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까지 준호의 목을 조여오던 두터운 손이 사라지자 막혀있던 목구멍으로 빠르게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몸이 간신히 숨을 내뱉으며 급하게 캑캑거렸다. 준호는 목과 얼굴이 붉어지고 눈꼬리에도 눈물이 찔끔 맺히는 것을 느꼈다. 힘겨워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더 집요하게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이 치솟는 최 팀장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더 빨랐다. 그는 이미 본능에 충실하여 준호의 뺨까지 거하게 내리친 것이다. 짝-! 소리와 함께 돌아간 고개는 얼굴 한 쪽 면을 다 가릴 만큼 크고 두꺼운 손바닥과의 마찰로 인해 금방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말 잘 들으면 돼."



 본래 가진 뽀얀 피부와 상대적으로 점점 붉게 짙어져가는 뺨과 눈가가 눈에 띄었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 제자리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꽤나 세게 가해진 힘에 의해 돌아간 옆선과 헝클어진 머리칼이 그 모습을 더욱 가련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준호를 고통 속에 빠트리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청순하기까지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순간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동물인지 인간인지도 모를 이 남자는 아무래도 누구든 간에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잠시 넋을 놓은 최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이 스치고 간 자리를 어루만졌다.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쓸어주는 손길이 마치 소중한 것을 대하듯이 행동했다. 미친놈…. 기분이 더러워 잔뜩 인상을 찌푸린 준호는 고개를 바로 해 결코 마주보기 싫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부딪혀오는 최 팀장의 두 눈은 저를 집어삼킬 듯이 강한 기운을 내비쳤다. 복잡한 감정들이 온데 엉켜 만들어 낸 살기가 드글한 것이 확실히 지금 이 남자의 눈빛은 여느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씨발, 변태 새끼…. 황찬성 어디 있어, 나 지켜준다며…!






구미준호뎐_제 6장






 그 시각, 찬성은 사라진 준호를 찾느라 이 넓은 연회장과 주변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술도 못하시고 어디 취해서 널브러져 있을 일도 없는데…. 이런 자리를 싫어하니 잠깐 얼굴만 비추고 얼른 돌아가자던 준호가 돌아오지도 않고 이곳에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제가 잠시 놓아둔 휴대폰 옆으로 이사님의 휴대폰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주인은 온데간데없는 것이 제일 아이러니했다.



"아니, 회장님이 오늘 파티 주최하시고는 왜 못 나오셨대?"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으시다나·· 암튼, 그 아들이 오늘 대신한다더라-."



 잠시 멈춰서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던 찬성의 옆으로 소곤거리는 대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엿들어버렸다. 이사님은 회장님을 만나러 가셨는데··. 회장님은 오늘 이곳에 못 오셨다? 그럼 이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까부터 올라오던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아님 오늘 내가 뭐 잘못해서 그냥 혼자 가버리신 건가, 휴대폰도 내던지고?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온 걱정스러운 마음은 뒤에 꼬리의 꼬리를 물며 온갖 가설을 모두 세울 작정이었다. 찬성은 초조한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발만 옴짝달싹 거렸다. 갈 곳 잃은 휴대폰만을 손에 꽉 쥐고는 입술을 물어뜯는 찬성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어미 잃은 새끼 강아지 같았다.





"…저기요! 혹시 여기 계시던 남자분 못 보셨나요?"



 오늘 파티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왔다 갔다 하며 자주 본 듯 눈에 익은 웨이터를 급히 붙잡아 준호의 얼굴 사진부터 대뜸 들이밀었다. 입고 있던 인상착의까지 이야기하니 곰곰이 사진을 쳐다보던 웨이터가 아! 불현듯 급하게 파티장을 나가던 준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구 쫓아서 엄청 다급하게 가시던데··? 저쪽 코너로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봤다는 남자의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찬성은 이미 그 방향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긴 복도를 따라간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인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이쪽이 아닌가…. 조용한 공간에 유독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는 듯해 주변을 한 번 돌아본 찬성은 아무래도 이곳은 아닌 것 같아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찬성은 소리를 따라 좀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이-, 우리 여기 말고 위에 호텔로 가자. 응?"



