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미 난 널 사랑하는 게 맞아.



 

첫 번째 파동은 내가 일으켰다. 같잖은 마음 품어놓고 심술은 상대에게 부린 꼴이라 추한 쪽은 둘이 아니라 나 혼자였다. 입술을 씹으며 후회했다. 다시는 추악하게 굴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들이밀었으나 걔는 나를 가려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날 다시 인사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크로플 따위를 먹었다. 둘 사이 있었던 일은 자연스럽게 걔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결국 나만 가지고 있을 평생의 후회이자 미련이었다. 여자친구 얘기를 하는 김도영한테 처음으로 짜증을 낸 날, 김도영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두 번째 파동은 김도영이 일으켰다. 나와는 다른 결의 파동이었으나 내게 다가오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생 가겠다 다짐하지 않은 인연이 없었으나 김도영은 유독 애인과의 관계에 영원 같은 말을 가져다 붙이는 걸 좋아했다. 그래놓고 남들처럼 3개월 사귀고 헤어지고 1년 만나고 헤어지고 그랬다. 그러니 김도영의 세상에서 영원은 얼마나 헤프고 값싼 존재인가. 알고 있었지만 수도 없이 뱉었던 영원을 다시금 언급했던 그 날, 김도영의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속이 뒤틀렸다. 정말로 결혼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나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를 두고. 여기에.

 

그리고 지금, 우리 사이에 세 번째 파동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이번엔 나의 마음이 지나치게 넘쳐흐른 게 문제였다. 김도영과 김도영의 여자친구, 둘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 내가 끼게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김도영은 나와 생각이 달랐나 보다. 가장 친한 친구라며 내 등을 떠미는 와중에도 난 여자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나를 싫어할까 봐. 김도영의 여자친구에게 미움을 받는 일은 익숙했으나 눈앞에서 보게 된 적은 없어서 미친 듯이 떨렸었다.

 


“담배도 안 피우는 놈이 왜 나와.”

“너 춥잖아.”

“여친은.”

“화장실 갔어.”

 


대놓고 드러나는 적대감은 없었으나 둘 사이에 낀 불청객이란 생각은 있는 건지 굳이 굳이 내 앞에서 김도영과 손을 꼭 잡은 채 앉아 있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는데. 김도영의 여자친구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 나는 두고두고 그 장면을 곱씹게 될 것이다. 김도영이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상황을, 사진처럼 찍어두고 평생을 간직하겠지. 그 눈빛은 나에게 향할 일이 없을 것.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앉았는데 김도영이 어깨 위에 겉옷을 걸쳐주었다. 선 넘은 호의라는 걸 알면서도 김도영은 항상 이렇게 나를 챙겼다. 여자친구도 버젓이 있는 놈이.

 


“들어가. 여친 오면 너 없다고 서운해할라.”

“희주 화장실 가면 한참 걸려.”

“그래.”

 


담배 피우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김도영은 옆에 서 있다. 쭈그려 앉아 담뱃재가 툭툭 떨어지는 걸 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김도영 옆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김도영은 쉽사리 나를 친구 자리에서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소꿉친구도 뭣도 아닌 대학에서 만난 친구였으나 이상하게 각별하게 굴었다. 내가 가진 마음은 정말 각별한데. 김도영은 친구 이상 이하도 아닌 마음으로 자꾸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게 죽도록 싫었다. 반쯤 남은 담뱃재를 지져 껐다. 김도영이 힐끗 나를 쳐다본다.

 


“일찍 끄네.”

“응. 맛이 없다.”

“희주 어때? 처음 소개해 주는 거잖아.”

 


한 번도 소개해 준 적 없었던 여자친구를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품이 좀 남는 후드집업에 손을 쿡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잘 올라가지도 않는 입꼬리를 올리며 김도영의 연애사를 듣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거든. 어떠냐는 말에 해 줄 말은 없었다. 내 시선은 여자친구를 향하지 않았으니까.

 


“글쎄 뭐. 내가 할 말이 있나.”

“같은 여자니까 뭐 알까 싶어서.”

“네 연애사에 말 얹은 적 없는 거 알지. 알아서 하는 놈이 왜 물어.”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아무도 없는 곳이래도 지금보단 나았다. 몸을 움직이면서 어깨에 있던 라이더가 흘러내렸다. 손으로 받아 건네주니 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저 눈빛에 익숙하지 않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눈. 김도영은 이따금 그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 눈동자 너머에 있는 마음을 꿰뚫고 싶기라도 한 건지. 그럼 나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희주가 요즘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나길래.”

“얼마나 사귀었는데.”

“150일 좀 넘었어.”

“너무 기대하지 마 그럼.”

 


별말을 해 주는 것도 아닌데 김도영은 그러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면서까지 듣는다. 네 촉이 좋아서 믿어도 되면 건덕지를 잡고 아님 말어. 남 연애사에 이래라저래라할 처지도 아니면서 잘도 말을 얹었다. 내 얘기를 듣던 김도영이 화장실에서 나와 김도영을 찾는 여자친구를 쳐다봤다. 고마워. 라이더를 다시 입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반쯤 남았을 때 지져 끈 담배가 아깝게 느껴지고, 발걸음을 돌렸다. 둘 사이에 내가 있을 곳은 없다. 세 번째 파동의 숨이 죽었다.

 



 


애초에 사랑을 시작하면 안 되는 관계에서 먼저 마음을 품은 건 나니까 내가 죄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팔뚝이라도 붙잡고 사랑해 달라며 떼라도 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 큰 머리를 가지고 김도영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떨어지는 사랑을 주워 먹기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술을 마셔서 속이 쓰린 건지 눈앞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연애를 목격해서 쓰린 건지 알 수 없었던 어제를 겪고 나서도 나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시간표를 제대로 짜 본 적이 없다. 저번 학기에는 4연강을 잡아 놓고도 별생각 없이 살다가 죽어 나갔으면서 이번 학기에는 4시간짜리 공강을 만들었다.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애매한 탓에 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복습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냥 조용한 분위기에 책 넘기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김도영을 볼 수 없는 곳이기도 했고. 집 주변에 사는 김도영은 4시간짜리 우주 공강이 생기면 집에 갔다가 올 수 있었다.

 


“누나 또 여기서 멍 때리네.”

“어어.”

“공부를 하라니까.”

 


똑똑한 머리는 저럴 때 써먹는 거다, 라는 문장의 표본을 보여주는 게 나재민이었다. 옆에서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항상 쥐고 있는 놈. 펜이라도 쥐지 않으면 애플 펜슬을 쥐고 있었다. 내가 모범생 이미지라 생각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실격된 놈이었으나 어쨌거나 공부는 잘했다. 글씨는 자기만 알아보면 되지. 지렁이가 친구라고 인사할 것 같은 글씨는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굳이 안 짚어도 알아.”

“밥 먹고 온 거야?”

“어. 오다가 형 봤는데, 같이 없더라.”

“뭐, 여친?”

“아니 누나. 원래 자주 다녔잖아.”

 


김도영 옆자리가 허락될 때는 항상 여자친구가 일이 생겼거나 김도영이 여자친구가 없을 때였다. 여자친구에게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김도영은 연애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던 여자 사람 친구들과는 거리가 생겼다. 김도영의 성격을 아는 애들이기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저마다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건데, 나도 그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김도영과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짓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연락이 없으면 김도영이 집 앞에 찾아왔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그거야 걔 여친 없을 때 얘기고.”

“누나도 고생이 많네.”

“내가 뭘.”

“그냥.”

 


날씨가 구렸다. 우중충한 기운만 잔뜩 머금고 있는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우산 없는데. 옆자리에 앉은 놈 공부하는 걸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험 기간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도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뭘 하겠나 싶어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어폰을 깊숙이 꽂고 필기를 하던 나재민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난 거라 작은 힘에도 풀썩 주저앉았다.

