈터컵까지 남은 시간은 이 주 남짓이었다. 저 위를 올려다보면 남은 계단이 층층이 까마득하다. 오르는 일은 숨차고 괴롭다. 그렇지만 몸이 괴로울수록 너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는 듯한 착각에 나는 계속 달리게 된다.

주변을 둘러보자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너머로 우리 동네가 보였다. 지붕이 낮은 주택가와 구불구불한 길들, 슈토쿠 고등학교, 하고 많은 집 중 네 집이 보인다.

네 방 불이 켜져 있었다. 널 배웅한 게 두 시간쯤 전인데 지금은 뭘 하고 있으려나. 내일의 행운 아이템 챙기기? 일찌감치 취침 준비? 아니면 모범생답게 오늘 수업 내용을 복습이라도 할까? 부 활동에 그렇게 열심이면서 너는 아무것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모든 것에 인사人事를 다했다. 나는 개인 훈련을 시작한 후로 수업 시간마다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책상에 고개를 처박는 처지인데 말이다. 뒤에 앉은 네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내 등을 쳐다보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신쨩,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윈터컵까지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부실 달력에 빨간 줄을 그어 나가는 네가 긴장한 기색으로 눈을 깜박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렸던 입을 황급히 다물곤 한다.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그럴 때마다 나는 하마터면 ‘내가 너를 이기게 해 줄게.’라고 말해 버릴 뻔하는 것이다. 

매번, 너에게 가고 싶은 말의 낱자들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가라앉는다.





3. 라쿠잔 vs 슈토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한동안은 중학교 때의 환상을 보았다.

경기장 천장의 스포트라이트와 상대편 관중의 함성, 속수무책으로 올라가는 적의 스코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압도적인 전력 차. 나를 놀리듯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낯선 유니폼.

움직이지 않는 두 발.

새까맣게 속을 태우는 무력감. 그리고 슬로우 모션처럼 허공을 가르는 농구공. 지금 나는, 환상을 보고 있는가?

아니, 공은 공중에 있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이번 쿼터 들어 한 번도 슛을 쏘지 못했다. 하늘색과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내 앞을 달려가 우리 골대에 덩크를 한 골 꽂아 넣는다. 그의 등판에 쓰인 글씨는 테이코가 아닌 라쿠잔이다.

지금은 라쿠잔전 3쿼터 7분, 우리 슈토쿠는 윈터컵 본선 준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다.

스코어는 57 대 46. 방금 덩크로 라쿠잔에 2점이 올라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멍하니 서 있어선 안 된다. 점수가 더 벌어지게 두어선 안 된다.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또 달린다. 하지만 공도 선수도 눈앞에서 번번이 놓쳐 버린다.

하프 타임까지는 동점이었지만 ‘아카시’가 미도리마를 마크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천제의 눈이라고? 저런 거, 어떤 경기 영상에서도 본 적 없었다. 미도리마의 말이 이런 뜻일 줄은 전혀 몰랐다. 미도리마는 이번 쿼터 원온원에서 동작에 들어가기도 전에 슛을 커트당했다. 완전히 무력했다. 어쩌자고 나는 미도리마도 이기지 못하는 상대에게 대항하겠단 생각을 했던 걸까. 멋대로 질투를 품었을까. 어쩌면 실력 차가 크지 않을지 모른단 망상에 나는 전반 내내 포인트 가드로서 아카시의 실력을 재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미도리마에게서 빼앗은 공을 들고 달려온 아카시를 막아섰을 때 그 자식은 어떤 기술도 쓰지 않았다.

“이건 못 뚫을걸!”

“뚫어? 그럴 필요 없어.”

그저 나를 보았을 뿐이다. 그뿐이었는데 나는 무릎이 풀려 꼴사납게 그 자식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카시를 보려면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아야 했다.

보란 듯이 그 자식은 위로 슛을 던져 올렸다.

“머리가 높다.”

숨통을 틀어막는 이 지독한 무력감. 아, 또다. 또 이 높이다. 이 빌어먹을 높이차.

