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의 일본. 거리의 밑바닥. 시죠 나유타, 그녀는 살기 위해서 타인을 속이고, 물건을 훔치고, 결국 사기꾼 아마야도 레이에게 약점을 잡힌다. 시종으로 분장해 귀족가 아리스가와 저택에 귀중한 정보를 훔치러 잠입하게 된 나유타는 가출하고 싶어하는 망나니 도련님 다이스를 만나게 되는데…….'

라는 요청으로 작업했습니다! 근대 일본의 밑바닥 서술이라거나, 고딕 양관 로맨스라거나, 여러 가지로 좋아하는 소재가 많아서 즐겁게 썼습니다. 겉으로는 밝고 별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의 심중을 드러내는 이야기인 점도 좋았고, 결론적으로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있어서 그것도 제 스타일처럼 되었군…… 싶었네요.

· 분량이 길어서, 쓰면서 꽤 골머리를 앓은 부분도 있는데, 돌아보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역시 소설은 그저 열심히 써야만.

· 작중의 다이스는 아직 집을 나오기 전이기에 토호텐 성을 쓰고 있습니다.






"엄마, 나도 신사에 종이를 달러 가고 싶어. 소원을 적으면 이루어지는 것 맞지? 나 빌고 싶은 소원이 여러 가지 있어. 이웃집의 오하루는 카스텔라를 실컷 먹게 해 달라고 빈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바보 같은 말은 적지 않을 테야. 가게가 잘 되어서 손님이 잔뜩 몰리게 해 달라거나, 아니면 아빠가 하는 '그 일' 이 오봉까지는, 아니, 이번 보름까지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거나 하고 쓸 거야. 아빠는 무척 바쁘니까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이런, 나유타."


시죠 모모는 빙긋이 웃으면서 딸을 달랬다.


"조금 더 네가 원하는 걸 빌어도 될 텐데. 갖고 싶은 것이라거나, 먹고 싶은 것이라거나 하는 건 없니?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오하루가 그렇게 이상한 소원을 빈 것 같지도 않은걸."

"먹고 싶은 건 아저씨들이 종종 사 주니까, 아무래도 엄마나 아빠가 잘 되는 게 좋아."


오전, 아직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 술집은 한산했다. 나유타가 유리창을 열었다. 바깥은 알록달록한 칠석 장식들로 치장되고 있는 참이었다.


"나유타, 먼지 묻는단다."

"신사에 가고 싶어."


오랫동안 열지 않아 먼지가 쌓인 창틀은 어린 아이의 요령으로는 쉽게 밀리지 않는 모양이라, 나유타는 한동안 끙끙거리며 창과 씨름했다. 신선한 바깥 공기가 새어들어오고, 조용한 술집과 달리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가 흘러들어와 별세계를 보는 느낌이었다.


"글쎄, 어떨지……."


모모는 부드러운 어조로 나유타의 말을 받아 주면서도 좀처럼 '그러자꾸나',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근처의 신사라고 하면 칠석에는 으리으리하게 치장하여 귀족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모모로서도 딸과 함께 칠석 나들이를 나가 대나무 조릿대에 탄자쿠(短冊)를 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의 허름한 행색으로는 신사 근처에도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안 돼?"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그런 게 어딨어? '아직은 모르겠다' 라면 역시 안 된다는 거지? 전에도 항상 그랬는걸."

"아니, 아니야. 나유타. 아빠에게 부탁해 보는 방법도 있고, 나유타가 그렇게 바라는데 엄마가 힘내 봐야지."

"정말? 그러면 약속해 줘. 칠석에 소원을 걸러 가기로."

"약속은……."

"아니야?"

"아니, 나유타. 그래. 약속하자. 칠석에는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빌 수 있도록 할게."


'안 된다' 라고 한다면 나유타가 당장 울 것만 같아 보였기에 모모는 엉겁결에 약속까지 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틀 안에 당장 옷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어딘가에 부탁해서 빌릴까 해도 모모가 아는 술집 손님들 중에 어린아이의 기모노를 여벌로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생긴 모모의 근심거리는 그날 밤까지 이어져, 오래간만에 가게에 들른 손님인 겐에게도 그만 푸념을 늘어놓게 되고 말았다.


"나유타가 이렇게 꼭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처음이어서요. 매번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제대로 입히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 옷차림이라거나 하는 건, 원래는 저보다도 신경을 쓰지 않고 명랑하게 자라 주는 아이이지만 혹시 모를 장소에서 창피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길거리에서나 입는 옷으로 축제에 끼어들었다가는 도둑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니까요."


겐은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내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아마도 지금까지의 겐을 보면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벽을 쳐다보고 있다가,


"도둑 취급은 곤란하지."


하고 말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장담은 못 해. 그래도 그 애가 신나하면 귀엽긴 하겠지."


모모가 걱정스레 묻는 것과 달리 겐은 여전히 태평한 투였다. 마치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하는 듯한 태도여서, 나유타에게 약속까지 한 모모로서는 애가 타고 미심쩍기도 했지만 겐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




"와!"


나유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눈앞에 펼쳐진 옷을 보았다. 어린이의 기모노라고 해도 바닥에 펼쳐 놓자 제법 크기가 커서, 나유타는 이리 걸어가서 쪼그려앉아 한쪽 소매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또 저리 걸어가서 반쯤 엎드려 다른 쪽 소매를 쓰다듬어 보고 있었다. 시카타 겐이 뒤에서 키득였다. 


"어이, 꼬마 아가씨. 그렇게 옷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야 정작 나들이에 늦는다고."

"그래, 나유타. 모처럼 예쁜 기모노가 생겼으니 얼른 채비하고 신사로 다녀오렴."


자, 이리로 앉아 보렴. 엄마가 머리를 만져 줄게. 모모의 말에 나유타는 쪼르르 달려와서 모모가 항상 단장을 할 때 앉던 거울 앞 자리에 앉았다. 고운 빗 아래 말괄량이처럼 푸석푸석하던 머릿결이 가지런히 다듬어졌다.


"그러면 오늘 아빠랑 둘이 놀러 나가는 거야?"

"그렇게 되는구나."

"엄마도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저녁이니까, 엄마는 손님들이 있잖니."


나유타는 갸웃하면서도 '응'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가서 잔뜩 보고 말해 줄게. 아, 엄마가 빌고 싶은 소원도 대신 적어 줄게. 그래도 되는 거지, 아빠?"

"뭐, 그렇지."


겐의 무신경한 듯한 대답에도 나유타는 한껏 올라간 양 뺨이 반질반질할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사로 가는 길은, 본격적으로 다리를 건너기 전부터도 축제를 즐기러 나온 구경꾼들과 길거리에 늘어선 포장 마차로 잔뜩 붐벼 겐은 나유타의 손을 꼭 쥐어야만 했다. 적당히 옷을 빌려다 주고서는 한량 보호자 행세나 할 심산이었는데, 7살짜리 여자아이는 생각보다도 너무 작았다. 제대로 잡지 않으면 인파에 떠밀려 넘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심지어 보폭도 크게 차이가 나니 부산스러운 가운데 보조를 맞추어 걷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겐은 나유타를 양 손으로 들어다가 자신의 어깨에 태웠다.


"어때, 이렇게 하는 게 더 잘 보이지?"


나유타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울긋불긋한 등불이나 사람들의 그림자에만 갇혀 있던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이자, 당황스러울 만큼 화려한 축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유타는 겐의 머리에 두 손을 기댄 채 입을 헤 벌리고, 거리를 따라 끝없이 늘어선 붉은 등과, 목마를 탔는데도 고개를 꺾어들고 보아야 할 만큼 높은 곳에서 나부끼는 후키나가시(吹き流し), 밤거리의 끝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신사의 건물과 흐르는 듯한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에 정신이 팔린 나유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겐은 겐 나름대로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흡족했는지 거침없이 신사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곧 붉은 다리를 건너고 언덕길의 계단을 오르자 대나무 숲과 소원을 쓴 탄자쿠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경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자, 소원을 적고 싶다고 했지? 가서 종이를 가져오면 돼."


나유타가 바구니에서 종이를 꺼내려고 하니 키가 약간 모자랐다. 나유타는 발돋움을 해서 종이 몇 장을 쥐고 겐에게 돌아와, 신중하게 소원을 적어 내려갔다. 옆에서 겐도 '모처럼이니까' 하며 뭔가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소원 종이를 두 장 만들어서 대나무에 걸려고 하는데, 근처에 있는 높이에는 이미 모두 색색의 소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딘가 예쁘게 어울리는 적당한 곳이 없을까? 소원은 하늘에 닿는 것이니까, 가급적 높고 예쁜 가지에 걸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가지를 발견하면 아빠에게 가서 다시 목마를 태워 달라고 해야지. 나유타는 생각하면서 대나무 숲을 따라 걸었다. 아주 높은 가지들에는 아직 소원이 없는 것 같았다. 아빠가 저기 닿을 수 있을 만큼 키가 컸던가? 돌아가서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유타는 소원 종이를 손에 꼭 쥔 채 뒤돌았는데, 색색깔의 종이들과 화려한 불빛, 번쩍거리는 금박이 장식된 비단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 시카타 겐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아빠, 아빠?"


나유타는 자그맣게 겐을 부르면서 경내를 헤맸다. 왔던 길을 착실히 되돌아가서 원래 종이를 꺼냈던 바구니가 있는 곳까지 와도 겐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불안함에 갑작스레 다리가 아프다고 느껴진 나유타가 울먹거리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또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언제 와?"


나유타는 눈이 반짝거렸다. 똑같이 길을 잃은 아이인 걸까?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어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쉿…… 오토메 님께서는 바쁘시다고 하셨어요."

"엄마도 온다고 했잖아!"


나유타는 기웃기웃 어른들의 옷 틈새로 안쪽에 있는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누가 보아도 귀족인 듯한 차림을 한 소년은 잔뜩 성이 난 것처럼 보였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안 와? 그럼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야? 하나도 재미없어!"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주위를 좀 보세요. 오토메 님께서는 못 오시니까, 도련님만이라도 오늘을 즐겁게 보내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보내 주신 거랍니다."


소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 주변으로 둥그렇게 늘어서 있는, 모두 같은 가문(家紋)이 새겨진 겉옷을 입은 이들을 불만스럽게 쏘아보았다. 


"칠석이니 생일이니 하나도 재미없어. 하나도 재미없다고."