 


“왜.”

“앉아.”

“갈 거야.”

“밥 먹자. 같이.”

 


뭐야. 그럼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옆에 사람이 있든 말든 제 할 일만 잘하는 놈이면서 자꾸 나를 잡아두려고 했다. 그냥 앉아 있어 좀. 나재민 고집 꺾을 만한 힘이 없다. 결국 뚱한 표정으로 앉아 도서관 입구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대충 흘려듣고 있는데 도서관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와서 여자친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는 걔. 시선이 절로 꽂혔다.

 


“어, 형이네.”

“여자친구랑 같이 왔어.”

“지겹지도 않을까.”

“너는 여친이랑 같이 다니는 게 지겹니.”

“안 다녀봐서 모르겠네.”

 


두리번대다가 자리를 잡고 여자친구를 부른다. 보아하니 여자친구랑 같이 공부하겠다고 온 것 같은데 김도영이 도서관에 있는 건 처음 봐서 그런지 새삼 낯설었다. 여자친구 말이라면 다 듣는구나 진짜. 가만히 앉아 김도영을 쳐다보는 일이 염탐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선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앉은 곳과 거리가 있었고 중간중간 앉은 사람이 많아 김도영 눈에 나는 안 보였던 것 같다. 또 나만 김도영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김도영이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걸 보고 있어야 했다.

 


“뭘 보고 있어.”

“궁금하잖아.”

“누나는 그래서 문제야.”

“알어.”

 


비슷한 두께의 책을 펼쳐 놓고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중간중간 옆에 앉은 여자친구 얼굴을 쳐다본다. 그럼 시선을 느낀 여자친구가 김도영을 쳐다보고, 눈이 마주친 둘은 또 둘만의 세상에 갇힌 것처럼 사르르 웃는다. 그 웃음에서 알 수 있었다. 김도영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는 볼 수 없을 웃음인 것 같으니 미련 없이 버려야 할 건 내 마음이라고. 속이 쓰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은 어제 마신 술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길 원했으나 늦게 일어난 사람에게 해장이 허락될 리가. 엎드린 와중에도 눈은 김도영을 향해 있었다.

 


“누나 너 짝사랑 안 힘드냐.”

“들켰네.”

“모르는 놈이 등신이지.”

“김도영은 등신이네.”

 


아무리 미워도 김도영을 욕하고 싶진 않았다. 숨기겠다고 악착같이 애를 쓰고 있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럼에도 이렇게 눈앞에서 봐야 하는 상황에서는 괜히 가서 뒤통수를 때리는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잼.”

“왜요.”

“해장하자. 공부 언제까지 할래.”

“누나 해장도 안 했어? 또 아침 안 먹었지.”

“으응.”

 


지금 가. 책을 덮어놓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나재민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나섰다. 김도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나재민을 김도영 쪽으로 밀어 넣었다. 나재민은 보더라도 나는 볼 수 없게. 김도영의 시선 끝에 내가 닿지 않았으면. 바라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나 바라게 됐다. 김도영과 나는 친구일 때 가장 아름다운 관계임이 틀림없으니.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로 포기할 수 없다면 명분이라도 만들어 정을 떨궈야 하는데 김도영은 그것마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호의로 둔갑한 다정함이 틈만 나면 내 일상을 뒤집고 빠져나갔다. 밀물과 썰물처럼, 숨을 옥죌 것 같이 밀려오다가도 너덜너덜해진 나를 두고 혼자 사라져버린다. 남은 내 모래사장에는 김도영이 몰고 왔던 조개껍데기 따위가 박혀 있다. 김도영이 두고 간 다정의 찌꺼기.

 


<- 잼

<- 바쁘니

 


아침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타이레놀을 두 알이나 먹었는데도 약발이 떨어지면 두통이 다시 생겼다. 머리만 아프면 족하지 달이면 달마다 찾아오는 놈 때문에 배도 아팠다. 손발이 저린 건 이때쯤이면 항상 겪는 일이라 익숙했지만 수업을 들을 만한 컨디션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한 번 더 빠지면 사정없이 F를 주겠다는 교수님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온 수업이었다. 결국 나재민한테 약 하나만 사 달라고 했다. 어차피 옆 건물에서 수업 들으니까, 편의점에서 진통제 하나만 사다 달라고. 이렇게 아파질 줄 알았으면 아침에 약을 챙겨서 올 걸 그랬다.

 


-> 어디서 수업 들어

<- 504호

-> 끝나는 시간 맞춰서 갈 테니 나와

 


평소에 이런 잔심부름을 시키면 귀찮은 일 좀 시키지 말라고 할 녀석인데 아프다고 하면 말을 곧잘 들었다. 나재민은 안 그렇게 보여도 이것저것 사람 챙기는 걸 좋아하니까. 고마워.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을 하나 보냈다. 이런 거 안 줘도 돼. 선물 거절이 눌렸다. 그래도 하나 더 보냈다.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이럴 때 내 고집은 나재민을 이길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두말 더 얹고 싶진 않았는지 잘 먹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이 날아왔다.

 


-> 고마워

 


김도영에게서 오는 연락은 받지 않고 있었다. 잘 잤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지 이틀이 지났다. 김도영은 구태여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여자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기 때문일지도. 씁쓸한 생각은 1이 남아 있는 채팅방을 누르면서 같이 사라졌다. 답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읽고 씹은 사람이 되더라도 김도영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생각을 내 머릿속으로만 하고 있으나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게 맞다. 얘기한 적도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거다.

 


“너 왜 여기 있어?”

“아프다고 해서 왔어. 여기.”

“……나재민은?”

“재민이는 내가 보냈어. 여기서 너 기다리고 있길래.”

 


그걸 또 술술 불었나. 아무 일 없다고 하지. 간신히 잦아들었던 두통이 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연락까지 씹었는데 얼굴을 보게 되면 다짐한 게 뭐가 돼. 차라리 나재민이었으면 칭얼거리기라도 할 텐데 김도영 앞에서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동정을 사고 싶진 않았고, 오래 잡아둘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도영 손에 들린 까만 봉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다. 얼른 가.”

“몸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 갈래?”

“괜찮아. 심한 거 아니라 약 먹으면 돼.”

“병원 가자. 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머리 아파서 그래. 괜찮다니까.”

 


여자친구랑 있었을 거다 분명. 나재민한테 내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여자친구를 보냈겠지. 나재민이 있는 걸 알면 굳이 자기가 나서서 챙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재민한테 부탁한 거지 김도영을 부르고자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여자친구 기다리겠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너 아픈 게 먼저야.”

“재민이 있는데 굳이 네가 왜 왔어.”

“친구잖아. 왜 나한테는 말 안 해.”

“아픈 거 광고할 이유는 없잖아.”

“적어도 나는 알려줘야지. 그럼 내가 왔을 텐데.”

“방금도 얘기했잖아. 굳이 네가?”

 


김도영에게 우선순위는 언제나 여자친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고. 이런 얘기로 김도영과 작은 말다툼을 하긴 싫었다. 나는 김도영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고, 김도영이 아니어도 누구든 내 약을 사다 줄 수 있다. 굳이 김도영이 아니더라도. 배려 없는 행동이잖아. 여자친구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김여주. 나한테 화난 거 있어?”

“화난 게 아니라 도영아. 난 네 여자친구가 나 신경 쓰는 거 싫어.”

“희주가 너를 왜 신경 써. 저번에도 봤잖아.”

“나 신경 쓰인다고 너한테 말하겠니 걔가. 쪼잔해 보이기 싫겠지.”

