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오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전화 받자마자 바로 왔어요.”

외숙모의 소리가 높아지자 박하민이 말대꾸했다. 제 엄마에게 대하는 낯은 억지로 좋은 아들을 연기해 웃고 있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배어 있다. 둘의 대화에서 불협화음을 감지했는지 얌전히 따라 오던 개가 컹컹 짖기 시작했다. 덩치가 크고 소리의 울림통이 커서 위협적이다. 털을 흠뻑 적시는 빗줄기 속에서도 짐승 특유의 눈빛이 살아있었다.

“그 개 좀 어떻게 해 봐라. 볼 때마다 짖어대니.”

“진순아, 착하지.”

현관에 서 있던 숙모가 질겁하며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박하민이 건성으로 개를 달랬다. 개가 제 엄마를 위협하는데 아들은 웃고 있다. 박하민이 쓰다듬자 개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열린 현관문 안에서 숙모 대신 삼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아버지 좀 따라와라. 도와줄 일이 있으니까.”

“뭔데요?”

신발을 신은 삼촌이 손짓하자 우산을 들고 있던 박하민이 재빨리 아버지를 향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와도 왼쪽 어깨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비에 맞지 말라고 박하민이 아무리 끌어안아도 소용없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다 스러져가는 집에 비교하면 깨끗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주택의 실내였지만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집도 비가 새는 것이다.

“아유, 이걸 어째!”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대야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본래 소파가 있던 곳의 천장에서 물이 새자 소파는 제 자리로부터 밀려나 구석에 옮겨져 있었다. 김장용으로 쓰는 커다란 대야의 한 쪽에 물이 절반 이상 차 숙모가 발을 동동 굴렀다. 혼자 힘으로 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외숙모와 함께 무거운 고무대야를 들었다. 둘이서 들어도 힘에 겨워 비틀 비틀대며 간신히 화장실로 운반했다. 이동 중에도 팔 힘에 부쳐 물이 바닥에 철썩 철썩 떨어졌다. 화장실 배수구에 물을 쏟아내고 돌아오니 할머니가 흘린 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단순히 걸레질로 끝날 양이 아니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양이 많다 못해 가느다란 물줄기를 이룰 정도였다.

물줄기 아래에 대야를 다시 돌려놓았다. 그 순간 툭 하고 실내가 암흑으로 변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빈 집의 깜박이던 전등과는 달리 이번엔 실내의 모든 전기가 나가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할머니와 숙모의 시커먼 형체 외에는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오자 눈이 적응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이 없었다면 어둠 속에서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물이 하도 많이 새서 하민 아범이 두꺼비집을 내린 게다. 사고날까봐.”

할머니와 숙모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비는 너무할 정도로 퍼부어댔다. 장마도 아닌 초겨울에 이렇게 많이 내리다니 기상이변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빗속에선 박하민이 고생 중이었다. 우산은 땅에 내팽개친 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사다리에 올라 지붕을 살피고 있는 건 삼촌이었다. 아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자 숙모가 득달같이 달려가 우산을 씌워줬다.

“여보, 뭐가 뭔지는 알겠어요?”

“하민아, 꽉 잡아라. 아버지 여기서 떨어지면 큰일 난다.”

“알았으니까 조심해요!”

숙모 말에 대답 않고 삼촌은 딴 소리를 했다. 빗속에서 알겠다고 외친 박하민은 제 아버지의 무게를 지탱한 사다리가 미끄러져 인명사고가 생기는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켜보는 쪽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삼촌이 공과대를 졸업했고 전자 제품을 다루는 기업에서 일하는 건 사실이지만 집수리를 해본 건 아니다.

삼촌은 한 동안 지붕을 살펴봤지만 딱히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부자가 초겨울에 비를 맞으며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다 못한 할머니가 아들을 말릴 지경이었다.

“아범아! 잘못하면 다친다. 이제 그만 내려 와라.”

“어머니도 말씀하시잖아요. 빨리 내려와요!”

“금방 보고 내려갈게요, 어머니!”

세 명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중구난방으로 외치는 가운데서 박하민은 난처해했다. 가족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애꿎은 사다리만 두 팔로 꽉 붙잡고 있을 뿐이다.

그 때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 주위를 서성대며 불안해하던 개가 갑자기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누군가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도 개를 따라서 몸을 돌리더니 상대방을 알아보고 손뼉을 쳤다.