소년이 속한 집안의 사용인들로 보이는 그 사람들은, 그렇지만 자리에서 움직이거나 하지 않았다. 소년이 하는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답답하다, 라고, 오히려 나유타가 대신 생각할 즈음에 일행 중 한 여자가 외쳤다.


"아, 도련님, 저기 좀 보세요. 축제 행렬이 지나갑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다같이 감탄하며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로서도 골치아픈 도련님을 모신 채 우두커니 있기보다는 모처럼의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싶을 터였으므로, 주위는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졌다. 그리고 나유타는 작은 키로 보았다. 그 순간 허리를 숙이고 옷자락들 사이로 잽싸게 빠져나오는 소년을.


나유타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하고 뒤에서 울긋불긋한 행렬 너머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도련님은 아니었지만,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패싸움을 하고 달아나거나 하면서 도망치는 인물들을 나유타는 거리에서 여럿 도와준 적 있었다. 나유타는 엉겁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사와 담벼락 사이 건물 틈새에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야, 하면서 나유타는 틈을 가리키고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면, 주위가 한동안 그 도련님을 찾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가 곧 조용해졌다. 


나유타는 태연한 척 거리에 서 있다가 조심조심 담벼락 쪽으로 다가갔다. 벽과 건물 사이 틈을 가리고 있는 수풀을 살짝 헤치자마자 예의 도련님의 머리가 쏙 하고 나타났다. 아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도련님의 첫 마디는 이랬다. 


"뭐야, 너는?"

"뭐야, 도와줬더니 그렇게 말하기야?"


나유타는 소년을 있는 대로 흘겨보았다.


"……고마워."


소년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도망가 본 거 처음이야?"

"음…… 밖에서는?"

"밖에서는?"

"집안에서는 자주 도망다녔어. 선생님이나, 수업 시간이나, 그런 것들을 피해서."


나유타는 눈을 깜박거렸다.


"너 정말 '그거' 구나."

"'그거'?"

"그러니까, '도련님' 이라는 거 말이야."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는지 콧등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선생님이 있다는 건 뭘 배운다는 거잖아. 그런 건 귀족들만 하는 거야."

"하나도 좋지 않아."


나유타의 말에 소년은 입을 삐죽거렸다.


"매일같이 따분한 이야기만 들어야 하고. 엄마 아빠는 바빠서 집에 자주 오지도 않아. 오늘도, ……."


나유타는 조금 전 사용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오늘도?"

"내 생일인데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어. 엄마 아빠도 오지 않아. 약속했으면서, 오지 않아."


소년은 분한 듯 외로운 듯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 사람들은 말은 나를 모시고 나왔다고 하면서 다들 휴가라도 받은 것처럼 자기들끼리 들떠 있단 말이야. 칠석이니까, 생일도 칠석이 떠들썩한 것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그래서 도망친 거야?"

"다들 한번 골탕먹어 보라지. 엄마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서 안 나갈 거야." 


"음." 나유타는 생각했다. 그건 곤란한데. 


"엄마가 많이 바쁘셔?"

"엄마는 매일매일 바빠. 특별한 날이 아니면 볼 수가 없어."

"그건 안됐네."


나유타는 '우리 엄마도 오늘 바빠서 함께 축제에 오지 못했다' 고 위로할 셈이었는데 소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상황도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적어도 자신은 오늘 낮에 엄마가 손수 머리를 빗어 주고 옷을 입혀 준 다음, '잘 다녀오렴' 이라고 포옹까지 해 준 참이었으니까. 대신 나유타는 담벼락 밑을 더듬었다.


"뭐 하는 거야?"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나랑 내기하는 거야."

"내기?"

"응. 여긴 계속 앉아 있으면 추워질걸. 여기 이 돌, 내가 손에서 손으로 옮길 테니까 어디 있는지 네가 맞히는 거야. 네가 이기면 계속 여기 숨어 있자. 그게 아니면, 우리 아빠한테 가는 건 어때? 아빠는 키가 아주 커서 나를 어깨 위에 올려 주기도 하거든. 아마 우리 둘 다 목마를 타고 구경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멋지냐면……."

"됐으니까 손이나 보여줘 봐."


나유타는 겐의 어깨 위에서 보았던 풍경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도련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적은지, 그 내기나 해 보자며 나유타를 재촉했다. 참을성 없기는! 나유타는 담벼락에서 떨어져 나온 돌 조각을 허공에 휙 던졌다가 잡아챘다. 어두운 그늘 안에서 돌 조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자신 있는 웃음을 지으며 나유타가 주먹 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소년은 곧장 나유타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조금은 헛갈려할 줄 알았는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르는 듯한 모습에 나유타가 반문했다.


"정말? 고민 안 해?"

"고민 안 해."

"그렇구나."


씩 웃으며 나유타가 주먹 쥔 오른손을 뒤집었다. 빈 손바닥이 드러났다.


"……이 쪽일 줄 알았는데."

"너, 포기가 빠르다. 도련님들은 다 이런 거야?"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소년에게 나유타는 쥐고 있던 왼손도 마저 펴 보였다. 그 쪽도 빈 손바닥이었다. 소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유타가 펼치고 있는 양 손을 바라보았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알았어. 잡아채는 척 하면서 돌을 그냥 던져 버린 거지? 재미없어. 안 속아."

"후후."


나유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년의 허리띠 쪽에 손을 뻗었다. 눈 깜짝할 찰나, 나유타가 아닌 소년의 품 속에서 하얀 돌 조각이 나타났다. 이번에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에게 나유타는 돌 조각을 내밀었다.


"이번엔 속았지? 재미있지?"

"내 옷 속에서 꺼낸 거야?"

"사실 아니야. 소매 속에 돌을 숨긴 다음, 어디서든 찾아내는 척 하면서 소매에 있던 돌을 꺼내면 돼." 

"그거 속임수잖아."

"그래서 '속았지' 라고 했잖아."

"풋…… 아하하."


뻔뻔한 나유타의 태도에, 줄곧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은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응. 재미있어. 그리고 네 말대로 슬슬 추워."

"그렇다니까. 밖으로 나가서 우리 아빠를 찾아보자."


그런데 두 사람이 담벼락 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는, 이미 축제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서 수군거리고 있고, 칼을 찬 경찰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유타는 그제서야 아빠를 잃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덜컥 겁이 나서 옆에 있던 소년의 옷소매를 붙잡는데, 갑작스럽게 소년의 몸이 어딘가로 확 당겨지면서 나유타는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도련님!"


그리고 바닥에 넘어진 채 나유타는 조금 전의 소년이 하늘 위로 안아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도련님,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갑자기 사라지시는 바람에 일대를 수색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피우게 되었지 않습니까. 집안의 고용인들은 물론 경찰에까지 연락하게 되고……."


당황스러움과 바닥에 팔을 찧은 아픔에 어안이 벙벙해서 나유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혹시 어딘가에서 이상한 것을 드시거나 이상한 사람과 말을 섞지는 않으셨겠지요? 축제 기간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섞여서 돌아다니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드렸던 것을 기억하신다면요.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을 오토메 님께는 뭐라고 고했어야 할지……."


소년은 모습이 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도련님은 저를 안아든 고용인들과 경찰들과 함께 오토메 님이라는 분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나 보았다.


나유타는 일어나서 몸을 털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겐과는 다행히도 신사에서 거리로 넘어가는 다리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




"뭐, 끝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어. 그때는 엄마도 있었고, 그 사람도 집에 자주 왔으니까……. 축제도 나쁘지 않았고? 어, 솔직히 엄청 멋졌고? 소원은, 뭐. 그때 그건 이루어진다고 해도 소용없었으려나. 어차피 그 사람의 그 일이란 거, 다른 여자들한테 관련된 거였을 테고."


스무 살의 시죠 나유타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아니, 실은 걸걸한 것은 목소리의 인상으로, 삐딱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하며 일부러 거칠게 목을 긁어 내는 소리 같은 것들이 버릇이 되어 일반적인 여성의 태도로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야도 레이는 눈앞에 있는 인물의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눈으로 훑었다. 크기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남자 구두는 낡고 닳아 구멍이 나지 않았으면 다행인 몰골이었고, 몇 주간 빨지 않은 것 같은 바지는 해져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늘어난 웃옷은 원래 색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또 위에 걸쳐입은 겉옷은 무늬까지 살아 있는 새것이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훔쳤거나 도박판에서 딴 듯했다. 제멋대로 뻗은 더벅머리는 자다 일어났거나 모자에 눌려서 기름이 번들거렸다. 길에서 마주친다면 가급적 피하고 싶은, 어디를 보나 질 나쁜 부랑아로 여겨지는 모습이었다. 나유타는 레이가 말이 없자 덧붙였다.


"그리고 귀족 나으리들 따위는 역시 비위가 상한다는 것 정도? 자식 하나 잠깐 안 보인다고 축제날에 경찰이라니 호들갑이 심하다고. 뭐, 그 날이 역시 이상한 거였고, 지금 와서는 더이상 얽힐 일도 없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런가."


아마야도 레이는 씩 웃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유타는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허공에 손부채질을 했다.


"너구리 굴이냐고."

"한 개비에 5엔이야."

"난 담배 안 피는 거 알잖아, 아저씨."

"5엔 내면 내가 이걸 안 핀다는 뜻."


능글맞은 미소에 나유타는 보란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장난해? 그보다 용건이나 말하라고."

"음."


레이는 느릿느릿 담배를 빨아들이며 시죠 나유타를 바라보았다. 외형의 지저분함에 감춰지지 않는, 아니, 지난 오 년간 더욱 날카로워진 선명한 눈빛이 마주한다.


"토호텐 오토메. 데릴사위인 오스카 미카도를 제치고 토호텐 가문의 실질적인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지. 대단한 여자야. 밖으로 모습을 많이 보이는 만큼 가정에는 별달리 신경쓰지 못하겠지. 그 도련님이 비뚤어지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거야."


담뱃재를 터는 레이의 손동작을 따라가던 나유타의 눈은 이어지는 말들에 흥미 없다는 기색이 되었다.


"알 바 아니잖아. 귀족들의 집안 사정 따위."

"이번엔 관련이 있지."

"뭐?"

"그 토호텐 가에, 이번에는 아가씨가 숨어들어가 줬으면 하는 거다."

"미쳤어? 나 간다."


나유타는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아마야도 레이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웃으며 나유타를 올려다보았다.


"어딜 가게? 이 계절에 구치소는 추울 걸."