“얘기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얘기하겠냐고 너 같으면.”

 


날카롭게 말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내가 살기 위해서 거리를 두고 싶은 걸 김도영 여자친구 핑계를 댄 것도 맞다. 물론 정말로 이게 맞는 행동이라 생각해서 하는 것도 있었지만……. 눈에서 보이지 않아야 잊기 쉽다는 말을 철저히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사이라고 이렇게 신경을 써.”

“……뭐?”

“네 말대로 친구잖아 우리.”

“…….”

“가. 너 전화 온다.”

 


김도영 손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김도영의 우선순위는 항상 여자친구였으니, 이번에도 김도영의 손이 향한 곳은 그쪽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금방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김도영이 건넨 봉지에 있는 약을 확인하고 김도영을 지나쳤다. 머지않아 손목이 잡히는 바람에 다시 뒤를 돌아야 했지만.

 


“수업 끝나고 갈게.”

“재민이 부를 거야.”

“……나재민 말고, 내가 죽 사서 가면 돼.”

“도영아, 신경 쓰지 마 이제.”

“신경을 어떻게……!”

 


김도영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큰소리를 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입을 꾹 다문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김도영은 한참이나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속이 문드러지는 사람은 난데 눈빛만 봐서는 김도영이 실연당한 사람 같았다.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어. 예상할 수 있었던 범위에서 자꾸만 벗어나려고 한다. 김도영이니까 이렇게 하겠지,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깨지고 있다. 왜일까. 나는 김도영이 친구라 정한 원 안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왜 너는 그 안으로 자꾸 들어오려고 할까. 우리 사이 수많은 선이 있는 걸 알면서도.

 





김도영이 부쩍 나를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이유는 모름. 그저 다가오는 애를 묵묵히 바라봤다. 김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여자친구랑 헤어졌냐고 물어보니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분명 여자친구랑 같이 듣던 수업이었는데. 찜찜한 마음에 김도영 쪽으로 쏠려 있던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귀에 수업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김도영이 내 옆에 있어. 어색한 두 이름을 억지로 붙여놓은 것 같은 기분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과제 제출 때문에 교수님 연구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여자친구에게 연락할 줄 알았던 김도영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김도영은 그렇게 했다. 나는 그 뒤에 뭘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 들어가야 해.”

“갔다 와.”

“너는 왜 왔어?”

“너 따라서.”

“……음, 여자친구는.”

“오늘 너랑 있을 거라고 했어.”

 


왜? 묻고 싶었으나 연구실 문이 열리면서 교수가 나왔다. 얼떨결에 과제를 내밀며 인사를 했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길래 김도영을 두고 들어갔다.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서도 다른 생각만 했다. 내가 쓴 문장들이 빨간펜으로 죽죽 지워지는 게 보였다. 이 부분은 이런 게 아쉬워요, 예전에 들었으면 속상했을 법한 말도 김도영의 이름 아래에 전부 지워졌다. 감사합니다. 빨간색으로 쓰인 글자들이 가득한 과제물을 품에 안고 나오자 김도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끝났어? 가자.”

“나 점심 먹어야 해.”

“응. 먹고 싶은 거 있어?”

“혼자 먹을 생각이었어. 서브웨이.”

“말고 밥 먹자. 저번에 먹었던 고깃집 갈까?”

“점심부터 무슨 고기야. 혼자 먹는다니까.”

“난 혼자 먹기 싫은데. 같이 먹어주면 안 돼?”

 


혼자 먹지 않아도 되면서 또 저런다. 내 손에 들린 과제를 뺏어 가방에 넣어준다. 가방에 지퍼에 달린 것도 김도영이 사 준 건데. 귀가 엄청 큰 토끼가 대롱 매달린 걸 보며 김도영이 픽 웃는다. 이거 아직도 들고 다니네. 김도영이랑 같이 샀지만 김도영의 가방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고양이. 그 고양이는 언제 버려졌더라. 김도영의 마이너스 세 번째 여자친구였나. 같은 브랜드의 키링이 걸린 걸 보고 노발대발 화를 냈던 그 여자애, 지금은 부디 잘살고 있었으면 한다.

 


“덮밥 먹자.”

“너 나한테 죄지은 거 있어?”

“음. 굳이 따지자면 있겠네. 너 아픈데 신경도 못 쓴 거.”

“그건,”

“누가 막아서 그런 것도 있는데, 아무튼.”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걸 잘 안다. 같이 밥 먹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사이였으나 불편했다. 김도영의 옆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데도 김도영은 자꾸만 나를 밀어 넣는다. 친구잖아. 친구니까 괜찮아. 모든 행동이 친구라는 명분으로 합당성이 주어진다는 게 잔인했다. 여기 어떠냐고 보여주는 김도영의 핸드폰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밥 생각 없어. 여자친구 불러서 같이 먹어.”

“……희주 오늘 친구 만나러 갔어.”

“…….”

“됐지? 이제 나랑 밥 먹자.”

 


그럼 그렇지. 김도영이 여자친구랑 붙어 있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또 기대를 했던 건지. 실망스럽다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머릿속을 비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도영의 손에 이끌려 덮밥집으로 향하는 내내, 김도영 인생에서 후순위인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자신이 안쓰럽다가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내가 나를 동정하고 있는 꼴을 한심해했다. 나는 언제쯤 김도영 앞에서 불쌍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먹고 싶은 거 시켜.”

“누가 보면 네가 사는 줄.”

“내가 사. 요즘 밥도 같이 못 먹었잖아.”

 


그건 네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닌 걸 안다. 그럼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싶은 건 그냥 내 심보가 못나고 못돼서 그런 거지. 항상 덮밥집에 오면 김도영은 소고기 덮밥을 시키고 나는 돈가스 덮밥을 시켜서 반을 나눠 먹는다. 둘 다 좋아하는 우리는 이런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김도영의 여자친구는 아니었다. 나와 김도영 둘 다 좋아하지 않았던 연어를 시켜서 혼자 먹었다. 덮밥은 혼자 먹는 음식이잖아. 맞는 말이라 김도영도 나도 입을 다물었던 적이 있다. 여태껏 같이 먹어도 되는 음식인 줄 알았지. 누가 막은 적은 없었으나 그때 이후로 덮밥집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우리 이렇게 자주 먹었었는데. 맞지.”

“응.”

“수업 몇 시야?”

“3시.”

“전까지 뭐 하게.”

“도서관 가겠지.”

“같이 갈까?”

“너 이후에 수업 없지 않나.”

“응.”

“그럼 왜.”

“그냥.”

 


너 공부한다니까 나도 하게. 말없이 소고기와 돈가스가 섞인 덮밥에 숟가락을 꽂았다. 그 뒤로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먹기만 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둘 중 누구도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두 숟가락 정도 남겨두고 김도영이 숟가락을 먼저 내려놓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숟가락 위에 단무지를 얹어 놓았다. 김도영이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갑자기 왜.”

“……아니야. 마저 먹어.”

 


본능적으로 창문 밖에 시선이 쏠렸다. 친구를 만난다던 김도영 여자친구가 덮밥집 옆에 있는 그릭 요거트 집으로 들어간다. 혼자였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김도영의 핸드폰이 울린다.

 


“친구 만난다며.”

“……먹어. 먹고 도서관 가자.”

 


그때 처음으로 김도영은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릭 요거트 집을 나오는 여자친구의 표정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답이 없는 핸드폰을 토독 두드려 보더니 주머니에 넣고 사라진다. 김도영은 여자친구가 사라진 걸 본 뒤에야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가시 돋친 물음에도 김도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많이 먹어.

 


“너 그러다 차이면 어떡하려고.”

“차이면 차이는 거지.”