 

“타카오! 정신 차려라!” 3쿼터가 끝나고 짧은 휴식 시간, 이온음료를 들이키는 내 등을 감독님이 세게 때리셨다. “아.” 나는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아프라고 때리신 만큼 아팠다. 하지만 한 번 나간 정신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4쿼터가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호각이 울리자마자 한 골 먹은 우리는 라쿠잔에게 14점이나 뒤지게 되었다. 14점 차! 농담이지? 슈토쿠에 온 이후로 본 적 없는 점수 차였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20점 이상의 우위로 승리해 왔다. 세이린에게는 이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럴 수밖에, 우리에게는 ‘기적의 세대 미도리마 신타로’가 있었으니까…….

어디서든 3점을 넣는 천재 에이스님, 언제부턴지 나는 그 모습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팀에서 뛰는 게 좋았다. 어떤 경기에서든 뒤를 돌아보면 흔들림 없는 자세로 버팀목처럼 꼿꼿이 서 슛을 쏘아 올리는 미도리마가 있었다. ‘내 슛은 반드시 들어간다.’ 그 프라이드, 자신감, 그가 내 등 뒤에 있단 걸 상기하면 날아갈 듯 다리가 가벼워졌다.

하지만 지금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묶여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후반부 들어 그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슛이든 드리블이든 들어가기도 전에 커트되었고 심지어 패스조차 트리플 스렛에서 막혔다. 아카시에게 공을 빼앗기고 너는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네 얼굴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네 뒤를 이어 선배들도 아카시 앞에 무너졌다. 오오츠보 선배의 방어가 깨졌고 아카시의 패스를 받은 상대 센터가 득점을 또 올렸다.

어지러웠다. 현실 감각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종종 꾸던 과거의 악몽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질이 나빴다. 최소한 꿈속에서 하늘색 저지를 입은 너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반면 저만치 보이는 슈토쿠 저지 차림의 네 얼굴엔 새까만 절망이 드리워 있었다. 나는 그 절망에서 눈을 뗄 수 없어 괴로웠다. 그 모든 게 마치 아카시를 막지 못한 내 잘못인 것만 같은 기분에 목이 탔다. 목이 너무 탔다.

그 마음이 내 발을 움직였을까.

“그렇다면 내가 직접!”

발악처럼 소리치며 나는 공을 잡아채 라쿠잔 쪽 골대까지 달렸다. 속공이었다. 지난 몇 주간 죽도록 노력했다. 너무 힘들어 먹은 걸 다 토해내면서도 난 버텼었다. 무엇을 욕심내 그렇게 열심이었던가, 뱃속이 울렁거렸다. 가장 내밀한 마음속 목소리가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만약에, 내가 여기서 ‘아카시’를 제친다면, 그래서 흐름을 우리 쪽으로 가져오고 어떻게든 따라잡는다면 너도……

골대가 눈앞이었다. “잠깐~” 그런데 아카시 세이쥬로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있었다는 걸 잊으면 섭섭하지.”

아카시가 아니었다. 무관의 오장, 라쿠잔의 슈터가 백코트로 다가와 있었다. 아카시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바로 뒤를 잡힐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무섭도록 깔끔한 실력이었다. 내게서 공을 빼앗은 놈의 등이 멀어져 갔다. 다시 수비에 가세하러 달려가야 하는데 발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라쿠잔 6번.

그러고 보면 그 녀석이었다. 2쿼터 때 저 녀석이 미도리마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결국은 너만 빼고 다 짐짝이란 소리지. 미안하지만.’

하프 타임에는 동점을 만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전반전에서도 우리 슈토쿠는 라쿠잔을 따라가는 데 급급했다. 아카시는 ‘눈’조차 쓰지 않았고 적 다섯 중 둘은 미도리마를 마크했는데 그랬다. 미도리마의 득점으로 어떻게든 점수는 올렸지만 팀의 내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라쿠잔 슈터가 그 말을 했을 때 하필 나는 미도리마 근처에 있었다. 응원, 함성, 운동화와 코트의 마찰음, 경기장에 가득한 소리 중 하필 그 말이 귀에 선뜩 꽂혀 주의를 놓친 순간 공을 스틸당했고…… 그리고…….

미도리마가 무어라 대답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짐짝이라, 도발이었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뛰면 뛸수록 그 말이 가시처럼 마음 깊이 박혀 들어왔다. 경기는 점점 최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도리마 널 이기게 해 주겠다고? 현실은 짐짝이고 걸림돌이었다.