 몸을 돌려 다시 한번 코너를 꺾어 들어가자 그곳에는 인사불성이 되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그 옆으로 온몸에 힘이 빠진 남자를 부축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여성은… 파티장에서 본 유명 배우였다. 불과 몇 년 전, 한국에서 흥행하기 힘든 로맨스 영화가 단숨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 영화 속 여주인공 역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특유의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로 남성들의 국민 첫사랑 자리를 매김 하며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으로, 찬성은 제 친구 놈이 이 여배우 얼굴이 들어간 소주만 마시던 것을 기억해 냈다.



"…뭘 봐?"



 길게 난 복도의 한편에서 지나치지도 않고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찬성이 영 신경 쓰였는지 여성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예쁘게 세팅된 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붙잡고 있던 중년의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치자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우스꽝스럽게 넘어갔다. 그 꼬락서니를 보며 비웃던 여성은 이내 남자의 몸을 더듬거렸다. 무엇을 찾는지 바지 주머니와 외투를 만지던 손길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두툼한 감촉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익숙하게 지갑 속에서 남성의 블랙카드와 수북하게 겹쳐진 현금도 모조리 빼낸 그녀는 별안간 찬성과 눈이 마주쳤다.



"원래 이런 곳이야, 뭘 그렇게 놀란 눈을 해?"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착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꽤나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성이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없는 찬성에 재미가 없는지 금방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미니 파우치를 닫으며 무신경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 본거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고 그럴 건 아니지? 여기 오는 사람들이면 다 알 만큼 알잖아-."



 이제서야 모두가 아는 국민 첫사랑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크고 맑은 눈동자를 이용해 자신에게 입단속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하며 행커치프가 들어가 있는 찬성의 자켓 가슴에 오만원권 지폐 몇 장을 찔러 넣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멀어지는 뒷모습은 고급스러운 실크 소재의 드레스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몸에 꼭 맞게 주름잡혀 그녀의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더욱 굴곡지게 부각시켜주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찬성은 제가 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봐버린 것 같은 기분에 난처한지 그저 어정쩡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모든 남성들의 이상형 후보 중 부동의 1위인 미모의 여배우와 번듯한 가정을 꾸려 슬하에 자녀도 여럿 있을 것 같은 중년의 남성 조합이라니. 진짜 이사님 말이 맞았네··. 원치 않게 그들의 뒷사정을 면전으로 확인하게 된 찬성은 자연스레 인상이 쓰였다. 입구를 막고 있던 그녀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이 깊숙한 복도는 그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문을 시작으로 VIP 고객을 위한 비밀 공간이 끝없이 즐비해 있었다. 



"하아… 난감하네."



 아직 복도에 제대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확인해버린 이곳 세상의 현실에 놀란 마음을 잠재울 새도 없었다. 문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어떠한 광경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찬성은 마음의 준비를 위해 깊은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여기가 원래 이런 곳이라면, 이사님은 더더욱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이사님의 친구도 애인도 뭣도 아니지만·· 찬성은 이제부터 몸이 움직이는 대로 무엇이든 해 볼 생각이었다. 며칠간 제 머릿속을 헝클어놓은 주인공이 남자든, 구미호든, 그냥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뜨끈하게 열이 오른 준호의 뺨 위로 여전히 손을 얹고 있는 남자는 섬뜩한 눈빛을 반짝거렸다. 이미 광기로 가득 찬 최 팀장의 눈을 보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 자신을 향해 엄포를 놓던 날카로운 두 눈이 겹쳐 보였다.



.

.

"네까짓 여우 새끼 하나 없애는 것은 나에게 일도 아니다. 아니, 너뿐만 아니라 네 어미와 같은 종족들 모조리 씨를 말려 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

"…그러니 더 이상 내 눈에 거슬리지 말거라."

.

.

"이번이 마지막 경고가 될 것이야."


 살기 어린 눈빛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만 같이 매서웠고, 그 모습은 가히 호랑이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

.



 내가 그때 그 경고를 조금이라도 새겨 들었다면…… 나는. 아니,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코 끝이 시려오는 통에 뜨끈해져 오는 눈두덩이를 지그시 감아버렸다. 엄마…,

우영아…­….