“하긴. 김도영 인생에 여자는 많으니까.”

“희주랑 헤어지면 당분간은 좀, 안 만나려고.”

 


기회가 주어질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쪽으로는 아예 희망을 품어보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김도영이 나에게 내린 친구라는 칭호는 변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확고한 믿음, 어쩌면 신념 같은 거였다. ‘사랑하되 사랑하지 말자.’ 나의 사랑은 일방적일 때 가장 안전하고 예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김도영이 연애를 쉰다는 얘기 자체는 와닿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는 또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나타날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나니까.

 


“영원을 약속할 땐 언제고 끝을 보고 있어.”

“영원은 멋대로 약속하는 게 아닌가 봐.”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다행이네.”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다. 단무지까지 올려둔 마지막 한 숟가락이었으나 입까지 가지고 올 힘이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김도영이 했다. 빚을 진 느낌이라 껄끄러웠으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이런 느낌이었나, 결은 좀 다르지만. 신경을 어떻게 안 쓰나. 앞으로 밥 사 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많을 줄 알고. 김도영을 집으로 보내려는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김도영은 끝까지 나를 따라왔다. 도서관에서 공강 시간을 보내고 수업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내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쥐여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김도영은 여자친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했다. 속을 모르겠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기대는 실망이라는 동반자를 데리고 오니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김도영이 그 뒤로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으니. 여자친구는 어디다 두고 계속 내 옆을 고집했다. 등을 떠밀어가며 보내려고 했으나 한 번 세운 김도영 고집이 쉽게 꺾일 리가 없었다. 결국 김도영은 다시금 내가 작게 그어뒀던 우리 사이 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무던한 다정을 허락했던 그 관계로. 어물쩡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남들에게는 연인으로 보일 만한 행동들을 하며. 물론 그 행동들의 대부분은 김도영의 것이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김도영의 여자친구가 나를 찾아오는 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눈치는 나 혼자 보고 김도영은 마음 편하게 행동하는 것부터 잘못됐다 생각했다. 내가 평생 미워해도 모자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만나려니 어색한 건 둘째치고 손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말을 이 사람 앞에서 쏟아낼까 싶어서. 김도영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희주는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잡은 손을 토독거리며 말을 꺼낼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응, 뭐.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응. 그럴 것 같았어.”

 


동태 눈깔로 앉아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요즘 김도영이 소홀해졌다는 것부터 시작해 부쩍 나를 많이 찾기 시작한다는 것도. 전부 김도영의 행동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눈치가 보일 뿐. 솔직히 말하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김도영의 여자친구는 내가 아니라 쟨데. 결론적으로 김도영은 둘 다 불편하게 만든 거였다. 이래놓고 마음 편하게 수업이나 들으러 갔다 이거지. 물론 만나는 걸 말하진 않았다. 그럼 수업 빼고 달려올 놈인 거 잘 아니까.

 


“여주가 도영이한테 계속 내 얘기 한 거 알아.”

“미안. 보내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

“고마워. 그래도 너한테는 소중한 친구일 텐데.”

 


소중한, 까지는 맞겠지만 친구는 아니다. 나는 김도영을 친구로 생각한 적 없으니까.

 


“내가 말한다고 여주가 들어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부탁할게. 나 도영이 정말 좋아해.”

“알아. 김도영도 너 좋아해.”

“……근데 요즘은 좀 아닌 것 같아.”

“거리 둘게. 네가 원하는 게 그거지?”

“……미안해.”

 


잘못이 뭐가 있겠어. 잘못은 김도영이 했지. 어중간하게 굴 거면 헤어지자고 하든가 나랑 연락을 하질 말든가. 속 썩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거란 생각에 저절로 그녀가 측은하게 보였다. 내가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냐. 그럼에도 나는 내 몫으로 샀던 마카롱을 그녀 앞으로 밀어 넣는다. 술집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해쓱해져 있는 모습을 보니까 통쾌하단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김도영 짝사랑 시작했을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김도영 고집 꺾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작정 피하면 걔도 어떻게 못 하겠지.”

“최대한 네가 귀찮지 않을 쪽으로 생각해 줘. 나 너한테 짐 주고 싶지 않아.”

“짐 아냐.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건데 뭘.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아니야……. 고마워.”

 


무슨 마음인지 알아서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받을 수 없었다. 좋아하니까 옆에 있는 누구든 신경 쓰이는 거겠지. 조금 더 막 나가기로 했다. 김도영의 고집을 꺾으려면 더한 강단이 있어야 하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수척한 얼굴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집으로 향했다. 김도영을 멀리할 것. 내가 머릿속으로 백 번은 더 외쳤을 내용이지만 매번 김도영 때문에 실패했던 그걸, 이제는 어떻게든 해내야 할 때가 왔다.

 





생각보다 ‘무작정’ 피하는 일은 잘되지 않았다. 연락을 씹으면 씹는 대로 수업 듣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또 거리를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천천히 멀어지기로 했다. 김도영이 모르는 사이에, 나는 혼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관계까지 정리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살아야 하고, 걔 여자친구도 살아야지.

 


-> 저번에 갔던 곱창집 어때

<- 나쁘지 않아 걔도 좋아할 것 같아

-> 너랑 갈 거였는데

<- 미안 나는 시간이 안 돼서

 


반복이었다. 김도영이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의. 때로는 나재민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곧 죽어도 싫다고 할 줄 알았던 놈이 의외로 장단을 잘 맞춰주길래 물어봤더니,

 


누나도 짝사랑 그만했으면 좋겠어서.

 


사연 가득한 얼굴로 얘기하는 애를 들쑤시고 싶진 않아서 고맙다는 말로 덮었다. 그렇게 김도영에게서는 꾸준히 연락이 오지만 일방적으로 내가 거절하는 일과가 지속됐다. 위태로운 관계였다. 누구 하나가 놓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관계. 나는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아니 사실은, 손을 놓고 싶진 않았으나 놓아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이라, 손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빼고 있었다. 놓아 줘. 이건 김도영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과도 같은, 독백이었다.

 


“오늘도?”

“응. 좀 바쁘네.”

 


피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후로 이상하게 할 일이 많아졌다. 대충 과제라든지, 팀플이라든지. 알바라도 시작해 볼까 했으나 그럴 시간도 없었다. 억지로 나서서 일이 제일 많은 걸 떠맡는 바람에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그동안 김도영과 그의 여자친구가 함께 있는 모습은 수십 번 봤다. 행복해 보였다. 내가 없는 둘의 사이는 전보다 더 무탈하고 괜찮으려나. 어쨌거나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에 볼살이 오른 걸 보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누나 이거 확인 좀.”

“이게 뭔데.”

“나랑 공모전 나갈 생각 있어?”

 


나재민은 내가 김도영과 이도 저도 아닌 관계가 되는 것을 누구보다 지지해 줬다. 짝사랑을 해 본 사람만 아는 마음이잖아. 그렇게 얘기하면서 같이 술잔도 부딪히고 나재민의 짝사랑 얘기도 조금 들었다. 얼굴만 보면 어디 가서 자기 좋다는 사람만 주야장천 만나고 다녔을 것 같은 놈도 절절한 감정을 겪어본 적 있다니. 마냥 애처럼 보여도 스물은 훨씬 지난 어른이라는 게 그럴 때 느껴졌다. 나재민이 내민 공모전 포스터를 훑었다. 생소한 분야였으나 나재민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래.”

“진짜지. 이거 상 받으면 돈도 줘.”

“해 보자, 뭐. 너 자신 있어서 하자는 거 아니야?”

“누나를 믿고 나를 믿는 거지.”