“아이고, 찬현이 왔구나!”

누가 왔다는 소리에 삼촌이 사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박하민도 고정된 몸은 움직이지 못한 체 고개만 돌려 누가 왔는지 봤다.

빗속에서 나타난 건 경운기 아저씨의 아들이었다. 낮에 논길에 빠진 경운기를 밀고 비료 포대를 직접 들었던 남자였다.

“잘 왔다, 잘 왔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리 와서 도와주니 고마워서 어쩌누.”

“괜찮습니다, 할머니. 뒷집이라서 금방 오는데요.”

할머니가 한달음에 다가가는 바람에 우산을 들고 있던 나도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반가움을 표하며 손을 주무르자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옆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지자 가볍게 목례했다. 나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뒷집 아들이 왔대요. 당신은 이제 그만 내려와.”

“어, 왔구나. 반갑다. 낮엔 인사라도 하지 왜 그냥 갔어.”

“찬현이가 왔으니까 됐다, 아범아. 너는 그만 내려오고 찬현이한테 보게 하자.”

“예예, 어머니. 내려갑니다.”

“조심하세요, 아빠.”

삼촌은 그제서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가 비에 젖은 사다리를 내려오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박하민은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경운기 아저씨의 아들은 이런 일에 경험이 있는지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검은색 플라스틱으로 된 사각형의 공구통을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사납게 짖는 개는 웬일인지 꼬리까지 치며 남자의 다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삼촌이 조심스럽게 땅 위에 착지하자 우산과 공구통을 처마 밑에 내려둔 남자가 이마에 무언가를 썼다. 어둠과 빗속에서 시야를 밝혀줄 헤드 라이트였다. 장비까지 등장하자 상대방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삼촌은 자기가 교대할 테니 이제 됐다고 아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사다리에 한 발을 올린 남자도 이쪽을 향해 한마디 했다.

“아저씨만 계시고 다들 들어가시죠. 비 맞지 마시고.”

남자의 말에 따라 사다리를 붙잡을 삼촌만 남긴 체 가족들은 실내로 들어왔다. 불 꺼진 실내는 여전히 어둠침침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까 전처럼 앞이 보이지 않아 움직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 동안 눈이 익숙해진 것이다. 그래도 행여나 할머니가 다치지 않도록 박하민이 핸드폰 라이트를 켰다.

“찬현이가 와 줬으니 이제 됐다. 한 시름 놨어.”

“이 시간에 기꺼이 와 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나저나, 아휴. 집이 물바다가 됐는데 이걸 언제 다 치워.”

숙모의 말대로 다들 잊고 있던 대야에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얕은 물웅덩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모두가 지붕에 정신 팔린 동안 실내에선 쉴 새 없이 물이 새고 있었다. 숙모의 한탄에 박하민이 자신의 폰을 내게 건네주고 고무대야를 영차 들었다. 두 사람이 들어도 비틀댔던 걸 의외로 번쩍 들어올렸다. 물론 얼굴은 힘든 기색을 숨기지 못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기보다 팔 힘이 좋은 박하민이 한 발자국 씩 딛을 때마다 젖은 옷과 대야에서 빗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박하민이 물을 화장실에 버리러 간 사이 숙모는 깊은 한숨을 쉬며 수건으로 바닥을 훔쳤다. 할머니와 나도 합심해서 옷과 걸레로 주변을 닥치는 대로 닦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려있는 현관으로 삼촌과 경운기 아저씨의 아들이 돌아왔다. 두 사람 다 내리는 비를 내내 맞은 탓에 마치 강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어머니. 고칠 수 있답니다.”

삼촌은 지쳐 보이는 얼굴에 비해 밝은 어투였다. 밖에서 젖은 셔츠의 물기를 짜던 남자가 설명했다.

“지붕이 낡아서 판넬의 이음새가 틀어졌어요. 실리콘을 다시 바르면 될 겁니다.”

“아이고, 찬현아. 매번 고마워서 이를 어쩌누.”

“그런데 죄송하지만 지금은 작업을 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며칠 동안 비가 올 테니 내일 아침 비가 그칠 때 급한 대로 적당히 실리콘을 바를 순 있어도 지금 같은 밤에는 힘듭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여보. 밤새도록 이렇게 물바다 속에 살아?”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숙모가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삼촌은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희망찬 태도를 유지했다.

