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피아노 교습소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국보다 먼저 도착한 학부모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심상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정국은 이따금 땅을 차며 자기 발만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몇 번, 학부모들이 젊은 아빠라기에도 너무 어려보이는 정국에게 동생을 데리러 온 거냐고 살갑게 말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렇노라 대답하는 것은 거짓말이었으므로 이후로도 쭉 대화는 거짓말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이어질 질문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 정국은 뚱하고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모두가 정국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게 되는 것으로 균형과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가 나타나 비탈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손잡이가 달린 종이봉투를 양손에 각각 들고 있었다. 무게 중심이 기울어질 때마다 넘어질 것도 같아 보였는데 정말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이는 걸음걸이에 집중한 것처럼 눈썹을 세모낳게 올려뜨고 잘 걸어왔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정국은 아이가 들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받아쓰기를 한 과제물과 토마토 화분, 그리고 씨앗 때부터 지켜보았던 토마토 화분에 대한 관찰 일지였다. 봄방학이 시작되어 학교에서 더 이상 돌볼 수가 없어지자, 아이들이 각자 돌보던 화분들을 가져온 것 같았다. 아이가 들고 있던 짐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국이 말했다. [들어주세요. 해야지] [드, 드러...주세여] 정국은 아이의 짐을 받아들었다. 식물의 줄기가 제법 곧았다. [나중에 이거, 토마토 열리면 따먹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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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벗어나 좁은 보행로를 따라 걸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이따금, 두 사람은 핫도그 가게에 들러 핫도그를 사먹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설탕을 뿌린 핫도그와 오렌지주스를 나누어 먹으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구경하고 앰프를 통과해 나오는 가게의 음악 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핫도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자꾸 졸아서, 실은 그렇게 많이 졸았던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피로한 기색이어서, 정국은 핫도그를 포장해달라고 고쳐 주문했다. 포장된 핫도그를 들고 가게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아이는 또 여상스레 잘 걸었다.


정국은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핫도그를 주고 자신도 하나를 먹었다. 아이의 입가와 머리카락에 묻은 설탕 알갱이를 손등으로 털어 바닥에 떨어지게 했다. [발로 밟지는 말고] 아이는 그렇게 했다. 진중한 태도로 설탕을 밟지 않고 뛰어넘은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가 양치를 하고 몸을 씻는 동안 정국은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아이가 욕실에서 나오자 수건으로 아이의 젖은 몸을 닦아주고 아이가 서 있던 바닥을 또 닦았다. 내복을 입힌 다음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물에 불은 작은 손톱들을 깎아주었다. 그리고 낮잠을 재웠다. 커튼을 쳐서 나른하고 어두워진 아이의 방에서 나오자 정국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아이는 한 시간 이상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보다 일찍 깨어나더라도 정국을 찾거나 제멋대로 거리로 나와 울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아이들은 없겠지만, 언제인가부터 그렇게 지낼 수 있는 아이는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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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은 담장을 허물고 있는 주택 단지 근처를 지나쳐 걸었다. 자동차가 줄지어 세워져 있는 공용 주차장에 몸을 숨기고 포도 향이 나는 담배를 가볍게 깨물어 피웠다. 정국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기진맥진해져 주차장 바닥에 누워 있다가, 오가는 차들 때문에 여러 차례 으깨져 죽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누나는 무섭지도 않았을까. 정국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풍경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살한 누나의 눈에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였을지 다시금 생각해보려다가 관두었다. 누나랑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었다. 아무튼, 애를 두고 자살할 만큼 뭐든 그렇게 힘들었던 거겠지. 다른 피붙이가 없는 조카를 기르게 되고 나서, 정국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했다. 그랬다가 실직을 했고, 어제는 관공서에 들러 실업 급여를 신청했다. 오늘 저녁에는 수급 기간 동안 생활비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계획해볼 참이었다. 정비공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좀 알뜰히 산다고 생각하면, 핫도그는 몇 개나 사먹을 수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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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주택이 모여 있는 단지로 돌아온 정국은 현관 앞에 서 있는 지민을 발견했다. 정국의 집은 1층이어서 계단을 몇 칸 오르지 않고도 서로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현관문은 안전 고리가 걸린 상태로 얼마쯤 열려 있었다. 지민은 아이의 언어 치료를 담당하는 봉사자였다. 교회를 통해 소개받았으나, 정국이 이제 더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는데도 지민은 일주일에 두 번, 비슷한 시간에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문틈으로 인사는 했는데. 정민이가 고리를 안 풀어주네] 정국은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안 돼서 그래요. 제가 아무나 열어주지 말랬거든요] [우와. 서운하네. 아무나라니] 진심으로 서운해 보였기 때문에 정국은 피식 웃었다. 지민이 조금 볼멘소리로 물었다. [넌 애만 두고 나갔었어?] [잠깐이요. 담배 피우러] 정국은 지민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가 걸어 나오자 문을 마저 열어달라고 했다. 아이는 발판을 밟고 올라서 안전 고리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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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지민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정국은 아직 파릇한 색이 남아 있는 사과 두 개를 먹기 편하게 잘라 물과 함께 지민에게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해 봐] [감샤함니다. 잘... 먹게써니다] 아이가 지민이 말한대로 따라하며 정국을 쳐다보았다. 정국은 아이에게 웃어주곤 천천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작은 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정국은 띄엄띄엄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발음이 부정확하고 어눌했다. 발화 길이가 짧아 길고 복잡한 문장을 단번에 말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것이 아이의 문제고, 질병이라는 것이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적절하지 않다. 읽고 쓰는 학습에 어려움이 있다. 이해 언어에 비해 산출 언어가 부족하다. 또래와의 상호 작용이 어려워 사교 관계에 문제가 있다... 정국은 아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빠가 없는데 엄마도 죽어버려서 그런 거겠지. 나까지 없어져 버린다면 영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정국은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지만 아이와 함께 산 뒤로 집 안에서는 한 번도 담배를 물지 않았다. 대신이랄지, 지민의 입술이 물고 싶었다.


