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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비 님! 일어나세요!”

“으음…….”

여러모로 심란한 마음에 잠자리를 뒤척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선잠이 든 호석이었다. 

평소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건만, 그날은 무슨 일인지 지민이 무례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와 평소와 달리 자신을 거칠게 깨웠다. 덕분에 호석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어서요! 얼른 이거 걸치시고 서두르세요! 도망쳐야 해요!”

지민은 보따리에 호석의 짐을 대충 챙겨 등에 매고는, 그에게 겉옷을 걸쳐주고 손목을 잡아 바깥으로 이끌었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비틀거리며 지민에게 이끌려 가던 호석은 지민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러는지 말을……!”

바깥으로 나온 호석은 벌써 해가 떴나 싶을 정도로 환한 불빛에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며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날이 밝은 게 아니었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두운 새벽이었으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의 거대한 화마가 귀왕부를 휩쓸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 앞에는 검은 복장을 한 낯선 자들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귓가엔 사람들의 비명과 도검류가 맞부딪히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망국의 그날이 또다시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화양국의 군사들이 침범해 오던 날을 떠올린 호석의 전신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서 도망가셔야 해요!”

지민은 완력으로 호석의 손목을 세게 쥐고 그의 걸음을 재촉했다. 원담을 향해 후원을 가로지르던 호석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왕부의 인간은 모두 죽여라! 귀왕의 씨는 멸절시켜야 한다! 애첩은 보는 즉시 죽여라!”

사내가 가리키는 애첩이란 존재는 아무래도 저인 듯했다.

‘왜…… 도대체…….’

호석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바로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아서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어째서 왕부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민의 이끎 덕분에 달릴 수 있었다. 원담을 지나 대나무와 아까시나무 산책로에서도 계속 달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나를 죽이려 해?”

헉헉, 호석은 숨이 차올랐다.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데 임신까지 했으니 달리는 게 너무 벅찼다.

그런데도 마음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에 휩싸여 목소리가 떨렸다. 지민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전사하셨어요.”

“!”

“이어 귀왕부 말살 명령이 내려졌죠.”

‘뭐…… 무슨…… 죽, 어? 누가?’

―죽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 그대는 살아.

‘거짓, 말…….’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전신의 모든 힘이 쭉 빠지더니 휘청거리며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눈과 코가 시큰거리더니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호비 님!”

지민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호석의 어깨를 잡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일어나셔야……!”

그때 대나무 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검은 옷과 복면을 쓴 검객 셋이 살기를 발산하며 뛰어내렸다.

평소의 순하기 그지없던 지민의 눈매가 살기를 느끼자 갑자기 매서워지더니 허리에 찬 검을 꺼내 자객에 가까운 이들을 향해 휘둘렀다.

“크헉!”

풍압을 일으키는 검기를 정통으로 맞은 세 사람은 무기를 들어 방어했으나 소용없었다. 보기 좋게 날아가 바닥과 나무에 내동댕이쳐지며 신음을 흘렸다.

놈들이 정신 차리고 다시 공격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판단한 지민은 연이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호석을 뒤에 두고 자객에게 튀어 나갔다. 시린 칼날이 달빛에 번뜩이자 제일 가까이 있는 놈의 머리가 깔끔하게 날아가 몸과 분리되었다.

“네노오옴~!”

바닥에 엎어져 있던 다른 놈은 제 코앞에 떨어진 동료의 머리통에 분노하며 고함을 질렀다. 일어서려는 그놈을 다음 목표로 정한 지민은 쉬지 않고 방향을 틀어 달려가 옆 모습을 보이며 심장을 검 끝으로 정확하게 찔러넣었다. 상대가 저항도 할 틈도 없었다.

이제 남은 놈은 하나. 대나무에 처박혀 있던 놈이 품속의 암기를 꺼내 던졌다. 지민은 칼날을 돌려 암기를 쳐내며 달려가더니 뛰어올라 검을 높이 들었다. 자객의 머리통부터 아래로 가르며 내려오자 등에 기댄 나무와 함께 깔끔하게 상체가 좌우로 쪼개졌다. 야차처럼 밤중에 번뜩이는 눈빛은 그동안 보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누구도 지민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산책로는 시체들이 흘린 선혈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지민은 평범한 시동이 아니었다.