라쿠잔 슈터에게 빼앗긴 공이 아카시에게 넘어갔고 미도리마가 막아섰지만 아카시의 슛은 또 들어갔고, 라쿠잔에는 2점이 더 올라갔으며,

미도리마는 아카시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두 손을 늘어뜨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낮아진 네 뒷모습. 온 코트가 숨을 죽이고 작아진 널 바라본다.

주저앉은 너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너는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고, 무엇이든 확신을 담아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상하고 독특하고, 진지하고 순수했으며, 오만했다. 너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나는 코트를 가로질렀다. 발이 네게로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가도 너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바로 뒤에 멈춰섰지만, 손을 뻗으면 등에 닿을 거리였지만 손을 내밀었지만 너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네가 너무나 멀었다. 내가 너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잡아……. 미도리마.”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개미 눈물만큼 작았다.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때였다. 미야지 선배가 다가왔다. “언제까지 멍하니 앉아 있을 거냐!”

키무리 선배가 응원석을 가리켰다. “저 글씨가 안 보여? 정신 똑바로 차려!”

현수막에 휘날리는 불요불굴不屈不撓. 오오츠보 선배가 말했다.

“포기하지 마라!”

전광판에 남은 시간이 반짝거렸다. 경기 종료까지 6분 15초. 다시 옆을 보았다. 

“타카오, 지금……. 해 보자는 거다.”

네가 일어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고서. 

두 번째 기회를 받은 기분이었다.

 

공을 가진 공격 측에게 허용된 시간 24초.

우리 팀에서 공을 든 건 나였다. 3점 라인에 선 너는 쉽게 움직이지 않은 채 골대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전광판에 표시되는 시간이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12초, 9초, 선배들의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모험이다, 이건. 4쿼터 후반이고 만일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간 온 경기장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모두들 전의를 잃어버릴 거다. 하지만 아까의 절망이 무색하게 이제 나에게 불안 같은 건 없었다.

네가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고요하게 골을 바라보고 서 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동작으로 네가 코트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기억하는 모습과 다른 점은 네 손에 공이 없다는 것.

그리고 공은 내 손에 있었다. 남은 시간 3초, 타이밍과 궤도는 알고 있다.

“3점?” “들어갔어?”

“저게 대체 뭐야?!”

어때, 깜짝 놀랐지! 내 패스를 공중에서 그대로 잡아넣은 미도리마의 슛에 온 경기장이 뒤집어졌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손바닥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우리 슛에 흔들린 라쿠잔 포워드의 동요를 오오츠보 선배는 놓치지 않았다. 선배가 내게 패스했을 때 미도리마는 이미 슛 동작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공, 막힘없는 3점! 라쿠잔 녀석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도 그렇지, 이건 아카시조차도 커트할 수 없는 슛이었으니까. 4쿼터 후반, 이 시점에 흐름이, 이쪽으로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아카시에게 선언하는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쿠잔 센터의 공격을 리바운드로 받아 낸 오오츠보 선배가 내게 패스를 넘겼다. 오른편을 돌아보니 네가 벌써 슛 자세에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나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처럼…….

연속 3점 슛으로 점수 차는 11점으로 좁혀졌다. 완벽한 호흡이라고, 코트 밖의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 내내 짐짝밖에는 되지 못했던 주제에, 이제야 에이스님의 고요에 받아들여진 듯한 달콤한 감각에 사로잡힌 나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패스를 던져 올렸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손발 끝을 흐르는 피가 짜릿했다.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그러나 고조되던 분위기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살골로 단번에 꺼뜨려졌다.

자살골이라니, 지면 자기 눈을 어쩌겠다고? 기적의 세대라는 놈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 건가? 아카시의 그 말은 그래도 어쨌거나 라쿠잔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공에 손도 못 대게 하겠다고? 아카시의 지시로 나에게도 더블 팁이 붙었다. 미도리마의 높이를 막을 수는 없으니 미도리마에게 보내는 슛을 막겠단 심산인 모양이었다. 젠장, 미도리마도 떨쳐 내기 어려워했던 라쿠잔의 수비였다. 관중석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 말대로였다. 이대로는 패스를 할 수도, 미도리마의 손에 공을 던져 줄 수도 없었다. 엄청난 압박감이다. 하지만, 나는 미도리마 너를 보았다. 라쿠잔 두 녀석 너머에 금방이라도 슛 폼에 들어갈 듯한 네가 있었다.

