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고 걸어요
Written by. Maria









매미가 운다. 크고 시끄럽게. 소음이 계속 되자 머리가 울리는 것 같다. 그늘 아래에 있는데 턱을 타고 땀이 뚝 뚝 흐를 정도로 습하고 더웠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보쿠토는 단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선배, 덥지 않습니까?

이런 날씨에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말은 살인 교사나 다름없는 말이에요. 아카아시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불러 내 놓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실 말씀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아카아시가 묻는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훽 쳐들며 보쿠토가 자신을 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햇볕을 담뿍 받아 평소보다 더 빛난다.

-아카아시! 이번 여름 합숙 때, 나 꼭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걸 지금부터 얘기 하십니까?
-어, 어쩔 수 없는걸…!!

그때, 여름 햇살처럼 웃던 아카아시의 얼굴.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선배.

햇살처럼, 빛나던.





*






“으….”

아카아시는 인상을 잔뜩 쓰며 알람을 껐다. 아, 일어나고 싶지 않아. 이대로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 오만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따라 훨씬 더 피곤한 것 같다.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며 일어나라고 말하던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양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제 연인을 보고 있자니 더욱 한숨이 나왔다. 예전에는, 알람 소리에 같이 일어나 주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지. 아카아시는 꾹꾹, 관자놀이를 지압하고 난 다음 버릇처럼 손가락 마디마디를 주물렀다.

“보쿠토 씨.”
“…어어….”
“아침은요?”
“어, 괜찮아….”

한숨을 쉬었다. 아카아시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 문을 열었다. 잠옷 대신 입는 목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트레이닝팬츠를 벗고 수도꼭지를 올렸다. 샤워기에서 금방 미지근한 물이 쏟아진다. 하아, 오늘은 정말 다행이도 보쿠토가 온수를 끄지 않았다. 늦가을까지 찬물로 샤워하는 보쿠토와,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아카아시 덕에 둘은 매번 샤워하기 전 서로를 위해 온수를 끄거나 켜거나 했었다. 그러던 배려가 언제부터인가 ‘귀찮다’는 이유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카아시는 제가 참았다. 보쿠토가 집에 있는 일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따뜻한 물에 채 떨어지지 않았던 피로를 씻어 내리며 아카아시는 한숨을 폭 쉬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연한 하늘색 셔츠와 짙은 네이비색 슬랙스를 꺼내 입었다. 타이 역시 네이비색. 여름에도 정장차림을 고수해야 하는 회사 덕분에 여름에도 넥타이를 매야 한다. 천천히 거울을 보며 손을 움직이던 아카아시가 멈칫, 하고 방 문 너머 침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살며시 열려있는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방문. 예전엔 그래도. 이렇게 넥타이를 매고 있으면 내가 해 줄까? 하고 와서 매 주더니….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연다. 우유를 꺼내며 냉장고를 닫고, 식탁에 둠과 동시에 찬장을 열어 시리얼을 꺼냈다. 그릇에 우유를 붓고 시리얼을 대충 두어줌 쥐어 넣고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한다. 들쩍지근한 시리얼이 입천장을 사정없이 찌른다.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달아서 도저히 삼키기 어려운 우유는 버린다. 예전엔, 늘 보쿠토가 이 우유를 대신 마셔줬다. 달아! 달아서 맛있어. 그렇게 웃으면서. 그 뒤엔 무엇을 해 주었던가. 키스를 해 주었었지.

“다녀오겠습니다.”

방문이 열리기는커녕 대답도 없다. 아카아시는 가방과 차키, 휴대폰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도쿄의 아침은 서늘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이웃과 눈인사를 하고 아카아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두어번 눌렀다. 편두통인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는 늘 주차해 두던 곳에 있다. 아카아시는 물끄러미 제 자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색 혼다 올뉴어코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보쿠토는 기억하지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자동차는 그가 해외 구단에서 첫 연봉을 탔을 때 아카아시에게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 지금은 혼다지만, 다음엔 포르쉐나 BMW를 주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던 그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정말 애지중지했다. 그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땐 손 세차까지 하며 어디 흠집이라도 날까 누가 긁고 가진 않을까 노심초사 하곤 했는데….

“…긁혔네.”

