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커밍과 인피니티워 사이 시점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소서러 슈프림이 되었음에도 의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단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는데(손이 떨려서 더는 수술을 하지 못하지만 의사 면허는 아직 남아있으니 실제로도 그는 아직 의사이다.) 이는 스티븐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인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했다. 의사로서 생명을 구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타임 스톤을 지키고, 생텀을 지킴으로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다. 그 때문에 없는 돈을 모아 겨우 참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긴 하지만 람보르기니 대신 엘드리치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은 더욱 편한 일이었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마법사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스티븐은 간혹 지난 어느 날을 되짚어보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도 지나간 수많은 날과 다를 것 없는 그런 날이었다. 슬로우모션으로 촬영한 듯 천천히 떨어지는 벼락과 함께했던 스승의 마지막 순간을 몇천 번이고 되짚어보는 일, 그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어 자신의 마지막은 항상 여기까지였다던 스승의 말이 메아리치듯 귓가를 맴돌고 자신도 모르게 아가모토의 눈을 열어 자신의 마지막을 본 그 순간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자신이 과거를 비틂으로 생겨날 균열 중 어느 것이 더 최악인가를 재보며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꿈에 전 여친이라도 나왔나?”

“뭐라고?”

“꼴이 말이 아니야 스트레인지.”


웡의 말대로 스티븐의 얼굴은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잠을 못 자서 실핏줄이 올라온 붉은 눈과 까슬해진 피부에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그의 인상을 한층 더 까탈스러워 보이게 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었어도 사람 취급도 못 받고 굴려졌던 인턴 시절을 겪었던 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밤 동안 떼어놓았던 레비테이션을 불러 제 어깨에 두를 뿐이다.


“웡, 스타크를 본 적이 있나?”

“토니 스타크라면 지금도 볼 수 있어 스티븐. 항상 TV 채널 어딘가에서 그 사람에 대해 떠들고 있다는 걸 자네도 알잖아.”

“오늘은 픽셀이 아닌 실물을 봐야겠어.”


게이트웨이를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스티븐의 팔을 낚아챈 웡이 굳은 얼굴로 그를 불러세웠다.


“1+1로 사 온 참치 샌드위치라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너는 오늘 아침 쫄쫄 굶게 될 거야 스티븐.”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하얀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는 제 친우의 모습에 미련 없이 팔을 내린 스티븐이 웡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급해도 참치 샌드위치를 놓칠 수는 없다.



*



“프라이데이 스파이더링은 지금 뭐 해?”

“파커군이라면 5분 전과 다름없이 현재 학교에 있을 시간이에요 보스. 스파이더맨 수트는 어젯밤 확인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비활성 상태입니다.”

“피터한테 연락 온 건 없었고?”

“해피 호건의 스마트폰으로 도착한 1건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눈앞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푸른 홀로그램이 당연하다는 듯 오늘만 3잔째인 커피를 홀짝이는 토니와 때마침 그를 찾으러 왔다가 제 스마트폰을 해킹해 보고 있는 상사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는 해피가 하도 이야기해서 입에 붙어버린 말(이럴 거면 제발 직통 번호를 알려주세요! 이거 사생활 침해인 건 아시죠?)을 외쳤다. 안됐지만 오늘은 빈손으로 오라고 해. 코 묻은 돈으로 산 간식까지 뺏어 먹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해피? 됐다고 해도 사준다고 한 건 그 꼬맹이에요! 당연히 들은 척도 안 하는 뻔뻔함에 오늘도 가슴 한구석에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꺼낼까 말까 수백 번 고민하던 해피가 파업을 선언한 것은 나름대로 쌓아온 정 때문이다.


“프라이데이 해피한테 피터 태우고 오면서 치즈버거 좀 사 오라고 해.”

“해피 호건의 스마트폰이 꺼져있어요. 보스.”

“벌써? 친히 메시지까지 남겨준 이유가 있었군. 해피는 오늘 반 차 처리하고 일주일 정도 휴가 처리해줘.”


‘말씀드렸어요. 오늘부터 파업이에요 전!’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에 대고 버럭 화를 내는 화면 속 해피의 얼굴이 한눈에 봐도 지쳐 보이는데 반해 토니의 얼굴에 슬쩍 보이는 것은 분명히 웃음이다. 평소 자신 대신 일을 처리해주던 해피가 파업을 선언했으니 못해도 귀찮은 일 한두 개쯤은 생길 것이 자명한데도 말이다. 물론 그가 창조해낸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나 토니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곧 미드타운 고등학교의 하교 시간입니다. 차를 보낼까요?”

“아니야 내가 직접 갈게.”