“흥, 이 정도는 될 줄 알고 있었지.”

마치 내게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너의 모습에, 이제 나는 정말 너의 파트너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미도리마, 네가 내게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노력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차디찬 밤바람을 맞으며 끝도 없는 계단을 오르다 온몸이 아프고 숨이 벅차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머릿속의 되감기 버튼을 눌러 과거 내가 했던 그 말을 듣고 또 들었다. 너는 이미 잊었겠지만, 분명 그랬겠지만,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너에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만한 패스를 할게.’

미도리마, 신쨩, 이 저편에 내 패스를 기다리는 네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순순히 막히겠냐?

“천재의 파트너가 이런 걸로 당황해서야 되겠냐.”

너는 이미 골대를 바라보며 슛 동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네 손이 비어 있는 게 보이는데

“얕보지 마!”

달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천재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겠어?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라쿠잔의 두 녀석을 뚫고 뛰쳐나가 너에게 공을 던졌다. 하지만 그 공은 너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말했잖아. 절대적인 건 나라고.”

아카시 세이쥬로.

공을 받지 못한 네 빈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카시는 어린아이들에게 마술의 트릭을 설명하듯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미도리마의 슛 동작, 방향, 패스 타이밍을 진작 파악하고 있었단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아카시 정도 포인트 가드를 상대하면서 그 정도는 당연히 고려했고, 이쪽에서도 아카시의 위치와 속도를 계산해 올 수 없겠다고 판단한 순간 공을 던졌던 거였는데…….

“설마, 이미 거기까지 포석을 두었을 줄이야.” 미도리마가 말했다. 순간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듯 나는 상황을 이해했다.

저 녀석은 내가 파악할 걸 대비해 전반 동안 속도를 늦춰 두었던 것이다. 그것도 미도리마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범위에서. 아. 이게 뭐야, 나는 완전히 당해 버렸다. 사십 분 경기 내내 저 녀석이 짠 판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울고, 웃고, 절망하고 다시 기뻐했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원숭이 꼴이었다. 아까까지의 모든 희망이 거대한 역류가 되어 나를 덮쳤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포기하지 마!” 그때였다. “아직 할 수 있어!” 응원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끌리듯 관중석을 돌아보자 불요불굴의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 이제 뭘 더 한다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아카시 손에 놀아나 버린 짐짝이었고, 이제 뭘 해도 널 이기게 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안 될 걸 아는데, 알면서도.

공을 든 라쿠잔의 슈터가 움직였다. 굽히지도 굴하지도 말라는 응원 구호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그게 나를 움직였다. 도저히 이대로 전부 끝나도록 둘 수 없어서, 그렇게 당하고도 욕심을 포기하지 못해 나는, 있는 힘껏 골대로 뛰어올랐다.

“타카오!”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내 마지막 발악은 파울을 동반한 3점 실점으로 끝났다. 선배들이 분전했지만 점수 차는 계속 벌어졌고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마지막 슛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남은 시간 0.0초. 최종 스코어 86 대 70. 라쿠잔 승, 16점 차였다.

응원석 앞에 정렬해 인사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만 움직였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커다란 현수막이 나를 놀리듯 펄럭이고 있었다.

뭐가 불요불굴이냐.

뭐가.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마음만 아파졌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라는 게 있는 거다.

땀을 흘리면 흘릴수록 더 분해질 뿐이다.

그게 이 경기로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코트 밖으로 나가는데 뛰지 않고 걸으니 편했다. 진작 이렇게 땀을 아낄 걸 그랬지, 중학교 인터하이 테이코전에서 진작 배워야 했던 교훈이었는데.

“4강이라. 이게 우리 실력이겠지. 천하의 라쿠잔을 상대로 잘 싸웠네.”

“…….”

그랬다면 이 녀석과 이렇게 나란히 걸을 일도 없었겠지? 녀석의 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나는 녀석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어라? 미도리마. 상처가 크냐?” 녀석의 눈이 젖어 있었다. 아, 네가 우는 얼굴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 부족함 때문에 네가 울게 된 것 같았다. 이 이상 어떻게 마음이 아플 수 있을까?