 오랜만에 우영이와 똑닮은 얼굴을 한 사람을 보아서 그런지 준호는 형용하기 힘든 마음이 이리저리 울렁였다. 그 사람은 정말 환생자가 아니었을까·· 저 대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던 어린 소년이 떠올라 급격히 속에서부터 뜨근한 것이 울컥거리며 솟아오름을 느꼈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눈물 한줄기가 준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연 있어 보이는 남자의 눈물은 꽤나 절절했으나,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기에는 딱 좋았다. 아까부터 집중하지 못하는 준호를 눈치채고는 한 손으로 뺨을 그러쥐어 자신만을 보도록 고정시켰다. 최 팀장은 열이 받는지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목을 바싹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테이블 위로 아직 깨지지 않은 병 하나를 들고는 그 안의 내용물을 원샷 할 기세로 꿀꺽꿀꺽 넘겨 삼켰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남은 술을 준호의 머리 위로 모조리 쏟아부었다.



"뭐, 놓고 온 애인이라도 생각하시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현재 남자의 기분이 뒤틀렸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술에 눈도 뜨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가만히 느꼈다. 코 끝이 싸해지는 도수 높은 알코올 냄새에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준호는 갑자기 혼자 놓고 온 커다란 멍멍이가 생각났다. …알아서 집에 갔으려나. 최팀장은 의도 없이 던진 말에 누군가를 떠올리는 준호의 모양새를 보니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져 배알이 꼬였다. 여전히 딴생각을 하는 상대에 이마가 잔뜩 구겨진 남자는 준호의 셔츠 깃을 꽉 쥐어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자락은 거센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힘없이 단추가 후드득 나가떨어졌다. 작은 알맹이들이 사방으로 튕기며 가볍게 통통 튕기는 소리가 테이블 위로 온데 퍼졌다. 옷자락이 여며지지 못하고 양쪽으로 벌어지자 그 아래에 준호의 각 잡힌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이사님, ··이사님! …이준호!"



 양쪽으로 나있는 문이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닌 찬성은 하나씩 열어보며 준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두꺼운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텅 빈 방이면 양호한 것이, 어째 하나 걸러 하나마다 남녀 불문하고 소파에 헐벗다시피 엉켜있는 인간들을 보고 나니 찬성은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렇게 끝이 안날 것 같던 복도를 일일이 다 확인해보고 나니 제일 끝 구석에 자리한 마지막 문만이 남았다.


 여기에도 없으면 어떡하지·· 아니, 있어도 안되는데. 당장 눈앞에 준호가 보여야 안심이 될 것 같은 마음과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거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종잡을 수 없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잠재우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마지막 문을 열어젖히려 했으나 굳게 잠겨있는지 헛도는 문고리에 이내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이사님! …여기 있어요?"



 이준호-!! 찬성은 이곳이 마지막 룸인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며 크게 소리쳤다. 반대쪽 너머에서는 빈 공간인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왜인지 찬성의 육감은 이 문 너머에 준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 못 먹어도 고. 그 생각이 들자 찬성은 그대로 문을 힘껏 발로 걷어찼다.



"아오, 문은 쓸데없이 겁나 두껍네."



 타고난 피지컬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생활 덕에 누가 봐도 건강한 몸을 가진 찬성이지만 온 힘을 다해도 결코 부서지지 않았다. 쿵- 거리며 둔탁한 소리만 날뿐, 열리지 않는 문에 슬슬 승부욕까지 올라와 찬성은 자켓까지 벗어던졌다. 후우... 몸을 가다듬으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온몸에 힘을 주고 그대로 문을 들이박자 쾅-! 커다란 소음을 내며 닫혀있던 공간이 드디어 열렸다.



"…이사님?"



 그곳에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온통 깜깜했지만 복도의 조명을 등불 삼아 찬성은 더듬더듬 안으로 발을 들어섰다. 실내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발을 딛일때 마다 바닥에서 짜그락거리며 밟혀지는 소리에 찬성은 빈공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가까이 갈수록 보이는 사람의 형체는 문이 부서지며 큰소리가 났음에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하던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출입문에서부터 흩어져있는 깨진 유리조각과 하얀 가루들이 아무래도 현재 남자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남자의 아래로 손이 묶여 눕혀진 준호가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올려 둔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고 멀쩡하던 셔츠는 단추가 모조리 뜯겼는지 상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준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목덜미를 탐하고 있는 남자를 보니, 찬성은 속에서부터 깊은 빡침이 잔뜩 올라옴을 느꼈다.