지민의 가족은 산속에서 평화롭게 살던 소수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민이 어릴 때 일가족이 노예상에게 납치당해 소연국에 팔렸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후로 영원히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지민은 지하 격투장의 투노(鬪奴)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 가족을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만을 붙잡고 한 마리의 사나운 짐승이 되어 생사를 걸고 싸웠다.

원형의 격투장은 회반죽으로 만든 높고 견고한 벽이었으며, 오랜 기간 운영되었기에 말라붙은 핏자국과 살점이 가득했다.

투노가 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자기 몸뿐이었다. 음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는 양이었다. 한창 중요한 시기에 영양을 채우지 못했으니 제대로 성장할 리가 없었다. 자라나지 못한 신체는 지민을 동갑내기보다 더 왜소하고 어려 보이게 했다.

그렇게 극악의 환경 속에서 타인의 살점과 피로 전신을 물들이며 다섯 해를 살아남았다. 천하통일을 내세운 화양국의 침략으로 뜻밖의 자유를 얻은 것이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가족은 찾을 수 없었으나 운 좋게 윤기의 눈에 들어 귀병대의 병사가 되어 정식으로 훈련받으며 제대로 된 검술도 배웠다. 그뿐이랴, 짐승이 아닌 사람처럼 살라며 왕부에 살게 하며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투노일 때 몸에 밴 잔악한 습성과 흉악한 성격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귀병대와 귀왕부가 새로운 가족이자 집이 되었다. 그렇기에 지민이 윤기에게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윤기가 호석에게 시동이 되어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기대감으로 매우 놀랐다. 다정하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윤기가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더는 사람을 죽일 일 없고, 칼을 들 일이 없는 평화로움이 좋았다. 색색의 꽃이 만개한 아름다운 후원에서 한가로이 꽃차를 만들며 마시는 것도 좋았다. 처음 겪는 호사에 행복을 느꼈다.

귀병대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열등감에 찌든 황제는 윤기를 이용만 하고 있음을 말이다. 같은 아비의 피를 타고난 황족이었음에도 그 신분의 고하는 천양지차였다. 하지만 윤기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직 군신의 도를 따라 그에게 충성할 뿐이었다.

늘 죽으라고 사지로 몰렸지만, 늘 선두에 서서 물러섬 없이 용맹하게 싸우는 윤기를 경외하면서도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왕부에서 충분히 쉴 틈도 없이 출정해야 했다.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그가 유일하게 귀왕부로 데려와 귀하게 여긴 이가 호석이었다. 그렇기에 지민은 생각했다. 이가 윤기의 반려일지도 모른다고. 드디어 이 왕부에 왕비가 생기게 되리라고.

윤기의 승전으로 하루빨리 천하가 통일되고, 호석이 무사히 출산하여 세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미모가 출중한 둘을 닮았으니 태어난 아기도 용모가 뛰어나리라. 그러나 그들이 함께하는 모습은 이제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 되었다.

“이곳엔 없습니다!”

“찾아라! 반드시 찾아 죽여라!”

원담 너머에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민은 호석에게로 다가갔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뒷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내 목숨이니…… 부탁한다. 지켜다오.

윤기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 석진과 지민을 불러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이유까지 말해주었다. 자신은 이 마지막 전쟁에서 죽을 거라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제가 죽어야만 모두를 살려주겠다는 약조를 받았다고. 

괴로웠다. 주군을 살릴 방법이 없었기에. 그렇기에 심장을 찢는 심정으로 윤기의 유언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황제는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만 봐도 그가 얼마나 치졸하고 간악한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군은 이제 이 세상에 없으나, 그의 유언과도 같은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호석을 찾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지민은 장검을 허공에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곤 허리에 찬 검집에 넣었다. 호석의 앞에 서서 무릎을 꿇고 그의 여린 어깨를 잡았다.

“이럴 시간 없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호비 님과 복중의 아기님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힘을 줘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흐느적거리며 지민의 손길에 겨우 일어선 호석의 안색은 놀라우리만치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의 두 눈은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호석이 제대로 걷지 못하자 지민이 저보다 훨씬 큰 호석을 번쩍 안아 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단 한 곳. 윤기의 침소에 숨겨진 탈출로였다. 뒷산으로 이어진 탈출로는 황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함이었다. 절대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만든 거였건만, 결국 이렇게 사용하게 되었다.