지옥 같았던 경기 끝, 최악의 마무리다.

내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미루어 온 벌을 이제 받는 기분이었다. 미도리마. 미안. “그래도 미안해.” 미안해. 나는 결국 해내지 못했다. 라쿠잔의 슈터가 한 말이 다 맞았다.

“지금은 나도 달래 줄 여유가 없거든.”

천재의 파트너는 무슨…… 네가 울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의 절망을 추스르기 벅차다. 뺨으로 턱으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이런 내가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못났다.

 

*

 

“야 미도리마! 타카오 거기 있냐?”

미야지 키요시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찾았을 때 미도리마는 경기장에서 대기실로 통하는 통로에 서 있었다. 쿠로코 테츠야, 카가미 타이가와 함께였다. 슈토쿠는 에이스 없는 카이조에게 승리해 3위를 결정지었고, 카이조를 이기고 올라온 세이린은 라쿠잔과의 결승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은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타카오? 타카오라면 여긴 없다는 겁니다.”

“그래?”

“타카오에게 무슨 일이라도?”

미야지는 카가미와 쿠로코를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졌어. 이제 결승인데 대체 어딜 간 거야? 미아 찾기 방송을 할 수도 없고…… 너도 담소 끝나면 좀 찾아봐.”

말을 마친 미야지는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카가미가 말했다.

“타카오? 그 녀석이라면 네 파트너잖아,”

“그래.”

“아까 지나가지 않았냐?”

“그렇지.”

그렇다. 그들이 막 모여 섰을 때 저만치에서 타카오가 지나갔었다. 시끄럽게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만큼 대화에 끼지 않을까 했는데, 웃지도 않고 ‘그럴 기분이 아니다’라며 어디론가 가 버린 모습이 미도리마의 마음에도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타카오 군 표정 어두웠지요.”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왜 진작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지? 미도리마는 갑작스러운 당혹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타카오가 사라졌다니, 그런 어두운 얼굴을 남기고. 라쿠잔과의 경기 때문인가? 하지만 미도리마가 아는 타카오는 고작 경기 패배 따위로 절망할 녀석이 아니었다. 아까 경기 중에도 주저앉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던가.

어쨌든 우선 타카오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난 그만 가 봐야겠어.”

“그래요” “그래.” 쿠로코와 카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마가 돌아서려는 찰나 쿠로코가 말했다. “아, 그런데 미도리마 군, 많이 변했더군요.”

“변했다고? 내가?”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카오를 찾겠다고 나섰지만 막상 혼자가 되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주요 통로들을 빙빙 돌아보다 슈토쿠 대기실로 돌아가자 미야지, 키무라, 오오츠보가 그를 돌아보았다.

“타카오는요? 아직……?”

“못 찾았어. 체육관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미야지가 말했다.

“더 찾을 수는 없었어. 우리는 결승전을 지켜봐야 하니……. 감독님 혼자 보시게 할 수는 없잖냐.” 키무라가 말했다.

미도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타카오가 경기장 밖으로 나간 것 같다고? 경박하긴 해도 돌발 행동은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어쩌면 좋지, 곧 결승전이었다. 3, 4위에 입상한 학교 주전은 의무적으로 결승을 관전해야 했다. 게다가 결승전 직후 시상이 있었다. 아예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면 시간에 맞춰 데리고 돌아오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선배들은 타카오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지는 때도 있는 법이겠지.”오오츠보가 말했다. “그런데 미도리마, 당분간 타카오한테 잘해 줘라. 상심이 큰 모양이야.”

“예?”

“그 슛 말이야. 너희 둘이 같이. 녀석 그거 성공시킨다고 노력 많이 했거든.”

금시초문이었다. 눈을 크게 뜬 미도리마의 표정을 본 오오츠보가 부연 설명을 했다.

“너한테는 말 안 했을 거야. 나도 우연히 밤에 혼자 연습하는 거 만나서 알았으니까. 그렇게까지 했는데 라쿠잔에…… 그렇게 됐으니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다.”

미도리마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야지도, 키무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타카오의 노력을 알고 있었던 건가? 설마 지금껏 자신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라쿠잔에, 아카시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갑자기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편한 감각이 올라왔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던 중 아주 기본적인 조건을 누락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처럼……. 오오츠보가 말했다.

