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Seong-jin Cho - Brahms Intermezzo A Major Op.118, No.2 (Live)

*야식 타입-마블 드림 6,001자.



across the time





그녀는 가라앉고 있었다.

부서진 트리스켈리온의 잔해. 서류더미들. 볼펜과 머그컵. 조각난 모니터 파편들. 그 사이로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느린 뉴에이지의 피아노곡이 들려왔었다. 몇 번째 마디인지도 기억했다. 그가 피아노 위에 턱을 괴고 마주앉던 찰나. 브람스의 곡조는 평화와 닮아있었다. 거실에 맴도는 캐러멜 향. 10월의 가을. 건반을 두드리는 속도는 여유로웠다. 아주 오래전에 브루클린의 카페 어귀에서 그녀가 자주 연주하곤 했었던 그 음악은…….


****


정신을 차리니 강가에 쓰러져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위장을 헤집어 놓은 탁한 물이 식도를 역류해 쏟아졌다. 허드슨 강가의 물맛은 고약했다. 불순물을 게워낸 후 더듬대며 바닥을 짚었다. 조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폴딩 나이프는 강물에 휩쓸려가는 동안 놓쳐버렸다. 강바닥 어딘가 가라앉았겠지. 그녀는 뒤엉킨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시야는 아직 흐릿했지만 또렷하게 두 눈 안으로 들어오는 두 인물이 있었다.

의식을 잃은 타겟, 캡틴 아메리카와 휘청이며 타겟-캡틴을 뭍으로 내동댕이치고 있는 윈터 솔져. 타겟은 미동도 없었다. 폭발과 급류에 휘말려 기절한 것 같았다. 이때를 노려 숨통을 끊는 건 어린 애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일이다. 운이 좋았다. 나이프를 잃어버린 것이 아쉬웠지만 괜찮다. 목을 조르면 되니까. 그녀는 캡틴 아메리카의 목울대 옆 경동맥의 위치를 눈으로 흘겼다. 어디를 감싸 쥐어야 할지 아는 것은 오래도록 그녀를 훈련시킨 하이드라의 교관 덕분이다. 그녀는 사람의 숨통이 끊어지기까지 몇 초가 걸리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때마다 작은 보상이 뒤따라온다는 것도 알았다. 미션을 마치고 돌아가면 피어스나 다른 요원이 따뜻한 스테이크를 대접해 줄지도 몰라. 철없는 어린애마냥 그 순간만을 바랐다. 

함께 먹어야지.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숱한 미션을 함께한 자신의 동역자, 새카만 윈터 솔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몸을 움직였다. 뭐가 됐든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녀가 타겟에게 다가가, 아니 구부정한 자세로 기어가는 동안 태양을 등지고 서있던 윈터 솔져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빛줄기가 사그라들자 보인 것은 마스크 위로 흔들리고 있는 그의 두 눈동자였다. 이상한 눈빛이었다. 평소의 냉정한 그것이 아니라 마치 동요하는 초식 동물처럼 나약한 모습. 죄의식. 생명에 대한 경외. 생전 처음 보는 연민과 동정심이 담긴 빛깔.

-죽이지 않을 거야.

그는 외마디 전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는 타겟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건 단지 윈터 솔져가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


 버키는 샘의 옆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쉴드 요원이 이번 작전에 대해 브리핑하는 내용을 흘겨들으며 기대어 서있었다. 최근 사하라 사막 외곽 지역에서 다수의 불법 무기들이 거래되었다고 했다. 여차하면 지구에서 지도 절반을 날려버릴 만큼의 폭약들이 움직였다는 말에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랐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하고도 무지했다.

대체 스티브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던 거지?

그는 희망을 지녔던 그의 옛 친구를 떠올렸다. 지금은 먼 과거에서 살아가고 있을, 그리고 또 조용히 노년을 맞고 있을 전우는 한 때 세상을 빛과 용기로 바꾼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역사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테러 조직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가? 왜 갑자기 움직이는 거야?”

샘의 질문에 요원이 서류 몇 장을 넘겼다.

“근래에 용병을 대거 고용했다고 합니다. 사하라 사막 지하에 있던 본거지를 쉴드에게 들켜서 급하게 짐을 옮기려는 듯 보입니다.”