지민의 빠른 걸음 덕분에 윤기의 침소에 금방 다다랐다. 지민은 탈출로가 숨겨져 있는 건물 뒤편으로 달렸다. 호석은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풍경 속에서 윤기와 함께했던 나날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달빛 아래 꽃비를 맞으며 검사위를 펼치던 아름다웠던 그의 모습, 물에 젖은 채 침대 위에서 나눈 싫지 않았던 입맞춤, 따스한 바람이 불던 달밤의 화원에서 꽃차를 마시던 그의 단정한 자태, 가야금 연주를 하던 섬섬옥수와 귓가를 간지럽히던 천상의 선율, 그리고 녹아들 듯이 하나가 되어 극상의 기쁨을 맛보았던 희락기…….

그러나 좋았던 추억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져버렸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도, 다시 겪을 수도 없음을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했더라…….’

―……당신 따위…… 너무 싫어…….

‘아아……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야. 그런 상처받은 얼굴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사실, 사실 난 당신을…….’ 

말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영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죽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 그대는 살아.

‘싫어…… 싫어…… 당신도 살아줘…… 다시 만날 수 있게 살아줘……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엔…….’

호석은 그날을 후회했다. 지민의 품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소리 없이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누군가가 제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숨쉬기가 버거웠다.






비비(悱悱) 외전 中

말을 하려고 하면서 아직 못함

Written by 휴위






 

정신을 잃고 하얀 자리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윤기의 눈꺼풀이 들썩였다.

“……!”

눈을 뜨자 보이는 낯선 천장에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허윽!”

심장과 폐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웅크렸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게다가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했다.

‘살아있다. 어떻게?’

자신은 살아있었다. 생생히 떠올랐다. 믿었던 부하에게 당해 독을 마시고 적장의 창날에 찔리던 날을. 흐릿해지는 의식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하며 눈을 감았건만,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윤기는 의아해하며 힘을 줘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몸뚱이 하나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킨 윤기는 자기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과 팔의 살집과 근육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들어가지 않는 힘을 겨우 줘서 상의를 묶고 있던 끈을 푸니 몸의 근육도 사라져 병자처럼 앙상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창에 꿰뚫렸던 복부와 허리 부분이 예쁘게 꿰매어져 흐릿해지고 있었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 흔적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자신을 치료했음이 분명했다.

‘대체 누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낯선 침소였다. 수려한 조각이 새겨진 커다란 침대, 화려한 비단 금침과 고급스러운 가구, 고가의 장식품으로 꾸며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은 싸구려 객잔 따위가 아닌 명문가의 저택인 듯했다.

대체 누가 자신을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와 치료까지 해준 걸까?

의아해하던 그때 창호지를 바른 문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이곳에 들어오려는 건가 싶어 윤기는 경계하며 무기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검이나 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눈에 도자기가 보였다. 저거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가지러 가고자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콰당!

아니나 다를까, 다리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땅에 발을 디디고 일어서려고 하자마자 빠르게 주저앉아 버리며 큰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큰 소리를 낸 바람에 벌컥, 빠르게 문이 열렸다. 윤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문을 향했다.

“!”

시야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윤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의 등장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오! 드디어 깨어났군! 역시 김 의원! 태형, 그대 실력은 화타도 울고 갈 정도로 뛰어나. 크하하하!”

피죽도 먹지 못한 환자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깨어난 윤기를 보며 크게 기뻐하는 거구의 털보 사내는 방탄국의 장군, 방시혁이었다.

“제가 깨어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장군님. 이번 건의 보수도 넉넉히 챙겨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외알 안경을 쓴 젊은 의원이 새침하게 말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크하하하하!”

시혁은 태형을 향해 호쾌하게 웃고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윤기를 내려다보고 씩 웃었다.

“삼도천을 건너 살아 돌아온 걸 환영하네, 귀장군.”

시혁은 윤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윤기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기에 의문을 가득 담아 인상을 찡그렸다. 

시혁은 음흉하게 웃더니 어린아이 들듯이 양 팔을 잡고 가볍게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거구의 사내에게 깃털처럼 가볍게 들려지니 여러 의미로 충격이 큰 윤기였다.