무려 토니 스타크가 고작 고등학생 한 명을 태우러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가진 아우디는 그의 통제 아래에서 자동운전이 가능한데도 말이다. 거기다 어느 시간대건 끔찍한 수준인 뉴욕의 도로 위를 달리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사람이 토니 스타크라고? 농담으로라도 믿기 힘든 상황이지만 정작 핸들을 잡고 있는 당사자와 롤스로이스를 끌고 온 해피의 불퉁한 얼굴이 아닌 아우디를 끌고 온 토니를 보고 10초 전보다 정확히 100배 이상 행복해 보이는 피터 파커는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어떻게 직접 오셨어요? 아, 물론 직접 오셔서 싫다는건 아니고요! 오히려 더 빨리 볼 수 있어서 엄청 좋아요! 그런데 해피는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스타크 씨가 끝내주는 레이싱카도 운전할 정도로 잘 하시는 건 알지만 보통 그 자리는 해피의 자리잖아요.”

“해피는 당분간 파업이야.”


토니가 스타크폰으로 해피의 파업 선언 영상을 띄워 보여주며 웃었다. 평소와 달리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은 피터가 토니를 따라 작게 웃었다. 그러다가도 오늘 제가 해피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는지 쩝 입맛을 다시다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라도 대신 대접해야 하나 작은 머리를 굴리며 흘끗 여유로운 얼굴을 쳐다본다. 피터 찌리릿 만큼은 아니지만, 평생 타인의 시선을 받고 살아온 토니가 자신에게 전해지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까, 이미 피터의 머리 안에 들어앉은 토니는 일부러 달마르가 아닌 버거킹이 있는 쪽으로 핸들을 튼 지 오래다.


“오늘은 치즈버거의 날이야.”

“미국에 그런 날이 있어요?”

“있어. 내가 방금 만들었거든.”


예전이었다면 토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 테지만 이미 그의 농담을 읽어낸 피터는 토니가 저와 해피의 약속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 과정에서 해피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오늘 그 대신 토니가 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불쌍한 해피. 그가 파업에서 복귀하면 반드시 특제 달마르샌드위치를 사주겠노라 머릿속에 메모한 피터가 먼저 내려 자신을 기다리는 토니의 손을 잡았다. 해피의 불행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사람과의 깜짝 데이트를 놓칠 수는 없으니 그에게 집중할 시간이다.

자타공인 버거킹을 사랑하는 토니 스타크답게 일주일 내내 치즈버거만 먹으라고 던져줘도 커피만 새로 리필해 준다면 아마 토니는 일주일 치 치즈 버거를 해치울 것이다. (조금 많이 투덜거리기는 하겠지만) 거기다 뭐든지 잘 먹는 피터는 앉은 자리에서 치즈 버거 다섯 개를 먹어도 끄떡없으니 모르긴 몰라도 토니 스타크가 팔아준 햄버거 값으로 뉴욕 버거킹의 한 달 월세 정도는 무리 없이 낼 수 있을 정도라는 거다. 그렇지만 그들이 먹은 대부분의 치즈 버거는 해피를 통해 받거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버거를 사러 직접 움직일 시간이 없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한가롭게 매장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기엔 그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그 때문에 피터는 얼떨결에 매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갓 나온 버거의 포장지를 벗기고 있는 상황이 영 어색해 이리저리 눈을 굴려댔다.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


짭조름한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넣으며 얼른 먹으라는 뜻으로 쳐다보니 그제야 피터가 제 몫의 버거 하나를 집어 든다. 늘 치즈버거만 고수하는 토니와는 달리 매일 새로운 버거를 먹어보는 피터의 쟁반엔 각기 다른 버거들이 가득하다. 그중 가장 최근에 나온 와퍼 종류의 버거가 제 입에 맞는지 입 안 가득 베어 무는 얼굴을 보며 토니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순식간에 버거 하나를 해치우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피터에 같은 종류로 하나 더 주문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피터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토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물론 고백도 했고(대답은 ‘아직 안된다’였지만) 서로의 마음도 얼추 짐작하고 있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먼저 스킨쉽을 할 정도로 연애에 대범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토니의 눈썹이 산처럼 솟았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피터?”

“누가 있어요.”


토니의 손등을 덮었던 손을 거두며 피터가 작게 소곤거렸다. 지구상에서 이 방면으론 가장 뛰어난 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곧장 쓰고 있던 선글라스로 프라이데이를 불러낸 토니가 주변을 확인했다.


“인화성 물질이나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어. 전과나 수배가 내려진 인간도.”

“스타크 씨 기준으로 세 시 방향에 있는 키 큰 남자요. 스파이디 센스가 울리는 방향이 저쪽이에요.”

“프라이데이 신분 확인해.”

“이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가능할까요?”

“여기 CCTV 해킹 중이야.”


똑똑한 인공지능이 빠르게 결과를 도출해내는 동안 의무적으로 웃으며 감자튀김을 씹던 토니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피터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웹슈터는 손목에 차고 있지만 슈트가 들어 있는 가방은 토니의 차 안에 있다. 피터는 저자가 공격했을지 수트를 불러낸 토니가 혼자 버틸 수 있을 최단 시간의 루트를 계산하며 애꿎은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토니의 선글라스에 미세하게 비치는 홀로그램이 빠르게 움직이다 멈추고, 당장이라도 수트를 불러낼 기세던 토니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닥터 스트레인지?”


토니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에 내내 미동 없던 등판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이 피터의 눈에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해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