"당신…!"

"말했잖아. 아가씨가 할 일이 있다고. 이건 부탁이 아니야."

"당신한테 협박당하는 것도 지겨워."

"아아, 뭐."


레이는 느릿하게 담배를 눌러 껐다.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면 말리지 않아."

"……."


나유타는 색안경을 쓴 아마야도 레이의 보이지 않는 눈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중절모에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어딘가의 실업가처럼도 보이고, 본인도 종종 그런 것처럼 말하지만 이 사람의 정체는 사기꾼이다. 그것을 알기 전, 멋모르는 나유타는 심부름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사기 행각에 여러 번 가담했다. 세상에 이유 없이 보수가 두둑한 심부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오 년 전의 어린 나유타는 아직 그것을 몰랐었다.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내막도 모르는 말을 전달하거나 물건을 옮기는 일을 도왔고, 그 결과 도리어 레이에게 약점을 잡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진짜 배후가 어둠에 몸을 숨긴 동안, 발로 뛰는 나유타 쪽이 사기 혐의에 엮이게 된 것이다. 이대로 고발당하면 나유타는 그 동안 레이가 저질러 왔던 죄목을 모두 뒤집어쓰고 이십 년은 감옥에서 썩는 신세가 될 터였다.


"나는,"


나유타는 쓴 입맛을 다시다가 물었다.


"왜 나야?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 없어. 발 빠른 것 하나 믿고 하는 소매치기나 거짓말, 좀도둑질 정도밖에 할 줄 몰라. 토호텐 같은 곳에 숨어들어갈 수는 없다고."

"그 말대로다. 토호텐 가는 명문 중에서도 명문, 이 중왕구의 실질적인 지배자지. 그 저택의 경비는 아가씨가 아니라 다른 노련한 도둑들이라도 뚫을 수 없을 거야. 그래서 아가씨에게 부탁하는 거지."


레이는 품에서 쪽지를 꺼내 나유타 앞으로 밀었다.


"카사메쵸 6번지. 가정집이야. 거기 가면 소노다라는 부인이 있다. 이 도시에서도 가사나 예절에 능통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니까, 거기서 한 달쯤 먹고 자면서 몸가짐을 배워. 아가씨는 그 집의 하녀가 될 거야."

"뭐?"

"밖에서 접근할 수 없으니까 내부자가 된다. 간단한 전략이지."


나유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그거 진짜 가능한 거야? 토호텐 가문 같은 곳이라면 사용인들의 출신도 확인할 거라고."

"아, 아가씨가 갈 곳은 정확히 말하면 토호텐이 아냐. 토호텐 오토메의 친정인 아리스가와 가 저택이다."

"아리스가와……."

"료엔지 근처에 있는데, 토호텐 오토메가 안가 삼아 종종 드나들지. 당연하지만 토호텐 본가에 비해 훨씬 경계가 덜해. 한적하니까 시간 때우기도 좋을걸."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딴 건."

"어이, 이제부터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아마야도 레이가 킬킬 웃었다. 나유타는 쪽지를 집어들고 만지작거렸다.


"신분은 준비해 뒀어. 아가씨는 원래 가전을 수입하는 카와구치 사장 집에서 일했는데, 이번에 불경기로 고용인들을 정리하게 되면서 내보내지게 된 거지. 나한테는 사촌 조카가 되는 아이여서 마침 손이 비는 아리스가와에 부탁하게 된 거야."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정보 확인. 자세한 내용과 연락 방법은 아가씨가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 알려주지."

"일단은 소노다 부인이라는 거네."


아마야도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유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리스가와 저택에 잠입하기 위한 하녀 역을 위한 위장이라. 아마야도 레이가 종종 이런 식으로 가져오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맡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왜 자신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녀 역이라면 애초에 좀 더 몸가짐이 조신한 아가씨들이 낫지 않나? 새침한 척 하는 여자애들은 뒷골목에도 널리고 널렸다. 역시 자신은 통제할 수 있어서? 정보를 알게 된다고 해도 입막음이 되니까? 하지만 아마야도 레이가 약점을 잡아 부려먹는 인간이 세상에 한 명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임기응변이라면 몰라도 깊은 생각은 익숙지 않은 나유타가 한숨을 쉬었다. 아마야도 레이는 사기꾼에 남을 협박해서 마음대로 부려먹는 것치고는 보수도 꼬박꼬박 주고, 어떤 때는 행동거지에 대한 조언도 하는 등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땅이 꺼지겠군. 그렇게 가기 싫나?"

"아니, 이런 꼬질꼬질한 애를 어떻게든 씻고 빨아서 귀족 집 하녀로 만들겠다는 당신 계획이 웃겨서."


아마야도 레이가 피식 웃었다.


"아가씨, 어릴 때는 꽤 귀여웠지."

"무슨 소리야?"

"지금 아가씨의 그 모습.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 아닌가. 남장에, 지저분한 옷차림에, 건달들이나 쓸 것 같은 말씨 같은 것들. 몸도 팔지 않으면서 부랑아로 살기에 여자답고 고급스러운 것들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니까."

"지금 욕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가씨는 필요하다면 다른 모습도 될 수 있다고 믿어. 이번에 일을 맡기기로 한 건 그 때문이야."


진지하게 자신을 향하는 말에 나유타는 허 하고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유타를 두고 레이는 도로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씻고 빨면 얼굴도 꽤 예뻐질 테니 그 집 도련님이라도 꼬셔 보든가. 아리스가와에는 세상에 나서길 싫어하는 방탕아 도련님이 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꺼져."


나유타는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바닥만 남은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그 집에 얘기는 해 뒀지? 그럼 당장 오늘 밤부터 여기로 갈 테니까." 




❖❖❖




"세상에, 어서 와요. 아마야도 씨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거지 같은 몰골에 뻣뻣한 겉옷을 걸친 차림으로 들어섰음에도 소노다 부인은 나유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체 아마야도 레이가 소노다 부인에게 뭐라고 해 놓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식사는 했나요? 아니, 일단 목욕부터 해야겠는데…… 그러니까 시죠 양이지요?"

"네. 그…… 시죠 나유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유타는 익숙하지 않은 인사를 꾸벅 했다. 소노다 부인이 호호 웃었다.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아마야도 씨에게 듣기로는 한 달 정도 여기 머문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어음, …… 네."

"그렇게 쭈볏거리지 않아도 돼요. 가사를 돕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죠 양은 손님이고, 제 수강생이니까요."

"수강생……."

"네. 평일 낮에 동네의 여성 분들을 상대로 예절 교실을 열고 있답니다. 시죠 양도 거기서 함께 수업을 들을 거예요."

"그렇군요."


나유타는 또 멋쩍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어머, 하고 소노다 부인은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곧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이쪽으로 오면 된다고 안내했다.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꽃이며 물건들이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사치스럽지 않지만 단아한 느낌의 집이었다. 사실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달까, 모범적이어서, 무슨 전시관에 온 것 같기도 했다. 복도는 윤이 반질반질 났고 소노다 부인은 버선을 신은 발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앞서 걷고 있었다. 욕실로 안내되는 동안 나유타는 별세계에 온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자, 씻고 나서는 이 옷으로 갈아입어 주세요. 원래 입던 옷은, ……."

"어, 버려도 돼요. 버려도."

"이 겉옷은 꽤 좋은 물건 같은데요. 남자 옷이지만."

"그, 아무튼 괜찮습니다!"


나유타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드르륵 문을 닫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가 눈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작지만 정갈한 공간이었다. 나유타는 잠깐 멍하니 욕실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




그 후에는 소노다 부인이 준비해 놓은 식사를 먹고, 소노다 부인은 나유타에게 집안을 안내해 준 다음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까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2층에 나유타가 머물기 위한 작은 방이 있었다. "그러면 내일 아침을 만드는 것부터 함께합시다." 라고 소노다 부인은 말하고 내려가 버렸기 때문에 나유타는 이제 방에서 혼자가 되었다. 방에는 이불장이 있고 작은 탁상도 있었다. 거울이 있고, 서랍이나 선반에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쓰지 않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방은 어두웠다. 창을 슬쩍 열어 보면 골목 건너편 이웃집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희미하게 비쳤고 종이를 붙인 창틀에는 먼지가 조금 앉아 있었다. 


나유타는 짐이 없었고, 입고 있던 옷도 모두 버렸기 때문에 언제라도 몸만 지닌 채 이 방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시죠 나유타는 제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얼마만에 감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머리가, 먼지와 기름이 씻겨나가 가뜬했다. 


머리를 빗어 주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신사에 놀러 가라고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빗어 줬었지. 나유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흑……."


시죠 모모는 나유타가 열 다섯 살이 되는 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사라져서 영영 나유타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술집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를 따라서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남몰래 진 빚 때문에 더한 곳으로 팔려갔다고 말했지만 나유타는 그런 말 중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남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나유타가 아빠라고 부르며 자라난 겐뿐이었는데, 시카타 겐은 엄마가 사라지기 훨씬 전부터 발걸음이 뜸해져서 찾아오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비록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지만 알뜰하고 꼼꼼하던 엄마가 큰 빚을 졌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엄마를 찾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술집 여자가 낳은 딸들은 보통 그 어머니를 따라 화류계에 종사한다. 남자에게 술을 따르거나 몸을 판다. 하지만 시죠 나유타는 어릴 적부터 그런 건 젬병이었다.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눈치를 보는 성격도 아니었다. 고집이 세고 성격이 드세고 남의 비위를 맞출 줄 몰랐다. 몸을 팔 생각이 없다면 살아남는 길은 범죄뿐이었다. 좀도둑질, 소매치기, 사기, 남장을 하고 험한 일에 가담하면서 길바닥을 구르고 몸을 축냈다. 그대로라면 아마 어딘가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어이없이 계단에 머리라도 부딪혀 죽거나, 범죄의 입막음을 위해 밤에 칼부림에 당해 죽거나, 아니면 더 나쁘게는 여자라는 것이 결국 약점이 되어 원하지 않아도 어딘가 팔려가서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거나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야도 레이의 말이었다. 그렇게 협박 아닌 협박, 경고 아닌 경고를 하면서 열 다섯 살의 시죠 나유타를 겁준 사기꾼 아마야도 레이는 나유타에게 영문 모를 이런저런 일들을 시켰다. 그의 수상한 심부름에 동원되고 나서부터는 길바닥에서 죽어갈 팔자는 아니게 되었으니까―


―거짓말이다. 아마야도 레이는 은인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자신을 편리한 도구로 삼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것뿐. 지금도 그런 그의 뜻에 휘말려 이렇게 서 있기도 낯선 집에서 귀족가의 하녀로 잠입하기 위한 훈련을 받으려고 있는 것뿐. 나유타는 억울했다. 이렇게 떠밀리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분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찌감치 사라져 버린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몸은 가볍고, 배가 부르고, 내일부터는 상냥한 부인의 지도 아래 편안하고 팔자 좋게 예절 공부 따위나 하면 되는데도, 나유타는 슬펐다. 차라리 아마야도 레이와 얼굴을 마주보고 험한 소리를 해 댈 때가 좋았다. 이런 집은 너무나…….