“자, 자, 환자는 누워야 해. 이렇게 말라서야, 원. 김 의원, 이제 미음을 먹이면 되는 겐가? 이 안쓰러운 뼈다구를 보게. 얼른 보기 좋게 만들어야겠는걸?”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전에 진맥부터 하고요.”

아직도 뭐가 뭔지 사정을 몰라 어리둥절한 윤기의 손목을 덥석 잡고 집중해서 맥을 짚는 태형이었다. 외알 너머의 눈동자는 윤기의 인생을 동정이라도 하듯이 아련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굳이 귀로 듣지 않아도 손가락에 느껴지는 맥으로 알 것 같았다.

“구하기도 힘든 ‘짐독(鴆毒)’이라니. 대체 얼마나 원한을 크게 사신 겁니까? 덕분에 꼬박 일 년을 혼수상태로 누워계셨습니다. 근육이 다 빠질 만도 하죠.”

“…….”

짐독이라는 말에 윤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온몸이 독으로 된 ‘짐(鴆)’라는 새가 있다. 이 짐새는 날기만 해도 그 아래의 논밭, 꽃밭, 과수원이 모두 말라 죽었고, 대소변에 맞거나 날아다니는 짐새 근처에 있기만 해도 즉사였기 때문에 모든 곤충과 동물은 짐새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피했다. 

이 새의 깃털을 이용해 제조한 짐독은 천하의 둘도 없는 극독이라 하여 그 어떤 장수라도 한 방울이라도 맛을 보면 단번에 죽을 만큼 강력했다.

짐새는 잡는 것도 위험하며, 그 새를 이용해 독을 제조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기에 짐독 자체가 희귀하여 구하기도 힘들고, 제조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황궁에는 세상의 모든 진귀한 것들이 바쳐졌다. 그중에 짐독, 아니 헌상된 짐새를 사육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에게나 사용할 법한 짐독이라니…….’

그렇게나 저를 고통스럽게 죽이고 싶었던 건가 싶어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거기에 장군님께 몸을 꿰뚫리셨으니…….”

태형은 시혁을 찌릿 노려보며 뒷말을 이었다.

“장군님께서는 ‘적당히’라는 말이 배우실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살려서 빼내 오실 거면 좀 적당히 하지 그러셨습니까. 가뜩이나 독에 당해 삼도천에 허리까지 담근 사람에게 이런 심각한 외상이라니요. 천벌받을 겁니다, 장군님.”

“크흐음…… 아니, 거기에 황제 놈 끄나풀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충할 순 없잖으냐. 게다가 ‘우리’ 귀장군이 본좌를 죽이고 저도 죽겠다는 결사항전의 각오로 덤벼오던 그 신호지세(晨虎之勢)를 봤다면 김 의원 역시 나처럼 했을 거라네. 지금껏 보지 못한 너무도 아름다운 회광반조(回光返照)라 본좌도 잔뜩 흥분해버렸지 뭔가! 크하하하하! 그래도 난 김 의원의 실력을 믿었지!”

시혁은 태형의 눈치를 보다가 곧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걸 본 태형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곤 윤기를 응시했다.

“범인(凡人)이라면 짐독을 마신 순간 즉사했을 겁니다. 그러나 귀장군께선 오랜 세월 독살을 대비하여 독을 마시는 훈련을 받으셨을 테지요. 그 덕에 짐독이 중화되어 증상이 늦춰진 듯합니다. 또한, 시의적절하게 저를 만나심은 그야말로 천운입니다. 하늘이 도우셨어요. 제 의술이 초절정 고수인 덕에 죽음에서 생환하셨습니다. 만……, 이 짐독이 어지간한 극독이 아닌지라 귀장군의 기혈을 전부 뒤틀어버렸습니다. 아까 보셨듯이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니 원모습으로 돌아가시려면 적어도 삼 년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얌전히 이곳에서 제가 놓아드리는 침 맞고, 약 드시며 잘 치료받으세요. 비용은 여기 방 장군님께서 내실 겁니다.”

태형은 자기 할 말을 하고 일어났다.

“미음을 준비하라 이르러 가겠습니다. 편히 말씀 나누시지요.”

태형이 침실을 나가 문을 닫으니 두 사람만 남았다. 윤기는 시혁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살리신 겁니까.”