“이삿짐센터라도 부르겠대?”

샘의 실없는 농담도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미국 정부에 악심을 품은 테러 조직은 전 세계를 다 둘러보았을 때 모래알의 개수만큼 많았고 개중에는 돈을 주고 용병을 여럿 고용할 만큼의 고약한 녀석들도 있었다. 

“고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병의 명단입니다.”

그들이 고용한 용병으로 추정되는 몇몇 인물들의 이름이며 코드 네임이 요원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녀의 이름도 있었다.

버키는 구부정한 자세를 바로 고쳤다. 흔적을 찾았다 싶으면 사라지고, 사라졌다 싶으면 또 나타나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브루클린 밤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으며 스윙을 흥얼거리던 모습도 스쳐지나갔다. 챙이 달린 모자와 부드럽게 흩날리는 프릴, 굽이 낮은 에나멜 구두. 이제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의 그녀는 늘상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출발하면 되지?”

사무적인 태도로 딴 짓을 하던 버키의 적극적인 질문에 요원이 비뚜름한 안경을 고쳐썼다. 샘도 고개를 돌렸다. 

“너 이번 임무 가기 싫어했잖아.”

“생각이 바뀌었어.”

“그 애 때문에 그래?”

“신경 끄시지.”

샘의 얄궂은 놀림에도 아랑곳 않고 버키는 곧장 짐을 챙겨 헬기에 올랐다. 육중한 철근과 합금판으로 가다듬어져 매끈한 군용 헬기는 곧 이륙했고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야경으로 가득한 워싱턴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사하라 사막까지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


사막의 한기를 몰아내기 위해 피워 둔 모닥불의 연기는 눈가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너무 가까이가면 타버릴 것이고, 또 너무 멀어지면 추위에 얼어붙을 것이다. 한 때는 루시라고 불렸던 솔져는 살얼음장 같은 밤도 몇 번이고 지새울 수 있었다. 그녀의 혈관 속 세포 하나하나마다 스며든 혈청이 비약적인 신진대사 활동으로 체온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밤은 여전히 추웠다. 그것은 육체가 느끼는 온도와는 다른 결,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일컫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이드라가 무너진 후로 갈 곳을 잃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전장을 수도 없이 맴돌았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죽이지 않을 거야.

윈터 솔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버키 반즈는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희뿌연 동공은 더 이상 냉혈하고 무자비한 윈터 솔져의 것이 아니었고,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드슨 강가의 갈대밭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혹은 그 어떤 하이드라의 잔당이라도- 그녀를 수거해줄 사람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윈터 솔져는 그녀를 남겨둔 채 홀로 겨울을 벗어나 떠나버렸다.

그러니 오직 그녀만이 얼어붙은 시간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이, 두 시간 뒤에 이송을 시작할 테니까. 잠들지 말고 있어.”

자신을 고용한 테러 조직의 중간 간부가 근처 모래바닥을 걷어차 불길을 꺼트렸다. 

“불을 켜두면 어떡해. 쉴드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하고 할 셈이야?”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주먹을 내질러 저 괘씸한 주둥이를 뭉개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부수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은 시도때도없이 찾아왔다.

“…….”

“…하여간 준비하라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사내는 살기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툴툴거리며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불 꺼진 사막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있자니 외롭다는 기묘한 감각은 점차 거세졌다. 하늘엔 별이 많았다. 반짝이고 눈부신 것들은 진절머리가 나. 무수한 별들이 다 무슨 의미일까. 그 사이의 어둔 여백을 한 뼘 한 뼘 촘촘히 훑어보던 그녀는 불현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북동쪽 상공에 쉴드의 마크가 그려진 헬기가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침입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무전기의 다이얼을 돌려 적의 위치를 알렸다.

“쉴드가 접근했다. 북동쪽 상공, 높이는 30미터 정도.”

그녀가 무전을 흘림과 동시에 쉴드 측 헬기에서 조명탄을 서너 개 쏘아 올렸다. 한창 무기고의 짐들을 옮기던 중의 테러리스트들이며, 그 주위를 몇 미터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던 용병 무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밝아진 시야를 재빨리 감싸고 어느 정도 빛에 적응한 뒤 다시 바라본 모로코 상공에서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헬기 갑판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버키 반즈를. 