"이 개새끼가-!"



 찬성은 분노가 치밀다 못해 눈이 돌아감을 느끼며 테이블 옆으로 나도는 빈 병을 들어 그대로 남자의 머리에 내려쳤다. 유리병이 깨지면서 산산조각 난 파편이 찬성의 얼굴에도 작은 생채기를 내었다. 광대뼈를 스치고 간 조각에 피가 작게 맺혔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은 남자를 곧장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미친, 변태, 새끼야! 찬성은 힘 없이 축 늘어진 남자를 미친 듯이 주먹을 내려치고 발로 걷어차도 분이 가시지 않았다. 한참을 붙들고 남자가 피떡이 되도록 쥐어 패던 찬성은 뒤에서 으윽… 준호의 앓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남자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이사님…. 정신이 드세요?"

"으, 머리..."



 골이 깨질듯한 두통에 머리를 잡으려 했지만 여전히 묶여있는 손을 보고는 찬성이 황급히 손목을 풀어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하얀 피부가 온통 까지고 쓸려 빨간 자국이 잔뜩 남아 있었다. 만지면 쓰라릴까 봐 아파 보이는 팔목을 붙잡지도 못하는 찬성은 저가 더 속상해했다. 하아, 내가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손목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준호의 모습에 등을 받쳐 상체를 일으켜 준 찬성은 자연스레 내려 보았다가 급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말라 보이지만 잘게 근육이 잘 잡힌 탄탄한 상체에 괜히 눈 둘 곳을 못 찾고 큼, 헛기침을 하였다. 자신의 자켓과 소파에 떨어져 있는 준호의 겉옷까지 찾아 다 젖은 몸을 꼼꼼하게 덮어준 후 조심히 등에 업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준호의 온몸에서 진동하는 술 냄새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황비서야?"

"네-. 제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요?"



 참 빨리도 알아챈다. 준호는 가까이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안심하며 순순히 등에 업혔다. 황비서 등짝이 이리도 넓었나.. 몸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온기가 좋아 볼이 꾸욱 눌리도록 그의 몸에 맡겼다. 거기다 제가 너 왜 집에 안 갔어?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혼자 중얼중얼 묻는 말에 일일이 차분하게 대답해 주는 찬성의 목소리도 퍽 다정하여 준호는 슬슬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진짜... 지켜줬네.."



 속으로 황찬성! 네가 나 지켜준다며! 혼자 타박 섞인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찬성이 나타나 구해줄 줄은 몰랐다. 자기가 슈퍼맨이야 뭐야·· 큰일 날 뻔한 건 그 사이에 다 잊어버린 건지 준호는 갑자기 바지 위에 팬티 입은 슈퍼맨 황비서를 상상해버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자꾸 풉풉거리며 웃음보가 터진 준호가 의아했지만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는 준호의 얼굴이 티 없이 맑아 어느새 찬성의 얼굴에도 따라 미소가 걸렸다.


 황비서가 지켜준다더니·· 진짜 나 구해줬네? 실실거리는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독한 알코올 냄새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준호는 몸과 마음에 안심이 들자 온몸이 노곤하게 풀려 술기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나 구미호인데… 인간이 구해주네. 푸흐-,"



 푸스스 웃으며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혼자 쫑알쫑알 옹알이하듯 입이 쉬지 않았다. 답지 않게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황비서어- 그거 알아? 나 사실 여우야, 여우…."

"그것도오, 꼬리가.. 아홉개!"

"……후우-. 그 새끼·· 죽여버려…."



 허, 이제 하다하다 뜬금없는 살인 예고 까지. 평소 흐트러짐 없는 모습과 달리 횡설수설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는 준호가 나름대로 귀여워 찬성은 택시를 잡으려던 것을 멈추고 이대로 조금만 더 걷기로 하였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말이 없는 준호에 고개를 돌려보니 안정적으로 내쉬는 숨결이 그대로 나의 목언저리에서 느껴졌다. 으음…,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다 말랑한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자 괜스레 불덩이에 데인 듯 그 부위가 뜨거워졌다. 지금 누군가가 찬성을 본다면 목과 귀가 새빨개져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 속으로 애국가 가사가 뭐더라·· 따위의 생각을 하며 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식혔다.