“음? 살리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 귀장군은 그곳에서 본좌의 손에 죽고 싶었던 겐가? 신기하군. 전장에 나오는 자들이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다고 할지라도 본망(本望)은 늘 ‘삶’인 것을. 그래, 그래서 그대는 그 독에 당한 비참한 몰골로 본좌에게 죽으러 왔구먼.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훌륭해. 모든 무인의 귀감이로고.”

시혁의 말에 윤기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그대 같은 실력과 인품을 갖춘 장수가 본좌의 수하였다면 천하통일은 이미 방탄국이 했을 터.”

윤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열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바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화양국.”

“그대의 형님은 매일매일 주지육림이라더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냄이 본국에까지 들릴 정도야. 아, 이것도 궁금하겠지? 그대가 본좌의 손에 사망한 그 날, 귀왕부가 불탔다고 하더군.”

“!”

깨어나자마자 들은 잔혹한 비보에 윤기의 눈동자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시혁은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그간에 화양국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윤기의 반응을 살폈다.

“떠돌이 상인이 술에 취해 벌인 불장난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다고 해. 안타깝게도 사고가 일어난 시각이 모두 잠든 시각인지라 살아남은 자는 한 명도 없다지 뭔가. 그리고…… 황궁에 살던 연약한 어린 왕야도 홀로 밤 산책을 하던 중 발을 헛디뎌 깊은 연못에 빠져 돌아가셨다더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이런 불우한 우연이 연이어 일어나다니…….”

힐끔 윤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치밀어오르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반드시 전쟁 통에 죽겠노라고 머리까지 박으며 간청했건만, 황제는 단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귀왕부의 식솔과 제 혈육마저 제거했다. 그 속엔 호석이 있었다. 첫 연정이었던 반려가.

극심하게 타오르는 이 격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결과를 보기 위해 황제의 개가 되어 살아온 게 아니었다. 제가 지키고 싶은 자들을 위해 제 목숨마저 포기했건만, 황제는 철저하게 기만하며 우롱했다. 제 꼴이 퍽 우스웠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냥개로 살다가 소중한 것을 모두 잃고 끝끝내 삶겨버렸으니 말이다.

“복수, 해야지? 귀장군.”

“……!?”

은근하게 부추기는 시혁의 목소리에 윤기의 눈매가 매섭게 번뜩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황상께서는 온건하신 분이라 타국을 침범하는 것도, 침범받는 것도 저어하시지. 하나, 지난달에 병환으로 선위하시고 태자께서 제위를 이으셨다네. 지금의 황상께서는 야망이 가득하시지. 화양국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으셨다고 해. 정확히는 54개국을 무릎 꿇린 그대의 실력에.”

윤기의 심장이 복수심으로 두근거렸다. 금빛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렁거렸다.

“그대의 몸이 완치되는 날, 본격적으로 방탄국이 천하통일의 기치를 세울 걸세. 자네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화양국의 귀장군이 아닌, 모든 가면을 벗은 방탄국의 ‘백장군(白將軍)’이 되어 방탄국의 천하통일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과 영원한 죽음이지. 그대가 백장군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면 화양국 황제의 생살여탈권은 그대의 것이 될 걸세. 또한, 자네의 귀병대 중 일부는 내 밑에 들어왔다네. 제 주군을 죽게 만든 망할 황제 놈을 더는 섬기고 싶지 않다며 받아달라 하더군. 오히려 그대의 고단했던 삶을 거둬가줘서 고맙다 하지 뭔가. 적장을 죽이고 그들로부터 인사받아보긴 또 처음이라 매우 신선했지. 그댈 향한 충심이 가득한 자들만 방탄국에 남아 그대의 복수를 하고자 열심히 훈련 중이야. 그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참으로 기뻐할 터. 어떤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

모두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천지의 조화가 제 편을 드는 것인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부하들이 남아있었다.

시혁은 윤기의 얼굴을 보곤 입가가 씰룩거렸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크하하하하!”

얼굴만 보아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 따위 필요 없었다. 그의 결정은 이제 확고했기 때문이다.

시혁은 화양국의 어리석은 황제를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그 멍청함 덕분에 방탄국은 천하를 얻게 해줄 귀한 검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다.

‘죽은 줄 알았던 귀신이 칼을 들고 눈앞에 나타났을 때 과연 어떤 얼굴을 할지…….’

복수는 언제나 즐거운 일. 그 짜릿한 장면을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시혁의 얼굴이 장난기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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