❖❖❖




"차갑다."


다이스는 동전을 휙 던졌다가 도로 손으로 받으면서 말했다.


"네?"

"동전 말이야. 네가 손에 계속 쥐고 있었다면 그럴 리가 없지."


나유타는 다이스의 말에 얼른 등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빨랫감 널기를 두고 내기를 했던 다른 하인은 이미 복도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데 동전을 하나 더 숨겨 놓았다가 꺼내는 거지? 예를 들면 소매 속 같은 곳에 말이야. 그리고 진짜 처음에 보여줬던 건 여전히 네 손에 있고."


다이스가 나유타의 왼손을 톡톡 두드렸다. 나유타는 볼을 부루퉁하게 한 채 왼손을 뒤집었다. 동전이 손에서 나왔다.


"아시면서 굳이 말하실 건 뭐예요. 저 쪽에서 들었으면 어쩌려고."

"애초에 속임수를 쓴 건 너잖아?"

"속은 쪽이 잘못이죠."


나유타는 툴툴거렸다. "적당히 모르는 척 해 주시란 말이에요. 도련님께서 하인들끼리 하는 장난에까지 신경쓰다니,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신가요."


"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이스가 고개를 확 들이밀었다. 나유타는 내심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여기서 배우는 것이 많은 것만큼이나 나도 시달리고 있다고. 다음 대 토호텐의 당주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네. 알겠습니다."


나유타가 고개를 꾸벅꾸벅하며 빠져나가려는데 다이스가 그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러지 말고, 얘기나 좀 하자. 방금 떠넘겼으니까 할 일 없는 거 아냐?"

"아."


반사적으로 나유타는 얼굴을 찌푸리고 상대를 노려보려다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하인이라니 정말 피곤한 삶이라고, 이 일만 끝나면 절대 이런 위장 따위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너 말야, 역시 보통 애들과 달라."

"네?"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나유타는 최대한 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한 달 정도 급하게 배운 몸가짐으로는 티가 나는 거였나? 


"그 손장난도 그렇고, 묘하게 말투, …… 태도가 달라. 굳이 말하자면, ……."


다이스가 나유타를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하인 같지가 않은데. 너 정말로 어디에서 왔어?"

"도쿄에서 태어났어요."

"도쿄 어디?"

"말씀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오늘 몰라도 내일이면 알 수 있지. 지도는 당장 위층에도 있고 마을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도 금방이야."

"……."


나유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되받았다.


"하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다음 대 토호텐의 당주님으로서 별로 하실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다이스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비틀어졌으나 나유타는 그대로 버티고 섰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이 도련님은 그렇게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다. 여기서도 아마, 보통의 귀족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 그대로 목이 달아날 불손한 발언일지 몰라도,


"이봐, 나에. 나에,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해 줘. 여기 오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어? 카와구치 사장인가 뭔가 하는 집에 있었다고 했지? 그러면 거기서 일하기 전에는? 작은 집에서 일하면 아무래도 바깥으로도 자주 다니게 되겠지? 응?"


다이스는 마치 제 쪽에서 사정하듯 나유타를 졸졸 따라왔다. 나유타는 한숨과 함께 뒤돌았다. "땡땡이치실 건가요?" "땡땡이가 아냐. 오늘치 할 공부는 이미 다 했다고."


나유타는 다이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얌전하게 행동하는 법에 대해 특훈을 받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귀족 집안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적응할 것이 많았다. 주인 일가를 대할 때라거나 하는 태도에 있어서 실제로 나유타가 배운 것과 다른 것도 많았고, 아리스가와 저택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들어온 신참에게 이런저런 조언이며 참견을 늘어놓았다. 귀찮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용한 말들이었다. 나유타는 빨리 익혔고 눈썰미가 좋다는 평가를 들었다.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살아남는 아이가 가지게 되는 기술이란 빠른 적응과 남의 눈치를 보는 일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도련님에게만은 적응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적응할 수 없도록 다이스는 자꾸만 나유타의 신경을 긁었다. 새로 들어온 하인이 신기한 것인지 어떤지, 아니면 새삼스레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인지―나유타의 하소연을 들은 하녀장이 했던 말이다― 일하는 도중에 자꾸 나타나는가 하면 자꾸만 말을 걸어서 자신의 출신이며 지냈던 곳 같은 것들에 대해 물었다. 출신은 길바닥이요 지냈던 곳도 어차피 거짓말로 사연을 둘러대어 온 것이었으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다이스는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어서, 나유타로서는 상대가 모셔야 하는 집 도련님만 아니었다면 그냥 한 대 치고 싶었다. 상대는 건장한 남자이니 주먹질을 해서 이길 리는 없겠지만, 치고받고 싸워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가 되면 서로 얽힐 일도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다이스는 그러지 않았다. 나유타가 피하면 피하는 대로 밀고 들어오고, 되받으면 되받는 대로 슬쩍 밀리면서 줄곧 대거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유타는 처음에 하녀장의 조언대로 그런 다이스를 적당히 무시하고 도련님이시려니 하고 모시려고 했지만 그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 아마 무시하려고 했다면 지금도 평범한 하녀들이 그렇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겠지만, 지금의 나유타는 감히 주인 댁 아드님을 마주 바라보고 있다. 하인이라면 주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눈치를 보는 법을 가장 먼저 익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 관계는―


"잠깐만 이야기하자. 응?"


다이스가 먼저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웃었다. 짧은 눈싸움이 끝나자 나유타는 도로 하녀답게 눈을 돌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나유타가 앞서서 거실로 가고 다이스가 뒤를 따르는 동안, 불을 밝힌 저택의 등이나 무늬 있는 벽지 같은 것들이 몇 개나 스쳐지나갔다. 


아리스가와 저택은 교외에 있는 료엔지라는 절로 가는 길에서 진입로가 나누어져 차로 얼마간 내려가면 있는 깊숙한 숲에 안긴 2층짜리 집이었다. 건물을 둘러싼 숲 때문에 낮에도 서늘했고, 밤에는 소슬바람이 불면 넓적한 잎사귀들이 검은 그림자로 된 깃털 비처럼 벽면을 쓸었다. 토호텐 본가로부터 아낌없이 돈을 지원받아 살림은 풍족했고 종종 토호텐 오토메가 방문하기도 하기에 내부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의 나날은 시끄러울 일 하나 없이 고요했다. 다이스의 말에 따르면,


"지겨워."


다이스는 방만하게 기지개를 쭉 펴고 말했다. 저녁 시간을 넘어 푸른 어둠이 드리운 저택의 창에서는 미약하게 남은 자연의 빛이 거실에 밝혀진 노란 불빛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책도 정치도 음악도 교양도, 전부 바로 손에 닿지 않는 것들뿐이야. 어느 하나 살아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달까."

"그럼 살아 있는 건 뭔데요?"


나유타는 최대한 노력해서 얌전히 두 발을 모으고 무릎에 손을 얹고 있었다. 심정으로는 이미 구부정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턱을 괸 채였다. 다이스는 진지하게 두 손을 모으고 엄지에 입술을 붙였다.


"대로에 부는 바람. 전파상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길거리에서 하는 흥정. 싸움. 술집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그게 뭐가 대단해요? 사람이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잖아요."

"너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야. 그러니까 알려 달라는 거야."


"방금 말씀하신 것들." 나유타는 물었다. "직접 보셨던 것들인가요." "응. 몇 번 가출했었으니까." "뭘 봤는데요?"


공허한 물음에도 다이스는 즐거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전에 집을 나가서 거리를 떠돌아다녔던 적이 있어. 대로에서, 전파상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고 길에서 제일 큰 잡화점에서는 여기저기서 수입한 물건들을 모아서 팔고 있었어. 어느 집에서 나온 것 같은 심부름꾼이 목청을 높이면서 가격을 흥정하더라고. 사진관에 손님들이 들락날락하고 있고, 커다란 액자를 옮기고 있고. 이 저택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숨 죽여 갇혀 있던 물건들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흘러들어오는지 처음 알게 된 기분이었지."


"그리고요?" 나유타는 느릿느릿 물었다.


"나를 바깥까지 데려다 달라고 운전사에게 가진 돈을 다 찔러줬던지라 수중에 가진 게 없어서, 전당포 같은 게 있는지 길을 헤맸지. 다리 뒤로 돌아서 좁은 골목을 따라서 뭘 하는지 모르겠는 잡다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에서 패물을 돈으로 바꿀 수 있었어. 다리 밑에서 또래 애들이 동전을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길래 끼어들어서 놀다가 저녁이 됐는데,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붙었거든. 몸싸움이 붙어서 걸친 것 빼고는 탈탈 털리고 말았는데, 이상하지.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줄곧 답답했는데, 그렇게 되고 나서 빈 손으로 길에 서니까 그때서야 상쾌한 기분이 드는 거야. 이 몸을 감싸는 바람이 그제서야 진짜 같았어. 웃음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어. 이 두 발로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와중에 신발도 한 짝을 잃어버려서 한 발은 맨발인 채로, 비가 아직 덜 마른 길에 있는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술집 같은 가게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라고. 난 당장 거기에라도 끼어들어서 말하고 싶었어. 나에. 살아 있다는 건 말이지……."

"그 사람들, 전당포에 가기 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던 걸 거예요. 비싼 옷차림을 하고 어리숙하게 길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까 털 수 있겠다 싶었겠죠. 따라다니다가 적당한 때 일부러 부딪힌 거고."


나유타는 듣다가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 그러나 다이스는 그 말에도 도리어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야. 그 사람들은 그 날 나를 만날 예정 같은 건 없었잖아?"

"당연하죠. 길에서 보이는 누구든 적당한 건수를 노리는 게 일인 사람들이니까."