그 마음도 4년이 지나니 이젠 무뎌지는 모양이다. 아카아시는 앞문 옆 길게 긁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대충 문질렀다. 어차피 검은 차니까 보이지도 않을 거다.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 놓아둔 커피향 방향제에서 기분 좋은 헤이즐넛 향기가 난다. 아카아시는 흘긋 차 앞 유리를 보았다. 혹시나 연애하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서로의 사진 대신 놓아두자고 말했던 부엉이 장식품. 보쿠토가 해외에서 사온 작은 장식품. 비즈가 촘촘히 박혀 꽤 예뻤던 기억이….

왜 하필 눈 근처 비즈가 없어진 거야?

“하아….”

처음 시작은, 서로가 17살, 18살 여름이었다. 그때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보쿠토는 같은 학교 3학년이었다. 배구부 선후배 사이로 만나 연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그 이후론 쭉 서로 ‘연인’이라는 이름 아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기를 10년. 이젠 27살과 28살. 어엿한 성인이다. 동성혼이 허용 되지 않는 사회라곤 하지만, 이게 결혼이 아니면 대체 뭐겠는가. 함께 산 날도 햇수로만 벌써 9년째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정말로 긴 시간이다. 사람들은 그게 뭐가? 라고 하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서로 볼 거, 안 볼 거,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살았다. 침대가 하나였기에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자리에 들지만 예전처럼 눈만 마주치면 붙어먹던 그 정력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섹스리스가 된 지도 이젠 세달 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카아시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간호사가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명찰을 목에 걸었다. 목과 어깨를 돌리자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육이 뭉친 모양이다. 오늘 집에 가면서 마사지 예약을 해야지, 따위 생각을 하며 아카아시는 재활치료실의 문을 열었다.

“아카아시 선생님!”

아카아시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첫 번째 환자인가. 웃는 낯으로 저를 향해 걸어오는 환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 팔 높게 드시고-.”

남자친구인 보쿠토 코타로는 작년까지 국기를 달고 뛴 배구 국가대표 선수이다. 현재는 해외 프로리그에 몸을 담고 있고, 마스크나 모자가 없이 밖에 나가면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스포츠 스타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탁월한 유머감각과 쇼맨십이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뭐, 학생 때부터 항상 주목을 받아오던 사람이니 스타가 되었다 해도 그다지 놀랍진 않다. 아카아시는 우수한 성적으로 T대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배구도 함께 졸업해버린 자신에게 적잖은 아쉬움을 토로하던 보쿠토였다. 저 역시 어떻게든 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재활 치료사가 되었다. 거기에 공부 하는 틈틈이 운동 치료사 자격증과 트레이너 자격증도 땄다. ‘혹시나 그와 같이 국가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환상과 기대로 준비했던 일이지만…. 현실과 환상은 역시나 별개의 문제였다.

“다리를 쭉 펴세요. 네, 잘 하셨습니다.”

꼬박꼬박 출퇴근 하는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시즌으로 움직이니. 서로 휴일을 맞추기도 쉽지 않고. 해외 리그가 시작되거나 원정 경기, 혹은 국가대표 합숙을 시작하면 몇 개월을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땐 더 불탔던 거다. 그 모든 걸 사랑으로 커버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진다고. 외로움은 조금씩 아카아시를 좀먹기 시작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몸이 달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데.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고, 쓸쓸히 애달은 몸을 식히며 잠이 들기를 벌써 10년을 했다. 만약, 이 생활을 하고도 지치지 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아카아시는 그 사람을 신으로 모실 수 있었다.

“아카아시 선생님! 오늘 점심 뭐 먹을 거야?”

벌써 점심시간인가…. 환자 여러명을 계속 돌아가며 보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지도 몰랐다. 아카아시가 동료인 마츠다를 향해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뭐 드시고 싶은 것 있으십니까? 그냥 간단하게 나가서 덮밥이나 먹을까? 자긴 가리는 것이 없다며, 탈의실 라커에서 지갑을 꺼내 나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평일 점심시간은 어떤 식당이나 붐비기 마련이다. 이젠 밖에서 기다려도 죽지 않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더위를 타지 않음에 감사를 하며 휴대폰을 열었다. 메시지 0건. 이젠 점심 먹으라는 말도 안 하는 건가…. 괜히 메시지를 보내려다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카아시는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다음 주가 결혼기념일이야. 이젠 선물을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레퍼토리 다 됐다 나도.”
“하하, 벌써 그렇게 되셨습니까?”