정국은 앉은 자리에서 잠시 졸았다. 정국이 졸고 있는 사이 아이의 수업이 끝났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국은 눈을 떴다. 지민은 정국에게, 아이가 대부분의 활동을 잘 따라주었지만 이번에도 종종 제시된 단어를 반복하기만 하고 문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 몇 번 들었던 말이었다. 제시된 단어가 무엇이었냐고 정국이 묻자 지민이 대답했다. [모자] [모자로 무슨 문장을 많이 만들 수 있어요?] 썼다. 벗었다.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지민이 모자와 관련한 예시문들이 가득한 문장카드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흠... 많이 만들 수 있네요] 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국은 아이가 방 안에 있는 것과, 거실까지의 시야가 확실히 가려지는 것을 확인하고 지민에게 반걸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마주쳤다. 정국은 지민의 통통한 입술을 약한 소리가 나도록 할짝인 다음 납작해지도록 이렇게 저렇게 짓눌렀다. 마침내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휘젓자 지민이 그만 하라는 듯이 살짝 깨물었다. 정국은 고개를 떼어내고 다시 지민의 등 뒤를 확인했다. 아이는 계속 방 안에 있었다. 정국이 말했다. [그래도 모자보다는 물이나 눈, 이런 단어가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다음엔 그걸로 해볼게]


지민을 배웅하고 나서, 정국은 환기를 하기 위해 베란다 창을 열었다. 어느새 구름이 끼어 날이 이전처럼 밝지 않았다. 펼치지 않은 우산을 한 손에 들고 개를 산책시키는 여자가 보였다. 오늘 비 소식이 있었던가. 지민이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 기억나서 정국은 비가 내릴른지, 얼마간 창밖을 지켜보았다. 베란다 배관 통로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윗집에서 베란다 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빗자루로 물을 쓸어내 하수구로 내려 보내는 중이겠지. 정국은 빗소리 대신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다가 거실로 들어왔다. 오후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른 저녁을 간식으로 때울까 싶었다. 과자와 우유, 아까 지민과 아이가 다 못 먹은 사과조각들하고, 생살구 두 알을 접시에 담아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과자를 먹으며 우유는 먹는 시늉만 하듯이 홀짝거렸다. 정국은 사과조각을 몇 개 집어먹은 뒤 살구를 입 안에 넣고 굴리다가 말했다. [우유까지 다 마셔야지 오늘 책 읽어줄 건데] 아이는 정국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정국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들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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