"역시 알고 있는 거지? 나에는. 길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아. 나유타는 다이스가 묻는 데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나유타는 손톱으로 앞치마를 조금 긁었다. "저택에 들어와서 처음 교육받을 때 집사님께서 도련님께 바깥 이야기를 너무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걸 들으면 또 집을 나가고 싶어하실 거라고." "이봐, 나에 너까지 그렇게 한통속으로 굴 거야?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비싼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네가 나고 자란 이야기만 해 줘도 된다니까?" "어땠을 것 같은데요?"


나유타는 물었다. 눈은 무표정으로 다이스를 응시한 채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는 게 있으니까 묻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그건……."


겨울에는 말이죠, 사람들이 얼어죽거든요? 문 밑에 모여 있는 시체들을 짚으로 덮어 놓는데 눈이 와서 길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 시체도 진흙으로 더러워져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얼굴은 사실 문제가 아니죠. 지푸라기 위에, 좀 더 나중에 죽은 사람들은 덜 더러워서 옷을 벗겨 가거나 머리카락을 잘라 갈 수 있어요. 그 시체들은 벌거벗은 채로 눈을 맞게 되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좀 낫냐 하면 앉은뱅이 거지가 진창에 손을 담그고 있어요. 서리가 낀 흙 위에 옷 사이로 보이는 다리가 벌겋게 얼어서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빨리 지나가려고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시비가 걸리는 날도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은 똑같이 가난한 가게에서 쓰려고 쌓아 놓은 장작들을 훔쳐가고, 마을에서 가까운 산은 어디든 땔감을 걷어갈 수 있는 대로 걷어가 민둥산이죠.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길을 따라 똥물이 흘러요. 더 많이 오면 집이 떠내려가죠. 쓰레기나 지붕에서 떨어져 나온 널빤지가 많지만 이불이나 소반 같은 것들도 떠내려왔어요. 쓸모 있어 보이는 물건을 건지려고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이 같이 휩쓸려가 죽었대요. 


"별로 들으실 필요 없는 이야기예요." 


나유타는 꿋꿋이 입을 다물었다. 다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깃코(亀甲)무늬로 은사 자수가 놓인 겉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다이스는 나유타의 두 어깨를 쥐고 이마 앞에 이마를 댔다.


"너, 내가 적당히 어울려 주니까 착각하나 본데. 넌 그렇게 고집 부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면 너는 말해야 하고, 내가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너는 나가야 해. 카와구치인가 뭔가 하는 집에서도 해고당해서 여기 의탁하게 된 거라며?"


커다란 두 손이 꽉 쥔 어깨 위로 나유타의 목이 움찔거린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너, 지금 당장 빈 손으로 내쫓길 수도 있어."


나유타는 눈을 홉떴다. 이 온실 속에서 자란 도련님이 뭐라고 하든 그런 무른 말은 나유타에게 협박으로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 당장 내쫓으시라고 뻗대고 싶었지만 이 집에 들어온 임무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다. 이 도련님과는 사실 친해 두는 편이 좋은데. 2층에는 토호텐 오토메가 저택에 방문할 때만 열린다는 서재가 있다. 거기 들어가려면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도련님과는 원만한 관계인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순종적으로, 적당한 하인처럼, 뭔가 둘러대야…….


"……됐어. 재미없어졌어."


그때,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던 얼굴이 도로 멀어졌다. 손을 놓은 다이스는 정말 관심 없어졌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나유타는 어리둥절했다.


"가 봐."

"저, 왜……."


말하던 나유타는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눈가가 축축한 것을 깨달은 탓이다. 왜? 고인 눈물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으니까 따가워서였을까? 자신도 모르게 너무 화가 나서였을까? 아니, 아니다. 조금 전의 나유타는 화가 나지 않았다. 위협도 되지 않는 어중간한 협박을 해 대는 다이스가 차라리 가소로웠을지는 몰라도……. 나유타는 입술을 짓씹었다. 화가 나고 부끄러운 것은 지금이었다. 방금 같은 상황에서, 저와 같은 인물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러니까 방금 자신을 놓아 준 것은 동정이었지? 멋모르는 하녀를 겁줬다가 울릴 뻔 하니까 재미없어졌다는 뜻이지?


화가 났다. 부끄러웠다.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목까지 새빨개져서 두 주먹을 꼭 쥔 나유타는 떨면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홱 돌아섰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나에."


끔찍하도록 싫었다. 나유타는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거실을 뛰쳐나갔다.




❖❖❖




하인들이 쓰는 별채로 가는 길에,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쾌적한 밤 공기와 잘 관리된 잔디를 가로지르면서 시죠 나유타는 몇 번이고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망할, 염병할, ……. 이유 모를 분노는 나유타가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방에는 하녀로서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받은 물건들과 갈아입을 옷 외에도 잡다한 물건들이 구석구석 있다. 탁자 구석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예쁘게 세공된 은색 설탕 통이 놓여 있는데 부엌 찬장 안에서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을 나유타가 싹싹 닦아서 가져온 것이다. 지난 달 부엌 청소 때 발견해서 슬쩍 소매 속에 넣었다. 물론 차를 준비하면서 훔친 각설탕들도 그 안에 제대로 들어 있다. 설탕 통 밑에 깔린 것은 비단 손수건. 서랍을 정리하는데 열 장도 넘게 있길래 마음에 드는 무늬로 하나 골랐다. 그리고도 손님을 대접할 때나 들어온 선물에서 하나씩 빼 와서 만든 과자 상자, 주인 마님이 잃어버렸다고 며칠이나 하인들에게 찾게 했지만 끝내 못 찾은 줄로만 알았던 머리빗, 세탁실에서 주운 누군가의 반지 같은 것들이 있다. 평소 나유타는 이 조그맣고 호화로운 물건들을 들여다보거나, 사용해 보거나, 느긋하게 누워서 간식을 먹으면서 밤을 보내거나 했는데, …….


까마귀처럼 자신이 모아 둔 물건들을 보자 나유타는 눈물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눈물은, 나유타가 스스로에게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가득 차올라 줄줄 흘러내렸다. 진정해, 멍청아. 이런 것 따위 갑자기 왜 신경쓰는 거야. 그런 소리로 자신을 달래기 전에 눈물은 이미 가득 차서 흘러내렸다. 나유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등이 굽었고, 몸이 떨렸고, 나유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전부 하나같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전부, 자신의 삶에서는 꿈에도 닿아 볼 수 없는 바보같은 물건들이었다. 그런 것을 동경하고,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내가 한심해서, ……. 


하지만 도대체 왜 가질 수 없단 말인가? 가질 수 없다손 쳐도, 그렇다면 도대체 왜 빼앗겼단 말인가? 아빠는 왜 떠나간 걸까? 엄마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왜 나를 두고 갔을까? 실은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앞으로는 이제 이런 인생밖에 남지 않은 걸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두려웠다. 무서웠다. 화가 났다. 슬펐다. 나유타는 바닥에 웅크려서 울었다. 나유타는 숨을 몰아쉬었고, 등 뒤에서 열리는 문도, 그 사이에서 이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자줏빛의 눈도 알지 못했다. 




❖❖❖




다음날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낮부터 음산한 먹구름에 잠긴 아리스가와 저택은, 어제까지 이어진 대청소 끝에 하인들이 대부분 휴가를 받은 터라 한산했다. 탁자에는 다이스가 읽는다고 가지고 나왔지만 세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책이 뒷표지가 위로 된 채 올라와 있었다. 


"휴가 안 냈네."


간식이라며 포도를 가지고 온 나유타에게 다이스가 말했다. 나유타는 마음 속으로 다이스에게 잔뜩 눈을 흘겼다.


"휴가를 내도 갈 곳이 없잖아요."

"왜, 나라면 그래도 길거리에 나들이라도 하거나―"


다이스는 말하다 말고 회색으로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하긴, 오늘 같은 날이면 밖에 나간 애들도 잔뜩 젖어서 우왕좌왕하기만 하겠지."


다이스는 키득 웃으면서 접시 위의 포도로 손을 가져갔다. 어젯밤의 일은 전혀 기억에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나라면 휴가를 내도 좋다는 말을 들은 김에, 일하지 않고 방에라도 늘어지게 누워 있었을 텐데. 나에, 의외로 성실한 편?"

"누워 있어도 우울해지기만 하는걸요. 이런 날에는."

"맞아."


다이스는 어째서인지 곧장 동의하고는 포도알을 깨물어 씨를 뱉었다. 


"쉬는 날에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몸 안에 무언가, …… 혈관을 따라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 같달까. 불안하고 근질거려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사육당하는 기분이야.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이. 그 기분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해.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건가? 나에게는 이제 앞으로 이런 인생밖에 남지 않은 걸까?"

"하지만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으시잖아요. 그래서 선생님들도 계속 저택으로 오시고."


다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봐, 나에. 내가 진짜 괜찮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해?"


답은 물론 '아니' 였다. 하지만 나유타의 눈에 다이스가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나유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마 다음 대 토호텐의 당주가 되지는 않겠지. 엄마가 정말 생각이 있었다면 나를 지금까지 이런 시골에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야.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엄마는 본인이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은 거겠지.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이는 동안 내가 드러나면 공격받을 수 있으니까."


정치나 정세에 대해 말하는 다이스는 나유타의 눈에 낯설었다. 이런 것을 배운 도련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고, 그러나 동시에 다이스가 그것들이 전부 별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생활에 대한 그의 감정도 알 수가 있었다.


"뭐, 애초에 이런 집안과는 안 맞기도 했고. 나는 앞으로도 좋은 도련님은 되지 못해. 훌륭한 사람들, 엄마나, 소위 말하는 저쪽의 '높으신 분들' 과 나는, 뭐랄까. 이제 와서는 너무 거리가 벌어져 버렸어."


다이스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있었지만 그 말은 어쩐지 씁쓸하게 들렸다. 나유타는 눈을 깜박였다. 방금 나유타가 다이스에게서 느낀 것은 술집에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나이 든 남자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변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따분함, 무력한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자조, …….


"그런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거든. 권력욕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믿음에서 기반해. 내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권력을 잡고 싶은 생각도 사라지지. 나는, 뭐랄까. 나에."


말하지 마. 나유타는 생각했다. 이런 시점에서 그런 남자들이 하는 말이란 똑같다. 나유타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공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신분도 환경도 너무 차이가 났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입으로 밥이 들어오는 도련님과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게 뻔한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앉아서 네 시중을 받고 있지만 사실 너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인간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갑자기 전화 벨이 울렸다.