“그 녀석이 너한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거 알고 있잖니.”

전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알고 있었다. 본인에게 직접 들었던 것이다. 사실 기억하고 있었다. 경박한 웃음이 섞인 그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오래전 녹음된 테이프처럼 돌아갔다. ‘네가 나를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어.’ ‘기억해 둬, 미도리마!’

‘싫어. 내가 왜 그런 걸 기억해야 하는데.’

다음 순간, 미도리마 신타로는 대기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고 있었다.





4. Eye Contact

 

 

미도리마는 패배의 충격을 잘 떨쳐 낸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본 미도리마는 세이린 녀석들과 함께였다. ‘쿠로코’와 ‘카가미’라……. 내가 낄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를 벗어나기 전 흘긋 돌아본 녀석은 꽤 멀쩡한 표정으로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달래 주어야 하나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니 다행이었다. 그 자존심에 상처가 컸을 텐데 과연 미도리마다. 무슨 일에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다. 그런 점을 좋아한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그렇게는 될 수 없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다 흘긋 유리창을 보니 반사된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꼭 뭐라도 저지를 것 같은 얼굴이구나. 스스로를 전혀 추스르지 못하고 속에 든 걸 전부 드러내 버리는 이 추한 꼴,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곧 결승이었지만 평소처럼 선배들 사이에 끼어 실실 쪼개며 너스레를 떨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정과 염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체육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었던 모양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로를 따라 죽 걷자 주차장을 끼고 경기장을 이웃한 작은 공원이 보였다. 도심에서 떨어진 체육관 옆 공원은 놀랄 만큼 조용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나는 공원에서 가장 외진 위치에 외따로 놓인, 가장 외로워 보이는 노란 철제 벤치에 앉았다. 경기장에 등을 돌리고 앉으니 좋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십이월의 쌀쌀한 초저녁 공기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곧 눈 깜짝할 새 세상이 어두워질 것이다. 이 계절엔 밤이 빨리 왔고 공기가 금방 차가워졌다. 저지 위에 점퍼를 걸친 채였지만 몸이, 특히 손이 급속도로 식어 갔다. 이대로 바깥 공기를 쐬면 감기에 걸리겠지. 하지만 나는 손이 차게 굳는 것을 느끼며 그저 앉아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가슴을 깊이 메웠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공기를 들이마시면 마실수록 가슴에 뚫린 구멍이 커져 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니, 경기장으로부터의 진동이 느껴졌다.

관중들의 환성이다. 결승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기적의 세대가 출전하는 전국 대회의 최종전이니만큼 텔레비전 방송국의 취재진까지 몰려오는 등 열기가 뜨거웠다. 라쿠잔 대 세이린인가, 세이린의 둘은 공식적인 ‘기적의 세대’로 꼽히지는 않지만 뭐, 미도리마에게 인정받은 녀석들이니 그 급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든 아카시를 상대해 낼지도 모르지. 난 어느 쪽도 이길 수 없었지만.

기적, 무관, 인정…… 그런 게 다 뭐냐.

애초에 나로선 상대가 안 되는 경지였다. 조금이라도 그 높이에 닿아 보겠다고 까치발을 들고 발버둥 쳐온 시간이 아까웠다. 어쩌면 이제 농구를 그만둘 때가 온 걸지도 몰랐다. 중학 인터하이가 끝난 순간 모두들 알았던 걸 나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멍하니 과거를 헤집고 앉아 있으려니 시간이 가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전반전은 끝났을까. 너는 감독님과 선배들과 함께 경기를 잘 보고 있을까? 난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까? 미도리마 너를 생각하자 다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히 보이는 네 꼿꼿한 뒷모습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발소리가 하나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소리라기보다는 기척이었다. 아까 전부터, 멀리서부터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주 익숙했다. 나는 내가 또 꿈을 꾸나 했다.

꿈 속에서도 나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타카오.”

“미도리마.”

너는 내가 앉은 벤치 등받이에서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누군가 찾으러 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너였다.

네가 말했다. “왜 이런 데 있냐는 거야.”

“신쨩이야말로……. 왜 왔어? 결승이잖아. 감독님이 나 불러 오라셔?”

“결승전은 이미 시작했어. 세이린과 라쿠잔의 경기라는 거야. 그리고 난 널 찾으러 왔어.”