 정처 없이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찬성은 새삼 오늘 하루가 참 긴 긴 하루같이 느껴져 급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 이사님 집 모르는데? 잠이 들어 축 늘어진 준호의 몸이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자 찬성은 몸을 고쳐 잡으며 별 수없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찬성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자신의 침실로 가 준호를 조심스레 침대에 뉘었다. 저보다 체구가 작기는 하나 그래도 건장한 사내를 업고 오다 보니 몸이 후끈하게 열이 올랐다. 더워진 찬성이 잠시 옷을 펄럭이다 침대 맡에 앉아 세상 모르게 잠 든 준호를 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온 앞머리와 곱게 내려앉은 눈꺼풀이 새삼 고왔다. 이렇게 보면 무슨 20대라 해도 믿겠네.


 준호가 눈 떠 있을때에는 못 할테니 괜히 심술궂게 한 번 볼을 쿡 찔러보는 찬성이었다. 침대에서도 스믈스믈 풍겨오는 알코올 냄새에 술독에 담겼다 나온 듯 잔뜩 찌들어 있는 옷을 갈아입히려 움직였다. 덮어두었던 자신의 겉옷을 치우자 이미 옷의 본분을 잊고 너덜거리는 셔츠에 찬성은 다시 한번 속이 부글거렸다.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곤히 잠들었는지 깨지도 않는 준호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옷을 벗기려 팔을 들었다. 하지만 아직 채 마르지 못한 셔츠가 살에 달라붙어 팔 한 짝을 벗기는 데에도 애를 먹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손에 닿는 맨살의 피부 감촉이 부드러워 자꾸만 침이 꼴깍- 삼켜져 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한동안 고통받았던 하얀 목덜미에 이어 매끈하게 잘 빠진 몸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절로 긴장감이 돌았다. 아무래도 찬성에게 더 이상의 정체성 혼란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반대쪽 팔을 마저 빼내주려 목뒤로 손을 넣었는데, 하필 그때 갑작스레 눈을 번쩍 뜬 준호와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이사님, 이거는 어…. 오, 옷 좀 갈아입혀 드리려고,"



 펀뜩 자신을 쳐다보는 동공에 놀라기도 했고,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지금 껴안고 있는 내 자세가 참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당황한 찬성의 동공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느라 진땀을 빼는 찬성을 달래주려는지 준호가 그의 뺨을 다정하게 그러쥐었다. 그러고 내뱉어지는 말은...



"…우영아. 보고 싶었어··."



 올곧게 쳐다보는 깊고 진득한 눈빛이 내 심장을 마음껏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얄밉게도 그의 입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우영…. 씁쓸한 마음에 애써 못 들은 척 몸을 일으키려던 찬성은 제법 힘을 주어오는 준호의 악력에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준호의 시선은 꽤나 애절하고도 슬퍼 보였다. 그자가 누구길래 이리도 그윽한 시선을 보내는 걸까·· 방금까지 빠른 속도로 두근거리느라 터질듯했던 심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굳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본 마음이라지만 벌써부터 패배감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 할 말을 잃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내리깐 찬성의 얼굴에는 옅게 음영이 내려앉았다. 시무룩해 보이는 그의 눈과 입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준호는 양팔로 목을 끌어안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한 찬성이 붙어오는 몸을 밀어내려 하자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준호의 혀가 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준호의 리드에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살며시 눈을 감은 찬성은 작게 생각했다. 지금 당신이 키스하고 있는 건 나일까, 우영이라는 작자일까…. 설령 그 상대가 내가 맞다 한들 준호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술김에 저지르는 실수일지도 몰랐다. 오늘 안 좋은 일을 겪어 심신미약인 상태이기도 하고 거기다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으니 말이다. 입술을 포개어 오는 준호의 몸을 지금이라도 떼어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준호와 엉키고 싶은 내 마음이 가증스러웠다. 그런 찬성의 마음도 모르고 준호는 연신 입술을 쪽쪽거리며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사님…, 지금 실수한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찬성은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기는 것을 느꼈다. 준호의 몸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쌍꺼풀이 짙게 자리 잡은 눈이 뜨겁게 일렁였다. 힘에 밀려 눕혀진 준호는 찬성의 얼굴을 온전하게 담느라 두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시선을 마주하던 준호는 찬성의 목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을 허락하는 몸짓에 찬성은 준호의 뺨을 그러쥐며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길고 다부진 손이 준호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고는 한마디 했다.