❖❖❖




"응. 오늘 밤?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 그래. 알겠어. 아니, 그래. 알겠습니다. 됐지?"


검은 전화는 다이스의 손에서 울리기를 멈추고 수화 저편에 있는 인물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나유타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다이스를 꽤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전화기를 놓은 다이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나에. 오늘 밤, 꽤 수고해야겠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엄마가 온대."


그 순간, 나유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온다. 토호텐 오토메가. 그렇다는 뜻은 아마 노리고 있는 2층 서재의 문도 열린다는 뜻. 늦봄에 들어와 여름이 깊도록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 도대체 밥값은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아마야도 레이와의 거래에서 움직일 시점이라면 바로 지금이었다. 


"하인들이 거의 휴가를 내서 집에 없으니까, 보통은 신입인 네가 할 만한 일은 없을 텐데, 오늘은 도와줘야겠어. 손님들도 세 명이나 온다는군. ……이럴 게 아니라 같이 집사장에게 가자. 별로 시간이 없어."

"네."


나유타는 일단 끄덕였다. 시죠 나유타도 별로 시간이 없었다. 하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님들은 어떤 사람이고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했다. 집사장은 다이스에게 통화 내용을 전해듣고 나유타를 따로 불렀다. 


"손님이 셋이면 아마 응접실에 주로 있으실 것 같군. 대청소 후라 따로 청소할 건 없어서 다행이지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해. 날이 궂어서 맞아들이는 부분이 가장 곤란할 것 같은데……. 일단 나와 신노스케가 궂은일을 하지. 자넨 주방 준비가 끝나면 가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도련님 옆에 붙게. 손님들이 오시면 그 분들 편의를 봐 드리고. 지금 저택에 젊은 하녀가 자네뿐이니까, 잘 부탁하네."


요는 화사하게 입고 손님 맞이 분위기를 살리라는 뜻이었다. 나유타는 눈치 빠르게 알아듣고 알겠다고 대답한 후 얼른 주방으로 갔다. 일단은 차 준비를 돕고, 그 다음 손님 응대를 한다. 아주 좋았다. 손님들 곁에 붙어 있는 역할이라면 토호텐 오토메를 포함하여 모두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방문의 목적이나 분위기도 알 수가 있다. 어쩌면 움직이는 도중에 잠깐 빠져서 서재에 숨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잘 풀려 간다는 생각에 나유타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오늘 만나는 건 전부 구내의 유력자들이라나 봐. 은행장이며 회사의 사장, ……. 그 사람들한테 나를 소개한다는데,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어."


나유타가 다이스에게 갔을 때 다이스는 이미 혼자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가문(家紋)이 찍힌 짙은 감색 겉옷에 하카마와 흰 버선으로 준예장(準礼装)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나유타는 앞뒤로 다이스의 옷차림을 살핀 후 문제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유타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이미 다이스가 알았을 테니 그다지 의미는 없을 것 같았지만.


"됐어요."

"그래, 됐겠지. 엄마는 꽤 깐깐하지만 이럴 때를 위해서 아예 입을 옷을 정해 뒀거든."

"네에, 잘 하셨습니다."


나유타는 슬쩍 비꼬듯 말했지만 다이스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다이스는 등 뒤에 서 있는 나유타에게 물었다.


"어때? 이런 날, 이렇게까지 준비하고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면 엄마는 꽤 곤란해지겠지?"

"농담도 정도껏 하세요, 도련님."

"그때야말로 집에서 쫓아내 주지 않으려나."


나유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나유타는 얼른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빗속에 불을 켠 번쩍거리는 자동차들이 몇 대나 아리스가와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으악. 저 내려갈게요! 집사장님께서 창 밖을 보고 있다가 손님들이 오시면 알려 달라고 그랬는데!"


나유타는 도련님을 내팽개치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다이스가 뒤에서 피식 웃으면서 따라 계단을 걸었다. 




❖❖❖




토호텐 오토메. 나유타는 고개를 숙인다. 저 여자가 토호텐 오토메로구나. 문이 열리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기에 자세한 것은 볼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체구가 크지 않은 것 같았다. 토호텐이라는 가문의 이름, 그리고 나유타마저도 들어 본 적 있는 언어당의 당수라는 자리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것처럼 느껴졌다. 막연하게 엄청나게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별 것 없네. 나유타는 토호텐 오토메와 다른 손님들의 구두를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단은 응접실로 가실까요. 손님 분들을 세워 둔 채 소개를 드리기도 미안하니까요."


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아, 평범하지는 않구나. 나유타는 그 울림에서 빠르게 토호텐 오토메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고, 이윽고 다른 하인들을 따라 오토메 일행의 뒤를 쫓으면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따라 걷는 다이스 쪽이 키가 더 컸기에 사람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였다. 


응접실은 이미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다섯 명분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토메는 손짓으로 다이스를 자기 옆에 앉히고 사용인들 쪽을 바라보았다.


"홍차를 부탁하죠."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 나유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네." 하는 대답은 반 박자 늦었을까? 얼굴을 제대로 살피기에 시간이 부족했으나 나유타는 주방으로 잰걸음을 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만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지요."

"이 나라에서 군 시설과 협력해 제품 개발을 하고 있는 제약 회사는 하나뿐이지요. 다이스, 오늘 이야기는 잘 알아 두도록 하세요."


문 앞에서 차 쟁반을 든 나유타의 귀가 쫑긋했다. 제약 회사. 아마야도 레이가 토호텐과의 결탁의 증거를 찾으라고 하던 것은 확실히 제약 회사였다. 그곳의 중역, 혹은 사장인가? 그렇다면 오늘 밤 오가는 이야기에서 단서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나유타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따뜻한 차로 준비해 드렸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기에……."


주방에서 시킨 대사를 그대로 읊고 한 자리 한 자리마다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나유타는 슬쩍슬쩍 손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제약 회사의 사람은 오토메의 바로 맞은편에 있다. 토호텐 오토메는 옆에 아들을 데리고 있고, 아들인 다이스는―


다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세는 지금까지 나유타가 보았던 것 중 가장 똑발랐다. 나유타는 쟁반을 거두고 도로 인사했다.


"그래요. 나가 보도록."


……남아 있을 만한 구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단호한 오토메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온 나유타는 문을 닫고, 주위를 살핀 다음 문 틈으로 귀를 갖다댔다. 뭐라도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는 없을까. 


"…하니까, 앞으로는 …… 언어당이 대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 에서 추천할 만한 인물은 ……."

"그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 신형 … 의 개발이 …… 예상하니까요." 


나유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주 집중하면 엿들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유타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냥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건가? '토호텐과 우리는 한패니까요.' 라거나. ……하지만 설령 나유타가 여기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도, 아마야도 레이가 요구한 것은 세상에 확실하게 내보일 수 있는 증거였다. 일단은 그 회사의 사람이 토호텐 오토메와 함께 이 저택에 방문했다는 것부터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니까. 그러니까 서재가 열려야 하는데……. 회담이 끝나면 토호텐 오토메는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여기서 묵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유타는 계속 문에 붙어 있었다. 


"……니까, 그런 주장을 하려면 아무래도 젊은 피가 필요하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차세대의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다이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다이스가 지금 외에 거의 말을 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나유타가 알던 것과 동일했지만, 어쩐지 전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것일까? 나유타는 생각했다. 다이스가 말한, 앞으로 이런 인생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해서, 다이스에게도 앞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요."


이것은 토호텐 오토메의 목소리.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완고하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것이 나유타의 인상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후, 대화가 멈추고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나유타는 얼른 기둥 너머로 몸을 감췄다. 




❖❖❖




다행스럽게도 토호텐 오토메는 손님들을 배웅한 다음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유타는 시중을 핑계로 저택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오토메의 움직임을 줄곧 눈에 담았다. 서재는 2층. 오토메가 2층으로 가는 기색이 보이면 얼른 따라붙을 셈이었다.


"뭐 해?"

"엣. 아. 어, 도련님."


나유타의 뒤에서 다이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의 예장한 차림 그대로였다.


"할 일이 남지 않았을까 하고……. 집사장님께서 오토메 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별로 없을 거야. 엄마는 보통 일을 하려고 여기 오는데, 서재에 하인들이 드나드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부터는 아마 부를 일 없을걸.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도 돼."

"그렇군요."


나유타는 끄덕였다. "그런데 도련님은 왜 들어가시지 않고요?"


"난 할 얘기가 남아서."

"할 얘기."


빤히 보는 나유타의 이마를 다이스가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나에, 너무 참견하려고 해도 안 좋다? 평소에는 저 좀 내버려 두시라고 피해 다니더니, 오늘은 왜 이럴까." 


뒤로 꾹 밀린 나유타가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네, 알겠습니다아." "대답이 길어." "알겠슴닷." 


그리고 다이스가 뭐라고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나유타는 쌩 하고 복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화병 틈으로 이쪽을 어이없이 쳐다보는 다이스를 관찰했다. 다이스가 뭐라고 하건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할 얘기가 남았다면 오토메와의 이야기. 그리고 오토메는 앞으로 서재에 있을 거라는 암시. 그렇다면 다이스를 따라가는 것으로 서재에 접근할 수 있다. 나유타는 곧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다이스를 확인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발소리를 죽인 채 뒤따랐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난 이런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 조금 전에도 앞에 당사자들을 두고 있으니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야. 그 사람들도 다들 알아챘을걸."

"아니오, 당신은 훌륭했습니다. 아직까지 당신은 조금 휘두르기 쉽게 보이는 것이 유리하니까요. 앞으로 착착 당신을 내세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갈 계획입니다."


서재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으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넘겨다보였다.


"말했잖아, 싫다니까. 당신이 만들어 둔 길에서 설령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을 지키고 싶어."


다이스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서 표정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반면, 자리에 앉은 채인 토호텐 오토메는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침착한 태도였다.


"세상을 움직이려면 거대한 힘이 필요하죠. 그 거대한 힘은 금전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무력이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그 힘으로 실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겁니다. 지배자는 그런 실리로 움직여야 해요."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 따윈 관심 없어. 난 그렇게 되고 싶지도, 그러지도 않아."

"지배하는 것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일률적인 통제가 필요할 뿐. 다이스, 여러 번 말했습니다만, 이 나라는 여전히 지난 세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국가적 이익 앞에 고리타분한 윤리는 힘을 잃고 마는 겁니다."