 


김도영과 이따금 마주칠 때가 있었다. 나재민이랑 공모전을 함께 나가기로 한 이후 특히 더 많이 마주쳤다. 잘 오지도 않는 도서관을 혼자서 올 때도 마주쳤고, 학식을 먹다가도 나재민이 내 어깨를 툭 쳐서 보면 김도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친구랑 같이 있을 때도 줄곧 시선이 마주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야 했다. 김도영에게는 인사 한번 하는 걸로 족했다.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오늘도 도서관 맞은편 자리에 앉아 30분에 한 번 나와 나재민이 앉은 곳을 쳐다보는 김도영 때문에 더 오버해서 나재민과 공모전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 부분은 이렇게 수정하는 게 나을걸.”

“경험자가 잘 알겠지. 그렇게 하자.”

“여기 고칠까.”

“나 생각한 거 있어. 어제 자기 전에.”

“잠 안 자고 이런 걸 생각해?”

“원래 영감은 갑자기 떠오르는 거잖아.”

 


수월했다. 점점 김도영에게서 오는 연락의 빈도도 줄고, 내가 연락을 읽지 않으면 김도영도 굳이 두 번 더 보내지 않았다. 이대로만 가면 서로의 인생에 언제 존재했는지도 모른 채 잊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김도영을 너무 단면적으로 본 건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건지. 내내 조용하던 김도영이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들이민 건 내가 공모전 때문에 밤을 새우겠다 다짐하고 담배를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담배를 사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세 가지나 있었다. 첫째, 팀플에서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업무를 맡았는데 팀원 중 누구도 연락이 되지 않음. 둘째, 삼천 오백일 정도 미뤄놨던 컴퓨터 업데이트가 제멋대로 되어버리는 바람에 반쯤 작성해 뒀던 발표 자료가 날아감. 셋째, 업데이트된 이후로 어딘가에 박아둔 자료 중 하나를 못 찾는 중. 메일로 보내달라고 수천 번 얘기했으나 카톡으로 보낸 것 때문에 기간이 만료돼서 저장할 수 없단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질 않으니 진도가 나갈 수 있나. 결국 다 떨어진 담뱃갑만 만지작거리다가 사러 나왔다. 새벽 한 시였고, 후드티 하나 뒤집어쓰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던 와중 김도영과 마주쳤다. 딱 봐도 우리 집으로 오는 꼴이라 김도영을 보자마자 후회부터 했다. 담배 좀 참을걸.

 


“여주야. 안 그래도 집 가는 길이었어.”

“어, 그래. 나 근데 빨리 들어가야 해서.”

“잠깐도 안 돼?”

 


순순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다 싶었다. 담배 두 개를 사서 나오니 김도영이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사람이 어떻게 그래. 너무 매정하게 굴면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으니 적당히 장단만 맞추다가 들어가려고 했는데 김도영은 허락하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힌 채 추궁을 당했다. 요즘 왜 그렇게 바빠. 나한테 뭐 하는지 알려주기 어려운 일이야? 그동안 궁금했던 걸 다 쏟아내기라도 하듯 김도영은 내가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물어왔다.

 


“재민이랑은 공모전 때문에 자주 보게 됐어. 나 지금도 팀플 중이었거든.”

“담배 끊으라니까.”

“쉬우면 진작 끊었을걸.”

 


집 앞에서 김도영을 세워두고 담배를 물었다. 새벽 한 시 반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네. 꼼짝없이 다음 날에 할 일이 두 배나 많아진 상황이라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이 있는데도 꼭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 한다니까. 담배 하나를 순식간에 태우는 동안 김도영은 내 옆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신 줄 알았더니 멀쩡했다. 술 냄새도 나지 않았고. 맨정신으로 새벽 한 시에 친구 집에 찾아오는 애가 어딨어. 연락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핸드폰에는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왜……. 요즘 나 피해?”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는 상황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김도영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들을 할 때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차라리 내 생각 안에서 행동해 주면 놀아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그럴 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김도영과 편의점 앞에서 마주쳤던 그때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럼 미리 생각해 뒀던 답을 뱉으면 되는 일이었다. 알아서 잘,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너 여자친구 있잖아. 너무 가까이 지내면 불편할 것 같아서.”

“희주가 그래? 불편하다고?”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불편해서.”

 


순식간에 담배 하나를 태웠다. 부족한 느낌이라 두 개를 꺼냈을 때 김도영한테 저지당했다. 그만 피워. 오늘 처음 피우는 건데 각박하게도 군다. 순순히 담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는 내 친구잖아. 내가 내 친구 챙기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여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여자친구가 신경이 쓰인다면 거리를 두는 게 맞잖아 도영아.”

“너랑 나는……! 너랑 나는 다르잖아.”

“뭐가 다른데? 우리가 남들이랑.”

 


이렇게 자꾸 의미를 부여하니까 그래. 김도영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붕 띄웠다가 다시금 추락하게 만든다. 물론 김도영이 내민 다정은 그저 호의에 지나지 않지만 그걸 내 멋대로 해석하고 내 의지와는 반대로 행동하게 되는 게 싫었다. 어쨌거나 싫다고. 나는 가까이 지내면서 네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까 싫어.

 


“저번부터 자꾸 별거 아니라고 하는데, 나한테 너 별거 맞아.”

“여자친구가 들으면 제법 서운하겠다.”

“희주 얘기는 그만하면 안 돼?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이잖아.”

 


쪼잔한 것도 맞고 내가 너를 다른 마음으로 보고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속이 좁아지는 것도 맞다. 내가 너를 정말 단순한 친구로 봤다면 우리는 이렇게 부딪히지 않아도 됐을까.

 


“둘 사이 일이래도 걔가 언급되는 건 어쩔 수 없어. 우리는, 그렇잖아.”

“여주야. 나는 우리 사이가 망가지는 게 너무 싫어.”

“…….”

“소중한 사람 잃기 싫단 말이야.”

 


우리 사이가 망가지는 게 싫어. 확실해졌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 혼자 간직할 마음으로 남을 이것은, 나는 쉽게 드러내지도 표현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걸. 억울하다. 하늘이 너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어떡해 그럼. 사랑에 빠지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았는데, 네가 그러면 나는 정말 죄인이 된 것 같잖아. 김도영의 눈동자가 떨린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내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요동치는 건 단연 네 눈동자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도영아.”

“내 친구잖아.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너.”

“나는 너 친구로 생각 안 해.”

“…….”

“그래서 안 돼.”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울먹이던 김도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답을 하는 대신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담배를 꺼냈다. 충동적이었다. 숨겨야 해. 관계를 망가뜨리기 싫다는 애 앞에서 관계의 종말과도 같은 얘기를 꺼내선 안 된다고 머리는 얘기하고 있었다. 듣지 않게 된 건, 내가 조금 예민해져 있던 새벽에 내 감정을 죽 긁어내린 김도영 때문이었다.

 


“다시 얘기해 봐 여주야. 무슨 뜻인데.”

“나 한 번도 너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그렇게 웃었을 때부터.”

 


꼭 내가 네 여자친구라도 된 것처럼. 손목을 잡고 있던 김도영의 손이 툭 떨어진다. 이 순간에 누구보다 무너질 것 같았던 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속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시원했다.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될 짐을 김도영한테 3분의 1 정도 넘겨준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뱉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함께 묻혔다. 이 정도면 돼. 굳이 말뚝을 박을 필요는 없었다.

 


“기어이 들어서 시원하긴 하겠다. 내가 여태 왜 그랬는지 한 번에 이해됐을 거 아니야.”

“…….”

“늦었네.”