미도리마가?

“날 찾으러 왔다고?”

그렇지, 녀석이 지금 여기 있을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왜? 감독님이 시키셨나? 같은 일 학년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벤치 뒤에 서 있던 미도리마가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반사적으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표정을 제대로 감출 자신이 없었다. 미도리마가 말했다.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아하. 그제야 납득이 갔다. 네가 흘린 눈물이 내가 받은 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는 내게 직접 말해 주려는 것이었다. 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최악의, 그리고 현실적인 장면들이 지나갔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귀를 막지 않고 네가 할 말을 듣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타카오.”

역시 넌 안 되겠다는 거다. 라쿠잔 슈터의 말대로, 너는 짐밖에는 되지 못했다. 아카시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했지. 실망했다. 너는 나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너를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다는 거다.”

어……?

잘못 들은 걸까?

두려움이 너무 크면 환청을 듣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미도리마가 진짜 한 말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귀가 현실을 부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계속 말했다.

“너 아닌 누구도 그런 패스를 해 주진 못했을 거다.”

뭐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농담이야……?”

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네가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거다.” 네 눈이 보였다.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익히 아는 눈, 농담이라고는 모르고, 언제나 진지하고, 전력으로 사람을 대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그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너는 말했다.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제야 네 눈에 비칠 내 얼굴 표정이 무척 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진짜 뜬금없는 거 알아?”

나는 울고 있었다.

“엄청 뜬금없다고…….”

“……늦어서 미안하다.”

그 말이 마치 결정타처럼 나를 때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겨우겨우 추슬러 숨을 쉬게 되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다 보니 뺨과 손이 다 얼어 갔다. 아까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어디에 이렇게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너는 커다란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진정되자 네가 말했다.

“……너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거야.”

그런데 그때 나는 문득, 너에게서 이상한 기색을 감지했다.

나는 너무 울었고, 힘이 하나도 없었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미도리마, 네 기색을 모르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

그건 일종의 긴장이었다. 또 불안이고, 초조함이기도 했다. 네가 내 기분을 살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었을까? 멍하니 너를 올려다보자 너는 기어이 짜증을 냈다. “그만 보고, 타카오. 말할 게 있으면 어서…….”

하지만 신쨩, 미간을 찌푸린 네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착시도, 환청도 아니었다.

어쩌면 네가, 내가 너에게 할지도 모르는 말들을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까 네 말을 기다리며 똑같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미도리마.”

우리 사이의 거리는 내 걸음으로 한 걸음 반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지만 나는 한 번도 네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멀었던 한 걸음 반.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손을 뻗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쨩.”

내 손에, 네 몸이 닿았다. 네 반듯한 어깨, 두 팔. 그런데도 너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리 와.”

나는 네 눈을 보고 말했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 걸음 다가가 나는 너를 끌어안았다. 너는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내 품으로 밀려왔다. 이 차가운 날씨에 네 몸에서는 열이 나고 있었고 그건 이제 나도 마찬가지였다. 키가 큰 너는 머뭇거리며 어깨를 수그렸고, 나는 너를 안은 팔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너와 내 몸이 천천히 맞닿았고, 운동복 너머로 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 기대어 오는 네 무게감이 기적 같았다. 그게 바로 기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가까웠다. 신쨩,

너와 나만이 그 거리를 알고 있었다.









Epilogue


 5. 타카오 카즈나리

 

 

윈터컵 준결승 경기 종료 6분 전, 스코어는 71 대 51. 20점 차.

나는 골대를 바라보고 있다.

초등학생 때 농구를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에이스에 올랐고, 셀 수 없이 많은 시합에 나갔으며 누구보다 노력했다. 아침저녁으로 하는 슛 연습은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진인사대천명, 공식전에서의 슛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인사를 다했다. 그러므로 내 슛은 들어간다. 한 번도 그 점에 의심을 품어 본 적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조금 다른 걸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13초, 10초, 공격 측에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전광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관중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9초, 7초, 누군가 입으로 숫자를 세고 있는 것 같았다.

전광판의 숫자가 6에서 5로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의 압박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몇 걸음 뒤에 선 네가 느껴졌다.

타카오.

 

너에 대한 내 첫인상은 결코 좋지는 않았다.