"사람들을 협박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이런 더러운 수까지 써 가면서 이루는 목적에 무슨 의미가 있지?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누군가는 그 국가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걸러져 떨어지고 말아. 그걸 어떻게 당신이, 혹은 내가…… 정할 수 있느냐는 말이야."

"다이스."


오토메가 손을 뻗어 아들의 뺨을 감쌌다.


"이미 이런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도 많이 들었을 겁니다. 당신도 알잖아요. 쌀 한 말의 껍질을 벗길 때 떨어져 나가는 쌀알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껍질을 벗기지 않을 건가요? 그래서는 모두가 굶어죽고 맙니다."

"엄마가 진짜로 굶어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기나 해?"


다이스는 오토메의 손을 쳐내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오토메는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호호, 짧게 웃었다.


"그러면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

"어차피 손이 닿지 않는 것은 똑같아요. 다이스, 당신은 축복받아 태어난 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운명의 주사위에서 감히 최고의 눈을 뽑았다고 할 수 있죠. 지배자는 그 최고의 눈에 따르는 역할을 하면 돼요. 그러니까 어린 아이처럼 구는 것은 그만두고 그만 자리에 앉아 주세요."


그렇지만 다이스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소매로 그 자리를 휙 뿌리치며, 더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서재를 걸어나왔다. 문 너머 모퉁이에 숨어 있던 나유타는 말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후다닥 뒤를 돌아 서랍장 너머로 웅크렸다. 다이스가 서재를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다이스가 지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오토메도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오토메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보내자마자 나유타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문을 잠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서재 문고리를 손자국이 남지 않도록 앞치마로 감싼 나유타가 조심스럽게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호화로운 가구들로 꾸며진 서재는 조금 전까지 오토메가 앉았던 책상이 가운데에 있고 그 근처에 있는 의자, 서랍장, 그리고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책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유타는 재빨리 문을 닫고는 등을 문에 기댄 채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드디어 들어왔다. 이제…….


……어디를 어떻게 뒤지면 좋지? 갑작스레 마주한 난제에 나유타는 두리번거리면서도 머리가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 수많은 서류며 종이들 사이에서 제약 회사와 결탁했다는 증거를 어떻게 찾지? 아냐. 침착하자, 침착하자. 나유타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토호텐 오토메는 오늘 그 회사 사장과 만났고 그 다음 서재로 왔어. 분명 거기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책상을 중심으로, 손 닿는 곳부터 우선 살펴보면 된다. 일단 책상 위를…….


또각, 또각.


그 순간, 문 저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미친 거 아냐, 이거 뭔데! 나유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서재 안에는 별달리 숨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 급한 대로 책상 밑으로라도 들어가? 하지만 토호텐 오토메가 자리에 앉으면 그건 곧장 들키고 말 텐데. 짧은 시간 동안 식은땀을 뻘뻘 흘린 나유타가 결국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을 때, 문 앞까지 다가온 발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가 돌아가고 잠금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나유타는 책상 위로 눈만 빼끔 내밀었다. 간 건가? 조금 더 기다려 보아도, 사람이 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유타는 조심스럽게 토호텐 오토메의 책상에 앉았다. 손에 닿는 서류철들을 일단 하나하나 꺼내 보는데, 표지 틈으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하기오 제약 내부 제안 건.' 이어서 몇 가지 날짜들과 사람 이름이 있었다. 책상에 있던 종이들과 대조해 볼 때, 토호텐 오토메의 필체인 것 같았다. 나유타의 눈이 커졌다. 이것이야말로 아마야도 레이가 말한 '확실한 증거' 다. 혹시…….


나유타는 쪽지가 떨어졌던 서류철을 펼쳤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상단에 적힌 하기오 제약이라는 글자만은 선명했다. 이걸 챙겨 나가면 될 것이다. 그리고 문 앞에 선 나유타는 잠시 곤란을 느꼈다. 아까 토호텐 오토메는 분명 문을 잠갔었지. 이것을 열고 나가면, 서재에 누군가 침입했다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의심받기 시작하면 들통나는 건 금방이다. 혹시 사용인들의 방이라도 조사하게 되면 무척 곤란해진다. 가급적 빠르게 탈출해야겠군. 운전사를 매수해 두었다던 아마야도 레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유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서재 문을 열었다. 쪽지와 서류철은 앞치마 아래 숨긴 채였다. 종종걸음으로 서재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유타의 몸을 감싸안고 입을 막았다.


"……!"

"자자.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고."


토호텐 다이스가 엷은, 묘한 미소를 띠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체격 차이가 커서 완전히 품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유타는 앞치마 아래 서류철을 꼭 쥐었다. 들키면. 이걸 들키면.


"있잖아."


다이스가 나유타의 눈앞에 무언가 흔들어 보였다. 열쇠 꾸러미였다. 


"이 집에서 내가 못 여는 방이란 건 없걸랑." 


당연히 잠글 수도 있지. 신랄한 어조가 칼처럼 귓가에 스며들어왔다. 그러면 아까 서재 문을 잠근 건 오토메가 아닌 다이스라는 걸까. 그런데, 그 행동은 사실 나를 도와준 데 가깝지 않나?


"왜냐고는 묻지 마. 한창 반항기 때 엄마를 골탕먹이고 싶어서 벌였던 일 중에 하나니까. 그보다 우리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지?"


나유타의 입을 막았던 다이스의 손이 슬슬 아래로 내려가, 앞치마 속에 감춘 나유타의 손에 겹쳐졌다. 


"아까 방으로 갈 때 네가 숨어 있는 걸 봤어. 저녁 때 집안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도 수상했고. 이게 뭔지 모르지만……."


다이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두부를 파고드는 서늘한 칼날 같았다. 매혹적이고 낮았다. 그 목소리가 싣는 내용에 홀려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두근, 두근. 어쩌면 위기 때문에 다가온 목숨의 위협 때문에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두렵고, 그런데도 주의를 뗄 수 없다……. 


"넌 이게 필요해서 이 집에 온 거지?" 


손이 손을 덮었다. 나유타는 그 즈음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수상하게 보여요. 일단 당신 방으로 좀 가서 이야기하죠." 

"요구하는 것도 있고 담대하네. 지금 내가 당장 소리를 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당신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지금 나를 붙잡은 거잖아요? 말대로 나는 길거리에서 자라서 그런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거래할 게 있다면, 내 부탁을 들어줘요." 


다이스는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곧 몸을 감쌌던 것이 풀렸다.


"뭐, 좋아. 방으로 가지." 


다이스의 방은 바로 2층 저편이었다. 도망치면 어쩌려고, 다이스가 앞장서고 나유타가 뒤를 따르는 모양이었다. 들어와서 문을 닫은 다이스가 의자를 권했다.


"앉아. 그거…… 보여주고 싶지 않으면 계속 숨기고 있어도 되고."

"당신 어머니의 서재에서 빼 온 건데,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해. 약점이라거나 그런 건가?"

"아마도요."


다이스는 조금 웃었다. "누구 사주를 받고 행동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토호텐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좀 흔들릴 수는 있겠지만, 뭐. 엄마도 정치를 하기로 한 이상 그런 역경쯤은 이겨내야지." "그런……."


나유타는 별 생각이 없었다. 막연히 아마야도 레이가 이 약점에 대한 증거를 잡으면 토호텐에는 큰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고, 그것도 지금 다이스가 말해서 떠올린 것일 뿐이었다.


그러면 이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도 아닌 걸까?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나유타는 고개를 숙였다. 당장 오늘 밤 저택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자신답지 않게 왜 이렇게 마음이 자주 흔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시죠 나유타. 하지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나는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쌀알 하나짜리 삶을 평생, 그런데도 그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이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바보 같은 감상이다. 당장 굶어죽을 일 없이 등 따숩고 배 부르니까, 이 저택의 호화로운 생활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서, 쓸데없는 생각이 는 것이다. 이 꿈이 끝나고 도로 거리에 내팽개쳐지게 되면 이 따위 감상은 전부 사라지겠지. 전부 사치니까. 그런데…….


"나에."


설탕 통이 떠올랐다. 본 적도 없는 고급 과자들과, 예쁜 머리빗, 비단 손수건, 반지가 떠올랐다. 가질 수 없는 거야? 평생 가질 수는 없는 거야?


"그 이름도 가짜인가. 진짜 이름은 뭐야?"


물론 물건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


"당신이 원하는 걸 알려주세요."

"응?"


나유타는 불쑥 말했다.


"나를 불렀으니까,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해요. 서재는 상관없다면서요. 그럼 왜 나를 도와주는 거죠."


다이스는 나유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이스는 대답했다.


"네가 밖에서 온 첩자 같은 거라면, 이제 곧 여길 빠져나가겠지. 그렇지?"

"그래요."

"그때 나를 데려가."

"네?"


'뭐?' 에 더 가까운 물음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유타를 두고 다이스는 선언했다.


"집을 나갈 거야." 

"미쳤어요?"


곧장 튀어나온 거친 말에도 다이스는 담담하게 응수했다.


"안 미쳤어." 

"나는 당신 감당 못 해요. 또 경찰이 출동하면 어쩌려고."

"나도 양보 못 해. 엄마한테 이미 말했어. 내가 어떻게 하든 가만히 놔두라고."

"알 바 아니고, 당신까지 달고 탈출할 수는 없어요."

"사람 부른다? 그리고 네 몸수색을 시킬 거야." 

"……."


한동안 서로 시선이 맞닿아 노려보았다. 먼저 기세를 죽인 것은 다이스였다.


"이봐, 나에. 난 이 집은 이제 정말 진절머리가 나. 오늘 확신했어. 이대로라면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엄마의 계획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러면서 뒤로는 온갖 더러운 일에도 가담하겠지. 난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배자 같은 건 정말 되고 싶지도 않아."

"그 얘기 들었어요."

"응?"

"서재에서 나왔던 얘기."

"그것도 들었구나."


다이스는 표정이 밝아졌다. 이야기가 더 쉬워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너도 알 거잖아. 토호텐의 이름 아래 어떤 지저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게 싫다는 게, 그래서 차라리 이 집을 떠나서 살아가겠다는 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망이야?"

"먹고 잘 집은 있어요?"

"없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으려나. 일단은 집을 나가는 게 먼저고."

"그거."