“…배신자.”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내 주변이 소란스러워졌고 용병들은 저마다 손에 쥔 총기를 들어 올린 채 헬기가 착륙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도 달렸다. 버키 반즈 만큼은 제 손으로 끝내겠다는 기이한 호승심에 불타오르면서.


그녀와 버키 반즈가 서로의 나이프를 –버키 반즈는 메탈암을- 맞부딪치기 까지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죽어!!!”

그녀의 새된 함성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그녀의 공격을 흘려보내며 틈을 만들기에 바빴다. 힘으로 밀어붙이기에는 그녀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귓가에 꽂힌 인-이어에서는 폭약이며 화기구들이 이송되는 와중이니 주의해야 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그녀의 주먹을 여유롭게 피하며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쓰잘데 없는 것들뿐이었다. 

“…왼쪽 이마에 못 보던 흉터가 생겼네.”

“무슨 상관인데!”

나이프가 쥐여진 그녀의 왼 손을 붙잡은 그가 천천히 팔목을 비틀었다. 고통은 익숙했으나 들끓어 오르는 분노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녀는 허공에 내던진 나이프를 오른손으로 낚아챈 뒤 그의 목덜미에 크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두 발 뒤로 빠르게 물러서 공격을 피했다.

“용병 일은 그만두는 게 어때.”

“닥쳐!”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

“닥치라고 했잖아!!!”

그녀가 복부를 가격하면 그는 다른 손으로 막아냈고, 그녀가 후두부를 내려치면 그는 메탈 암으로 보호했다. 어느 면에서나 그의 실력이 더 나았다. 항상 그랬다. 하이드라에게 사용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그녀보다 앞서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녀를 떠나갔다.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갈 때에도, 허드슨 강가에서도, 그가 2차 대전에 나갈 때에도, 브루클린의 카페에서도.

순간, 기억의 파편이 유리처럼 부서져 내렸다.

……브루클린?

그런 시절도 있었지. 낡은 자동차들이 내뱉는 시커먼 연기를 들이치며 갓길을 손잡고 걸었던 때. 스티브와 함께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던 때. 새카만 커피에는 설탕을 두 스푼 넣고. 해가 질 때면 겁도 없이 골목사이를 산책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내일은 내일의 파티가 있을 거야, 순진하게 대답하던 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은 너무 오래전 것이었고 또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다.

뒤이어 귀를 찢어놓을 듯한 굉음이 들렸다.

맞은 편 버키 반즈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입모양이 보였으나 방금 전의 폭발음으로 귀가 멀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분주히 짐을 옮기던 화약고가 폭발하여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안에 남아있던 폭약이며 미사일들에 불을 붙여 연달아 굉음을 내뱉었다. 열기를 실어온 바람에 왼쪽 뺨이 뜨거웠다. 거세게 밀려오는 돌풍에 휘청거리는 그녀를 붙잡고 내달리며 웅얼거리는 버키 반즈. 화약고로부터 멀어진 곳, 시간이 제법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 …루시.”

이상한 이름. 하지만 익숙한 이름.

“…루시!!!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그리고 그건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녀, 자신의 이름.

브루클린을 울리던 브람스의 악보가 스쳐지나간다. 피아노만으로 흘러가는 단조로운 멜로디.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곡 더 연주해주기를 요청하곤 했었다. 피아노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여 부추겼다. 그 때 그의 표정은 어떤 모습이었지?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몽롱했다.

“…왜 나를 구해준 거야?”

그녀는 물었고, 버키 반즈는 속죄하지 않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냥.”

“…….”

“네가 루시니까.”

그녀는 그토록 오랜 세월 바랐던 것이 단지 자신의 이름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고 맑은 눈물을 흘렸다. 루시. 루시. 루시... 그가 나지막이 속삭여주는 그녀의 이름은 전혀 다른 세상의 언어처럼 들렸다. 한 때는 그녀도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는 저주가 풀린 것처럼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불길이 타오르는 동안 오래도록 그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호흡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해가 진 사막에서도 더 이상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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