마츠다는 올해 결혼 12년차다. 병원 사람들은 모두 아카아시가 미혼인 줄 알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아카아시는 동거 10년이면 결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은 평생을 약속한 사이지만 동거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르겠지.

“선물 써먹을 만 한건 다 써먹었어.”
“그러시군요…. 그것도 참 고생이시겠어요.”
“이런 날을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가 고생이니 말이지.”

자리에 앉자마자 소고기 덮밥과 주먹밥 정식을 주문한다. 아카아시는 그의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는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이 마음 몰라!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투덜거림을 적당히 받아 넘기며 아카아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쯤이면 일어나셨을 텐데. 오전에 러닝은 하셨으려나…. 아니면 그냥 쉬셨나.

“연차 좀 남은 게 있으니, 이번 결혼기념일엔 여행을 다녀와야겠어.”
“어디로 가시게요?”
“뭐 직장인이 어디 멀리 갈 수 있나….”

가깝게 온천이나 가는 거지.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는 순간 종업원이 메뉴 두 개를 아카아시와 마츠다 앞에 놓는다. 점심시간은 짧다. 둘은 젓가락을 빼들고 동시에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그는 말을 이어나간다. 참, 지치지도 않나 싶다.

“그래도 여행이 제일 잘 먹혀. 갔다 오면 나름 애틋한 마음도 생기고….”
“…그런가요.”
“그럼! 왜, 아카아시 선생님도 뭐, 애인이랑 잘 안 돼?”

아카아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라 생각한 건지 마츠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인생 선배니까 해주는 말인데, 권태기일 땐 딱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 사람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면 헤어지는 거고. 천천히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여전히 이 사람을 놓칠 수 없다 싶으면….”
“싶으면…?”
“보통은 결혼을 하지.”

하하. 웃음이 터진다. 그러게요. 그럴 수 있었으면 아마 벌써 했을 텐데 말입니다. 밥알과 함께 말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사정이 돼야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사람 일이라는 건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니. 마츠다가 수저를 놓는다. 그릇이 깨끗하다.

“선생님도 여행이나 가보는 건 어때? 가까운 곳이라도 좋으니까.”

기왕이면 추억거리가 좀 있는 곳이 더 좋지 않겠어? 리마인드도 좀 되고 말이지. 다 먹었으면 가자고.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카아시는 먹다 남은 주먹밥을 빤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은 여전히 잠잠했다.




* * *





보쿠토는 소파에 늘어지듯 기대 TV 리모컨을 들고 하릴없이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리그를 우승으로 마무리한 그는 시즌오프 기간을 맞이해 일본에 돌아 왔다. 한 달간의 휴식을 한 후 다시 출국한다는 일정이지만 한 달이나 그와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이라면 서로 옷을 입고 있는 것 보다 벗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테지만. 저녁을 먹고, 서로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대화는 없다.
대화가 없어도 편한 사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은 하지만…. 아카아시의 머릿속엔 낮에 마츠다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뱅글뱅글 맴돌았다. 놓칠 수 없다면, 잡아야 한다. 아카아시는 제 옆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배를 긁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직 사랑해? 아카아시는 그 말에 대답했다. 응. 아직. 사랑해.

“보쿠토 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카아시가 읽고 있던 전공서적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며 책을 덮는 그가 의아했는지 보쿠토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고 아카아시를 쳐다봤다. 오늘 그와,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응, 뭔데?”

잠시, 심호흡. 청록색 눈동자가 아주 살짝 떨렸다.

“아직….”

저 사랑하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말이 채 이해가 되지 않은 듯 보쿠토가 눈만 끔벅였다. 지금 쟤가 뭐라고 하는 거지…? 아직도 사랑 하냐고? 보쿠토가 당황해 몸을 아카아시에게 돌리며 다급히 대답했다. 당연히, 당연히 사랑하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눈에 띠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아카아시의 얼굴이 설탕 녹듯 사르르 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기분이 묘했다. 설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아카아시도 느끼고 있었던 걸까.

“다행이네요. 저도거든요.”

저기, 아카아시…? 살며시 이름을 불렀다. 그는 보쿠토를 흘끗 보다, 눈앞의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화면엔 요즘 한창 인기라는 연속극이 방송되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브라운관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생각 해 봤는데요. 저는 이걸….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으응….”