 


세 번째 파동은 내 차례가 맞았다. 그때 숨을 죽여 놓았던 것이 좀비처럼 살아나 뇌를 갉아먹은 게 분명했다. 이번에 일렁이는 마음은 내가 아니라 저쪽일까. 내가 너를 뒤흔들 만큼의 파동을 일으킨 게 맞을까. 역겨운 욕심이었지만 나는 제발 그러길 바랐다. 선택을 넘겨준 입장에서, 나는 김도영이 나와 친구의 연을 끊는다고 해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들어가. 도영아.”

“…….”

“여자친구가 기다리겠다. 말은 하고 나왔을 거 같은데.”

“말……. 안 했어.”

“자꾸 그렇게 비밀 만들지 마. 사랑하면서.”

 


김도영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내가 담배를 두 개째 태우는 걸 보고 나서 조용히 벽에 대고 있던 등을 떼고 사라졌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김도영이 가고 나서야 손끝에 닿는 바람이 차갑다는 걸 알게 됐다. 담뱃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툭 떨어진 재는 색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형태까지 사라진다. 다 꺼진 불씨를 발로 지지고 문댔다. 이게 끝이라면 차라리 편하다. 이미 일상에서 김도영을 조금씩 지워내고 있었던 탓에,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발표 자료 다시 보냈어요. 밤을 새울 예정이었다.

 





관계의 연장선이 보이지 않는다.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접점이 사라졌다. 김도영을 쉽게 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어쩌다 한 번 보이는 것도 여자친구와 함께 있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말보로 레드 주세요. 클래식한 담배만 피운다며 한 소리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김도영 때문에 흘려보낸 놈 중 한 명이겠지. 편의점을 나오면서 건너편 양식집에 마주 앉은 김도영과 그의 여자친구를 보게 됐다. 포기한 건지 아닌지 모르는 마음을 간직한 채 김도영과 멀어지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었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나서 저 모습을 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 잊는 거 성공했나? 가볍게 지나쳤다. 오늘까지 마감인 과제가 있었다.

 


“누나.”

“응.”

“맘 접는 게 안 돼서 아예 안 보기로 한 거야?”

“비슷해.”

 


공모전이 끝났는데도 나재민과는 붙어 있을 일이 자주 생겼다. 반은 나의 의지, 반은 나재민의 의지. 걱정쟁이라는 별명ㅡ이것도 상당히 순화한 버전이었다ㅡ에 걸맞게 나재민은 툭 하면 아침밥을 거르는 나를 걱정했다. 옆에 따라다니면서 지겹게 아침 아침 염불을 외운 것 때문에 일어나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에어프라이어기에 냉동식품을 넣는 게 습관이 됐다.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놓고 과제를 했다. 부탁 거절 못 하는 나재민은 이번에도 별 희한한 것들을 떠맡은 것 같았다.

 


“사서 고생이다, 너도.”

“싸운 거야 뭐야.”

“그냥, 들켰어. 내가 걔 친구로 안 보는 거.”

“이제 알았대?”

“눈 보니까 그렇던데.”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말을 할 때도 그렇게까지 동요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친구라 믿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충격이 큰 거겠지. 구태여 들쑤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먼저 선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건 김도영이라는 거. 어떻게든 남 탓을 하고 싶은 못된 심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학교 끝나고 뭐 할 거야.”

“집 가겠지. 오늘 끝나니까 가서 쉬려고.”

“술이나 마실래.”

“차였어?”

“그건 아니고. 걍 누나랑 술 마시고 싶어서.”

“누나는 연하한테 관심 없어.”

“연하도 누나한테 관심 없대요.”

 


통과. 술 마시러 가자. 즉흥적으로 잡히는 약속도 김도영만 허락되었던 일이었다. 무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던 내 인생에서 유일한 무질서였던 김도영. 아무것도 남은 건 없다지만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나았다. 매일 밤 울리던 카톡 알람음도 잠잠해진 지 오래, 김도영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표시를 수도 없이 봤지만 내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끝이라는 단어를 입으로 뱉지 않아도 끝이 날 수 있구나. 세 번째 파동의 결과는 관계의 정리였다. 서서히 힘을 풀고 있던 손을 김도영이 놓쳐버리면서, 나와 그가 억지로 이어오던 선이 갈라졌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평행하게 이어지게 된 두 개의 선.

 


“수업 끝나고 연락하면 달려감.”

“알겠어.”

“또 어디 가.”

“담타.”

“끊을 생각은 없어?”

“당분간은.”

 


내 폐의 색깔이 블랙이라고 해도 얘가 아니면 숨통 트게 해 줄 애가 없었다. 도서관 뒤쪽 흡연 구역으로 나와 정자에 앉았다. 어젯밤에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는데 이제 낮에는 서글서글한 바람이 불었다. 라이터 불길이 흔들리다 하얀색 심지에 불을 붙인다. 뜨거운 김이 입안으로 훅 들어오는 기분과 함께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목을 넘어가는 쾌쾌한 느낌은 담배를 몇 년이나 삼켜도 익숙해지지 않을 느낌이었다.

 


언제 갈까? 내가 예약할게.

……어. 아무 때나 괜찮아.

다음 주에 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어. 맞아. 토요일이야.

 


지나가는 사람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갖은 모양의 구름이 떠다니는 구름을 응시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가 끈적한 냄새를 남기는 걸 알아서 일부러 휴지를 덧대고 피웠던 때가 있었다. 연기는 뻑뻑 뱉어대면서 손가락 사이 남은 냄새가 싫어서, 비누로 몇 번이나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가 역겨워서 담배를 끊을까 했었다. 이틀도 안 돼서 다시 찾긴 했지만. 그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사랑은 담배 냄새 같은 것, 따위로 비유하기에는 낭만을 찾을 수가 없어 실패했다. 노트에 그대로 썼다 지운 흔적도 있다. 사랑은 담배 냄새…… 이건 좀 아닌 듯.

 


도영아. 아까부터 무슨 생각해?

아, 미안. 어제 잠을 못 잤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어려봤자 그도 성인이었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으니 주변에 김도영과 그의 여자친구가 다가왔다. 흡연 구역이라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다 모자를 푹 눌러썼다. 찾지 않던 캡 모자를 서랍에서 꺼내게 된 건 일주일 전이었다. 김도영이랑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게 싫어서. 싫은 것도 가지가지. 김도영은 아까 양식집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멍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잠을 못 자? 왜. 무슨 일 있어?

그건 아니고……. 어디까지 얘기했지?

내 말 안 듣고 있었네.

미안.

 


생기가 죽은 눈이 내 쪽을 향한다. 곧바로 고개를 숙여 담배를 빨아들이려고 했던 척,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혹시 다가오나 싶어서 쿵쿵거리는 심장을 저지하겠다고 침만 꿀꺽 삼켜댔다. 그래봤자 내 노력은 심장 근처에도 닿지 않을 텐데. 김도영의 팔짱을 낀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귀를 지나친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나를 보고 있던 김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도영아, 도영아?

…….

너 요즘 왜 그래 진짜.

 


왜 저렇게 쳐다볼까. 비련의 남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의 주인공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는데도 플롯에 어거지로 끼워 넣었다가 이야기가 다르게 튀는 걸 봤으면서도, 김도영은 마주친 눈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익은 담배 끝이 붉게 점멸하다 사그라든다. 반쯤 남기고 끄는 게 습관이라 끝까지 태워본 적은 없었다. 손마디가 후끈거린다. 담뱃재를 툭툭 털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도영은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조금 이따 들어가야 했다. 마주칠지도 모르니.

 


“담배를 만들어서 피우고 오는 줄 알았어.”

“미안. 마주쳐서.”

“냄새.”

“섬유유연제 있니.”

“뿌리고 와. 밖에서.”