"지금 보고 있는 건 황찬성이에요. 똑똑히 기억해."

"…하아, 응. ……찬성."



 뜨거운 입김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눈길은 오직 서로에게만 향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준호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있었으나 찬성의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확신을 주는 그 대답에 찬성은 심장이 급격히 빠르게 뜀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100m 달리기를 한 듯 심장이 둥둥거릴 수가 있구나.


 준호의 풀린 눈동자는 한쪽에만 더 선명하게 보이는 얕은 속쌍꺼풀이 매력적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내리깐 눈이 예뻐 찬성은 눈꺼풀에 촉 가볍게 입 맞추었다. 미처 다 벗기지 못해 걸리적거리는 옷을 마저 벗겨내고는 찬성이 준호의 다리 사이로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

.

.



 하아, 하-, 하아... 빈틈없이 닿아오는 가슴이 헐떡이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빠르게 오고 가는 들숨 날숨에 원래도 다부진 골격이 더욱 팽창되어 내 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 찬성을 온전히 받아내며 등을 작게 토닥거려 주었더니 커다란 몸이 나에게 더욱 파고들었다. 덩치는 산만한 것이 따뜻한 품을 찾는 아깽이 같아 옅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찬성이 고개를 휙 들더니 장난기가 가득한 눈을 하고는 본격적으로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나에게 부비적거렸다.



"푸흐-, 간지러워.."

"……이사님."



 맨살에 스치는 느낌이 간질거려 머리를 밀어냈더니 불쑥 웃음기를 거두고는 갑자기 저를 불렀다. 뜨거운 숨을 머금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대답이 없는 나를 찬찬히 눈에 담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막상 본인 이마는 땀에 흠뻑 젖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들러붙어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흐르는 땀에 눈이 따가운지 눈썹을 작게 찡그리자 그대로 투둑 흘러내리는 모습이 미친 듯이 섹시해 나도 모르게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준호야."



 거기다 갑자기 말까지 놓고. 반말하니까 더 섹시하네…. 이래서 여자들이 연하남, 연하남 하나 보다. 불러놓고는 대답이 없는 찬성은 나를 잠자코 쳐다보고만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꽤나 진득하여 준호는 귀엽던 댕댕이가 섹시한 늑대로 변하는 느낌에 화제 전환을 하려 입을 열었다.



"야, 너 나랑 나이차가 몇 살인데..."

"......"

"...앞머리 내리니까 더 이쁘다."



 팔을 괴고는 지긋이 쳐다보다 한다는 말이 겨우 이거다. 무, 무슨… 갑자기 싱거운 소리를 하고 있어. 서로의 벗은 몸을 다 확인하고 방금까지 뜨거운 정사도 나누었지만 준호는 어째 지금 하는 담백한 고백 같은 말이 더 간질거렸다. 머쓱하게 눈을 돌리며 우물거리는 준호는 부끄러운지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민준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성격 탓에 칭찬받는 법에는 익숙지가 않았을 뿐이니까.



"이제 그만 자요… 피곤할 텐데."



 이쁘다는 소리에 당황했는지 어버버 거리며 갈 곳을 잃을 준호의 동공이 제법 웃겼다. 이사님 보면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네. 소리 없이 작게 미소 지은 찬성이 이제 그만 자자며 이불을 끌어다가 준호에게 덮어주었다. 베개며 이불이며 찬성의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이부자리가 꽤 마음에 드는지 준호는 몇 번이고 킁킁거렸다. 옆에서 찬성이 자신의 배 언저리를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려주니 금방이라도 단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낯선 공간에서 내가 이리도 따뜻함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 얼마 만에 가져보는 포근함인지 모르겠다. 창밖으로는 매서운 바람이 윙윙 거리며 창문을 힘껏 두드렸지만 잠 귀 밝은 준호가 예민하게 깨지도 않았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평온 그 자체인 모습에 찬성도 안심하며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뒤늦게 눈을 붙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오면 얼어있던 땅이 녹듯이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의 따뜻함에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시린 줄도 모르고 지내던 준호의 싸늘했던 마음이 어느새 제 온도를 되찾아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클린 버전이라 생략된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넘 오래 걸렸네요...주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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