아카아시의 눈이 똑바로 보쿠토를 향했다.

“우리, 권태기 같아요.”

툭. 그 순간, 보쿠토의 손에서 리모컨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잖아요. 저는 아직 보쿠토 씨를 사랑하고, 보쿠토 씨도 역시 저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불이 꺼지게 놔두고 싶진 않거든요. 보쿠토를 빤히 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그러게. 아직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슬그머니 다가와 한쪽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오랜만에 보내는 키스 시그널. 눈을 살 감으며 입을 맞추려 들자 아카아시가 슬쩍, 얼굴을 옆으로 뺐다. 엣? 당황해 쳐다보는 보쿠토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아카아시가 말을 이어나간다.

“여행이라도 가는 게 어때요?”
“어디로?”

아무 곳이나 좋아요. 뭐? 어디 생각해 놓은 곳은 없고? 아카아시가 고개를 끄덕끄덕.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국내 여행이라면 웬만큼은 돌아다녀서…. 어딜 가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 출발할거야? 하고 물으니 금,토,일. 2박 3일동안 다녀오자고 한다. 확실히 그정도로 짧은 여행이라면 굳이 계획이 필요하지 않으니 상관은 없긴 하지만….

“가고 싶은 곳, 정말 없어?”

톡, 이마가 마주 닿았다. 천천히 깜박이는 아름답고 오묘한 빛깔의 청록을 바라보던 보쿠토가 눈꺼풀에 쪽, 입을 맞춰 주었다. 간만이다. 이런 분위기.

“생각났습니다.”
“어디?”
“교토. 교토에 가고 싶어요.”

에? 여행 이야기 자체도 뜬금없이 나온 거긴 한데 생각해낸 장소는 더욱 뜬금없다. 갑자기 교토라니. 너무 흔하지 않은가? 수학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보쿠토가 고심해서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도 아카아시는 전혀 기다려주는 기색 따윈 없이 더욱 뜻 모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따로 출발하는 건 어때요. 저, 간만에 집에 좀 들렀다가 가고 싶어서요.”

보쿠토는 도쿄 태생이고, 이 근방에 제 본가가 있지만 아카아시의 본가는 도쿄 외곽에 위치 해 있다. 집엘 들렀다 간다고? 보쿠토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왜, 뭔데. 같이 가. 이리 말하면 열 중 아홉은 들어주던 아카아시였는데. 단호하게 먼저 가시라 딱 자르는 말에 보쿠토는 순간 서운함이 울컥 솟아올랐다. 너무 단호한 거 아냐? 결국 조금 토라져 먼저 잠이나 자겠다며 투덜투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였다. 권태기인 것 같다고, 같이 극복 해 보자고 여행을 가자는 얘기 아니었나? 도대체 저 작달만한 머리통에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보쿠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10년…. 확실히 길었지. 아니, 정말 길었지. 잠이 오지 않는다. 거실은 아직 밝았고, 닫은 방문 틈새로 전등불이 새어 들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려 깊고 섬세하다. 그 모습에 반해 지금까지 사랑했다. 분명 무슨 생각이 있어 제게 그런 말을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운함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확실히 세월이라는 게 무섭긴 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아카아시를 이해하려 들었을 텐데 지금은 제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보쿠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은 수요일. 떠나는 건 금요일. 급작스럽게 잡힌 여행인 만큼 처리해야 할 것도 많았다. 아카아시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 갑자기 잡은 휴가이니 만큼 미리 얘기를 잘 해야 한다는 거다. 보쿠토 역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에이전시에 연락을 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여행을 떠날 생각이니 자잘한 일들은 캔슬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행가방을 어떤 걸 가져가는 게 좋을까. 드레스룸에 들어가 가방을 이것저것 보던 보쿠토는 그냥 평소처럼 커다란 스포츠 백에 옷이며 속옷, 수건, 세면도구를 챙겼다. 아카아시 역시 제 것을 챙기겠지만 세면도구는 보쿠토가 챙기는 게 훨씬 편하다. 아카아시는 좀 무딘 면이 있어 아무거나 쓰는 편이지만 보쿠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민한 쪽이 신경 쓰는 게 옳다. 예전엔 그러고 보니 이런 것 가지고도 싸웠었는데…. 이젠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그만큼 익숙해진 건지.
그날 저녁 전화가 왔다. 본가에 들렀다 바로 교토로 출발할 예정이니 오늘은 혼자 주무시라는 얘기였다. 의아하기도 하고, 혼자 잠들라는 말이 좀 서운하기도 해서 보쿠토는 알았다 대답하곤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여행 기대하고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런 생각도 들었다. 권태기 타파…. 그런 게 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생 한결같이 사랑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정한다. 익숙해지니 무덤덤해졌고, 무덤덤해지니 잔잔해졌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동료들의 말에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매번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에 아카아시를 소홀히 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카아시! 어디야?”