학기 초의 어수선한 공기를 피해 사람이 드문 구관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네가 뒤에서 나를 불러세웠다. 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오하아사에 대해 얘기하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네가 나를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기 초부터 너는 교복 단추를 위에서 두 개 풀고 있었고, 경박해 보였다.

전통 있는 강호라서일까. 슈토쿠의 연습은 테이코와 맞먹거나 그 이상으로 혹독했다. 중학교에서 솜씨를 뽐내던 선수들이 매일 하나둘씩 떠나간다.

하물며 일 학년 중에서 연습 후에 남아 개인 훈련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너는 나만큼이나 연습을 버텨 냈고, 자율 훈련 시간에 내가 연습하는 걸 보며 웃곤 했다. 그게 귀에 거슬렸다.

“무슨 꿍꿍이야?”

또 내 뒤에서 웃고 있던 너와 마주 보았을 때 나는 네가 테이코 시절 수도 없이 보았던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나 발에 차이도록 있는 건들거리는 녀석. 테이코에서 주전으로 뛰며 받은 시선은 크게 둘이었다. 동경, 혹은 적대.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그런 녀석들은 포기가 빨랐고 인사를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다. 제대로 노력도 하지 않은 주제에 졌다는 것에만 앙심을 품고 내가 지나갈 때 몸을 부딪쳐 오거나 빈정대는 말을 던지곤 했다.

“최근에 내가 남아 있을 때는 너도 거의 있더군. 연습 때도 자꾸 경쟁하는 느낌이 들던데. 나한테 특별한 적의라도 있어?”

“뭐,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 이라. 답을 예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역시……. 생각 안 나는 모양이구나. 실은 나, 중학교 때 너랑 한번 붙었다가 진 적이 있거든.”

하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그때 나를 올려다보며 지었던 네 표정이 내 머릿속엔 필름 사진처럼 남아 있다. 일종의 충격이었다. 나에게 졌던 사람 중 누구도 ‘졌다’라는 말을 그런 얼굴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농구로 붙어 오지도 않았다. 너는 나에게 인정받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럴 생각도 없겠지만, 아직은 인정하지 마라. 나는 그저 너보다 더 연습한다, 스스로 결심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너는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타카오, 이후로도 너는 한 번도 나보다 먼저 돌아간 적이 없었지.

그래서일까.

그 빗속에서 네 얼굴을 생각했다.

인터하이 예선에서 세이린에게 지고 나는 패배가 아팠다. 인사를 다한 슛이 점프에 막혔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데도 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졸업한 학교는 무패의 테이코였다. 그건 내가 공식전에서 처음으로 맛본 패배였다. 시합이 끝나고 나는 경기장 밖으로 나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뺨을 흐르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렵고 아팠다. 분했다. 그래서 네 생각이 났다, 타카오. 빗속에서 눈을 감았는데 네가 보였다. 나에게 ‘졌던 적이 있다’고 말하던 네 생각이 났다.

지금 체육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너에게마저 지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온 나에게 너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양 웃으며 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패배를 겪었을 텐데도 너는 그랬다.

그러니까 타카오, 나에게 패배를 가르쳐 준 건 너인 셈이다.

아카시 앞에 무너졌을 때도 너는 스스로 일어섰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다가와 주었다. 잡으라고, 뒤에서 들리는 네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생각했다.

지금 일어나지 못하면 그건 너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너는 나를 항상 일으켜 세운다. 나를 잡아 준다.

 

이 슛은 내가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거였다. 나는 무엇이든 혼자 하는 걸 좋아했다. 세상에 노력하는 건 나뿐이고, 인사를 다하는 것도 나뿐인 줄 알았다. 농구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5초. 전광판의 숫자가 바뀐다. 공식전에서 이걸 시도해 보는 건 처음이다. 이건 함께 던지는 슛이다. 모험이다. 혼자 인사를 다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나를 믿는 것 이상으로 너를 믿어야 한다. 하지만 타카오,

나에게 불안 같은 건 없다.

4초. 또다시, 나는 네 얼굴을 생각한다. 슛 동작에 들어가자 주변의 술렁임이 느껴졌다. 비어 있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3초. 두 발이 코트를 박차고 떠올랐다. 나는 네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슛이 반드시 들어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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