 


담배 냄새에 향수 섞이면 냄새 진짜 지독한 거 알지. 킥킥 웃으며 나재민이 주는 섬유유연제를 받아들였다. 누나한테는 이제 냄새가 배서 익숙한데, 막 피우고 오면 이렇게 심해. 잔소리 섞인 말이 들릴까 봐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섬유유연제를 곳곳에 뿌리고 다시 들여가려고 하는데, 눈앞에 김도영이 혼자 서 있었다. 더 내려가지도 않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지나가려고 했으나 김도영은 놓아주지 않는다.

 


“여주야.”

“…….”

“여주야…….”

 


놓아주지 않으면 어떡해. 내가 놓아야지. 손목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조금 움직이자 나를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진다. 대답은 하지 않고 나재민 옆자리로 돌아왔다. 괜히 말했나. 아주 조금은 후회가 됐다. 하필 예민할 때 걔랑 부딪혀서. 속이 뒤집힌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으니 여기서 김도영 탓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자꾸. 강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눈빛에 약했다. 주체가 김도영이라면 더더욱.

 

나재민은 끽해야 저보다 두 살 많은 내 건강까지 걱정해 줬다. 이제는 예전처럼 달리면 안 된다며 소주 두 병 병나발을 불려는 내 손목을 저지했다. 세 병 마셔야 할 시간에 한 병 반밖에 못 깠으니 취할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술이 센 편이라 새내기 때도 김도영이 나를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오히려 조절 못 하고 의자에 뻗은 김도영 목덜미를 잡아 택시에 태우는 게 내 역할이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배만 채운 채 나재민과 헤어졌다. 수확은 없었다. 나재민은 제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신비주의 컨셉 고집하겠다나. 한 번도 신비하게 본 적 없는데 웃긴 일이었다.

 


-> 집 도착하면 연락해

-> 813나 2000

 


술 마시고 택시 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김도영은 멀미가 심해서 매번 택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앞자리에 태워야 했지만. 멀어지고 나니 일상처럼 여겼던 것들도 추억으로 둔갑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방울을 터트리면 감정도 함께 흘러내릴까 봐 쉽게 건드리지도 못한 채 웅크려 앉아 그 기억을 바라보고만 있다. 창문 너머로 길게 늘어지는 네온사인들을 보다 눈을 잠깐 감았다.

 


-> 아직도 도착 안 했나

-> 누나

 


여성분이셨다. 내가 곤히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고. 택시 요금은 멈춘 지 오래였다. 자고 일어났을 땐 기존 도착 예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지나 있었고, 택시 기사님은 잔잔한 노래를 틀어둔 채 창문 밖으로 비가 떨어지는 걸 구경하고 계셨다. 죄송한 마음에 추가 비용을 결제하려고 했으나 손까지 저어가며 괜찮다고 하셨다. 결국 입에서 담배 맛이 감도는 걸 없애기 위해 항상 넣어 다니는 허브향 껌이라도 쥐여 드렸다. 졸릴 때 씹으시라고.

 


비가 오길래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미안해요.

 


고맙다는 말만 이십 번 정도 한 뒤 차에서 내렸다. 번호판을 기억해 두면 어디 글이라도 쓸 수 있을까 싶어 뇌에 힘을 주고 기억했다. 나재민이 보내뒀다는 사실은 술기운에 날려버리고. 터덜터덜 주차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린다. 나재민이면 집에 가서 연락할 생각으로 받지 않았는데, 한 번 툭 끊긴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나재민은 굳이 두 번 걸진 않을 텐데. 핸드폰을 들자 모르는 번호가 액정을 채우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주야, 나야. 희주.]

“아……. 응.”

 


술기운이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일까 또. 최근에 김도영이랑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으니 그의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엘리베이터 앞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 내 꼴은 한번 보고 말 사람이래도 보여주기 싫었다.

 


[도영이가 많이 취했어.]

“……그렇구나.”

[집에 데려다줄 수 있을까?]

“네가 가면 되잖아.”

[……음.]

 


김도영을 챙기는 역할은 이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 역할을 고스란히 넘겨받았을 여자친구가 굳이 나에게 전화해서 김도영을 데리고 가라는 부탁을 할 리가 없으니, 뭐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네 번째 파동일까. 술을 마셔 펄떡이고 있던 심장이 쿵쿵거리며 제 존재를 알렸다. 나 여기 있어.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 심장 박동에 맞춰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다. 또 같잖은 기대의 시작을 알리는 파동이었다.

 


[오면 알 거야.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저기, 잠깐만. 희주야.”

[지금 와 줘. 그리 멀지 않거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멍하게 있던 몸에 순식간에 피가 돌았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탔다. 카톡으로 받은 주소를 불러주고 움직이기 시작한 심장 부근을 손으로 문질러댔다. 나재민에게는 대충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남겨줬다. 아직도 걱정하고 있길래. 택시 타고 5분만 가면 되는 거리가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우산도 없이,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택시에서 내려 술집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반쯤 젖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술집으로 들어서자 김도영을 어깨에 기대게 한 채 앉아 있던 희주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자는 김도영을 의자에 조심스레 눕혀 놓고, 자신의 짐을 다 챙긴 채 나에게 다가온다.

 


“우산 안 가져왔어?”

“응. 급하게 오느라……. 택시 타면 돼.”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곳이 없었나 봐.”

“……뭐?”

“여주는 알고 있었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았다면 이렇게 놓아주지도 않았겠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념한 듯 내뱉는 얼굴을 쳐다봤다. 내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그녀의 신발 끝을 더럽혀도 발을 물리지 않았다. 가방끈을 매만지는 손이 얇았다. 귀엽게 올라왔던 볼살은 그녀의 얼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무슨 소리야. 김도영이 사랑하는 건 너잖아.”

“아니야 여주야. 머저리 같은 김도영이 늦게 안 거지.”

“…….”

“김도영은 너 좋아해.”

 


네 번째 파동의 범인은 김도영이었다.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아 어떻게든 볼 안쪽을 씹어대며 눈물을 참았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희주가 씁쓸하게 웃는다.

 


“진작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나도 모른 척하고 싶었나 봐.”

“…….”

“조심히 들어가, 여주야.”

 


뒤쪽에서 계속 끙끙대던 김도영이 반쯤 떠진 눈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것도 없이 밖으로 나가려는 희주를 잡으려다 김도영한테 손목이 붙잡혔다. 여주야……. 늘어진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비는 단 한 방울도 맞지 않았으면서 나보다 더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거짓말. 쟤가 말한 게 다 거짓말이라고 해.

 


“김도영. 정신 차려.”

“보고 싶었어…….”

“네 여자친구 가잖아. 희주야!”

“내 여자친구 아니야. 나 데려다줘 여주야…….”

 


술에 취한 건지 잠에 취한 건지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건 확실했다. 악착같이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해도 힘을 주고 있는 김도영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김도영 옆에 털썩 앉았다. 중얼거리듯 내 이름을 읊조리던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박히기 시작한다. 여주야. 내 얼굴을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던 김도영이 내 어깨 위로 얼굴을 푹 묻는다.

 


“나 네가 있어야 해.”

“집에 가자. 김도영.”

“응. 나랑 같이 가자. 나, 나랑 같이 가.”

“알았으니까 일어나라고.”

 


이 상태로 집에 떨구는 건 무리였다. 잘 걷지도 못하는 놈을 데리고 택시를 붙잡아 탔다. 술 마시고 비 맞으면 감기 걸릴까 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머리를 가려주었다. 뒷자리만 타면 멀미를 하던 놈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무릎 위에 누워 있었다. 흠뻑 젖은 나와 대비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김도영 자취방 앞에 다다랐을 때쯤 빗줄기가 약해졌길래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집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상황이 실감이 났다. 멍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비를 맞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여주야…….”