나유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서류철은 보란 듯이 탁상에 탁 올려놓았다. 나유타는 다이스를 가리킨다. 가슴팍 높이에서 손을 꾹꾹 누르면서 밀어붙인다.


"그 따위 무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습다는 거야. 계획도 없으면서 가출? 이런 집에는 더 있고 싶지 않다? 우스워. 바보 같아. 하나같이 바보 같은 말 뿐이야. 하도 바보 같아서 구역질이 날 정도야." 


시죠 나유타는 으르렁거렸다. 저 높이 있는 얼굴을 곧장 잡아먹을 듯이 마주봤다.


"나라고 당신을 모를 것 같아? 팔자 좋게 태어나서 이런 저택에 사는 도련님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길바닥에 구를 자신이 있어? 그게 뭔지는 알아? 사기를 치고, 누군가를 협박하고, 남의 것을 뺏는 일이 싫다고 했지? 그게 내가 해 온 일이야.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당장 내 입에 들어올 밥이 없으면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먹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당신, 그럴 각오가 있어? 손에 물 안 묻히고 살아온 도련님이 생각하는 가출이라는 것, 진짜로 집이 없어져서 집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죄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일 뿐이라고."


다이스는 아연한 것 같았다. "네가 그랬던 거야? 집이 없어져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아빠는 술집에 드나드는 남자. 엄마는 거기서 일하는 여자였어. 가족 같은 거, 보통이랑 같은 모습이 아니더라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져 버렸어. 갑자기 없어졌어. 술집에서는 일하지 않는 한 나를 군식구로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했지. 그래서 거리로 나갔어. 물건을 훔치고 사람들을 속이고, 아마 전에 도련님을 벗겨먹은 그 치들이랑 한패였을지도 모르겠네." 


나유타는 키득거렸다. 다이스가 할 말을 잃은 동안 나유타는 계속 말했다.


"갖고 태어난 놈이 길바닥 인생을 원한다는 건 거짓말이야. 뭔지도 모르면서 공허하게 쫓고 있어. 진짜로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좀 힘들면 도로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겠지. 그런 건, 전부 흉내뿐인 거야."

"흉내내면 안 돼?”


뭐? 이번에는 나유타가 할 말이 없어져 어벙해졌다. 다이스는 말했다. 침착한 말투였다.


"네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어. 나는 정말 바보같은 도련님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에."

"나유타."

"……나유타."

"……."


아빠라는 사람이 지어 준 이름이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래. 웃겨. 무한한 가능성은커녕 나는 아직 아무것도…….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맞은편에 선 다이스가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나유타. 나는 이미 도련님이 살아야 하는 삶을 흉내내 봤거든. 엄마는 내가 주사위의 눈 중에서도 가장 높은 눈을 뽑았다고 했어. 하지만 그건 나에게 전혀 맞지 않았어.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래서 다른 인생을 살아 보고 싶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리고 다이스는 주위를 둘러본다.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는지, 자신이 입고 있는 하오리 끈을 잡아뜯는다. 구슬들이 바닥에 흩어지고, 손 안에 비싼 원석이 하나 들어온다.


"나유타, 내기하자. 이걸 내가 손에서 손으로 옮길 테니까 어느 쪽에 있는지 네가 맞혀 봐. 맞힌다면 이대로 너를 보내줄게. 아니라면 너는 나를 데리고 가는 거야."


나유타는 다이스의 손 위에 올라간 구슬을 본다. 그리고 그의 소매 속도 본다. 나유타는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

"응."

"아주 옛날에."

"응."

"이런 적이 있었어."

"기억나?"


다이스는 허공으로 구슬을 휙 던졌다. 손이 빠르게 잡아채고, 그것이 소매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나유타는 보았다.


"어느 쪽이게."


다이스는 두 손을 주먹 쥐어 내밀었다.


"……."


나유타는 손을 슬쩍 들어올린다. 어디를 가리키든 돌은 없다. 돌은 소매 속에 있다. 나유타는 소매 속을 가리킬 수도 있다.


"있잖아, 나에. 아니, 나유타. 네 말을 듣고 생각해 봤어."


다이스는 주먹 쥔 손을 내민 채 나유타에게 말을 걸었다. 나유타가 속임수를 눈치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삶은, 여기에도 없고,"


나유타는 가리키려 했다. 그러나 다이스가 먼저 손을 펼쳤다. 손은 비어 있다.


"그리고 저기에도 없어. 천당도 지옥도 아니야. 내가 바라는 삶은 주사위의 가장 높은 눈도, 낮은 눈도 아닐 거야." 


다이스는 두 손을 모두 털어 버린다.


"그럼……."

"너는 밑바닥 이야기를 했지만 너도 그렇게만 살아오지는 않은 때가 있는 거지? 그 날, 신사에서 만난 너는 즐겁고 행복해 보였어."


오래된 기억이다. 천당도 지옥도 아니다. 엄마는 낮에 자고 있고 밤에 나를 돌볼 수 없어서 새벽에나 엄마가 옆에서 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빠라는 사람은 몇 달에 한 번씩 와서 술 냄새가 나는 얼굴로 주정처럼 나를 귀여워했지만, 칠석의 신사로 가는 길은 알록달록했고 목마를 탄 내 다리를 아빠의 두 손이 꼭 쥐고 있었다. 엄마는 머리를 빗겨 주고는 예쁘게 되었다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엄마는 글자를 가르쳐 주었고, 술집의 알록달록한 불빛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자란 나는 곧 술집 바깥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로에는 신기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이 있었다. 전차를 탈 돈이 없어 몰래 뒤에 붙어 올라타서는 대로에서 부는 바람을 만끽했다. 구슬이나 동전 한두 개를 가지고 벌어지는 내기판에서 적당히 배운 손기술을 가지고 잔뜩 따서, 헌책방에 학생들이 맡긴 물건을 헐값에 사서 놀았다. 


"이 집안과는 인연을 끊을 거야. 토호텐이라는 성도 버릴 거야.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고 싶어. 보통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건 아마 내가 말한 것과도 네가 말한 것과도 다르겠지.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겠지. 하지만 너는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있잖아. 그러니까 나를 도와 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게. 그렇게 말하는 다이스의 눈은 닳고 닳은 나유타와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진실되어 보였다. 나유타는, 파도처럼 물기 가득히 일어나려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 분명 그런 시절이 있다. 지금도 그런 것을 바라고 있다. 삶은 저 높이 있는 천당과 저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나뉘어지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지저분하고 또 깨끗하게 살아간다. 그런 삶을 원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일단 주워."

"어…… 어?"


답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답은 소매 속이다.


"밖에서 살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비싼 거 바닥에 버리는 습관부터 고치라고. 방금 그것도 꽤 비싼 거였지? 그리고 다른 비싼 것도 다 챙겨서 뒤뜰로 나와. 뒷문으로 나갈 거야."


바닥에는 하오리 끈에서 떨어진 흑단 구슬들이 구르고 있었다. 허둥지둥하면서 다이스가 구슬을 줍고 있자 나유타가 또 채근했다.


"싼 거 말고, 비싼 거 챙겨!"


그리고 서류철을 휙 집어서 방을 나간다. 자신도 옷을 갈아입고 도망칠 준비를 해야 했다.


본저에서 하인들이 사는 별채로 달리면서 나유타는 미쳤어, 미쳤지, 내가 미쳤다고.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공기는 상쾌했고 이제 이 저택과도 곧 이별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둘이서. 어쩌면 그래, 둘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저 인간은 당장 의탁할 곳도 없는 모양이니까 당분간은 나와 같이 있게 될 거다. 수중에 비싼 것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리고…….


어쩌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랑거리는 소맷자락 속, 행운과 불운을 가르고 행운과 불운이 겹쳐 거듭되는 날들을. 이쪽도 저쪽도 정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구르는 주사위의 눈처럼, 그래서 어떤 가능성도 펼쳐져 있는 삶을. 




❖❖❖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을 들킬 수 없었으므로, 운전사는 미리 밖에 세워 두었다는 차까지 둘을 걸어오게 했다. 다이스는 몸집이 상당히 커져서는 가방까지 하나 들고 나타났다.


"있는 옷 중에 비싼 걸 겹쳐 입었어. 이것들도 팔 수 있잖아. 그렇지?"


나유타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아무리 봐도 뚱뚱한 겨울 곰 같은 어깨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나유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좌석에 앉은 채 몸을 숙이고 끅끅거렸다.


"이봐, 왜 그러는데?"


다이스가 묻고도 나유타는 한동안 낄낄거리고 웃고 있었다. 그 사이에 차가 출발했다. 아리스가와 저택을 둘러싼 깊은 숲, 어둠에 잠긴 검은 잎사귀들이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스스 부딪혔다.


"옷이란 거 꽤 비싼 물건이어서 말이야."


나유타가 말했다. 그러나 다이스가 한 말에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었다.


"당신 생일날 그 신사에서 만났을 때 내가 입었던 기모노, 그것도 아마 아빠가 무리해서 빌려온 거였을 거야. 짐작하고 있어서 깨끗하게 입으려고 무척 노력했어. 얼룩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질 테니까. 그런데 그때 당신과 장난치다가 조금 더럽혀 버렸는데, 나중에 아빠가 별 일 아니라고 껄껄 웃는 거 있지." 


나유타는 차에 몸을 기댔다. 암흑 속에 드문드문 도로와 나무의 윤곽이 비쳐 보였다.


"결국 돌려줄 때는 꽤 굽실거리거나 대가를 치렀을 테니 허세였던 거지만, 나쁘지 않았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달까,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

"그건 마음이 지지 않는 거네."

"뭐, 나중에는 또 마음도 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게 항상은 아닌 거지. 나유타는 생각한다. 그들 앞에 있을 삶은 천당도 지옥도 아니겠지만,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이스도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상 뭐 하나 할 줄 모르는 백수일 뿐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살기 위해 도둑질을 하거나 도박장에서 반쯤 목숨을 걸고 야바위를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에 저당잡힌 무리한 인생이다. 그럼에도, …….


나유타는 느릿하게 웃는다. 그럼에도 목청을 높여서 웃고 허언을 하면서 마음을 세우자. 주사위는 계속해서 구르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니, 마음이나 몸 중 어느 곳도 비지 않도록, 천당과 지옥 사이 소매 속을 드나들면서. 


따지고 보면 자신 또한 언제나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거기에 한 사람이 더해지는 일은, 어쩌면 이 시점 뽑은 아주 좋은 운일지도 모른다.



남그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