다음날 교토에 혼자 도착한 보쿠토는 입을 삐죽 내밀며 아카아시에게 전화를 했다. 여행은 저가 알아서 하겠다더니 숙소는 어딜 예약했는지 뭘 할 건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질 않은 것이다. 가는 내내 연락을 했지만 메시지는 읽지도 않고 심지어 전화도 받지도 않았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니 거기엔 또 답장을 하는 모양새가 못내 화가 나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알기나 할까? 오는 내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했는지.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에 보쿠토는 알았다며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누가 알아보던 말든 상관하지 않고.
아카아시가 원하는 것이 권태기 타파라면, 자신 역시 그에 맞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했다. 제가 짐작한 것이 맞는다면 말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보쿠토는 초조하게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한 시간을 기다렸다. 이젠 짜증보다 걱정이 앞서고 있는데, 제 등을 툭 치는 손에 보쿠토가 모자를 고쳐 쓰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너 너무 늦은 거 아냐!?”

…응? 잠깐 뭔가….

“선배,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선배라니. 학교를 졸업하면서 같이 졸업해버린 호칭을 쓰다니. 아니, 그 전에. 호칭이 문제가 아니야. 그 전에….

“아카아시…. 그게 뭐야…?”
“뭐가요?”
“그… 옷.”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다. 보쿠토는 당황했다. 정말, 진심으로. 아카아시 케이지는 아주 오래전, 추억 속에 존재하던 그 모습 그 대로 제 앞에 서있었다. 품이 조금 크고 낙낙한 하얀 반팔 셔츠. 줄무늬 넥타이. 그리고 흰색에 검은색 포인트가 들어간 네모난 에나멜 스포츠 백…. 그랬다. 아카아시는 교복을 입고 후쿠로다니 배구부 전용 스포츠백을 메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라. 보쿠토는 순간 눈을 비볐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봤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지금이 10년 전인가 싶어서였다.

“선배 왜 그래요?”
“아, 아니…. 아니야.”

뭘까. 지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은 걸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설마 본가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이것 때문일까? 교복을 입고 제 앞에 서려고? 갑자기 가슴 속이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권태기 타파를 위한 여행을 온 건 확실한데, 그것을 타파하려다 제 심장도 같이 파괴될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냐며, 앞서 걸었다. 어, 같이 가 아카아시! 어서 체크인 하지 않으면 늦는다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제 가슴께를 매만졌다. 사실, 많이 설렌다.

“…여긴….”

보쿠토는 숙소 앞에 멍청히 서서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철저하네. 역시 아카아시 케이지야…. 누구 애인 아니랄까봐 정말 철저해. 응? 이 곳이라면 숙소를 가르쳐 주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여길 가르쳐 주면 분명 지금처럼 놀랍고 설레고, 두근거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후쿠로다니 여름 합숙은, 온천 여관을 운영하고 있던 스즈메다네 부모님 집에서 이루어지곤 했었다. 그의 부모님도 후쿠로다니 출신이었고 시즌이 되면 그녀의 부모님들은 출신 학교 우대라며 후쿠로다니 학원 운동부 학생들에겐 여관을 특별히 50%나 할인을 해 주었기 때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딱 한번, 여관 유지 보수 공사를 위해 여름 내내 그곳이 손님을 받을 수 없다 하여 다른 곳을 선택한 적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이곳, 토모야 장인 것이다.

“….”

아카아시 케이지가 첫 레귤러 합숙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밤에는 같이 온천을 즐겼고, 밥을 먹고, 온천에서 조금 떨어진 사설 체육관에서 연습도 하고 그랬었지. 그리고…. 그날 밤. 여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보쿠토 코타로는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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