“자고 일어나서 이거 마셔. 냉장고에 있더라.”

“가지 마.”

“이거 놓고.”

“뭘 놔.”

“놔. 가야 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울먹거리던 김도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내 손을 덥석 붙잡는다. 가쁜 숨조차 뱉어내지 않고 후두둑 쏟아내는 말을 받아내는 건 내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왜 놔야 해. 싫어. 이리 와.”

“김도영!”

“너 나 좋아하잖아!”

“…….”

“나 좋아하잖아. 여주야……. 여기, 여기 앉아.”

 


제 옆을 톡톡 두드리면서 손을 잡아끄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취기라고 믿고 싶었다. 취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라고. 취중 진담 같은 얘기는 김도영과 수많은 날을 지내면서 믿지 않게 되었는데, 어째서 김도영의 눈동자조차 물기를 머금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도영아. 한숨처럼 뱉어낸 이름에도 김도영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맞아. 나 너 좋아해. 그래서 네가 이런 모습 보일 때마다 욕심부리고 싶으니까 그만해.”

“어떻게 그만해. 뭘 그만해.”

“너 지금 많이 취했으니까……!”

“취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나 진심이야. 여주야, 몇 날 며칠을 생각해도 답이 너인 걸 내가 어떡해야 하는데.”

“갑자기 왜 이래, 어?”

“아무것도 못 놔, 여주야. 나 봐. 나 좀 봐봐.”

 


매달리는 쪽이 김도영이 될 줄은 몰랐다. 허공을 맴돌던 손이 내 손가락 마디를 찾아 얽히기 시작한다. 술을 마신 건 나도 똑같았는데 김도영이 가진 온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뜨거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억지로 앉게 된 침대 끄트머리에서 김도영의 두 눈을 마주 보는 일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눈동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향한다.

 


“그만하자. 나 너랑 사랑할 자신 없으니까.”

“왜 자신이 없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

“멋대로 판단하지 마.”

“그럼 너 나 사랑해?”

“여주야,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여태 김도영이 넘어왔던 보폭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파동이었으나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 모든 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주사’로 여겨져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상황을.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모든 걸 시작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김도영이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넘어지려는 걸 김도영 어깨를 잡고 버텼다. 묘한 분위기가 잡혔다.

 


“내일 일어나서 후회할 짓 좀 하지 말고, 집에 갈게 나는.”

“후회는 실컷 했어.”

“뭐?”

“이제 그만, 그만 후회할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뒤로 쭉 빠지며 볼에 뜨끈한 손이 닿았다. 입술에 생경한 촉감이 전해진다.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두 눈을 뜬 채 김도영에게 안겨 있었다. 슬며시 올라간 눈꺼풀이 내 눈과 마주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내 눈을 덮는다. 술 냄새가 가득 풍기는 입맞춤이었으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건 나도 김도영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선을 넘었고, 내가 그어둔 동그라미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네 번째 파동의 결과는 관계의 재정의였다. 울컥, 눈물이 치솟는 것 같아 맞대고 있던 입술을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난 김도영이 고개 숙인 내 얼굴을 잡아 올렸다.

 


“왜 울어…….”

“우리 사이 망가지는 거 싫다며. 소중한 사람 잃고 싶지 않다며…….”

“내가 너무 늦게 알았지. 미안해. 미안. 여주야.”

“네가 그랬잖아. 네가 우리 친구라고……. 했잖아.”

“맞아. 애초에 사랑하지 말자고 생각했어. 나한테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서 그랬어. 그럼 될 줄 알았어. 친구로 지내면 괜찮을 거라고……. 내가 가진 감정의 이름도 모르고 그랬어. 미안해. 용서해 줘.”

 


이럴 줄 알았으면 바보 같이 감정을 태우는 짓도, 별거 아닌 일로 너를 미워할 일도, 나 혼자 새벽 내내 담배 냄새를 사랑이라 곱씹는 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김도영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 달아서 걱정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으로 돌아갈 환상이라고 해도 괜찮으니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오르던 방울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라 김도영의 감정이었나. 물기를 머금은 것들이 그대로 내 머릿속으로 전이되는 것 같아 김도영 품에 파고들었다.

 


좋아해.

 


가지게 된 건 오래전이었으나 너에게 한 번도 전하지 않았던 마음을 먼저 내뱉었다. 가슴팍에 닿은 귀를 타고 김도영이 전해주지 않았던 파동이 흘러들어왔다. 어깨를 꽉 끌어안고 축축하게 젖은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감기 걸리겠다 여주야……. 울고 있는 건지, 김도영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떨리고 있었다.

 


“사랑하지 말자고 했는데.”

“…….”

“난 이미 너를 사랑하는 게 맞아. 내가 먼저 너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어, 여주야.”

 


숨이 턱 막힌다. 어떡할까. 지금의 감정을 무어라 형용할 수 있을까. 역시 사랑은 담배 냄새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향기로운 게 맞았다.

 


“……자고 갈래? 늦었는데.”

“뻔하다. 김도영.”

“너 차가워.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김도영 때문이지 뭐.”

“응. 내가 다 책임질게.”

“책임진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너는 내가 책임질게. 잃을 일 없을 거야.”

“웃긴다.”

“웃어 줘.”

 


입고 있던 남색 니트에 내가 가진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채 마르지 못하고 먼지처럼 붙어 있는 물기들이 김도영에게 옮겨가는 중이었다. 소매 끝을 붙잡고 김도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긴장이 풀린 몸뚱어리가 추위를 느끼기 전에 따스함을 가져오고 싶었다.

 


“희주한테는 네가 차였지?”

“응. 너한테 정신이 뺏겨 있었거든.”

“나 담배 피우고 올래.”

“기분 좋은데 왜 피워.”

“그래서 피우는 거야.”

“싫어. 여기 있어. 나랑 떨어지지 마.”

“언제부터 이렇게 떼를 부렸어.”

“너랑 잠깐 멀어지고 나서 알았어. 나 너 없으면 안 되나 봐 진짜로.”

“내가 뭘 해줬는데.”

“그냥 다.”

 


있잖아. 김도영이랑 같은 침대에 누워 손을 맞잡고 있다가 문득 머릿속에 스친 걸 입 밖으로 뱉었다. 이제 숨길 거 없다고 필터링조차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잘도 나온다. 그렇게 뱉고 싶을 때는 삼켜내는 법밖에 몰랐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금세 익숙해진 게 좀 웃기기도 했다.

 


“내일 일어났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해도 이해할게.”

“뭘 이해해. 그럴 일 없어.”

“김도영은 그럴 수도 있어.”

“나를 뭘로 봐.”

“거짓말쟁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몸이 팔뚝에 붙는 게 느껴진다. 야. 김여주. 고개만 돌려 쳐다보자 김도영이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째려본다. 아무 표정 없이 그 눈빛을 바라보다 웃자 김도영도 따라 웃는다.

 


“내가 이겼어.”

“응. 네가 이긴 거로 해.”

“져주지 마.”

“너 이기는 법 몰라.”

“잘 알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면서.”

“내가 그것보다 더 좋아해.”

“해 보자는 거지.”

“환영이야.”

 


허리를 감싼 손이 몸을 가깝게 끌어당긴다. 이제야 깨기 시작한 술이 머리를 울리기 시작한다. 앓는 소리를 내며 김도영 품으로 들어갔다.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온기였다. 다음 일은 일어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어. 나를 안고 있는 김도영이 내가 사랑하는 김도영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내 등을 토닥이고, 내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전부 김도영이기를.



 




 


늦어서 죄송합니다.....

글태기가 온 건지 몇 번을 써도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아서.... 글이 잡힐 때까지 소재만 뽑아두고 있었답니다

마음에 드는 글이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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