“괜찮아, 하민 엄마. 밖에 비 그쳤거든. 봐봐. 아까부터 덜 새잖아.”

삼촌의 말 대로였다. 대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천장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의 세기가 급격히 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간헐적으로 똑 똑 하고 조금씩 대야 위로 떨어졌다. 창 밖에서 하루 종일 화이트 노이즈처럼 들려오던 빗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이야기할 동안 두 번째 대야도 비우고 돌아온 박하민이 창밖으로 손을 내밀더니 ‘진짜 그쳤네’라고 중얼거렸다.

“어휴, 어머니. 다행이에요. 지금이라도 비가 그쳐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구나.”

“이웃집 아들내미가 이렇게 와 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하민아, 너도 대학 다니면서 저런 것 좀 배우지 뭘 공부하니.”

긴장이 풀린 숙모가 박하민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하고 어깨를 움츠린 박하민이 제 엄마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숙모가 남의 아들을 추켜세우고 박하민을 깎아내린 건 진심이 아니다. 숙모는 삼촌과 마찬가지로 공대에 합격해서 장학금까지 받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상황이 정리되자 숙모는 비에 쫄딱 젖은 아들을 화장실로 밀었다. 초겨울 날씨에 젖은 채 오래 있다가 감기 걸리지 말라는 거다. 박하민은 실리콘 정도는 자기도 바를 수 있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엄마의 손에 기어이 갈아입을 옷과 함께 화장실에 갇히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저 집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거실 바닥의 물기를 닦던 할머니가 근심했다. 나도 옆에서 소파에 흥건한 물자국을 걸레로 지우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는데 정리를 돕겠다며 남은 경운기 아저씨의 아들은 삼촌과 함께 무거운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유리 장식장 아래에 흘러든 물을 발견한 삼촌이 장식장을 밀며 끙끙대자, 남자는 어깨를 툭툭 치며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삼촌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남자는 백팔십이 넘어 보이는데 덩치도 좋았다. 남자가 당기자 장식장은 벽에서 뽑혀 나오듯 손쉽게 드르륵 움직였다.

“찬현아, 낮에 저쪽 집에 가 봤니? 비도 하루 종일 오고해서 애들이 있는 김에 한 번 봐 줬으면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의 질문에도 한동안 대답이 없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태까지 나에게 말은커녕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던 남자가 할머니의 질문에 어째서인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때 깨닫고 말았다.

낮에 박하민과 함께 있을 때 들었던 대문 소리의 정체는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죄송합니다. 못 가봤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열이 나셔서.”

“아버지가? 아이고 또 무슨 일이래. 몸살 기운 아니냐?”

“푹 쉬면 나으실 겁니다. 낮에 비를 맞으셨거든요.”

“진작 말을 하지. 이리 와 봐라. 할미가 기침에 좋은 한약을 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이웃끼리 정이라는 게 있지. 너도 매번 우리 집을 도와주지 않니.”

노인의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할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그 사이 화장실에서 박하민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충 말리고 갈아 있었는지 옷은 새 거였지만 머리는 여전히 덜 마른 체였다. 따뜻한 물에 세수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 보기 좋게 혈색이 돌고 눈빛이 맑았다. 박하민이 내게 마른 수건을 건네 줬다.

“엄마 아빠는 이제 쉬세요. 나머지는 저랑 누나가 할 테니까. 누나도 작은 방에 가서 좀 말리고 와. 내일 아플라.”

“그래, 하민이 나왔으니까 이제 당신도 씻어요. 하민 아빠도 많이 젖었잖아.”

숙모는 벽에 튀긴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평소와 같이 친절한 사촌의 얼굴로 미소를 머금은 박하민은 아무래도 방금 전 할머니와 남자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삼촌이 화장실로 향하고 나도 작은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박하민과 삼촌, 그리고 경운기 아저씨의 아들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꽤 젖어 몸이 으슬으슬했다. 문제는 캐리어를 빈 집에 두고 와서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박하민이 준 새 수건을 옷 안에 넣어 몸의 물기를 닦는데 밖에서 대화가 들렸다. 남자가 할머니에게 받은 한약을 가지고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남자는 내일 날이 밝으면 두 집 모두 수리하러 오겠노라 약속했다. 할머니가 돈을 주겠다고 해도 이웃 간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거절하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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